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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은 오랫동안 논리학에 첨가되어 왔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해석학설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말하는 기술과 이해하는 기술은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말하는 것은 단지 사고의 외적 측면이다. 해석학은 사고기술의 일부이며 고로 철학적이다."
-프리드리히 슐라이머마허, <Hermeneutics>, The Handwritten Manuscripts, pp.6~7 中-
-프리드리히 슐라이머마허, <Hermeneutics>, The Handwritten Manuscripts, pp.6~7 中-
※ 이 항목은 현대 신학자 베르너 진론드의 저서 <신학적 해석학: 해석학의 역사와 특성>을 토대로 1차 문서가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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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解釋學 / Hermeneutik, Herméneutique, Hermeneutics, Hermeneutica[1]해석학의 어원을 살펴보면, 해석하다(to interpret)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동사 hermeneūein과 해석(interpretation)으로 번역되는 명사 hermēneia 이 두 단어가 Hermes 神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어 hermeios는 델포이 신탁의 사제를 의미한다. 즉 헤르메네웨인, 헤르메네이아라는 단어는 날개 달린 메신저 신(神) 헤르메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 자체를 ‘해석’이라고 보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해석학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Hermeneutics)을 명시적으로 헤르메스와 연관 지었다. ‘해석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17세기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원문 주석의 기능과 해석의 제반 이론들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따라서 계몽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석학은 개별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문헌학과 신학의 분과로서 기능해왔다.
철학의 해석학은 주로 텍스트의 해석을 다룬다. 여기서 명시하는 텍스트의 의미는 19세기까지는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면 20세기부터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자크 데리다의 영향으로 단순히 책이나 논문의 해석을 떠나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다 텍스트로 보고 다루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자면 개인도 텍스트로 볼 수 있으며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이전의 해석학의 질문이 "어떻게 텍스트를 이해할 것인가?"였다면 이후의 해석학의 질문은 "이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적 해석학의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여를 한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빌헬름 딜타이, 마르틴 하이데거,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네 명을 꼽는다. 이 중에서도 가다머는 현대 해석학의 거두로 평가된다.
계몽주의 이후에 출현했던 모든 해석학적 운동들과 제안들을 다 다룰수 없기에 여기서는 해석학적 사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유럽의 대륙철학 전통에 서있는 몇몇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2.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 ~ 1834)는 흔히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라 알려져 있다. 그는 해석학적 문제의 보편적인 범위를 파악했고 그 결과로 얻은 "이해"에 대한 "철학적"이론을 체계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칭호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는 해석학의 성격과 범위를 재정의하면서 신학적 해석학을 교회적 이데올로기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 (이 감옥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정통주의 해석학적 접근을 의미한다) 해석학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사상과 강의노트는 뒤늦게 발견, 출판되었기 때문에 그의 공헌, 평가들이 다시 재평가를 받는 중이다.전술한 대로 여태껏 해석학은 수사학, 논리학, 신학과 문학에 의존해왔기에 여타 학문들에 비해 철학적 기초가 부족한 상태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철학적 기초를 발전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첫째로 그는 "이해"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는 입으로 말해진 것이나 글로 쓰여진 것을 종종 잘못 이해한다. 이해의 과정에 있어 개인적 또는 주체적 차원은 이해되어야 하는 대상, 객체적 차원의 언어학적 성격에 대한 올바른 고려를 수반해야 한다.
둘째로 그는 인간의 의사전달이 갖고 있는 언어학적 성격을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다. 모든 이해는 언어를 전제로 하며 언어 안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언어를 통해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므로 언어가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석학과 수사학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슐라이어마허는 언어의 문법적이고 객관적인 관습과 기술적, 주관적인 개인적 실행을 구분하여 전자를 해석의 문법적 차원, 후자를 해석의 기술적/심리학적 차원으로 구분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의 문법적 차원의 작업을 "언어 안에서 언어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의 올바른 의미를 찾아내는 예술"이라 묘사했고, "심리학적/기술적 해석"은 작품의 전체성과 통일성 그리고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주요 특징을 파악하려는 작업으로 보았다.
셋째로 그는 이해의 두 차원이 모든 텍스트 해석활동에 있어서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텍스트가 만들어낸 모든 산물은 관습적인 언어학적 규칙의 개별적 개인적 적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모든 행위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관습적인 방식을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기초한다.
넷째로 본문의 성격에 주목했다. 그는 텍스트를 하나의 우주로 생각했다. 관습이나 규칙들이 우주적 망을 이루어 여기서 새롭고 의미있는 전체를 창조하기 위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텍스트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려기보다는 근사치를 목표로 삼는다. 그럼에도 텍스트의 의미를 향한 이 해석상의 근사치는 해석과정의 비평적이고 책임있는 특성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규칙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다섯째로 그는 그 어떤 규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해석의 예술을 위한 규칙들은 하나의 실증적 형식(a positive formula)으로부터 발전되어야 하고, 이것은 주어진 진술의 역사적인 동시에 예감적이며,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재구성이다."
이 규칙은 해석자로 하여금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겨나게 된 언어체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언어체계에 대한 텍스트 자체의 특별한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다.
이 규칙은 '먼저 텍스트를 이해하고 텍스트의 저자가 이해한 것과 같이 이해하고 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작업의 목표는 해석자가 저자의 언어에 완벽하게 익숙하며 저자의 내적 외적 삶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곧바로 저자의 언어와 삶에 대한 지식은 저자의 저술들을 해석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부언한다.
여섯째로 '우리가 어떻게 부분들로부터 전체의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가? 어떻게 텍스트 안에서 언어학적 도구들의 비교를 통해 부분들에 관해 알게 되는가? 어떻게 우리가 유사한 텍스트들 아래에서 특정 테스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가?'와 같은 해석학적 순환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사고는 이전에는 부수과목에 불과했던 해석학을 이제는 타인이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들을 이해하기 원하는 그 자체의 고유성과 학문으로서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 철학의 한 분야로 등장시키는 하나의 혁명을 가져왔다.
3.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강령의 회복은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 ~ 1911)의 업적에서 시작되었다. 철학적 해석학을 발전시키려 했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노력은 신학적 해석학에서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인문과학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였던 딜타이에 의해 철학적 해석학은 활기를 띄었다.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과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인문과학은 인간생활과 인간들의 복잡한 표현양식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실제적으로 동일한 현상을 다룰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과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해라는 용어는 인문과학의 과업을 특징짓는 핵심용어이다.
설명은 순전히 지적인 사고 과정들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이해는 모든 정신적인 능력들이 결합된 활동을 수단 삼아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해에 있어서 우리는 자체를 우리에게 하나의 살아있는 실체로서 제시하고 있는 전체의 연결성을 전제로 한다. 바로 이 맥락 속에서 우리는 개별적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연결성을 각성하고 살아간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문장, 특별한 몸짓, 특별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Wilhelm Dilthey, Gesammelte Schriften, vol.5. 4th edn, 172.
-Wilhelm Dilthey, Gesammelte Schriften, vol.5. 4th edn, 172.
딜타이는 "인문과학의 심리학적 기초 과업"이라는 표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연과학은 가정들 상호간의 관련성의 도움을 받아 일련의 결론들을 얻어 자연 현상들 사이의 연결을 먼저 구축해야 하는 반면 인문과학은 항상 원래부터 주어진 정신적 생활, 즉 인간 삶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삶은 인문과학의 자료들이며 그것은 이해를 요청한다. 그러나 명확이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해의 과정이다. 이것이 해석학의 과업이다.
즉 삶의 모든 표현은 우리 자신의 과거의 경험들을 갖고 유추함으로써 이해된다는 말이다. 인간 이해가 갖는 이 유추적 성격은 모든 해석자가 주어진 대상을 어느 정도 상이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모든 해석행위에 있어 필연적인 이 상이한 이해는 해석 다원주의라는 현상을 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고의 이 연결성을 고정된 방식으로 "객관적 정신"이라고 정의하자마자 우리는 이해에 있어서 귀납적 추론의 가능성과 생산적이며 비평적인 다원주의의 영역에서 떠나버린다.
슐라이어마허는 의사소통의 모든 노력들을 연결시키는 인간 이해의 통로를 언어 속에서 찾는 반면 딜타이는 보다 물질적인 내용을 의사소통의 기본원리로 삼는다. 이것은 딜타이가 특히 "생"의 개념을 갖고 모든 사고의 토대를 놓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해석학이 중립적이며, 과학적 기초이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딜타이의 생각은 그 자체가 관념론적이다. 그러나 그의 제안으로 철학자들은 해석학적 사고를 철학적 논의에 재도입시켰고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딜타이의 해석학 사상은 하이데거, 가다머, 리꾀르와 같은 인물들에게 중요한 제안들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4. 마르틴 하이데거의 해석학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적 해석학에 보다 고유한 해석학적 기초이론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면 딜타이는 해석학을 모든 인문과학의 기초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비록 딜타이의 제안은 일반적인 동의를 얻지 못했지만 해석학적 사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재발견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해석학적 철학에 주된 영향을 미쳤다. 현상학으로 알려진 철학운동은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었지만 현상학이 해석학의 발전에 미친 충격은 컸다. 현상학은 하이데거와 가다머, 리꾀르 아래에서 해석학의 변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필수적으로 알아둬야 한다.4.1.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과 해석에 대한 입장
에드문트 후설은 철학적 사고를 모든 종류의 철학적 체계들의 사변적 논의와 교리주의로부터 해방시킬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철학이 사물자체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우리는 가치, 목표, 수단들을 단순히 직접적으로 파악해내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그것에 상응하는 주관적 경험을 파악하고 그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자각하게 되고 사물들은 드러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들은 "현상"이라 불린다. 현상의 가장 일반적, 본질적 특성은 개별, 사물, 사상, 계획, 결정, 희망, 기타 등등에 대한 "자각" 또는 "나타남"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드문트 후설, "Phenomenology"(1927)-
-에드문트 후설, "Phenomenology"(1927)-
후설의 강령은 현상에 대한 파악이 사물 자체의 본질을 나타나도록 허용하는 공동자각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주체-객체 분리 문제를 극복한다. 그러므로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인문과학 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분야에 하나의 기초이론을 제공하려는 철학적 노력을 후설이 설파한 셈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현상학자가 하나의 철학체계의 이상을 포기할 것과 그렇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겸손한 일꾼으로서 영원한 철학(philosopia perennis)을 위해 살 것을 요구한다.
-에드문트 후설, "Phenomenology"(1927)-
-에드문트 후설, "Phenomenology"(1927)-
후설은 순수 현상들에 대한 확실한 의미파악을 할 수 있는 절차를 발전시켰다. 하나는 에포케(epoch: 뒤로 물러서다)이고 둘째는 직관적 환원(eidetic reduction)이다. 이 과정 속에서 현상학자는 모든 경험의 본질을 해방시킨다.
오늘날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후설의 강령은 세속적인 상황 밖에서 본질을 파악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후설이 모든 종류의 속임과 왜곡으로부터 현상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해방시켰다 할지라도 그는 현상의 역사적 상황,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상황들을 이해의 행위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인간 이해를 왜곡시켰다.
4.2.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나타난 해석학 접근
후설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제자였던 하이데거의 접근은 후설의 현상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 역시 죽음, 세상, 존재, 덧없음과 같은 인간 존재의 기본적 현상에 대해 면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후설과는 달리 이 현상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순전히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성격을 그것의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본질들을 해석학적 활동 속에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추상적인 개념과 논리를 넘어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이동하고자 했다(인간 현존재).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상과 이 현상의 분석자 모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만이 오직 "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해석학적 철학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해석학적 성찰을 제공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 첫 장에서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조건들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다. "세상에 존재함"이라는 현존재의 구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현존재의 실존적 상황을 다루고 나서 하이데거는 이해의 차원을 현존재의 실존적인 구조들 중의 하나로 논의한다.
이해는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는 현존재의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구조이고, 다음은 앎의 많은 가능한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현존재가 바로 자체의 존재 가능성을 파악하는 데 까지 이를 수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라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구분하려 했다. 하이데거는 "이해가 자체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확고한 양식"을 해석이라 부른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라 해석하는 이 행위는 항상 이해관계 혹은 의도, 예견, 선이해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전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이데거는 텍스트 해석이 무엇인가를 지적함으로써 이 견해를 설명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것'에 호소하기를 원할 때 ...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일차적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논의되지 않은 가정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 고찰들은 하이데거로 하여금 "의미"의 뜻을 정의하게 한다. "의미란 어떤 것에 대한 가해성(可解性)이 그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 가해성은 언제나 이해하는 사람의 선(先)판단(Vorurteil)[2]에 의해 미리 구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인간의 상황 바깥에서 발견될 수 없다. 오히려 실존적 구조로서의 의미는 다만 그 자체만이 의미로울 수도 무의미할 수도 있는 현존재에만 속한다. 모든 이해란 비록 어느 누구도 선 판단의 법칙 밖에서, 즉 해석학적 순환을 떠나서 사물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사물 자체에 대한 최선의 파악의 배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3. 하이데거의 언어에로의 전환
후기 하이데거는 1950년 발행된 강의록과 논문에서 "언어"를 내적인 움직임들 혹은 그것들을 지도하는 세계관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인간수단으로 보는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그는 "언어는 본질상 표현이나 인간행위가 아니다. 언어는 말을 한다(Die Sprache spricht)." 라고 주장했다. 언어가 말을 하는 순수한 모습을 그는 시(詩)에서 발견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 그 자체가 말을 하며, 언어가 그것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존재의 외침을 전달하기 위해 말하기를 필요로 한다. 하이데거는 시를 인간 언어의 참된 본래의 표현으로 여겼으며, 일상언어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빈약한 것으로 보았다. "언어는 말을 한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언어에 대응할 때이다. 대응은 듣기다." 하이데거는 참된 존재와의 접촉을 회복하기 위한 열쇠가 언어에 대한 사려깊은 듣기라고 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듣기가 참된 듣기이고 왜곡되거나 편향된 듣기가 아니라 확신하도록 돕는 전략이 무엇인가이다.
5.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02.11~2002.03.14)의 주요 저서인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이 1960년대에 등장한 이후로 가다머는 해석학적 주제들에 대한 주요 대변인이 되었다. 그의 사상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것이 더 수월하기에 몇가지의 해석학적 성찰과 비평적 관찰들을 다루도록 한다.5.1. 인간 태도로서의 이해
가다머는 현상학의 전통을 따르면서 자신의 해석학을 인간의 이해활동에 수반되는 요소에 대한 성찰이라 보았다. 그는 해석학의 통찰과 해석 방법은 해석학을 순전히 기교적인 개념으로 이끌고 가기에 현대의 다른 기술의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의구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대신에 해석학의 "철학적" 특징을 강조한다. 즉 해석학은 인간이해와 인간의 자기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관심을 두는 "실천철학"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가다머는 인간이해를 분석하면서 텍스트 해석의 예를 든다. 텍스트 이해의 과정이 독자들의 선이해와 텍스트의 의미에 참여하는 독자 자신의 관심에 의해 항상 연료를 공급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독자에게 있어서 텍스트 이해의 궁극적인 목적은 텍스트와의 실질적인 일치다. 이해의 목표는 두 지평, 즉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의 융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해는 주관성의 행위라 할 수 없고, 전통의 과정 속에 자신을 올려놓는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융합된다. 이것은 과정, 즉 방법의 개념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학 이론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진리와 방법>. 258쪽.
가다머는 이 이해의 과정을 게임의 경험에 비유한다. 독자는 마치 게임의 규칙에 자신을 복종시켜 궁극적으로 그 게임에 의해 지시받거나 움직이는 경기자와 같다. 이처럼 가다머는 그의 해석학적 성찰을 이해를 추구하는 자가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게임의 조건들에 대한 성찰로 이해한다.
우리는 항상 한 텍스트를 일련의 질문들을 갖고 접근한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텍스트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에게 의미를 드러내려는 텍스트의 잠재성에 의해 우리의 생각이 이미 어느정도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기대의 지평을 통해서 이해의 과정에 들어간다. 우리는 텍스트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사전달의 역사적 실체에 의해 항상 조건 지워진다.
이해의 과정에서 두 지평들의 실제적인 융합이 발생한다. 이것은 역사적 지평이 투사되자마자 그와 동시에 그 지평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융합의 의식적인 행위를 "효과적 역사의식"의 과업이라 묘사할 수 있다. <진리와 방법>. 274쪽
가다머에 따르면 이 "효과적 역사의식"의 구조는 언어이다. 언어는 두 사람 사이의 대상에 관한 이해와 일치가 발생하는 중간지대이다. 대화는 두 사람 사이를 중개하는 특별한 형식이다. 독해의 과정을 인간의 대화에 비유해보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상호운동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운동의 주도권은 독자에게 있다. 텍스트는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지만 사실상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해석자의 작업이다. 텍스트와 해석자는 이 작업 속에서 공유점을 가진다.
그러나 언어는 순전히 도구의 관점에서만 고려될 수 없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가다머에게 있어서 언어는 의사전달의 매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가다머에 따르면 언어의 참된 본질은 의사 전달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오직 언어만이 존재의 총체성과 관련을 가지며 유한자, 역사적인 제한을 받는 인간을 인간 자신과 세계에 매개시킨다." 그래서 그는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 라고 결론내렸다.
해석학적 경험은 단지 많은 인간의 경험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들이 진리에 접근하는 하나뿐인 방법이다. 해석학적 경험의 이 성격때문에 가다머는 이 경험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으로서의 해석학은 모든 철학의 보편적인 측면을 대표하며, 단지 인문과학을 위한 방법론적인 기초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가다머는 해석학을 인문과학의 기초이론으로 평가하는 딜타이의 견해를 거부하고 대신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관한 실존적인 해석을 따른다. 가다머에 따르면 해석학은 인간의 이해 현상 그리고 인간존재에 대한 적합한 이해에 관한 것들을 성찰하는 학문으로서 하나의 실천철학이다. 해석학의 본질에 대한 가다머의 성찰은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을 상당히 진전시켰다. 특히 "효과적 역사의식"에 관한 그의 분석은 해석학적 순환에 관한 하이데거의 통찰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해답을 얻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비평의 문제가 제기된다.
독자는 어떻게 잘못된 이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독해의 과정에서 전통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왜 텍스트는 권위를 가지며 따라서 그것이 제시하는 전통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가? 두 지평의 융합은 행복한 융합인가 아니면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갈등인가? 텍스트 해석에 있어서 진리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가다머의 해석학을 간추려 설명하자면, 기원적이라고 가정된 텍스트의 의미보다 그 이후의 일련의 독법들 속에, 즉 그 이후의 텍스트의 실효성에 더 많은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3] 쉽게 말하자면,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 텍스트를 활용하고 이해하는 방법에 따라 텍스트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소리이다. 일례로, 시인이 수능 언어 영역에 나온 본인의 시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하는 현상은 수능 문제의 불합리함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니다. 수능 언어영역이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이며 객관적인 문학 작품의 해석 능력이며, 작가의 주관을 알아 맞추는
5.2. 해석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평
가다머에 따르면 이해는 이해를 하려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텍스트에 복종시키려고 하고 텍스트가 제시하는 전통에 들어오려고 하는한 항상 성공적일 수 있다. 이런 류의 해석학이 철학의 보편적인 특성이 되어야 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은 날카로운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년 6월 18일 ~)는 이러한 보편적인 주장을 거절하면서 이해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했다.하버마스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조직적으로 왜곡될 경우에는 가다머의 이해에 관한 모델이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해석학적 의식은 그것이 해석학적 이해의 한계에 대한 자체의 성찰을 고려하지 않는 한 불완전하다. ... "정상적"인 말, 즉 병리학적인 이상이 엿보이지 않는 말에도 조직적으로 왜곡된 의사 소통의 유형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때에만 해석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의사소통의 두절이 해당 당사자들에 의해 감지되지 않는 사이비 의사소통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 대화에 새로 참여하는 사람만이 그들이 서로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위르겐 하버마스, <On Hermeneutics Claim to Universality>
하버마스는 보다 깊이있는 해석학과 보다 적절한 의사소통 이론을 요구했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성찰이 지닌 가치있는 것들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가다머가 하이데거를 좇아 설명했던 해석학의 존재론적 개념자체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가다머는 하버마스의 비평을 거부했고 자신은 단지 어떻게 지식이 해석학적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려고 의도했을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했다. 그 대신 텍스트와 그 텍스트 전통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해석자의 자유에 근거를 둔 행위로 보았다. 그러나 가다머는 인간의 의사소통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대한 비평과 해석작업에 수반되는 이데올로기적 행위의 역할에 대한 특별한 분석을 요구하는 하버마스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비평은 폴 리꾀르가 지적했던 것처럼 가다머의 보편적인 요구를 무효화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평적 혹은 보다 깊이 있는 해석학조차도 하나의 해석학으로 남기 때문이다.
5.3. 회복과 의심: 폴 리꾀르의 철학적 해석학
[1] 순서대로 독일어, 프랑스어, 영국식 영어, 라틴어[2] 선입견이라고도 번역하며 실제로 일상적 용례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선입견에 가깝다. 다만 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하며 말 그대로 인간이 이해하고 판단을 내리는 실존론적 구조를 지시한다.[3] 슬라보예 지젝의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