최근 수정 시각 : 2019-01-03 18:30:09

성서해석학


1. 개요2. 성서해석학의 역사3. 근대의 성서비평학과 보편적 해석학의 등장4. 신학적 해석학5. 그렇다면 바람직한 성서해석학은 무엇인가?6. 관련 문서

"우리는 성령이 말씀하신 그 목적에서 우리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장 칼뱅-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 진리의 예증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을 지혜의 참된 형태라고 해석함으로써 신앙을 철학의 자리에 정치시켰다. 철학은 그 개념의 단어적 의미를 이 지혜에서 찾았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해석학은 원래 전통적으로 성서 주석을 하는 데 준수해야 할 법칙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해석학에 관여하는 범위가 아주 넓혀진 셈이다. 해석학은 본래 역사 혹은 역사적 문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켜야만 할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따지고 묻는 것이다.
-Carl Braaten-

※ 이 문서는 현대 신학자 베르너 진론드의 저서 <신학적 해석학: 해석학의 역사와 특성>을 토대로 1차 문서가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1. 개요

聖書解釋學
성서해석학. Theological Hermeneutics라고도 한다.
그 옛날 그 옛 문화권 내에서 그 사람들이 쓰던 말과 사건이 어떻게 오늘날 오늘의 문화권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정황에 맞는 실존적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가를 연구 검토하는 학문.
신과 인간 사이의 괴리, 옛사람과 오늘날의 나의 괴리를 연결하고 융합하는 학문.

학자들이 추정하기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교훈들을 해석하려는 움직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대부분의 종교경전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문서는 그리스도교학의 관점에서 쓰여졌기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어지간한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 곧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경전인 토라(Tora, 모세오경), 케투빔(Ketubim, כְּתוּבִים, 성문서), 느비임(Nevi'im, 예언서) 모두 과거에 구전되던 전승들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해석이 가미되고, 또 후대에 편집과 추가, 삭제를 통해 지속적으로 해석을 시도했기에,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자세한 사항은 성경 항목 참조.

그리스도교는 멀리갈 필요도 없이 예수부터 구약을 재해석하였다. 그 재해석과 가르침을 전수받은 사도들과 사도교부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면 곧 예수께서 재림할 것으로 믿었기에 재해석을 따로 하지 않고 묵묵히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았다.[1] 그러나 재림이 늦어지게 되면서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로마제국의 민간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고발, 심문, 고문, 사형을 당하자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은 변호, 고백, 순교를 하면서 예수의 어록들을 다시금 해석하고 편지로 목회하였다.[2]

이후에 기원후 120년 이후 교회가 전면적으로 로마제국에게 탄압받자 편지들 중 변증이 유독 뛰어나고 온전히 구약성서의 전통대로 저술된 편지들과 증서들, 토막글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의 의미로 보관돼었다가 신약성서로서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구약성서와 더불어 경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레네오 주교, 아타나시오 주교는 카르타고공의회 이전부터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부르며 그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바실리카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부시대에 이르러 위대한 교회의 변증가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끊임없는 변증과 신학논쟁들을 하게 되었다. 신론,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인간론 등의 신학이 교리로 정립되어 교회에 전수되면서 자연스레 강론이나 기도에도 성경을 토대로 한 해석이 각주처럼 달리기 시작하였고, 이게 설교집으로 묶여져서 책으로 나온게 성서 주석이다.

2. 성서해석학의 역사

사실 성서의 해석은 유대교의 성립부터(기원전 5~4세기 바빌론 유수이후) 접근하는 것이 옳으나, 내용상 방대해질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적 관점보다 유대교적 관점이 주를 이룰 수 있기에 이 문서에서는 생략한다. 이 문서는 원시교회가 탄생하던 시기의 문화 생태계를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므로 당시 문화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대교회의 시대는 그리스, 로마 철학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작용했던 시절이었다. 사도행전만 살펴봐도 이를 뚜렷이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 헬라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보다도 헬라문화에 익숙해있었고, 구약성서에서 외치던 메시야를 유대전통에 의한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보다도 현세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묵시적 메시아를 염원하였다. 예수는 후자에 아주 적합한 메시야 상이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이러한 전개가 인물을 중점으로 이루어지며, 대표적인 디아스포라계 유대인은 순교당한 스테파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필립보이다.[3]

디아스포라계 유대인들은 이후 팔레스타인계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고[4] 안티오키아로 피난을 가 최초의 교회를 세운다. 이때 교회는 지부가 둘로 나뉜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 디아스포라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안티오크 교회다. 그런데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부터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이후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붕괴되면서 팔레스타인계 유대인들도 정처없이 떠돌게 되고, 유대교는 얌니아 회의를 거쳐 회당과 랍비를 세워 자신들의 종교를 수호하려 하였다. 이때부터 회당을 놓고 교회와 갈등을 벌인다. 유대교가 보기에 기독교는 이미 유대교와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팔레스타인지역에 있었던 교회들은 유대인들과 별반 차이없는 종교생활을 해왔기에[5], 기독교를 “예수를 좇는 유대교의 종파”쯤으로 여기고 회당을 빌려주고 같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더 이상 로마제정정부의 눈에 나서는 안되었기에 그들은 기독교를 내쫓았다.

기독교는 이렇게 회당에서 쫓겨나면서 예배를 가정에서 드리기 시작했고, 지부의 개념에서 가족 공동체로 축소되었다. 직접 예수를 보고 전했던 사도들과 바울로가 순교하면서, 교회는 사도들의 제자였던 속사도들을 지도자로 세웠으며 속사도들의 제자,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신약성서는 이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이들의 목회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들 중에서 유독 뛰어난 사람들을 이후에 교부(敎父)라고 불렀다. 이렇게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어가면서, 이교철학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는데, 이 복음은 유대교와는 또다른 것이어서 헬라철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와중에 몇몇 철학자들도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를 불법적인 단체로 여긴 로마정부는 교회를 추궁, 심문, 핍박하게 되었고 교회는 이에 대해 철학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교부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목회하였던 그 장소에서 자신들의 신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교훈과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였다.[6] 그들은 진심으로 기독교의 진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생각했고, 철학적 인식론과 사유의 도움으로 성서를 해석하였다. 특히 교부들에게서 그런 경험이 뚜렷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사상사는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전시켜 왔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이쪽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은 순교자 유스티노,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부터, 주교 이레네오와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암브로시오, 클레멘스, 예로니모,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레오 1세, 오리게네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성 바실리오 주교, 안셀모,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등등 동서방을 막론하고 다양한 교부들이 있다. [7]

서기 1~3세기의 로마시민은 수사학과 시학, 역사학 공부가 기본이며 철학, 법률학까지 빠삭하게 교육받았다. 로마의 직할시로 인정받은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로마인으로 인정받았고 따라서 그곳에서 태어난 교부들과 감독들도 자연스레 로마의 교육풍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이분들은 당대 철학자들과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만큼 필력과 어휘력, 지적 수준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라(대부분 철학자나 교사, 다른 종교의 강사였다), 지금도 이분들의 주석을 보면 존경스러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당장 삼위일체론항목만 봐도 알 수 있다.[8] 2세기에 "신학"은 플라톤의 전통에 따라서 "신화론"과 동일한 의미로 여겨졌다. 따라서 교부들은 기독교를 신학이 아닌 하나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철학으로 변호하였으며 그리스 철학은 하느님의 섭리이고, 하느님이 그리스인들에게 빌려준 선물[9]로 까지 여겼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공의회를 거치며 신학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신화로서가 아니라 성서에 계시된 야훼를 변증하는 학문이 되게 했다.

고대시대의 교부들은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국가론, 의무론, 법률론 등등 여러 철학서적들과 지혜서적을 자연스레 읽어왔기에 어떠한 문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알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성서를 위의 책들과 같은 방식으로 접했고 대했으며, 성서가 위의 책들보다도 더 큰 지혜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교회조직과 성경의 정경화가 미처 이뤄지지 않았던 시대(기원후 70~200년 사이)에서 이러한 교부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이들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성서해석은 콘스탄티노플 니케아 신경과 같은 교리와도 거리가 먼 것들이 종종 있었다.

2세기부터 교회를 공격한 마르시온의 도전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그들의 자의적인 해석을 경고하고 교회의 올바른 전통에 따른 해석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사제의 권위가 상승한다. 순교자 성 유스티노 사제 순교자(Iustinus)은 최초로 성경을 질서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리용교회의 주교인 이레네오는 자신의 성경 해석에 따라 영지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삼위일체론에 위대한 기여를 한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해석을 위하여 순결한 영혼과 그리스도를 따른 덕이 있어야 하고, 문맥에 의해 해석하며, 전체 성경의 유추(믿음의 유추와 동일함)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오늘날 가톨릭정교회, 개신교에서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학문적),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으로 자라온(신앙적) 사람을 따로 모아서 훈련하고 육성하는 이유는 교부들의 뛰어난 식견과 경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철학이 왕성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성서를 신비적, 은유적으로 해석했다. 이 모임이 학파를 이루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은 알레고리 해석, 즉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이 강하였다. 반면 스토아, 라틴철학이 왕성했던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문법적, 지성적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학파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안티오키아 학파의 타르수스의 디오도로스(Diodore of Tarsus)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레고리 해석을 비판하고 언어학적이며 문법적 분석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르(Thehodore of Mopsuestia) 역시 알레고리 해석을 주관적인 성경 해석이 될 수 있으므로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학자는 건전한 신학적 판단에 의거하면서, 문자적 의미를 확고하기 위해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실제적인 적용에 관심을 가졌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Theodoret of Cyrus)는 비유적이고 모형론적인 해석을 수용하면서 언어학적 분석을 하였다.

그러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의 신학적 도그마가 형성되고, 성서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들이 도그마를 따라서 점차 구심적, 배타적으로 변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삼위일체론항목 참조. 따라서 도그마를 내세운 교회는 성서를 온건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초점을 두게 되고, 동서방 교회가 분열하게 되면서 동방교회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서방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전통을 따라 성서를 해석하게 된다. 이후 서로마의 멸망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면서 더더욱 보수적으로 변하게 된 가톨릭은 비잔틴 제국에서 사용하고 있던 오리게네스의 3중적 의미 해석을 조금 더 보강하여 서로마 교회들에게 4중적 의미의 해석을 강론할 것을 명령한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교부들의 출신, 배경, 철학의 다양함으로 각기 독특한 사상, 성서 해석이 교부들에게 존재했으나 성경의 정경화, 교황제도가 정립되면서 성경해석에서 보편적 방법론을 제시해야 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강론(설교)를 듣는 신자들의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고트족을 대표로 여러 야만족들이 로마영토를 분할 통치하면서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보존되던 로마문물, 즉 로마의 문화를 배우고 싶어하게 된다. 교황들은 이들과 협상하여 보호를 받는 대신 기독교를 위시한 로마의 문화를 제공하게 되었고, 부족장이나 왕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온 백성들이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언어문제가 생기고, 교회는 전통수호를 위해 라틴어[10]미사를 집전하고 백성들은 그냥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학계에서의 성경 연구는 발전하더라도 교회현장에선 별 효율이 없었다.

4중적 의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역사적 의미 혹은 문자적 의미 (Sensus historicus aut literalis)란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것
2. 교훈적인 의미(Senus tropologicus)란 교훈과 도덕적 시정(Correctio moralis)을 찾는것
3. 풍유적인 의미(Sensus allegoricus)란 문자적 의미 이상의 다른 의미를 설명하는것
4. 영적 의미(Sesus anagoricus)란 신비적으로 혹은 공적으로(mystically or openly) 사용되는데, 듣는 자의 마음이 하늘의 것들(heavenly things)을 묵상함으로써 감동받고 훈계를 받는것.

쉽게 설명하자면, 4중적 의미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해석해 본다면 문자적(literal)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문자적 도시이며, 풍유적(allegorical) 의미로는 교회를 의미하며, 도덕적(tropological) 의미로는 인간의 영혼을 언급하며, 영적(anagogical)인 의미로는 하늘의 도성을 말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소위 자의적 해석을 할 여지가 너무나 컸으므로 성경 원저자의 의도를 밝히는데는 실패한 방법이었다. 성경 그 자체가 말하는 것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한 해석이었다. 실제로 수도원에서 성경에 대해 강론을 펼치던 많은 설교자들(선생님들)이 이단심판에 회유되기도 했다. 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그나마 성경연구를 매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수도자들이 이단심문을 당하는 판에 교회 현장은 더 심했을 터.

9세기 카를 대제의 문예부흥기에 본격적으로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이전의 교부들이 시도해왔던 해석들, 특히 미학에서도 강조했듯이 신 플라톤주의에 기반한 성서해석들이 교리화되던 것에 반발하여 이슬람 문화에서 보존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여 논리학, 자연철학, 심리철학, 형이상학,윤리학, 천문학, 연금술, 법학, 생태학이 학문으로 개설되고 신학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가 재검토되며 신비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13세기 극렬한 변화의 시대에 놓여있던 교회는 기존의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해석들을 고수하는 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중심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편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때의 유명한 사람들은 성서해석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사람은 안셀모,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이때의 해석학적 논의들도 스콜라주의, 실재론을 토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성으로 최대한 성서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형이상학, 초자연의 영역으로 넘겼다.

15세기 윌리엄 오컴을 시작으로 유명론이 나타나면서 "하느님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행동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오컴에 의하면 은 제한적(ordered)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에서만 우리는 신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자연 질서에 따라 운행하며 합리적으로 행하는 것들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에 대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신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오컴은 신학체계를 성경을 통한 계시에 기초하지 않고 자연을 통한 이성에 기초하여 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로 주장하였다.

오컴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신학자들이 이성으로 신학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교리는 합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계시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스콜라 신학에 대한 반발과 문헌학과 역사학의 발전으로 고전, 고대의 모습들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다시금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 신학을 재정립해서 문예부흥을 유도하기도 했다.

17세기 종교개혁 시기가 되면서 루터는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였으며, 중세의 4중적 의미의 해석을 버리고 역사적-문법적 해석을 중시했다. 루터는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 즉 성서 원본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미 과거의 죽은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많은 문법적 손실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 언어 고유의 지리적 해석과 문학적 기법들이 깡그리 무시될 수 있기 때문. 그래서 루터는 번역을 할 때 최대한 성경시대의 의미대로 번역하고자 노력했다. 나머지 해석은 주석이나 각주를 달면서 이해를 도왔다. 그러나 그가 성경의 권위를 중시한 나머지 축자영감설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를 담은 구유"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루터는 그리스도론 중심의 해석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뒤에 더더욱 성서해석학계의 먼치킨이 등장하는데,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성서주석들은 칼뱅의 해석학이 여지없이 뛰어남을 증명해주며 현재까지 목사님들의 베스트 셀러로 통용되고 있다. 칼뱅은 성서의 영감을 유기적 영감설로 이해하였지만 결국 시대적 한계로 인해 성서에서 추구하는 지상의 국가를 신본주의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국가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루터의 한계와 동일한 맥을 잇기 때문이다. 자세한 항목은 장 칼뱅 항목 참조.

이때부터 성서해석학은 개신교마저 교리를 답습하던 현실의 차원에서 한 차원 도약하여 종교개혁자들의 각각 고유한 기독론과 종말론 등등의 사상들이 해석에 활용되었다. 다시금 교부시대의 다양한 성경해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처음으로 사용한 신학자가 바로 장 칼뱅.[11] 이들이 성서 해석을 할 때 일관되게 강조한 명제는 "성령이 확실한 해석자이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였다.

종교개혁 시기이기에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문헌해석학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었기에 성서를 해석할 때 쓸데없이 장황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가능한 짧고 간략한 방식을 유지하려 시도하고 해석시 애매한 점을 제거시켜 단순성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되게 하도록 도왔다. 어떻게 보면 이단으로 빠지지 않게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방식의 해석은 오컴의 면도날의 여파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이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대학의 철학과에서 해석학이 도입되고 고전 비평, 문학 비평 등의 분야가 개척이 된다. 이후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철학적 해석학을 최초로 신학에 적용시키면서 소위 성서비평학이 탄생하고 역사비평이 설교강단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3. 근대의 성서비평학과 보편적 해석학의 등장

이 항목은 성경/논란항목과 성서비평학을 참조하는 것이 더 낫지만 두 항목을 간소화시켜 설명해주길 원하는다 읽기 귀찮은 위키러들에게 참고하라는 의미에서 적는다.

역사 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은 간략하게 역사적 방법, 또는 역사적 비평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비평적”이라는 말은 성서 연구에 있어서 일체의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거기에서부터 전적으로 자유한 입장을 나타낸다. “역사적”이라는 말은 첫째, 세속적인 역사학에서 적용되는 척도를 성서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역사적”이라는 말은 연구의 대상 또는 목표를 가리킨다. 세속적 역사학의 일차적 관심이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느냐?”(What happened really?)에 집중되는 것처럼 계몽주의자유주의 시대의 역사 비평적 성서연구에서는 주로 성서에 보도된 사건들이 보도된 그대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확증하려는 역사 실증주의적 관심이 지배했다. 그래서 이당시의 성서비평학은 역사비평에만 머물렀고 그 다음에는 윤리적 해석, 낭만주의적 해석, 식민주의적 해석과 같이 근대적 시대사조를 따라갔다. 여기서 학문에게 다 뺏긴 신앙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소위 경건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은 장로교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감리교의 존 웨슬리, 루터교의 필립 슈페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18세기에 당면했던 시대는 더이상의 형이상학과 신론에 더이상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의 생존을 위해 근대철학이 종교에 제시한 의문들을 반박하고, 동시에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법학, 철학에서 사용해왔던 해석의 도구들, 즉 문법적 해석과 비유적 해석의 전통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한 방식의 해석은 그들의 논리를 보완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특수 해석학에 가까우므로 다른 이들이 볼때 글쎄올시다와 같은 반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편적인 이성(당시의 칸트를 의식한듯 하다)의 관점에서는 옳지 못한 방식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해석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모델을 제시한다면 계몽주의의 비판과 함께 종교의 교리화된 경전해석에 대한 안티테제가 될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해석학의 역사에서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전의 신학적 해석학이나 문헌학적 해석학과 같은 해석학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지반에서 해석과 이해의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에 이르기까지 성서 해석학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비유적인 해석 방식[12]에 슐라이어마허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비유적 해석은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 이외에 비본래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을 위해 쓰인 성서를 더 이상 신앙과 은총이 아니라 문법적이고 심리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절감한 슐라이어마허는 이전의 전통과 동시대인들과의 활발한 지적 교류를 통하여 해석학과 비판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13]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해석은 하나의 구성 과정이다. 구성은 규칙(Regeln)을 잘 적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재능(Talent)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해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문법적 해석이다. 이것은 저자의 언어 영역권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단어의 의미는 전체적인 문맥(Kontext)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배후에 깔고 있다. 텍스트의 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심리적 해석은 저자의 기본 생각과 본래 의도에 비추어 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저자에게서 우리는 자아, 품위, 자율, 자유, 자발성과 같은 심리적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해석자의 예감(Divination)은 해석자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의 심리적 상태 파악은 물론 저자의 전체적 저술에 비추어 하나의 작품을 통찰함으로써 이해를 촉진시킬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저자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성서비평학 연구는 성서를 교회의 전통과 권위, 그리고 교리로부터 해방시켜 하나의 세속적 문서를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탐구하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연구방법의 맹아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에서 희랍·로마의 고전적 문헌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데서 생겨났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성서 자체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대립시킴으로써 다음 세기에 있어서 성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촉진하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14] 당시 이 방법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1870년 제1차바티칸 종교회의를 통해서 역사 비평적 방법을 공적으로 금지시켰다.

위키러들은 여기서 “성서 연구”와 “성서 해석”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성서연구는 성서를 사료(史料)로 하여 그 안에 직접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된 역사적 사항들을 연구하거나 성서 문서의 성립과 관련된 인물들 및 시대적 사정들을 규명하는 작업이라 한다면, 성서해석은 성서의 본문을 어떤 의미 내용이 담겨 있는 그릇으로취급하여 그 속에서부터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를 끌어내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위의 "성서 연구"와 "성서 해석"을 최대한 합리적이고, 이해가능한 범위에서 해석을 시도했다. 위의 출애굽, 여호수아 사건을 그저 후대의 신화적 삽입, 고대 근동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문학적 색깔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강조했던 이성은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키면서[15] 신학적 해석이 없는 성서비평학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4. 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은 성서비평학의 공허한 비평을 비판하고 등장한 안티테제이다. 자세한 내막은 신정통주의 항목 참조.

흔히 말하는 신학적 해석학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이후에 만들어진 보편 해석학, 일반적으로 철학적 해석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기존 계몽주의자유주의의 안티테제로 나타난 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학을 다루는 것이다.[16] 위의 성서비평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학적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하는 역할을 맡는다.[17] 따라서 신학적 해석학은 성경해석학을 보필하고 세워주며, 필요에 따라서는 성서해석학을 검증하는 역할도 한다.

모더니즘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종말을 고하고 자유주의 신학 전통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19세기에 출현했던 자유주의적 성경주석과 신학의 역사비평적 접근은 급진적인 정치적, 과학적 도전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18] 그 이후 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 실존주의적 접근방법을 하나의 혹실한 새로운 성찰방법으로 여겨 이를 환영했다.
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영향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 진정한 삶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실존적 가능성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설명은 루돌프 불트만과 다른 신학자들에게 이 실존적 상황에 상응하는 새로운 신학적 강령들을 발전시키도록 촉구했다.
둘째, 언어에 대한 그의 성찰은 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를 재차 환영케 했다. "신해석학"이 그것이다.
셋째, 인간존재의 해석학적 조건에 대한 하이데거의 총체적 통찰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계속적인 신학적 성찰에 영향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텍스트와 종교적 문헌을 오로지 역사적으로만 다루는 방법을 초월한 인간학적 토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성경 메세지와 이 세상의 재해석된 인간의 현존재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들이 같은 열정으로 공유한 것은 아니다.

독일계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자신의 동료들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데 반하여 자신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 신학에 심각한 위험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경비평을 출발점으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친 문서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정경으로서 성서를 바라보게 되었고, 소회 통시적 접근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비평방법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저자와 배경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긴 역사를 거친 책을 보는 독자의 관점이 중시되는데,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해석하는 것이 필수가 되면서 현대철학, 즉 실존주의현상학, 철학적 해석학, 언어학, 행동주의연구방법을 모두 차용하는 비평방법들이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성서해석학은 다시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거의 공시적 접근, 역사적 해석(historical interpretation)이며, 다른 하나는 이른바 통시적 접근, 신학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이다. 역사적 해석은 그때 거기서 그의 독자들을 향하여 말하려고 했던 바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라면, 신학적 해석은 루돌프 불트만의 의견으로 그 본문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를 말해주는가, 즉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구속력 있는 신적인 건넴말(Anrede)로 들려오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반대로 한스 프라이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그 삶을 따르고 실천함으로 그 이야기에 속할 수 있는지를 고심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비평학에서의 성서해석 또는 주석은 역사적 해석에 국한된다. 이러한 해석과 주석은 어차피 평신도를 대상으로하는 설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요소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없다. 들려줘도 '어쩌라고'라는 냉소적인 말밖에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지금 당장 나에게' 말을 거는 계시만이 중요하다.

5. 그렇다면 바람직한 성서해석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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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해당 내용으로 다루었는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한신대학교 계열 신학교수를 인터뷰했다.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강도사님들이 설교하기 전에 참고하는 성서 주석은 계몽주의 시대 부터 성서 고고학에게 입양되어 역사적, 문헌적, 편집적, 언어적 비평으로 각주와 미주 폭격(...)을 당한 작품이다. 이때 동반되어 나타난 영역이 역사적 예수이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들이 등장해 계시와 일반역사의 절대적 차이를 주장하게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예수연구가 흐지부지되자 성서 주석서의 형태는 근대의 문서비평 형태에서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아 역사비평은 살린채 계시를(크게 신화적 예수이해, 교회시대의 성경집필형식, 설교자들의 성경연구방법 등을 일컫는다.)돕는 참고서의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위의 주석서들을 주로 연구하고 집필한 유럽의 개신교보다 압도적으로 미국의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기에 주석서들의 용법에 대해서는 미국의 방식을 답습하게 되었다. 즉 성서무오설과 같은 근본주의 개신교의 교리를 답습함으로 위의 역사비평을 싸그리 무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배예식에서도 드러나는데, 한국의 개신교에서 흔히 드리는 예배의 형식은 19세기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드려진 간소한 예배형식, 곧 변경예배에서 대부분 가져온 것이다.

설교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 것도 변경예배의 영향이며, 유럽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의 보수적인 성서관, 변경예배로 인한 목사들의 설교 비중 상승 -> 목사들의 권위의식의 상승 -> 마틴 루터가 강조했던 만인사제설의 실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본 문서가 해석학이기에 여러 성례전에 대해서는 많이 생략한채 기술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배경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많은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은 예배의 변화로 해석의 중요함이 증가한 것을 간과하고 주석만 연구하다가 끝맺음이 기존 변경예배의 흔한 모습인 기복주의은사주의로 빠지게 된다. 심각한 경우에는 위의. 4중적 의미의 해석. . 지금. 시대. . 계속. 써먹는. 분들. . 아직도. 전국에. 지천에. 계신다.

이제부터는 주석서만 보고 "이렇게 해야지"하면 큰일나고, 신학적 입장을 올바르게 정하고, 예배예식을 올바르게 정하고, 그에 맞게 설교비중을 줄이는 대신 성만찬을 강조하던가 예식을 다듬던가 해야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신학적 해석학은 좀 더 철학적이며 기존의 신학사상과 신학자들의 관점들을 많이 고찰한다. 그리고 신학적 해석학 역시 성경해석학에게 검증되고 교회 공동체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신학적 해석학은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석학적인 원리를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 타당성은 약화 된다. 즉 주석서를 한개만 보면 안되고,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생각도 해보고, 학자들의 생각도 보고, 성서의 원저자는 뭐라고 생각하고 썼는지도 연구해보고, 역사는 뭐라고 하는 찾아보고, 이게 진짜 하나님이 하신 말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전쟁의 정당성을 위한 삽입인지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거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기본적인 규칙들을 준수하고 풍유적 해석학, 낭만주의적 해석학, 실존주의적 해석학, 현상학적 해석학, 존재론적 해석학, 사회비평 해석학, 민중신학의 해석학 등 현재 존재하는 해석학 중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서관에 책 찾듯이 뒤져가면서 해야한다. 이렇게 보니 목사님이 존경스럽다 근데 아무도 이렇게 안하잖아

위의 말이 너무 어렵다는 위키러들을 위해 첨언하고자 한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그의 유명한 논문 “전제 없는 주석은 가능한가?” 라는 논문에서 해석자가 아무런 전제 없이 백지 상태에서 성서를 객관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딜타이(Wilhelm Dilthey),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G. Gadamer) 등 존재론적 해석학의 대가들이 주장하는 바이며 신학적 해석학에서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입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의식하여야 한다. 이는 임의적 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이 정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해석은 누구나 주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특성상 자신의 관심이나 이해된 자기 없이 백지 상태로 본문 앞에 설 수 없음을 의식하는 것은 오히려 해석자의 자리에 대한 의식이며, 독단으로 빠지는 해석을 방지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딘가에 아무런 전제도 없이 순수하고 객관적인 사실주의 입장에서 역사를 볼 수 있다고 하는 나이브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성서에 대한 가치중립적 읽기란 가능하지 않음을 철저히 의식하는 것이다. 이는 C.S.루이스가 자신의 저작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며, 칼 바르트가 강조하는 신정통주의의 모토이다.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논리, 부르주아적 역사사관 또는 공산주의 마르크시즘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단히 반성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 교회에서는, 자본주의적 욕심을 추구하거나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성서의 핵심인 양 선전하는 설교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미국을 선망하고 미국시민의 상태가 예수를 믿어 복 받은 이상적 모델인 양 제시하고 제3세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가난이나 재난을 겪는 나라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제시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러한 해석의 결과는 당장 멀리갈 필요도 없이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따라서 바람직한 해석학은 성서 본문 속으로 해석자의 주관적 욕구를 제멋대로 집어넣는 자의적(恣意的) 해석이 아니라 성서 본문 속에 담겨 있는 본래적 약속을 바르게 끌어내는 해석이다. 근데 이렇게 열심히 적고나서 보니 마지막 문장에서 왜 안구에서 습기가 차는지 모르겠다

6. 관련 문서



[1]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안디옥 교회가 그러하다.[2] 사도 바오로복음서 네 기자들, 서신서 기자들이 대표적이다.[3] 신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이름이 사도행전부터 유대식에서 그리스식으로 비율이 늘어난다. 점차 유대인들만의 종교에서 디아스포라계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들의 종교로 확장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4] 사울이 이 사건의 상징적인 인물이다.[5] 사도행전을 잘 살펴보면 사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절기를 철저히 지키고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다. 사이클이 유대인들과 차이가 없었다.[6] 그 교회들은 지역마다 인종과 언어가 달랐으며 그들의 문화에 맞추어 가르침을 전해야 했기에 자연히 해석이 필요하다.[7] 문서 맥락에서는 고대의 교부들만 포함시켜야 하나 이해를 돕기위해 중세까지 삽입하였다.[8]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만 봐도 자기 과거 이야기 하면서 참회하는 와중에 시간이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샛길로 새면서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주의의 철학이 다 튀어나온다... 게다가 몇몇 교부들은 서로 편지 주고받으면서 "너도 알겠지만 말이야 시편 122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하면서 성경과 철학책이 이미 머리 속에 존재해서 필요할때마다 끄집어내는 수준이다.[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했던 말이다.[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11] 그의 시대에 이게 가능해진 것은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학 원서 연구 유행과 북방 르네상스(알프스 이북을 중심으로 성경이나 주석을 그 시대의 언어로 롤백시켜서 이해하고자 했던 문예운동)의 역사문맥적 이해가 시대적으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12] 이를 모형론적, 비유론적 해석이라고 한다[13]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9%8C%ED%97%AC%EB%A6%84_%EB%94%9C%ED%83%80%EC%9D%B4[14] 이것은 그 당시에 사회 변혁의 주체로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로서 지식인들이 교회의 권위로부터 해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15] 이게 어떻게 세계 대전과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들은 관련책들을 살펴보라. 다 성서를 인간적으로 해석하여(특히 창세기의 "땅을 정복하라", "노아가 저주한 함 민족이 지금의 아프리카 흑인들이다"의 해석에 따라 자연스레 생긴 제국주의가 그러하다) 생긴 결과이다.[16]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신정통주의, 여성신학, 해방신학, 신스콜라주의 등등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동과 함께 등장한 신학들과 드물지만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구)정통주의와 복음주의계열들도 포함한 것이다. 임의적으로 붙인 것이므로 수정바람.[17] 여기서 신학적이라 하면 철학, 기독교의 전통, 기독교적 체험, 그리고 성경의 원리까지 포함하여 해석학의 방법론을 연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8] 자주 사용되는 비유로 "어항의 물고기"가 있다. 옛날 어느 한 어항에 물고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물고기가 어떻게 살아움직이는지 신기해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물고기를 만져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옛날부터 사람들은 그 물고기를 함부로 손대었다간 저주를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했고 가르쳐왔기 때문에 섣불리 만질 수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르침은 옛말이 되었고 용기를 낸 몇몇 학자들이 물고기를 어항에서 꺼내어 해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물고기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알게되었다. 물고기에게는 부레가 있었고, 아가미가 있었고, 지느러미가 있었기 때문에 물에서 헤엄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물고기를 분해해놓고 보니 이 물고기는 더이상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고심하던 한 학자가 나타나 말했다. "우리 이 물고기를 봉합합시다" 그래서 물고기를 봉합하고 다시 어항에 넣으니 물고기가 다시 살아 움직였다. 바로 이 물고기는 성경이고 학자들은 역사비평과 양식비평을 했던 성서학자들이다. 책의 "삶의 자리"를 찾기 위해 성서를 찢어놓았더니 성서를 죽였다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이들의 제자들은 어떻게 이 기록들이 살아남아 "책의 자리"에 놓여졌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마치 "축구 경기장의 응원석에서 온통 하얀 팻말을 든 사람들 중에 검은 팻말을 든 사람들을 보고 쟤들 왜 저기 있냐 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한마리의 호랑이 그림이 있었다. 흰 팻말은 호랑이의 눈이었고 검은 팻말은 호랑이의 눈동자였던 것이다."의 비유처럼 책은 편집이 완성된 하나의 책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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