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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01b> 마르쿠제 Marcuse | |
본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 |
출생 | 1898년 7월 19일 |
독일 제국 베를린 | |
사망 | 1979년 7월 29일 (향년 81세) |
독일연방공화국 슈타른베르크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1898~1940)[1]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940~1979)[2] |
직업 | 사회학자, 철학자, 사회평론가, 사회운동가 |
모교 |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철학 / 박사) |
학파 | 비판 이론[3], 신좌파 |
경력 |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원 회원 (1933)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과 교수 (1952~1957)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 (1958) 브랜다이스 대학교 교수 (1958~1965) UC 샌디에이고 철학과 교수 (1965~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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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20세기 후반 신좌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좌파 사상의 핵심 이론을 제공하여 신좌파의 아버지라 불린다. 젊었을 때는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가 나치로 인해 미국 망명을 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활동했었다. 이후 강단에서만 활동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판하면서 갈라져나와, 사회주의 운동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68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2. 생애
2.1. 교육 및 초기 연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1898년 베를린에서 섬유 제조업체의 사장인 유대인 칼 마르쿠제와 그의 아내 게르트루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상류층 가정에서 그는 두 형제와 함께 자랐다. 1916년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예비사단으로 징집되었지만 시력이 나빠서 독일에 머물렀다. 다름슈타트와 베를린의 비행선 교체 사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 거기서 말 엉덩이를 닦는 일을 했다고 한다.[4] 이후 반전운동을 위해서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군인 평의회에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19년 초, 독일공산당의 독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주동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참하게 암살당하자, 우익 군사체제와 결탁한 사회민주당에 크게 실망하고 탈당을 한다.1918년 마르쿠제는 독일과 현대 독일 문학사를 전공으로, 철학과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에서 4학기,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4학기 동안 학업에 열중했다. 여기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독문학 박사학위를 땄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 한동안 베를린의 출판 업계에서 일했다. 1924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자이자 통계 학자 소피 베르트하임(Sophie Wertheim)과 만나 결혼을 했다. 1928년 마르쿠제는 엄청난 철학자가 독일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하이데거를 찾아가 그의 아래에서 수학한다. 후설의 후임이었던 하이데거의 조교가 된 마르쿠제는 한 때 자신이 추구해야 할 철학의 목표가 하이데거의 서구철학비판에 있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전체주의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는 이제 도처에서 발흥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비판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에서 헤겔로 방향을 바꿨다.
1932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일부로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 및 철학 수고》에 대한 초기 분석을 사회주의 잡지에 실었다. 그는 이시기에 청년 마르크스의 저술을 읽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가 나중에 저술에서 마르크스를 언급 할 때마다 항상 "소외된 노동"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해 말에 마르쿠제는 '헤겔전문가'로서 호르크하이머의 사회조사연구소의 비공식 연구원이 됐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나치 체제하에서 교수직을 절대 얻지 못하리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절망적인 심정에서 그나마 유대인을 받아주는 사회조사연구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르쿠제의 임용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취한 헤겔주의적 전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사실 아도르노보다 훨씬 먼저 부정적 사유의 힘을 현실화하고 이론화한 사람은 마르쿠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5]
2.2. 사회 연구소에서의 활동
독일의 권력이 히틀러에게 양도된 직후, 마르쿠제는 1933년 5월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갔다. 에드문트 후설의 추천으로 그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을 떠나 제네바에 있는 호르크하이머가 이끄는 사회조사연구소 지부에서 1년 동안 일했다. 1년후, 1934년 6월 말에 마르쿠제는 미국 이민 신청을 허가받았다.1934년 사회 연구소의 저널에서 마르쿠제는 「국가 전체 주의적 개념에서 자유주의와의 싸움」을 발표 했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다룬다. 하이데거는 그의 총장 연설에서 "과학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고 명시하였으며, 하이데거는 1933년 11 월 프라이부르크 학생 신문에서 "총통 자신과 그 자신은 현재와 미래의 독일 현실과 그 법칙이다."이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며 하이데거를 비판했다.[6]
마르쿠제는 뉴욕으로 이주한 사회조사연구소에서 비로소 온전한 회원이 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마르쿠제에게 자신 다음으로 2인자 역할을 맡겼다. 1937년 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철학 에세이와 비평 이론을 저술했다. 1940년에는 미국 시민이 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그가 계획한 《계몽의 변증법》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1941년 5월 로스엔젤레스 서부로 이주했다. 아도르노도 여기에 참여했지만,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의 권유에 따라 뉴욕에 남았고, 미국 최초의 정보 기관인 미국전략사무국(OSS)에 들어가서 미국정부를 도왔다.
2.3. 미국 첩보국에서의 근무
OSS에서 그는 파시즘을 패배시키기 위한 연구 및 분석 부서에서 일했다. 독일의 미래 군사 정부에 대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에 대한 배경 정보와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그룹이었다. 이 그룹에는 스튜어트 휴즈, 배링턴 무어, 폴 스위지, 칼 쇼스크, 프란츠 노이만 및 오토 키르히하이머 등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와 미국 인문학 및 사회 과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쿠제는 중부 유럽 섹션에서 노이만, 키르히하이머 등과 함께 정보분석가로서 일했으며, 에우게네 안데르손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정치 및 문화적 기원을 가진 40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근무했다. 마르쿠제의 작업 중 하나는 민주적인 독일의 건설에 대한 것이었다.이 시기 호르크하이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자신의 역할이 "미국 국민, 언론, 영화, 선전 등에서 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제안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46년에 설립된 OSS 후임 기관인 미국 국무부 산하 정보연구실에서도 근무했다. 1951년까지 유럽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지시에 따라 세계 공산주의위원회(CWC)의 심리전에 대한 과학적 결과를 분석했는데, 이 때의 관찰과 분석은 소련 뿐만이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조직 외부의 공산당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광범위한 연구에서 냉전 체제 시대의 공산주의 이해와 미국 정부 기관의 전략적 논의에 대해서 분석하면서 데탕트 정책을 옹호하고 있다.
훗날 마르쿠제는 CIA의 전신이었던 곳에서 일했다고 좌파들의 비난을 받는다. 마르쿠제는 이에 대해서, "나치체제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기 위해서" 그 일을 맡았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리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만일 내가 했던 일 때문에 비판자들이 나를 공격했다면, 당시 전쟁이 파시즘에 대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나는 내가 미국정부에 봉사했던 것에 전혀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1950년에 마르쿠제는 워싱턴정신의학교에서 일련의 강의를 한다. 미국정부를 도와 나치즘에 대항했던 긴 시기가 비로소 끝나고, 드디어 본업인 철학과 저술활동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 강연에서 마르쿠제는 에로스가 갖는 전복적 잠재력을 통해 비판이론이 견지했던 암울한 전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1955년에 출간한 『에로스와 문명』의 기초가 된다. 그는 친구의 미망인 잉게 노이만과 재혼하면서, 이 책 『에로스와 문명』을 4년 전 암으로 죽은 첫 번째 아내 소피 베르트하임에게 헌사했다.[7] 같은 해(1955)에 그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철학 및 정치 과학 분야의 첫 번째 교수직을 받았다. 1964년에는 그 유명한 『일차원적 인간』을 출간하고,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것 외에도 그는 1965년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2.4. 신좌파의 아버지
1968년, 68혁명이 벌어지자 마르쿠제의 책은 신좌파 학생들에게 어마무시한 인기를 얻었다. 그의 책 《구조와 사회의 추진력》, 《이성과 혁명》, 《일차원적 인간》은 학생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르쿠제는 베트남 전쟁 및 학생 운동에 대한 그의 성명을 통해, 학생운동의 영웅이라고 불리며 일순간에 락스타와 같은 환호를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마르쿠제가 왔다!"는 소리가 들리면 곧 주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면서, 사람들이 길을 내주기 위해 양쪽으로 갈라섰다. 학생들은 숨을 멈추고 그를 경외감에 차서 응시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비로소 그곳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리면서 북적거리고 시끄러워졌다.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부”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국제 해방 운동을 다루면서, 베를린, 파리, 런던, 로마의 학생들에게 강의와 토론을 했으며, 버클리,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뉴욕, 파리에서 혁명을 원하는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영감을 얻어 갔다. 그는 신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파리의 학생운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위 "3M"이라 불리는, "Marx, Mao, Marcuse"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을 정도였다.이 시기 아도르노가 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도 68운동의 물결에 휩싸이고 있었다. 아도르노는 권위주의적 대학 체계가 바뀌어야 된다고는 생각했지만, 학생들이 교원들에게 자아비판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는 것은 또다른 권위주의적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생들과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급기야 아도르노는 연구소를 점거한 시위대를 내보내기 위해서 경찰을 부르는 강수를 뒀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학생들의 강한 반발만 불러왔을 뿐이었다. 경찰을 부른 것에 실망한 마르쿠제는 "우리의 옛날 연구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아도르노를 비난했으며, 아도르노는 "우리 사이의 깊은 차이"를 언급했다. 결국 아도르노는 그를 비난하기 위해 윗옷을 벗은 여학생들에게 조롱을 받고는 충격을 받아 강의를 중단하는 사건을 겪고 만다. 이후 둘은 스위스에서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아도르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도르노의 사망 2주 후, 방송에서 마르쿠제는 차이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약화되지 않을 공통성과 연대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후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을 여전히 비난하기도 했지만, 학생들과의 분쟁에서 아도르노의 입장을 대변했던 하버마스와는 죽을 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시위 운동에서 그가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되자 미국 정치권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1965년 정치권의 압박으로 브랜다이스 대학과의 계약이 더 이상 갱신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 단원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 한동안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는 이러한 위험이 지속되자 1976년에 결혼한 세 번째 부인 에리카 쉬로버[8]와 함께 로스엔젤레스의 집을 떠나서 캘리포니아 북부에 숨어 살았다. 이런 와중에도 주지사 로날드 레이건은 선거 운동 도중 캘리포니아 대학에게 마르쿠제를 해고하라고 촉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2.5. 죽음
마르쿠제는 1979년 독일 슈타른베르크에 있는 하버마스를 방문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시신은 오스트리아에서 화장되었고 유골함은 그의 아내에 의해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유골은 묻히지 않고 잊혀졌고 2003년에야 유골의 소유권은 그녀의 아들 피터 마르쿠제와 그의 손자 해롤드에게 넘어갔다. 이후 지인들의 설득에 의해 그들은 결국 마르쿠제를 그의 고향 베를린에 묻기로 결정했다.장례식은 2003년 여름 베를린 미테에 있는 도로텐슈타트 묘지(Dorotheenstädtischer Friedhof)[9]에서 언론의 큰 관심을 받으며 열렸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저명한 인물들이 그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묘비는 건축 평론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브루노 플리에르가 디자인했다. 이 비석은 앞에서 보면 강단에 놓여 있는 책상 모양이고, 옆에서 보면 1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마르쿠제의 주요 작품인 《일차원적 인간》을 연상시킨다. 장례식 전날, 1967년 마르쿠제가 했던 유명한 강의 '유토피아의 종말'을 했던 장소인 베를린 자유대학교 강당에서는 이 대학 철학연구소의 주최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철학을 주제로 하는 행사가 열렸다.
3. 사상
3.1. 에로스와 문명
프로이트는 1930년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이란 행복과 성적 쾌락을 승화시켜 노동과 사회적 제약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 가지 원칙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리의 본능은 원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쾌락원칙'이다. 하지만 사회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고통이 없는 필요의 충족이란 불가능하다는 트라우마적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회는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동을 하도록 개인에게 개입한다. 이러한 사회의 억압을 프로이트는 '현실원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현실원칙에 의해서 문명이 발전하는 것이라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마르쿠제는 이 논의에서 더 나아가, 현실원칙의 억압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다. 마르쿠제는 인간 종이 살아남기 위해서 문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억압을 '기초억압'이라 하고, 탐욕스럽고 적대적으로 확장하는 필요 이상의 억압을 '과잉억압'이라고 구분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잉억압'은 합리성을 내세워 노동을 전문화시키는데, 노동의 전문화로 인해 인간은 단지 사회가 미리 설립해놓은 기능들만 수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는 쾌락원칙의 제약을 합리적인 법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조종당하며, 광고, 대중문화,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에게 이 법을 내면화시킨다. 이제 자본가를 위해 상품과 이윤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이미 계획된 기능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우리의 또다른 본성이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욕망하도록 정해진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이렇게 변질된 욕망은 본디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원 부족으로 인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으므로 '현실원칙의 억압'은 절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마르쿠제가 살았던 당시 미국은 더 이상 자원 부족으로 인한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생산성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마르쿠제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만 한다면 '억압 없는 문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결핍을 지적한 것이 초기에는 아마도 유효했겠지만, 이제 짐짓 결핍처럼 보이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일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뿐이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벗겨내고 보면 우리는 '과잉억압'에서 충분히 탈출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생각이었다. 물론 현실은 만만치 않다. 과거에 인간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우리의 노동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기술은 우리를 더 많이 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내도록 동원되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시간 대부분을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도덕적이고 정신적 상해는 매우 심각해서 우리의 집단적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현대 사회 속 개인의 허무적 경향과 그로 인한 부작용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과잉억압은 분명 이데올로기적 장치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효과가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는 그것이 그런 효과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조차 주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과잉억압(과잉노동)이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감하게 말해야 한다.
즉, 선진 산업화사회에서의 문제는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원의 공정하고 평등한 분배의 부재에 있다. 마르쿠제는 노동하는 날이 짧아지고 재화와 서비스의 개선된 분배, 혹은 노동의 더 나은 분화를 통해서 모든 사람의 욕구가 만족스럽게 충족됨으로써 그 결과 에로스적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힘든 노동의 폐지, 환경의 개량, 질병과 부패의 정복 등과 같이 과잉억압이 없는 문명은 생산과 노동에 있어서 충실한 만족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과잉억압이 없는 문명에서 노동은 단순한 도구가 되기보다 에로스(긍정적인 쾌락에너지)로 재구성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에서 에로스를 얻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몸이 하는 일, 곧 사회적 관계, 일, 문화 창조에 있어서도 노동이 놀이와 창조적 활동으로 여겨져 에로스화 된다.
마르쿠제는 단지 우리가 놀기만 하고 일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예측되는 결핍을 적절하게 충족시켜줄 정도로만 필요하고, 그래서 그런 노동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그 이외의 과잉노동이 불필요한 것이라는 게 마르쿠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해하기 쉽게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마르쿠제의 의도는 워라벨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억압이 없는 사회에서의 '적절한 노동'은, 자기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3.2. 일차원적 인간
선진산업사회에서는 물질적 번영이 점차 확산되어,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로 지목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없어진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렇진 않을지 모른다. '배고픔과 비참함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종속과 타락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 체계에 의해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구원에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노동자와 그의 고용주가 동일한 TV프로그램을 보고 동일한 휴양지를 방문한다는 것이 계급의 소멸을 말한다기보다는, 체제의 유지를 위한 욕구가 그 체제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은 노동자가 억압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보다 더 많은 노동을 통하여 그의 고용주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어렵게 획득한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노동의 양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점은 고용주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은 욕망의 양에 비례하는데, 그런 욕망을 대중문화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과잉노동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문화가 광고하는 상품에 대한, 노동자들의 '일차원적'인 욕망 추구가 광범위하게 퍼진다. 그 결과, 부유한 서구의 선진산업사회가 제공하는 자동차, 세탁기, 구김 없는 옷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품에 집착하여 정작 자신의 진정한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정신적으로는 매우 빈곤한 상태가 된다. 이러한 일차원적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비재로 착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상품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자동차, 하이파이 스테레오세트, 복층 집과 부엌용품 등에서 찾는다."[10]
일차원적 사회에서 인간은 진정한 개인이 될 자유가 없다. 마르쿠제의 주장에 의하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억압하는 사회의 특수한 이해관계 속에서 개인 각자에게 부여된 '거짓 욕구'만을 붙잡고 산다. 광고와 대중문화는 그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뇌하고 조작한다. 우리는 TV, 영화, 인터넷 등등에서 모두 예외없이 이러한 상품 소비주의에 묶여있다. 상품은 거짓에 익숙해져버린 우리의 허위의식을 부풀리고, 상품에 담긴 주입식 의미들은 어느새 우리에게 삶의 방식으로 고정된다. 우리는 자유로워 보여도 사실 어디서나 족쇄를 차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현란한 광고에 우리가 계속해서 속아주는 한,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자유는 결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쿠제는 일찍이 『에로스와 문명』에서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혁명을 이끌어내는 주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9년 뒤 『일차원적 인간』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더 이상 전복적이지 않고 도리어 현존 억압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서술한다. 즉, 일차원적 사회에서 성적 쾌락은 이제 억압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이 사회에서 섹스와 성적 노출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성적 매력 마저도 또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구속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사무실의 섹시한 판매 여성들, 잘생기고 신체 건강한 젊은 관리인과 매장지배인은 시장에서 거래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품들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면 심지어 지위가 별로 높지 않은 직종의 경력조차 수월해진다."[11]
그러므로 마르쿠제는 이제 오히려 우리가 성적 만족으로서의 섹스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몸과 생활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에로스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즉, 성적에너지(에로스)는 단순한 섹스에서의 쾌락으로만 드러나서는 안 되며, 좀 더 사회적이고 도덕적이며 미학적인 사용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승화'는 억압사회가 개인에게 포기하라고 강요한 것을 의식하게 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해방을 향한 욕구도 유지해준다. 그는 여기서 마음속에 예술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일차원적 사회에서 예술과 같은 승화 활동은 본래 현존 질서에 저항하는 낯선 것이다. 이 예술은 현실을 비난하고 반박한다. 하지만 예술은 현실의 거짓과 왜곡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저항의 역할을 할 뿐, 기술사회에서는 지배적인 체제 속으로 다시금 포섭된다. 이러한 예술은 상업화되어 상품으로 팔리며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는 대중문화의 역할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제에 따르면 결국 해방의 단초는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 예술은 역설적으로 "억압에 고개를 수그리면서도 억압을 좌절시킬 수도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 질서를 교란시켜서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마르쿠제는 그것이 사회에 대한 '부정', 즉 '저항'에 있다고 보았다. 예술은 억압과 지배의 형식들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그러한 힘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저항예술을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부(Great Refusal)"[12]라고 부른다. 그는 이 거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마르쿠제는 이 용어를 베트남전쟁에 대한 거부, 핵무기철폐운동, 신좌파와 히피문화, 학생운동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이런 저항은 "게임의 법칙을 위반하는 기본적인 힘이며 법칙위반을 통해서 게임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폭로한다."[13] 그리고 마르쿠제는 "사람들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며 여기에 희망을 건다.
4. 주류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차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마르쿠제의 견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과 혁신 과정이자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변혁시키기 위한 급진적 유토피아의 기획이었다. 따라서 마르쿠제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많은 점을 공유하더라도, 그 학파의 대다수 구성원은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폐기하거나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72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72
비판 이론이 본래 정신을 유지하려면 연구소 비판론자의 주장처럼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물신화를 경계해야 했다. 연구소의 급진적인 젊은 세대는 이런 변화가 반영된 이데올로기에 실망했다. 호르크하이머와 다른 사람들이 1949년대에 강력하게 투쟁한 냉전 시대의 정신이 1950~1960년대에 점차 내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함에 따라 여전히 좌파로 의연하게 남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르쿠제와 점차 갈라섰다. 사회적인 유대 관계는 유지했기에 이런 불화가 대외적으로 노출되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불일치는 첨예했다. 마르쿠제는 국가원수와 동석할 정도인 미구 주요 대학의 총장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을 얻었다. 사실 마르쿠제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계는 대외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노명우 옮김, 동녁 출판사, 2021, p.497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가 대부분은 유토피아적 옳은 사회나 대안에 대해 미리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지 현재 사회의 나쁜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나쁜 것을 예상하고 폭로하는 것을 통해서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부정'을 통해서만 제대로된 학문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제시한 칼 마르크스를 비판했었던 것이었다.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노명우 옮김, 동녁 출판사, 2021, p.497
이에 반해 마르쿠제는 프로이트 이론의 수용과 변형을 통해, 긍정의 유토피아 이론을 전개한다. 마르쿠제는 비판 이론의 추진력이, 잘못된 현실을 공격하면서 그것을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하려는 힘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 이론은 단순한 비판이나 부정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현실 초월적인 이상적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유토피아의 제시는 정치적 이론과 실천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는 게 마르쿠제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주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마르쿠제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비판 이론"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마르쿠제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이의 이론적 갈등을 점점 더 첨예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갈라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5. 어록
기억의 정신분석적 해방은 그 억압된 개인의 합리성을 터뜨린다. 인식이 재인식에게 길을 내주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잊혀진 이미지들과 충동들은 이성이 거부하는 그 사실을 말하기 시작한다.
《에로스와 문명》[14]
《에로스와 문명》[14]
그 소통 수단들, 오락과 정보 산업의 저항할 수 없는 생산물은 소비자를 생산자에게, 그리고 생산자를 통해 사회 시스템 전체에 결합시키는 어떤 지적이고 정서적 반응들, 미리 정해진 태도와 습관들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그 생산품들은 세뇌하고 조종한다. 그들은 그것의 거짓말에 끄떡없는 잘못된 의식을 촉진시킨다... 그리하여 일차원적인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 생겨난다.
《일차원적 인간》 中..[15]
《일차원적 인간》 中..[15]
"주인을 자유롭게 선출한다고 주인이나 노예가 폐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차원적 인간》 中..[16]
《일차원적 인간》 中..[16]
이 단계에서는 다음 질문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그보다는 다음 질문이 유효하다 :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자기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즉,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노예상태를 영속화하는 착취적 기제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자신의 열망과 만족을 통해, 재생산하지 않고.'
《해방에 관한 시론(An Essay on Liberation)》 중에서..[17]
《해방에 관한 시론(An Essay on Liberation)》 중에서..[17]
6. 여담
-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출신 에리히 프롬과 마르쿠제의 논쟁은 1955년 출판한 《에로스와 문명》이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마르쿠제는 이 책에서 프롬이 인간 성격의 본능적 기반에 거리를 두고 대신 "긍정적인 사고"를 채택했다고 비판한다. 논쟁은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기반으로 한다. 첫째,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를 해석하는가? 둘째, 정신 분석 이론을 역사와 사회에 적용할 때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마르쿠제는 에리히 프롬이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이론, 특히 섹슈얼리티와 죽음 충동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했지만, 프롬의 전기 작가 다니엘 버스튼은 프롬이 자신의 생각의 어떤 요소가 지속적으로 중요하고 어떤 요소가 그의 시대와 문화에 영향을 받았는지 구별하기 위해 프로이트를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배치했다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마르쿠제가 그의 급진적인 해석으로 인해 프로이트의 사상을 오해했다고 비난한다. 프로이트는 부르주아지의 전형적인 대표자이자 사회주의의 반대자였는데, 마르쿠제는 그를 혁명적 사상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르쿠제는 "비판 이론의 영역에서 프롬의 추방"을 말했고, 이 사건 이후 마르쿠제와 프롬 사이의 우정은 끝나게 된다.
-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에 의구심을 가졌으며 소련 마르크스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비(非)마르크스주의, 반(反)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마르쿠제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때로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 비판의 칼날은 주로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나 소련의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것이었지,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18]
[1]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스위스 → 무국적자(난민)[2]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미국에 있었지만 미국 국적은 없는 난민 신분이었다.[3]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개념과 혁명(실천)을 버리고, 인간 소외에 관한 끊임없는 '이론적 비판'만이 유효하다는 것이 비판 이론이다. 즉, 비판 이론에서는 실천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판 이론은 루카치한테, '실천없는 이론이 과연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마르쿠제는 초기에 비판이론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본래 실천적인 면에 관심이 많았고 이런 점은 주류 비판이론가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과 갈라지는 계기가 된다.[4] 손자 헤럴드가 흥미롭게 묘사한 발대로 마르쿠제는 참전 경험이 전혀 없고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이라 베를린의 보병부대가 사용할 "말 엉덩이를 닦는 일을 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82)[5]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18~219[6] 마르쿠제는 전쟁이 끝난 1947년 독일을 방문하여 하이데거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하이데거에게 나치를 지지했던 과거의 발언을 철회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요청했지만, 하이데거는 자신이 1934년경 나치와 완전히 연을 끊었으며 이후 강연에서는 나치를 비판했다고 말하여, 자신의 발언철회를 거부했다. 이는 마르쿠제를 분개하게 만들었다. 이후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와 연을 끊는다.[7] 마르쿠제는 아내의 죽음 이후, 친구 프란츠 노이만(Franz Leopold Neumann)과 그의 아내 잉게 노이만의 집에 얹혀살았다. 노이만이 1954년 스위스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하자, 마르쿠제는 친구의 미망인 잉게 노이만과 1년 뒤 재혼했다.[8] 두 번째 부인 잉게가 1973년에 사망한 후 마르쿠제는 197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에리카 쉬로버(Erica Sherover, 1938–1988)와 결혼했다.[9] 마르쿠제가 묻힌 도로텐슈타트 묘지는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독일의 근현대사를 장식했던 거물급 인사들의 안식처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몇명만 언급해 봐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루돌프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요하네스 라우, 요하네스 베허,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위르겐 쿠친스키, 크리스티나 볼프, 한스 아이슬러 등이 있다.[10]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34[11]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40[12] 이 단어는 초현실주의 미술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 빌려온 용어이다.[13]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50[14] “The psychoanalytic liberation of memory explodes the rationality of the repressed individual. As cognition gives way to re-cognition, the forbidden images and impulses of childhood begin to tell the truth that reason denies.”[15] “The means of communication, the irresistible output of the entertainment and information industry carry with them prescribed attitudes and habits, certain intellectual and emotional reactions which bind the consumers to the producers and, through the latter to the whole social system. The products indoctrinate and manipulate; they promote a false consciousness which is immune against its falsehood...Thus emerges a pattern of one-dimensional thought and behavior.”[16] “Free election of masters does not abolish the masters or the slaves.”[17] “At this stage, the question is no longer: how can the individual satisfy his own needs without hurting others, but rather: how can he satisfy his needs without hurting himself, without reproducing, through his aspirations and satisfactions, his dependence on an exploitative apparatus which, in satisfying his needs, perpetuates his servitude?"[18] 사회 비판과 대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71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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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스위스 → 무국적자(난민)[2]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미국에 있었지만 미국 국적은 없는 난민 신분이었다.[3]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개념과 혁명(실천)을 버리고, 인간 소외에 관한 끊임없는 '이론적 비판'만이 유효하다는 것이 비판 이론이다. 즉, 비판 이론에서는 실천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판 이론은 루카치한테, '실천없는 이론이 과연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마르쿠제는 초기에 비판이론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본래 실천적인 면에 관심이 많았고 이런 점은 주류 비판이론가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과 갈라지는 계기가 된다.[4] 손자 헤럴드가 흥미롭게 묘사한 발대로 마르쿠제는 참전 경험이 전혀 없고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이라 베를린의 보병부대가 사용할 "말 엉덩이를 닦는 일을 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82)[5]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18~219[6] 마르쿠제는 전쟁이 끝난 1947년 독일을 방문하여 하이데거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하이데거에게 나치를 지지했던 과거의 발언을 철회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요청했지만, 하이데거는 자신이 1934년경 나치와 완전히 연을 끊었으며 이후 강연에서는 나치를 비판했다고 말하여, 자신의 발언철회를 거부했다. 이는 마르쿠제를 분개하게 만들었다. 이후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와 연을 끊는다.[7] 마르쿠제는 아내의 죽음 이후, 친구 프란츠 노이만(Franz Leopold Neumann)과 그의 아내 잉게 노이만의 집에 얹혀살았다. 노이만이 1954년 스위스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하자, 마르쿠제는 친구의 미망인 잉게 노이만과 1년 뒤 재혼했다.[8] 두 번째 부인 잉게가 1973년에 사망한 후 마르쿠제는 197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에리카 쉬로버(Erica Sherover, 1938–1988)와 결혼했다.[9] 마르쿠제가 묻힌 도로텐슈타트 묘지는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독일의 근현대사를 장식했던 거물급 인사들의 안식처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몇명만 언급해 봐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루돌프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요하네스 라우, 요하네스 베허,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위르겐 쿠친스키, 크리스티나 볼프, 한스 아이슬러 등이 있다.[10]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34[11]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40[12] 이 단어는 초현실주의 미술이론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 빌려온 용어이다.[13]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50[14] “The psychoanalytic liberation of memory explodes the rationality of the repressed individual. As cognition gives way to re-cognition, the forbidden images and impulses of childhood begin to tell the truth that reason denies.”[15] “The means of communication, the irresistible output of the entertainment and information industry carry with them prescribed attitudes and habits, certain intellectual and emotional reactions which bind the consumers to the producers and, through the latter to the whole social system. The products indoctrinate and manipulate; they promote a false consciousness which is immune against its falsehood...Thus emerges a pattern of one-dimensional thought and behavior.”[16] “Free election of masters does not abolish the masters or the slaves.”[17] “At this stage, the question is no longer: how can the individual satisfy his own needs without hurting others, but rather: how can he satisfy his needs without hurting himself, without reproducing, through his aspirations and satisfactions, his dependence on an exploitative apparatus which, in satisfying his needs, perpetuates his servitude?"[18] 사회 비판과 대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제들』 도서출판 옹기장이(2010)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