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8:46:12

아놀드 토인비


컴패니언 오브 아너 수훈자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 (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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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전체 영어 명칭은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이지만
영연방의 정부(내각), 관보(런던 가제트), 왕실 등 공공기관 웹사이트에서 약칭 Companion of Honour로 표기,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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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lack><colcolor=#fff> 아놀드 J. 토인비
Arnold J. Toynbee
CH FBA
파일:Arnold_J._Toynbee_Anefo.jpg
성명 아놀드 조지프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89년 4월 14일
잉글랜드 런던
사망 1975년 10월 22일 (향년 86세)
잉글랜드 요크
직업 역사학자, 교수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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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white> 학력 <colbgcolor=#fff,#1f2023>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컬리지
(서양고전학) (1911년)
소속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컬리지 강사
킹스 칼리지 런던 교수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교수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
배우자 로잘린드 머리 (1913년 결혼 – 1946년 이혼)
베로니카 M. 볼터 (1946년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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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이론4. 대중매체에서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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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는 영국역사학자이다. 대표 저서로는 28개 문명의 흥망성쇠와 독자적인 문명사관을 담은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가 있다.

2. 생애

1889년 4월 14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조지프 토인비(1815년 12월 30일 ~ 1866년 7월 7일)는 이과(耳科)의사였으며, 삼촌은 19세기 경제학자인 아널드 토인비(1852년 8월 23일 ~ 1883년 3월 9일)였다. 그는 학창시절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베일리얼 컬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그리스에 있는 아테네 고고학원으로 가서 공부한 경험도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고대사 학위를 딴 뒤 외무부에서 근무했으며, 1919년에는 런던 대학교에서 동로마부역사학 및 현대 그리스어 교수로 재직했다.

터키 독립전쟁 당시 《가디언》지의 특파원으로 파견되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와 터키의 서부문제: 문명의 접촉에 관한 연구(The Western Question in Greece and Turkey: A Study in the Contact of Civilisations)》을 저술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정부를 비난하여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1924년에 런던 대학의 교수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그리스/비잔틴 역사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925년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국제역사학 교수와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의 이사를 역임했다. 1934년에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를 저술하기 시작하여 27년에 거쳐 12편을 완성하였다. 역사의 연구의 창작 동기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한 서유럽 문명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다.

1975년 10월 22일에 잉글랜드요크에서 사망했다.

3. 이론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에서 그는 문명이 탄생-성장-쇠퇴-붕괴의 과정을 거쳐 순환한다는 역사 순환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단순한 순환설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연구 제3권에서 말하기를 "이와같이 우리는 문명과정을 분석하면서 주기적 반복운동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반복운동은 문명 과정 자체가 실제로 순환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소운동의의 주기성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오히려 우리는 소운동이 일으키는 대운동은 순환이 아니라, 전진 운동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명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고차원 문명과 저차원 문명 간의 '도전과 응전',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와 외적 프롤레타리아트', '창조적 소수와 대중의 모방' 등으로 분석했으며,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아시아 문명의 역사에도 주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서유럽 문명에 위기가 도래한 상황에서 아시아 문명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주장하였다. 인류 문명사를 다각도로 통찰한 토인비의 이론은 기존 서구 중심의 전통사관에서 탈피한 독자적이고 새로운 사관으로 평가받으며, 전후 역사가들에게 일종의 패러다임과 비전을 제시했다.

토인비의 이론이 학계에 미친 영향은 컸지만 학계에서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박도 많았다. 결국 그의 이론은 1960년대 후로 잊혔다. 하지만 그의 고전 연구는 저명한 고전 역사가인 투키디데스헤로도토스와도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도 그의 작품은 고전 역사가들에 의해 많이 인용된다.

4. 대중매체에서

TV 시리즈인 영 인디아나 존스에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와 함께 베르사유 조약의 협상 대표로 등장한다.

5. 기타

1987년에 인류에 학문적 공헌을 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토인비 상이 만들어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토인비는 러시아를 비서방 문명으로 간주했고, 러시아 혁명을 서유럽을 위협하는 요소로 보았다. 하지만 1952년 이후로 생각을 바꾸어 냉전서유럽의 종교적인 기독교적 유산과 러시아의 물질적인 마르크스주의 간의 대립으로 보았다. 이 주장은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 기록되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시오니즘유대인 국가를 지지했다. 하지만 1922년에 런던을 방문한 팔레스타인 대표의 영향을 받아 견해가 점점 바뀌었고, 1950년대에는 핵 전쟁 발발을 우려하여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1961년에는 이스라엘 대사와의 토론에서 이스라엘이 핵전쟁 발발을 막기 위한 전세계의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외 그의 저서중 하나인 「역사의 연구」의 61년 초판본에서 한국을 일본 문명권에 포함시켰다가 비난이 빗발치자 72년 새로 펴낸 축약본에선 한국문명을 별도 문명 단위로 설정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을 중국의 위성문명으로 분류하는 등 여러가지로 동양사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 그러나 말년에 한국의 효 사상과 경로 사상을 듣고 감격하여 '인류에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고 극찬했다는 설이 있다.[2] # #

아놀드 토인비에 관련하여 미국 도심에는 토인비 타일이라는 기이한 사회현상이 존재한다. 해당 문서 참고.
[1]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모델이 된 사람이다.[2] 그의 이러한 반응은 당시 한국이 서구 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점도 반영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