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2 01:10:19

차도선

파일:독립장 약장.png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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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3년 1월 29일
함경남도 북청군 풍산면
사망 1939년 2월 8일 (향년 76세)
만주 무송현 추수동 동대툰
본관 연안 차씨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연변의 재야사학자 강룡권이 1991년 연변의 조선족 잡지 <장백산> 1월호 '역사의 발자취'란에 게재한 "차도선과 그의 후예들"에 따르면, 차도선은 1863년 1월 29일 함경남도 북청군 풍산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광산 노동자, 사금채굴업자, 또는 대한제국군 진위대 하사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냥을 주업으로 삼은 것은 분명하며,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해 북청군의 포수 73명의 사냥총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홍범도와 함께 의병을 모았다.

1907년 11월 15일, 차도선은 홍범도와 함께 68명의 포수를 이끌고 북청군 안평사 언방골에서 무장 봉기를 선포했다. 그는 도대장(都大將)을 맡았고 홍범도는 부대장(副大將)을 맡았다. 차도선은 11월 16일 일진회 회원이자 안산면장인 주도익(朱道翼)을 처단하고 22~23일 이틀 동안 북청 후치령에서 일본군과 순사 등 10여 명을 사살했다. 이에 북청군수비대는 1907년 11월 24일 60명의 일본군을 후치령에 투입해 토벌에 나섰지만, 차도선과 홍범도는 험준한 산 속에 매복했다가 급습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후 차도선과 홍범도는 1907년 12월 초순에 북청, 풍산, 황수원, 갑산, 삼수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12월 15일에 장항리에서 화물과 우편 호위병을 기습했으며, 12월 26일에는 삼수군 중평장에서 함흥수비대 소속 일본 기병대와 교전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이들이 이렇듯 활약하자 각지에서 부대원들이 모이면서 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차도선은 이들을 4개 부대로 재편했다. 1907년 12월 31일 일본군이 두번 째 토벌 작전을 개시하자, 차도선은 홍범도와 함께 적을 삼수로 유인한 뒤 3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격퇴했다.

1908년 1월 9일, 북청주재 50연대 제3대대장 미츠키 소좌는 200명을 추가로 확보한 뒤 토벌 작전에 착수했다. 차도선과 홍범도는 적군이 삼수를 포위 공격하자 소수 병력으로 시간을 끌게 한 뒤 1월 10일 새벽 6시에 갑산읍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 적군을 격파하고 우편국 등 각 기관을 소각했다. 이렇듯 의병 토벌에 애를 먹자, 일본군은 의병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의병이 산에서 내려오면 식량을 준다고 선전했다. 이에 적지 않은 의병들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하산했다. 또한 당시 의병대는 거듭된 전투로 부상자가 많았으며 무기와 탄약도 매우 부족했다.

차도선은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홍범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일본군 측이 하산하여 협상할 것을 권하자, 그는 1908년 3월 17일 250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 오쿠무라 중위를 만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속을 어기고 의병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태양욱이 이에 항거하자 즉결 처형했다. 한편 홍범도는 일본군의 회유를 듣지 않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2개월 동안 갑산헌병분견소에 갇혀 있던 차도선은 5월 7일에 탈옥해 홍범도 부대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나섰고, 홍범도는 그를 받아들였다. 이후 차도선은 도대장 직책에서 물러나 일개 의병으로서 무장 투쟁에 다시 나섰다. 그러자 일본군은 차도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차도선의 아내와 친형 차도심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다. 아내는 겨우 풀려난 뒤 1916년 3남 1녀의 자식과 차도심의 외아들 차원식을 데리고 중국 무송현으로 떠났다. 차도심 역시 도주해 차도선의 가족과 합류했다.

차도선은 1919년 4월 신봉황(申鳳荒)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士)를 조직해 만주의 황국보(黃菊甫) 등과 연락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같은해 9월에는 무송현에서 500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강룡권의 "차도선과 그의 후예들"에 따르면, 차도선은 말년에 나이가 들어 무장 투쟁이 어렵게 되자 "왜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두메산골에 가서 살겠다."며 무송현에서도 고립된 산중인 두지동에 들어가 자신의 집을 서당으로 꾸민 뒤 마을의 자제 10여 명에게 계몽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1938년 3월 일본군이 두지동 전체를 불사르자, 차도선은 인근의 동대툰 집단부락으로 옮겨 새로 살 집을 짓던 중 병을 얻었고, 1939년 2월 8일 만주 무송현 추수동 동대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차도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후 1995년 오영선, 양기하, 윤현진, 천보락, 정한경 등과 함께 중국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봉환해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3. 가족

차도선의 맏아들 차리덕(1889년생)은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대원으로서 함께 했다. 그는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했지만 부상을 입어 전투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두지동에서 농사를 지었고 공산당에 가담했다. 그러나 1942년 무송현에서 벌어진 공산당원 검거 선풍에 휘말려 둘째 동생 차운학과 셋째 동생 차원복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 그 후 그는 몽강현 2도화원구 소가영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1953년 2월 사망했다.

차도선의 둘째 아들 차운학(1895년생)은 어머니와 함께 무송현 두지동으로 이주한 후 형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무송현에서 벌어진 공산당원 검거 선풍에 휘말려 봉천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그는 1945년 4월 15일 탈옥을 시도했다가 체포된 직후 총살형에 처해졌다.

차도선의 셋째 아들 차원복(1902년생)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한 뒤 무송, 화전, 통화, 장백, 몽강현 등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2년 형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봉천 감옥에서 복역 중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 그는 무송현으로 돌아온 후 농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토지개혁과 지주청산운동에 참가했으며, 1974년에 사망했다.

차도선의 형 차도심은 만주로 망명한 뒤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서양총, 칼, 화약, 탄약 등을 제조해 의병부대에 공급하다가 1933년에 사망했다. 차도심의 외아들 차원식(1900년생)은 양세봉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원으로서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다가 양세봉이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소련군에 가담했다. 그는 1945년 8월 소련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감행했을 때 가담했고, 이후 중국의 관료로 일하다가 1976년에 사망했다.

차도선의 동생 차도순은 형의 의병부대에 가담해 의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8년 9월 북청헌병분견소에 체포된 뒤 그해 9월 15일 북청의 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