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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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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오희선(吳羲善)·우단우(于丹宇·禹丹宇)
본관 해주 오씨[1]
출생 1889년 12월 8일[2]
경기도 죽산도호부 원삼면 죽능리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3]
사망 1931년 5월 6일[4]
서대문 형무소
서훈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2.8 독립 선언2.3. 대한민국 임시정부2.4. 국내에서의 활동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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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오의선은 1889년 12월 8일 경기도 죽산도호부 원삼면(현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서 부친 오인묵(吳寅默)과 모친 능성 구씨 사이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주 오씨 족보>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우며 남달리 영민한 두뇌와 학습능력을 가져 근동에서 신동으로 소문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초년기에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다. <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 따르면 오의선은 8살 때 종로청년학원(鐘路靑年學院)에 들어가 4년을 수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당대 기록은 없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이 작성한 <조선인개황 1918.6.1~1920.6.30>에 따르면, 오의선은 21세 때 서울의 사립 대동법률전문학교(大東法律專門學校)를 졸업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에 재학했다고 한다. 또한 <독립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그는 25세 때 도쿄의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2년만에 중퇴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한다면, 오의선은 1914년경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고 1916년에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에 유학한 것이 된다. 다만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입학과 관련된 자료는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가 작성한 <왜정인물 3권>을 근거로 한 것 이외에는 없다.

2.2. 2.8 독립 선언

1918년 겨울, 재일 조선유학생들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그들은 학우회(學友會) 주최로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로 정하고 12월 하순 동경의 YMCA 강당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각자의 의사를 확인한 뒤 산회했다. 이후 김도연, 백관수, 송계백, 최근우(崔謹愚) 등이 추진위원을 맡아 한달간 준비한 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YMCA 강당에서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이때 오의선은 각 대학에 흩어져 있는 유학생들에게 대회장까지 나오도록 연락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열기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그는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아 체포되지 않았고,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한다.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4월, 오의선은 경기도 대표로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4월 30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된 제4차 회의에서, 그는 김동형, 이춘숙 등과 함께 의정원 세칙제정(細則制定)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의정원에 올라온 법률을 심사하는 청원법률 심사위원도 함께 맡았다.

또한 그는 홍진, 김동형 등과 함께 재원 마련에 대한 구체적 안을 발표했다. 그는 내외에 공채(公債)를 발부하고 국민을 상대로 의연금을 걷고 세금을 징수하자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 재정통일기관을 설치하며 이 기관에서 각지에 특파원을 파송하여 수합하자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의선을 비롯한 여러 의원들이 내놓은 안건을 종합, 첨삭한 뒤 1920년 3월에 재정방침을 발표했다.

한편, 오의선은 1919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의 상임의원으로 발탁되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전시 및 천재지변에 의해 교민 중 사상자가 발생하면 이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고 1921년경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박용만의 추종자인 김복(金復)을 만나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설립해 이 은행의 주식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내놓고 이것을 매개로 삼아 최윤동(崔胤東) 등 동지들을 포섭해 국내로 파견시켜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임무를 맡겼다.

최윤동은 고향인 대구로 가 자신의 집을 본거지로 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포섭해 군자금 모금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 인사동에 살고 있는 이수영(李遂榮)을 동지로 포섭하여 노기용 등과 전북 정읍의 보천교(普天敎) 본부를 습격해 군자금을 모금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고종사촌 동생인 백동희(白東熙)를 동지로 포섭해 대구의 쌀 중매상을 습격해 군자금을 수합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울러 최윤동은 김응섭의 부하 김의삼(金義三)이 가져온 폭탄 3개를 숨겨 놓았다가 김지섭(金祉燮)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11월 27일, 최윤동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그의 배후에 오의선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2.4. 국내에서의 활동과 최후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오의선은 국내로 잠입해 신분을 숨기고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해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기사를 여러 편 작성했다. 그러는 한편 각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고, 독립은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조국 독립의 방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과도 교류를 가졌던 그는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많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투옥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국제혁명자후원회 간부가 되었다. 국제혁명자후원회란 혁명운동을 전개하다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국제공산당이 만든 후원단체로, 그는 코민테른과 연계해 사회주의자들을 구출할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1931년 3월 14일, 그는 고향인 용인에서 머물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심한 고문으로 폐결핵과 복막염에 걸려 같은 해 5월 6일 사망했다. 향년 42세. 그가 매장된 장소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오의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사복시경공파-판서공파. 23세 선(善) 항렬.[2] 해주 오씨 대동보에는 1890년 11월 8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목신리·학일리와 함께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오광선도 이 마을 출신이다.[4] 해주 오씨 대동보에는 3월 9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