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홍콩 총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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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행정장관 |
제28대 홍콩총독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 彭定康 | Christopher Francis Patten |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944년 5월 12일 ([age(1944-05-12)]세) |
잉글랜드 랭커셔주 클리블리스 | |
학력 | 일링 세인트 베네딕트 학교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사학 / 학사) |
재임기간 | 제8대 해외개발부장관 |
1986년 9월 10일 ~ 1989년 7월 24일 | |
제10대 환경부장관 | |
1989년 7월 24일 ~ 1990년 11월 28일 | |
제28대 홍콩총독 | |
1992년 7월 19일 ~ 1997년 6월 30일 | |
랭카스터 영지 담당 장관 | |
1990년 11월 28일 ~ 1992년 5월 10일 | |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 |
2003년 9월 20일 ~ 2024년 7월 31일 | |
경력 | 보수당 의장 |
소속 정당 | |
지역구 | 바스 |
의원 선수 | 3 |
의원 대수 | 48, 49, 50 |
[clearfix]
1. 개요
I, Christopher Francis Patten, swear that I will well and truly serve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in the office of governor of Hong Kong so help me god
나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은 선서합니다. 홍콩 총독으로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를 진심으로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1992년 7월 19일 영국령 홍콩 총독 취임식 선서 중
나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은 선서합니다. 홍콩 총독으로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를 진심으로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1992년 7월 19일 영국령 홍콩 총독 취임식 선서 중
It has been the greatest honour and privilege of my life to share your home for 5 years and to have some responsibility for your future. Now Hong Kong people are to run Hong Kong. That is the promise and that is the unshakable destiny.
5년 동안 홍콩에서 함께 지내고 홍콩의 미래에 약간의 책임을 가지는 것은 제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자 특권이었습니다. 이제 홍콩인들이 직접 홍콩을 운영할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이며 흔들리지 않는 운명입니다.
1997년 6월 30일 홍콩 반환식 행사 중
영국 및 홍콩의 정치인 겸 교육인. 1944년생으로 영국령 홍콩 제28대 총독이자 마지막 총독이었다. 후술되어있듯 지금도 홍콩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사다.5년 동안 홍콩에서 함께 지내고 홍콩의 미래에 약간의 책임을 가지는 것은 제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자 특권이었습니다. 이제 홍콩인들이 직접 홍콩을 운영할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이며 흔들리지 않는 운명입니다.
1997년 6월 30일 홍콩 반환식 행사 중
2. 생애
2.1. 영국의 정치인
원래는 영국 보수당의 하원의원이자 유력 정치인 중 한 명으로[1], 1980년대 마거릿 대처 내각과 존 메이저 내각에서 해외개발부 장관(Minister for Overseas Development), 환경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Environment), 랭캐스터 영지 담당 장관(Chancellor of the Duchy of Lancaster) 겸 보수당 의장 등을 지냈다. 1992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와 재집권을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지역구에서 자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2][3]당시 영국 총리였던 존 메이저는 이에 대한 보상의 일환으로 패튼에게 홍콩 총독 자리를 제안했으며, 패튼은 이를 수락해 1992년 7월에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의 후임으로 부임했다.[4]
2.2. 홍콩 총독
1997년 6월 30일, 홍콩 예빈부에서 개최된 하기식에서 하기된 유니언 잭을 왕립 홍콩 경찰 의장대장으로부터 건내받는 크리스 패튼 홍콩 총독 |
이미 중영공동선언 때문에, 특별한 돌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패튼은 1997년 7월 1일, 즉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재직하는 '마지막 총독'이 될 예정이었다. 또한 패튼은 부임 당시 홍콩 현지에서 많이 쓰이는 광둥어를 할 줄 몰랐고[5], 보수당에서 총선에서 낙선한 그에게 챙겨준 자리일 뿐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단순히 현상유지만 하다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는 반대로, 그는 자신의 임기 후에도 홍콩의 장래에 막대한 영향을 줄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패튼은 홍콩에 부임한 뒤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94년에 있었던 선거 개혁이었다. 당시 홍콩인들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총독을 현지인들이 선출하거나 영국에서 임명하더라도 실권은 현지인 총리가 갖도록 했던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홍콩은 반환되는 날까지 영국인 총독이 여전히 전권을 휘둘렀다. 선거제도도 머레이 맥클레호스 총독이 밀어붙여 1982년에서야 도입되었고, 그마저도 국회 격인 입법국 의원들은 간선제로 선출했으며, 직선제인 구의회 의원도 1/3 가량을 총독이 임명했다. 1991년에 입법국 의원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나 여전히 제한된 선거권자만이 선출하는 직능대표의원들이 많았다.
1993년에 패튼은 겸임하던 입법국 의장직을 존 조셉 스웨인 의원에게 넘겨줬고, 1994년에 선거개혁을 실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소선거구제 도입
- 투표연령을 만 18세로 하향
- 임명직 구의원 폐지
- 직능대표의원 선거권자 범위 확대
이러한 조치들은 1994년 구의회 선거부터 1995년 입법국 선거에 적용되었다. 홍콩 반환 후 선거권 확대로 민심을 얻으려 계획하다가 영국에게 선수를 빼앗긴 중국은 당연히 발끈했으며, "홍콩이 반환되면 이 조치들을 무효화할 것"이라는 엄포를 놨다.[6] 결국 홍콩 반환 후 전인대는 1994년 선거개혁에 따라 선출된 기존의 입법국을 해산하고 새로운 입법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홍콩 반환 후 기존의 입법국은 해산되었고[7], 중국 대륙에서 선출된 임시입법회를 거쳐 1998년 선거로 선출된 홍콩 입법회가 구성된다.
2.3. 현재
영국령 홍콩 총독직을 이임한 이후로는 남작 작위[8]를 받아 영국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2011년에서 2014년까지 BBC Trust 이사장, 2003년 9월 20일부터 종신직인 옥스퍼드 대학교의 총장[9]으로 [age(2003-09-20)]년째 재직중이다.[10]2014년 홍콩 우산 시위와 관련해서 패튼 전 총독의 행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가 총독으로 재직할 당시에 그의 임무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어도 홍콩에서 일국양제가 제대로 적용될 수 있도록 각종 안전책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11]
총독직을 마친 이후에도 그는 주기적으로 홍콩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많은 홍콩인들이 그를 반가워했는데, 유튜브를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최근에는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와 관련하여 해당 시위를 촉발한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고, 해당 법안을 철회하는데 국제사회가 협력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홍콩 국가안전법에 대해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대 중국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홍콩 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홍콩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현실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홍콩에서의 민주화 요구에 관한 대내외의 지지를 약화, 분산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2020년 7월, 중국이 홍콩 보안법을 도입한 것을 두고 "홍콩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으로 망명한 네이선 로 전 데모시스토당 주석과 회담했다.
2021년 4월, 홍콩 법원이 홍콩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지한 빈과일보의 사주 지미 라이에게 징역 14개월 형을 선고하자 "중국공산당은 누군가를 투옥시켜서 전체주의적이고 부패한 정권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비판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1974.2[12] | 제46회 영국 총선 | 램버스 중부 | | 8,585 (28.4%) | 낙선 (2위) | |
1979 | 제48회 영국 총선 | 바스 | 23,025 (46.4%) | 당선 (1위) | 초선 | |
1983 | 제49회 영국 총선 | 22,544 (47.1%) | 재선 | |||
1987 | 제50회 영국 총선 | 23,515 (45.4%) | 3선 | |||
1992 | 제51회 영국 총선 | 21,950 (41.8%) | 낙선 (2위) |
[1] 그는 총독을 역임한 많은 영국인들 중 유일한 정치인 출신이었다.[2] 영국은 의원내각제로 장관의 기본요건이 국회의원이다. 현직 총리도 지역구에서 낙선하면 그냥 민간인이 된다. 존 메이저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당선되었으면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에 임명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총리, 내무장관(Home Secretary), 외무장관과 더불어 영국 정부 최고의 요직(Great Offices of State)으로 손꼽히는 자리다.[3] 메이저가 마음만 먹었다면 패튼을 귀족원 의원으로 서임한 뒤 재무장관 자리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각에서도 핵심 요직인 재무장관을 자기 지역구에서 떨어진 사람으로 무리하게 임명하는 것은 이래저래 정치적 무리수가 될 수 있었다.[4] 당시 데이비드 윌슨이 친중 성향이 강한 것도 한 몫 했다.[5] 전임 총독들은 대부분 중국 정세에 밝은 외교관 또는 학자 출신이어서 광둥어와 중국어를 최소한 의사소통은 무리없이 가능할 정도로는 할 수 있었다. 반면 패튼은 이전까지 중국과는 관련이 없는 정치인 출신이라, 광둥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6] 중영공동선언에서는 '홍콩특별행정구는 행정관리권, 입법권, 독립된 사법권 및 최종심판권을 향유한다. 현행 법률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라는 부칙 조항이 있는데 영국은 '현행'을 반환시점인 1997년, 중국은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국은 공동선언 체결 이후 반환 직전까지 여러 민주주의 개혁을 처리해 놓고 떠났고, 중국은 이에 반발했다.[7] 이를 맡았던 사람이 후일 신민당 대표를 지낸 레기나 입. 이 과정에서 저항하던 민주파 우치와이 의원 등은 체포당했다.[8] Baron Patten of Barnes, 일대귀족이다.[9] 총장은 명예직이며 주로 명망이 높고 초당적인 명사들이 선임된다. 실제 권한은 선출직인 부총장(임기제)에게 있다.[10] 다만 옥스퍼드대 유색인종 학생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 동상의 철거 요구에 반대하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11]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상당부분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반환하는 순간부터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기도 했고.[12] 1974년 2월 28일의 총선. 1974년에는 총선이 2번 있었고 10월 10일에 47회 총선이 다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