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9 22:27:22

백기환

파일:독립장 약장.png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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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기환.jpg
성명 백기환(白基煥)
생몰 1883년 7월 29일 ~ 1972년 11월 22일
출생지 평안도 평양부 내천면 신양리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백기환은 1883년 7월 29일 평양시 신양리에서 백낙흥(白樂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 평양숭실학교 2학년을 마치고 평양 군영에서 1년동안 하사관 교육을 받았다. 그 후 1904년에 미주에 건너가 캐나다 크리스트 대학 건축학교 3년을 수강했고, 귀국 후 함경 남·북도에서 선교사 및 건축 기술자로 15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 삼원포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민족교육을 전수받았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백기환은 1920년 1월에 동지 정찬조, 고창희 등과 함께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평양리 신양리의 고창희 집에서 평양 수정에 사는 김승호(金承鎬)와 함정에 사는 오원선(吳元善)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각 1천원씩 청구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그 후 1920년 5월 초순에 백기환이 직접 이것을 가지고 오원선의 집에 가서 그를 설득해 자금을 얻어냈고, 뒤이어 김승호 역시 설득해 독립운동자금을 얻어냈다.

이후 세 사람은 유하현 대황구에서 이상룡(李相龍)이 조직한 서로군정서의 요원 이근수(李根洙)의 권유에 따라 평양 이향리에 사는 강성리(康聖利)와 함께 폭발물을 사용하여 평양에 있는 평남도청 및 평양경찰서 등을 폭파하고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정찬조는 강성리가 보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 1개를 받은 후 평양 순영리에 있는 백기환의 집에 가지고 가서 다이너마이트 일부를 실험해본 후 그것을 헛간 천정에 감춰뒀다. 또한 백기환은 정찬조, 고창희, 이학근, 김기일 등과 함께 1920년 5월 8일 밤 평양 죽전리의 김남호(金南鎬)의 집에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을 얻어내려 했지만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독립신문>과 선전 문서들을 각처에 배부했다.

그러나 5월 10일, 백기환은 고창희의 집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도청, 경찰서 등 폭바 방법을 모의하다가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후 그해 10월 2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그의 아내 강해숙은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가 재판관이 징역 10년을 선고하자 "조선 사람이 조선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고함을 치며 자갈을 던져 판사에게 상처를 입혀 법정 모독죄로 2년형을 받았다. 그 후 백기환은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21년 11월 26일 서울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징역 6년 9개월로 감형되었다가 1927년 4월 13일 가출옥 형식으로 풀려났다.

이후 백기환은 1944년 평안남도 대동군 신궁방화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피신했고, 1945년 2월 평양의 일본군사시설 파괴를 모의했으나 다시 발각되어 피신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백기완의 아들 백도선씨의 회고에 따르면, 백기환은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혁명가'라는 칭호를 받고 건설상 자리를 맡으며 한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쪽에서 김구가 "어서 내려오라"는 내용의 밀서를 보내오자 안 그래도 기독교인으로서 공산주의 사상과 맞지 않았던 백기환은 "가겠다"라고 적어서 밀서를 내려보냈다. 그런데 그 밀사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고, 백기환은 즉시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김일성의 배려로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언젠가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그는 1949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내려갔고, 김구를 위해 일하려 했지만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자 정치와 담을 쌓고 지냈다고 한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72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 향년 89세.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백기환의 아들 백도선씨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는 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인생화보'-1,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인생화보'-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