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6-11 23:19:52

이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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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이승화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당숙
이상룡 건국훈장 독립장 (1962) 본인
이준형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장남
이병화 건국훈장 독립장 (1990) 장손
이상동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동생
이형국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이상동의 장남
이운형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이상동의 차남
이봉희 건국훈장 독립장 (1990) 동생
이광민 건국훈장 독립장 (1990) 이봉희의 장남
김우락 건국훈장 애족장 (2019) 배우자
김대락 건국훈장 애족장 (1990) 김우락의 큰오빠
김락 건국훈장 애족장 (2001) 김우락의 여동생
이만도 건국훈장 독립장 (1962) 김락의 시아버지
이중업 건국훈장 애족장 (1990) 김락의 배우자
김도화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종고모부
강호석 건국훈장 애족장 (2011) 사위
김태동 대통령표창 (2003) 이상동의 사위
허은 건국훈장 애족장 (2018) 이병화의 배우자
허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허은의 재종조부
이원기 건국훈장 애국장 (1990) 허길의 장남
이육사
(이원록)
건국훈장 애국장 (1990) 허길의 차남
박경종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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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장 부장.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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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50~1961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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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명
1950
모리스 윌리엄
파일:호주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어니스트 베델
파일:영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1968
일라이 M. 모우리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제이 제롬 윌리엄스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존 W. 스태거즈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찰스 에드워드 러셀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프레드 A. 돌프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호러스 뉴턴 알렌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0
윌리엄 L. 로버츠
파일:미국 국기.svg 군인
1952
리처드 J. H. 존스턴
파일:미국 국기.svg 언론인
1952
올리버 R. 에이비슨
파일:영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59
에템 멘데레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정치인, 국방부장관
1959
김병조[A]
(취소)
1961
아이작 D. 화이트
파일:미국 국기.svg 군인
1961
카터 매그루더
파일:미국 국기.svg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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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2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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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명
1962
강무경
의병
1962
고광순
의병
1962
고두환
만주방면
1962
기삼연
의병
1962
김덕제
의병
1962
김도원
국내항일
1962
김도현
의병
1962
김동식
국내항일
1962
김마리아
국내항일
1962
김봉학
계몽운동
1962
김석진
계몽운동
1962
김수민
의병
1962
김승학
임시정부
1962
김예진
중국방면
1962
김원벽
3·1 운동
1962
김정련
중국방면
1962
김정익
의열투쟁
1962
김진묵
의병
1962
김철
임시정부
1962
김태원
의병
1962
김학규
광복군
1962
김혁
만주방면
1962
김홍일
광복군
1962
나철
의열투쟁
1962
문일민
임시정부
1962
민양기
만주방면
1962
박세화
의병
1962
박장호
만주방면
1962
박재혁
중국방면
1962
박치의
만주방면
1962
반하경
계몽운동
1962
변학기
의병
1962
서일
만주방면
1962
선우혁
임시정부
1962
손정도
임시정부
1962
송계백
일본방면
1962
송병선
계몽운동
1962
송학선
의열투쟁
1962
심남일
의병
1962
안경신
만주방면
1962
안명근
계몽운동
1962
안승우
의병
1962
안태국
계몽운동
1962
안희제
계몽운동
1962
양세봉
만주방면
1962
여순근
만주방면
1962
오강표
계몽운동
1962
오광선
만주방면
1962
오기호
의열투쟁
1962
왕회종
의병
1962
우덕순
의열투쟁
1962
우동선
의병
1962
유관순
3·1 운동
1962
유근
계몽운동
1962
유도발
계몽운동
1962
유림
임시정부
1962
유명규
의병
1962
유시연
의병
1962
윤병구
중국방면
1962
윤세복
만주방면
1962
윤세용
만주방면
1962
윤익선[B]
(취소)
1962
윤현진
임시정부
1962
이갑
계몽운동
1962
이강
계몽운동
1962
이경섭
3·1 운동
1962
이광호
국내항일
1962
이규갑
임시정부
1962
이남규
의병
1962
이만도
계몽운동
1962
이면주
계몽운동
1962
이상룡
임시정부
1962
이상철
계몽운동
1962
이석
의병
1962
이석용
의병
1962
이소응
의병
1962
이수흥
만주방면
1962
이애라
만주방면
1962
이윤재
문화운동
1962
이인식
3·1 운동
1962
이종암
중국방면
1962
이종호
만주방면
1962
이준식
광복군
1962
이중언
계몽운동
1962
이진룡
의병
1962
이진무
만주방면
1962
이학순
계몽운동
1962
이한응
계몽운동
1962
이현섭
계몽운동
1962
이회영
만주방면
1962
이희승
문화운동
1962
임병찬
의병
1962
장지연[B]
(취소)
1962
장진홍
의열투쟁
1962
장태수
계몽운동
1962
전덕기
계몽운동
1962
전덕원
만주방면
1962
정동식
계몽운동
1962
정용기
의병
1962
정인승
문화운동
1962
정태진
문화운동
1962
정한경
미주방면
1962
조경한
임시정부
1962
조도선
의열투쟁
1962
조맹선
만주방면
1962
조병옥
국내항일
1962
조인환
의병
1962
지용기
의병
1962
차도선
의병
1962
차병혁
3·1 운동
1962
차이석
임시정부
1962
채응언
의병
1962
채찬
만주방면
1962
최시흥
만주방면
1962
최양옥
만주방면
1962
최용덕
광복군
1962
최재형
임시정부
1962
최팔용
일본방면
1962
최현배
문화운동
1962
표영준
의열투쟁
1962
한징
문화운동
1962
함태영
3·1 운동
1962
현익철
만주방면
1962
홍만식
계몽운동
1962
홍범식
계몽운동
1962
홍진
임시정부
1962
황학수
임시정부
1962
황현
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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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63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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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명
1963
강명규
만주방면
1963
강순필
국내항일
1963
강창제
임시정부
1963
강철구
만주방면
1963
계화
만주방면
1963
고운기
광복군
1963
고인덕
의열투쟁
1963
고제량
의병
1963
곽재기
의열투쟁
1963
곽종석
3·1 운동
1963
구연영
국내항일
1963
권영만
국내항일
1963
권용일
의병
1963
권쾌복
학생운동
1963
기산도
의열투쟁
1963
김경태
국내항일
1963
김관오
광복군
1963
김광진
만주방면
1963
김규식
만주방면
1963
김기한
만주방면
1963
김낙용[A]
(취소)
1963
김동수
광복군
1963
김두만
임시정부
1963
김만수
만주방면
1963
김병로
문화운동
1963
김병록
의열투쟁
1963
김보형
만주방면
1963
김복한
의병
1963
김봉수
만주방면
1963
김상길
학생운동
1963
김상태
의병
1963
김석창
만주방면
1963
김성근
임시정부
1963
김성엽
만주방면
1963
김성호
만주방면
1963
김세환
3·1운동
1963
김승만
만주방면
1963
김영숙
만주방면
1963
김영철
만주방면
1963
김우근
만주방면
1963
김원국
의병
1963
김원조
국내항일
1963
김재근
국내항일
1963
김준승
만주방면
1963
김지환
3·1 운동
1963
김창곤
만주방면
1963
김창근
중국방면
1963
김창환
만주방면
1963
김천익
만주방면
1963
김최명
만주방면
1963
김태오
3·1 운동
1963
김태원
만주방면
1963
김평식
만주방면
1963
김한종
국내항일
1963
나월환
광복군
1963
나중소
만주방면
1963
나창헌
임시정부
1963
남정각
중국방면
1963
노기용
국내항일
1963
노복선
광복군
1963
민강
국내항일
1963
민영구
광복군
1963
민필호
임시정부
1963
박기성
광복군
1963
박기제
만주방면
1963
박기한
만주방면
1963
박민항
만주방면
1963
박상진
국내항일
1963
박세건
만주방면
1963
박시창
광복군
1963
박연백
의병
1963
박응백
만주방면
1963
박중서
만주방면
1963
박찬익
임시정부
1963
방순희
임시정부
1963
백기준
임시정부
1963
백기환
의열투쟁
1963
백낙주
만주방면
1963
백남규
의병
1963
백시찬
만주방면
1963
백운한
만주방면
1963
백정기
중국방면
1963
변춘식
만주방면
1963
서상교
학생운동
1963
서상렬
의병
1963
서상한
일본방면
1963
손기업
만주방면
1963
손창준
만주방면
1963
송병조
임시정부
1963
송진우
문화운동
1963
신공제
임시정부
1963
신덕영
만주방면
1963
신송식
광복군
1963
신숙
만주방면
1963
신영삼
임시정부
1963
신우현
만주방면
1963
신팔균
만주방면
1963
안규홍
의병
1963
안병찬
계몽운동
1963
안상익
3·1 운동
1963
안세환
3·1 운동
1963
안재환
중국방면
1963
안지호
3·1 운동
1963
안춘생
광복군
1963
양기하
만주방면
1963
양우조
임시정부
1963
엄순봉
중국방면
1963
여행렬
의열투쟁
1963
연병호
임시정부
1963
오면직
중국방면
1963
오복원
의열투쟁
1963
오상서
만주방면
1963
오운흥
국내항일
1963
우승창
만주방면
1963
우재룡
국내항일
1963
유기동
만주방면
1963
유상렬
임시정부
1963
유창순
국내항일
1963
유흥수
학생운동
1963
윤준희
만주방면
1963
윤창하
학생운동
1963
이건석
의열투쟁
1963
이광
임시정부
1963
이광세
국내항일
1963
이교재
임시정부
1963
이규채
임시정부
1963
이기송
3·1 운동
1963
이동수
의열투쟁
1963
이명상
의병
1963
이명하
만주방면
1963
이민화
만주방면
1963
이상만
임시정부
1963
이상호
학생운동
1963
이서현
만주방면
1963
이설
계몽운동
1963
이세영
임시정부
1963
이순모
3·1 운동
1963
이신애
국내항일
1963
이용담
만주방면
1963
이우영
만주방면
1963
이원직
임시정부
1963
이유필
임시정부
1963
이인
문화운동
1963
이장녕
만주방면
1963
이재현
광복군
1963
이정
만주방면
1963
이정렬
국내항일
1963
이준용
만주방면
1963
이창용
만주방면
1963
이춘영
의병
1963
이치모
국내항일
1963
이탁
임시정부
1963
이한구
의병
1963
이홍래
만주방면
1963
이화익
중국방면
1963
이화주
만주방면
1963
임국정
만주방면
1963
임봉주
국내항일
1963
임의탁
임시정부
1963
임창모
의병
1963
장관주
국내항일
1963
장기천
만주방면
1963
장덕준
문화운동
1963
장덕진
만주방면
1963
장두환
국내항일
1963
장해평
중국방면
1963
장형
국내항일
1963
전좌한
중국방면
1963
전태선
의열투쟁
1963
전홍섭
만주방면
1963
정남용
국내항일
1963
정봉화
만주방면
1963
정순경
만주방면
1963
정신
만주방면
1963
정의도
임시정부
1963
정이형
만주방면
1963
정인복
만주방면
1963
정찬조
만주방면
1963
정태희
임시정부
1963
조경환
의병
1963
조길룡
학생운동
1963
조명하
중국방면
1963
조병준
만주방면
1963
조시원
광복군
1963
조원세
국내항일
1963
조인제
광복군
1963
조종대
국내항일
1963
조지 새넌 맥큔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3
조지 쇼
파일:영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3
조진탁
3·1 운동
1963
조창호
의열투쟁
1963
주기철
문화운동
1963
주명우
3·1 운동
1963
주병웅
만주방면
1963
지달수
광복군
1963
차병제
만주방면
1963
채기중
국내항일
1963
최관용
만주방면
1963
최낙철
학생운동
1963
최능찬
3·1 운동
1963
최병선
중국방면
1963
최병수
3·1 운동
1963
최병호
만주방면
1963
최석준
만주방면
1963
최수봉
의열투쟁
1963
최은식
3·1 운동
1963
최지관
만주방면
1963
최진동
만주방면
1963
최천호
의열투쟁
1963
한봉수
의병
1963
한상렬
의병
1963
한상호
만주방면
1963
한흥근
의열투쟁
1963
함석은
만주방면
1963
허형
의열투쟁
1963
현순
임시정부
1963
현천묵
만주방면
1963
홍사구
의병
1963
홍성익
임시정부
1963
홍주
만주방면
1963
홍찬섭
3·1 운동
1963
황덕환
만주방면
1963
황병길
만주방면
1963
황상규
중국방면
1963
황학봉
만주방면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5~1969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94명
1965
체스터 니미츠
파일:미국 국기.svg 군인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고이허
만주방면
1968
궈타이치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권준
중국방면
1968
김관보[A]
(취소)
1968
김기형
임시정부
1968
김명권
만주방면
1968
김봉식
만주방면
1968
김상옥
만주방면
1968
김석
중국방면
1968
김성택
만주방면
1968
김시중
의병
1968
김용구
의병
1968
김원범
의병
1968
김원식
만주방면
1968
김정수[A]
(취소)
1968
김진성
만주방면
1968
김진준
만주방면
1968
김천성
광복군
1968
김태연
만주방면
1968
김학섭
만주방면
1968
김홍서
임시정부
1968
노병대
의병
1968
노태준
광복군
1968
다이리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로버트 그리어슨
파일:캐나다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류용야오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마수례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모더후이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문창학
만주방면
1968
박도경
만주방면
1968
박인화
의병
1968
박태열
만주방면
1968
박희광
만주방면
1968
백삼규
만주방면
1968
서원준
만주방면
1968
서의배
국내항일
1968
손승억
만주방면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신정백
의병
1968
신태식
의병
1968
신현구
국내항일
1968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양승우
만주방면
1968
양한규
의병
1968
여준
만주방면
1968
유득신
국내항일
1968
유상근
의열투쟁
1968
유택수
만주방면
1968
윤이병
계몽운동
1968
이규선
3·1 운동
1968
이규창
중국방면
1968
이기
의열투쟁
1968
이명균
국내항일
1968
이병묵
만주방면
1968
이병욱
만주방면
1968
이붕해
만주방면
1968
이성구
중국방면
1968
이성우
의열투쟁
1968
이양섭
3·1 운동
1968
이응서
만주방면
1968
이의준
만주방면
1968
이진택
만주방면
1968
이창덕
만주방면
1968
이현규
의병
1968
이희경
임시정부
1968
임치정
계몽운동
1968
장소진
3·1운동
1968
장윤덕
의병
1968
장쥐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장진원
중국방면
1968
장췬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전덕명
만주방면
1968
정서송
3·1 운동
1968
조지 애쉬모어 피치
파일:미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조창선
국내항일
1968
주석환
만주방면
1968
주칭란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차병수
임시정부
1968
차희식
3·1 운동
1968
채세윤
만주방면
1968
채원개
광복군
1968
천리푸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최규동
문화운동
1968
최도환
의병
1968
최세윤
의병
1968
최영걸
만주방면
1968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파일:캐나다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한훈
의열투쟁
1968
한흥
만주방면
1968
홍원식
의병
1968
황병학
의병
1968
황줴
파일:중국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68
황창오
국내항일
1969
세바스티안 우가르테
파일:필리핀 국기.svg 언론인, 체육인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77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84명
1977
쉐웨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77
강상모
만주방면
1977
강진원
의병
1977
권기옥
중국방면
1977
김교헌
만주방면
1977
김대규
의병
1977
김동신
의병
1977
김성수
중국방면
1977
김순애
임시정부
1977
김승곤
광복군
1977
김약연
만주방면
1977
김용재
광복군
1977
김이직
만주방면
1977
김중건
만주방면
1977
김진만
국내항일
1977
김홍량[B]
(취소)
1977
나태섭
광복군
1977
남궁억
문화운동
1977
남석인
의병
1977
노원섭
의병
1977
노응규
의병
1977
노임수
의병
1977
문상익
3·1 운동
1977
문창숙
만주방면
1977
민용호
의병
1977
박승길
만주방면
1977
박영준
광복군
1977
박영희
만주방면
1977
박인항
국내항일
1977
박춘실
의병
1977
서상용
만주방면
1977
서영석
3·1운동
1977
손양윤
만주방면
1977
송병순
계몽운동
1977
송주면
계몽운동
1977
신건식
임시정부
1977
신언성
만주방면
1977
안경근
임시정부
1977
안병무
임시정부
1977
양진여
의병
1977
염온동
임시정부
1977
오광심
광복군
1977
오성술
의병
1977
왕광연
3·1 운동
1977
원심창
중국방면
1977
유민식
만주방면
1977
유병기
의병
1977
유석현
중국방면
1977
유장렬
국내항일
1977
유지명
의병
1977
유해준
광복군
1977
윤병구
미주방면
1977
이강산
의병
1977
이강훈
중국방면
1977
이관석
만주방면
1977
이기손
의병
1977
이병채
의병
1977
이상정
임시정부
1977
이승길
계몽운동
1977
이우식
문화운동
1977
이원대
중국방면
1977
이재윤
의병
1977
이종건
광복군
1977
이종희
광복군
1977
이진영
광복군
1977
이형우
만주방면
1977
이화일
만주방면
1977
임용상
의병
1977
장한성
만주방면
1977
정용대
의병
1977
정운경
의병
1977
정춘서
의병
1977
조용하
미주방면
1977
조정인
의병
1977
차천모
만주방면
1977
채광묵
의병
1977
최욱영
의병
1977
최익형
계몽운동
1977
최중호
중국방면
1977
최해
만주방면
1977
한성수
광복군
1977
허빈
만주방면
1977
홍준옥
3·1 운동
1977
홍충희
만주방면
1977
황재운
3·1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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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980~1990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101명
1980
강원형
계몽운동
1980
강인수
중국방면
1980
권인규
의병
1980
금달연
의병
1980
기우만
의병
1980
김대지
임시정부
1980
김봉원
만주방면
1980
김인전
임시정부
1980
김일두
임시정부
1980
마진
만주방면
1980
박문용
임시정부
1980
사도덕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80
서종채
의병
1980
손영각
의병
1980
안무
만주방면
1980
양근환
일본방면
1980
양윤숙
의병
1980
오의선
임시정부
1980
왕주이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80
이구연
임시정부
1980
이능권
의병
1980
이봉우
만주방면
1980
이종혁
만주방면
1980
임이걸
3·1 운동
1980
장석영
3·1 운동
1980
조훈
만주방면
1980
진치언
의병
1980
진희창
임시정부
1980
한봉근
중국방면
1980
한정만
의병
1982
김석황
임시정부
1982
김성숙
임시정부
1982
김영백
의병
1982
류인식
문화운동
1982
윤세주
중국방면
1982
윤인순
의병
1983
정현섭
중국방면
1983
조윤하
만주방면
1982
최창식
임시정부
1986
권석도
의병
1986
김갑
임시정부
1986
김영현
만주방면
1986
이명순
만주방면
1986
정순만
만주방면
1986
황준성
의병
1987
신언준
중국방면
1987
안정근
임시정부
1988
유동하
의열투쟁
1989
고창일
노령방면
1989
엄항섭
임시정부
1989
원세훈
중국방면
1990
강기덕
국내항일
1990
박봉석
의병
1990
서병희
의병
1990
손덕오
의병
1990
염인서
의병
1990
이은영
의병
1990
이충응
의병
1990
이필봉
의병
1990
이현
3·1 운동
1990
이황룡
의병
1990
이희룡
3·1 운동
1990
임하중
의병
1990
장인초
의병
1990
정기찬
의병
1990
정철화
의병
1990
조병두
의병
1990
지석용
3·1 운동
1990
최산흥
의병
1990
추삼만
의병
1990
김상덕
임시정부
1990
김의한
임시정부
1990
김일곤
중국방면
1990
김형빈
만주방면
1990
명제세
임시정부
1990
박건웅
임시정부
1990
오영선
임시정부
1990
윤해
만주방면
1990
이관직
만주방면
1990
이광민
만주방면
1990
이병화
만주방면
1990
이종건
만주방면
1990
장도빈
국내항일
1990
장철호
만주방면
1990
정인보
문화운동
1990
조지영
임시정부
1990
최이붕
중국방면
1990
김춘배
만주방면
1990
김치홍
의병
1990
박여성
의병
1990
박인호
3·1운동
1990
양경학
의병
1990
윤동주
학생운동
1990
이대극
의병
1990
이명서
만주방면
1990
이봉희
만주방면
1990
장일환
국내항일
1990
정기선
의병
1990
최동오
임시정부
1990
태양욱
의병
1990
한이경
국내항일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2~1995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114명
1992
곽중규
임시정부
1992
김철남
임시정부
1992
이달
중국방면
1992
고평
만주방면
1992
손기혁
의병
1992
현정건
중국방면
1992
현정경
만주방면
1993
이철형
의병
1993
강기운
만주방면
1993
김태원
의병
1993
문석봉
의병
1993
박건병
중국방면
1993
박치화
만주방면
1993
이필희
의병
1993
이흥관
임시정부
1993
장두량
만주방면
1994
장봉한
만주방면
1994
천병림
중국방면
1994
민효식
의병
1995
강경선
중국방면
1995
강이봉
의병
1995
강제하
만주방면
1995
강진해
만주방면
1995
계봉우
임시정부
1995
권순명
의병
1995
권준
의병
1995
금기철
의병
1995
김강
만주방면
1995
김경운
의병
1995
김난섭
만주방면
1995
김덕순
의병
1995
김덕흥
의병
1995
김동수
의병
1995
김문희
임시정부
1995
김범이
의병
1995
김법린
국내항일
1995
김병조
중국방면
1995
김병태
의열투쟁
1995
김봉규
의병
1995
김선여
의병
1995
김성범
만주방면
1995
김수곡
의병
1995
김영란
국내항일
1995
김영렬
만주방면
1995
김용대
만주방면
1995
김원국
만주방면
1995
김원식
의병
1995
김율
의병
1995
김응백
의병
1995
김이섭
만주방면
1995
김일봉
만주방면
1995
김일원
의병
1995
김정원
의병
1995
김종철
의병
1995
김준택
만주방면
1995
김창균
만주방면
1995
김태연
중국방면
1995
김훈
만주방면
1995
나병삼
만주방면
1995
나시운
의병
1995
나정구
만주방면
1995
노을룡
중국방면
1995
노종균
중국방면
1995
문양목
미주방면
1995
문일평
중국방면
1995
박경순
임시정부
1995
박차정
중국방면
1995
성익현
중국방면
1995
송종익
미주방면
1995
송헌주
미주방면
1995
신석우
임시정부
1995
신창룡
의병
1995
신창현
의병
1995
안공근
임시정부
1995
안국형
만주방면
1995
안원규
미주방면
1995
안현경
미주방면
1995
엄주필
노령방면
1995
오상원
의병
1995
유광흘
만주방면
1995
유성삼
만주방면
1995
유일한
미주방면
1995
윤덕보
만주방면
1995
윤흥곤
의병
1995
이광복
중국방면
1995
이교영
의병
1995
이대위
미주방면
1995
이덕삼
중국방면
1995
이범직
의병
1995
이병진
만주방면
1995
이석이
의병
1995
이영준
중국방면
1995
이인금
의병
1995
이중봉
의병
1995
이희삼
만주방면
1995
임병극
만주방면
1995
전학수
만주방면
1995
정봉준
의병
1995
정원집
의병
1995
조창룡
만주방면
1995
조화선
만주방면
1995
천세헌
미주방면
1995
최성천
의병
1995
최익룡
만주방면
1995
최일엽
만주방면
1995
최진하
미주방면
1995
최천유
의병
1995
한시대
미주방면
1995
허근
만주방면
1995
홍석호
만주방면
1995
홍언
미주방면
1995
홍학순
만주방면
1995
황봉신
의병
1995
황봉운
의병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6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73명
1996
강윤희
의병
1996
김치보
노령방면
1996
이중집
만주방면
1996
장명도
만주방면
1996
추푸청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1996
남공선
만주방면
1996
안광조
의병
1996
엄해윤
의병
1996
윤상열
3·1 운동
1996
정인국
의병
1996
최봉준
노령방면
1996
최영호
만주방면
1997
김호
미주방면
1997
백일규
미주방면
1997
임성우
미주방면
1997
조병요
미주방면
1998
김용성
미주방면
1998
김찬수
만주방면
1998
박사화
의병
1998
심용준
만주방면
1998
차천리
만주방면
1999
신우여
노령방면
1999
후쭝난
파일:대만 국기.svg 독립운동지원
2000
이호원
만주방면
2000
이성화
의병
2001
김학무
중국방면
2002
김규면
노령방면
2002
신현규
국내항일
2002
채영
노령방면
2003
이필상
의병
2004
윤자영
중국방면
2005
권오설
국내항일
2005
조동호
국내항일
2005
김철수
국내항일
2005
김태연
국내항일
2005
김한
중국방면
2005
정헌태
국내항일
2005
최윤구
만주방면
2005
한위건
중국방면
2006
고지형
3·1운동
2006
박영
만주방면
2006
이재유
국내항일
2006
이민환
노령방면
2006
한봉철
만주방면
2007
이자해
중국방면
2007
전일
노령방면
2008
유기석
중국방면
2008
이춘숙
임시정부
2009
장기초
만주방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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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필(觀必)
향산(響山)
본관 진성 이씨 하계파(下溪派)
출생 1842년 1월 2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하계 마을
사망 1910년 10월 10일 (향년 68세)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청구동
묘소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
서훈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관직 경력2.3. 을미의병2.4. 을사조약을 반대하다2.5. 순국
3. 대를 이은 독립운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만도는 1842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에서 아버지 복제(復齊) 이휘준(李彙濬)과 어머니 야성(冶城) 송씨(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의 11대손이며, 조부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은 순조 11년(18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고, 부친인 이휘준도 철종 7년(185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 명망 높은 관리였다. 이만도는 일찍부터 부친과 족형인 이만각(李晩慤)에게서 퇴계학을 전수받았고, 18살 때 봉화 유곡의 안동 권씨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 권승하(權承夏)는 아우인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와 함께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저명한 학자였기에, 이만도는 이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박민영의 저서 <거룩한 순국지사 향산 이만도>에 따르면, 이만도는 15살 때 과거에 응시하기로 결심하고 "내가 벼슬하지 않으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후 왼손 엄지를 10년 동안 굽혔다가 1866년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야 비로소 폈다고 한다. 또한 <향산전서>에 따르면, 부친은 이만도에게 입지(立志)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고 한다.
선비란 뜻을 세움을 귀중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마치 가슴 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이 하는 법이다. 위로는 머리로 하늘을 꿰뚫듯이 하고, 아래로는 발이 땅의 움직임을 꿰뚫어야 하니 한 순간이라도 마음이 흔들린다면 사업을 이루어 낼 수 없다 .

이후 이만도가 25세에 장원 급제하자, 부친은 이만도에게 관리로서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내가 이미 관직이 높고, 너 또한 장원이 되니 기쁜 것이 아 니라 실로 두렵다.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다가는 집안을 망친다’는 유계(遺戒)가 지엄하니 너는 마땅히 깊이 새겨야 할 것이 다. (중략) 선비가 나라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나라가 평온하면 치화(治化)로서 은혜를 갚을 것이며, 위급함을 보면 마땅히 목숨을 던져야 한다. 지금 변경이 위급한데 만약 조정이 너를 죽을 자리에 두면 반드시 죽음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신하로서의 의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임이 어찌 크고 무겁지 아니한가?

2.2. 관직 경력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사간원 정원,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 및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집의 등을 거쳤다. 1873년에는 홍문관 동료들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청한 최익현에게 엄형을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1876년에는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자 사간원 집의로서 대사간(大司諫) 이재경(李在敬), 사간(司諫) 신석구(愼錫九), 장령(掌令) 오인영(吳麟泳)과 함께 최익현을 추국해 죄를 캐물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성균관 사성, 홍문관 응교 등 여러 관직을 지낸 이만도는 양산군수로서 세금 징수를 너그럽게 하고 물난리를 만나 곤경에 처했던 백성을 도와 칭송을 자자했다. 이 공으로 한양으로 상경한 그는 홍문관 수찬에 이어 1882년 통정대부 및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월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6월 임오군란이 발발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했다.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아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고향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했다.

1885년, 경상도의 안동 유생 김진우 등이 상소를 올려 이만도 등 도산 서원 문인들을 탄핵했다.
작년 가을 경주(慶州) 유생인 진사(進士) 이능모(李能模)가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 것과 관련하여 내린 비지(批旨)에서, ‘억울한 것을 풀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조처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도신(道臣) 조강하(趙康夏)가 성상의 비지(批旨)를 받들고 열읍(列邑)에 감결(減結)하여 신칙하기를, ‘내직(內職)으로는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외직(外職)으로는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지내는 사람이 연이으며 심지어 종묘(宗廟)의 제사에는 모두 다 축사(祝司)의 관리로 추천되고 문묘(文廟)의 제사에는 다같이 헌관(獻官)과 집사(執事) 반열에 참가하니 조정에서는 차별이 없고 성균관(成均館)에서도 두루 통한다.

그런데 어째서 경상도(慶尙道) 한 지역에서만 견문이 막히고 제한하는 데에 빠져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직임을 주지 않고 조상의 제사에서 배척하면서「신유(新儒)와 구유(舊儒)의 차이는 백세(百世)를 가도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하니, 이 사람들로 하여금 원통한 마음을 품게 하고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한번 내린 임금의 말을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대양(對揚)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치로는 유임(儒任)을 통행(通行)시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혹시 구유(舊遊)라고 칭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못된 짓을 답습하는 경우에는 이름을 지적하여 치보(馳報)하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조처하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안(禮安)의 도산 서원(陶山書院)은 임금의 명에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윤리를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해치는 변고가 이를 계기로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전 참의(前參議) 이만도(李晩燾)와 유학(幼學) 이만응(李晩鷹)은 임금의 명을 거역할 계책을 제창하고 겸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푸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여러 이씨(李氏)들을 서원 뜰에 많이 모아놓고 그 서자(庶子) 족속의 항렬(行列)이 높은 자 몇 사람을 잡아다가 뜰 아래에 결박하여 꿇어앉히고 장(杖)을 치고 태(笞)를 치며 노예처럼 취급하고는 ‘서자(庶子) 부류를 허락하지 말라.〔勿許庶類〕’라는 네글자의 글을 크게 써서 벽에다 붙였습니다.

그런데 본읍(本邑)의 현감(縣監) 이학연(李鶴淵)은 조정의 명령을 거행할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교지를 받드는 신유(新儒)들을 잡아들이고 형리(刑吏)를 시켜 ‘조령(朝令)’이라는 두 글자를 먹으로 지워버리게 하고는 형장을 세 차례 엄하게 쳐서 몇 달 동안 단단히 가두어 놓고 있으니, 아! 통분할 일입니다. 교화에 저항하고 임금의 명을 거역한 무리들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이 무리들처럼 군명(君命)을 어기고 기강을 문란시키는 자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잘 살펴서 헤아려보고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명을 거역한 죄를 다스리고, 특별히 엄한 교지(敎旨)를 내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여 향교·서원·향당(鄕黨)의 여러 직임을 속히 통행(通行)시켜서 사람 축에 낄 수 있게 하고 전하의 혜택을 영원히 칭송하게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종실록 고종 22년 6월 9일자 기사

하지만 조정은 이만도를 비롯한 도산 서원 유생들을 잘 타이르는 선에서 그칠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경상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도산 서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사족들의 지지를 잃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3. 을미의병

1894년, 일본군이 동학 농민 혁명으로부터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인천에 상륙한 뒤 경복궁을 장악하고 김홍집을 위시한 내각을 구성해 갑오개혁을 단행하게 했다. 이에 이만도는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끊은 것에 비판을 가했다.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잊을 수 없지만 지금 원수같은 이웃의 협박에 따라 청을 배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관리의 직제는 조종에서 정한 것이고 복색은 황명의 구제이다. 오랑캐의 법으로서 중화를 훼방하는 것은 불가하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이만도는 "신하된 몸으로 천고에 없는 변을 당했는데도 의거를 일으켜 복수하지도 못하고, 상례(喪禮)를 치를 여지조차 없으니"라고 개탄했다. 게다가 그해 11월 17일 일제가 단발령을 발표하자, 그는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만도는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될 때부터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고려했지만 왕명이 없이 스스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죄를 얻을 것이 두려워 주저했다. 그러다가 단발령 발표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도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895년 11월 29일 예안에서 이중린(李中麟), 이인화(李仁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장이 되었고, 이중린은 선봉장, 이인화는 유격장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보다 앞서 거병한 안동 의병대가 관군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겁을 먹은 예안 의병대는 결성된 지 9일 만인 12월 8일에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에 이만도는 탄식하며 남은 이들에게 말했다.
오합지졸의 농민들이 황겁하게 흩어지는 것을 굳이 나무랄 것이 없다. 영이 없어도 흩어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차라리 영을 내려 흩어지는 것이 오히려 살아남게 되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너희들은 각자 돌아가 본업에 종사하면서 다시 알릴 때까지 기다려라

이렇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의병대가 와해되는 걸 지켜본 이만도는 근처의 산에 입산한 뒤 수년간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그의 밑에서 선봉장을 맡았던 이중린이 진성 이씨 문중의 이중목(李中穆), 이중언(李中彦), 이인화(李仁和), 이빈호(李彬鎬), 이중엽(李中燁), 그리고 이만도의 큰아들 이중업(李中業)과 함께 의병대를 재결성하고 풍기, 영주, 순흥의 의병대들과 합류한 뒤 1896년 3월 30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로 저녁 무렵에 수세에 몰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중린은 청량산에 들어가 전열을 재정비했지만 일본군이 급습을 가해오는 바람에 와해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상계마을에 있던 퇴계 종택에 불을 질러 가옥 일부와 사책들을 불태웠다.

2.4. 을사조약을 반대하다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과 대신들을 강압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에 이만도는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근자에 만국이 개화한 이후에 저들이 곧 그 맹세를 어기고 먼저 개항을 요청하였는데 어기지 못하였고, 다음으로 도성에 들어와 거주하려고 하였는데,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태평 시대가 오래되어 안일이 풍속을 이루어 세력으로 볼 때 적수가 될 수 없어서 그런 점이 있으나, 실로 5적과 같은 무리가 저들 과 체결하여 외세의 원조를 끌어들여 권병(權柄)을 장악하기 를 도모한 소치입니다. (중략)

아! 저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 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이완용(李完用) 등 5 적이 저들과 더불어 5조(條)의 계약을 정하고 성명(聖明)을 협박하여 마침내 조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5적은 대대로 벼슬하여 국가와 좋고 나쁨을 함께 한 신하로서 교묘히 위기를 틈타 협박을 자행하였으니, 그 마음을 따져 보건대 도리어 원수보다 더 흉악합니다. (중략)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살펴 결단을 내리셔서 먼저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의 죄를 바로잡아 서 시조(市朝)에서 처형하고, 다음으로 만국에 통행하는 공법 에 질정하여 협박에 의해 정해진 조약은 폐기해야 합니다.
향산집

또한 이만도는 조약의 폐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만국공법에 남의 내정을 간섭하지 말며, 남의 재물을 취하지 말며, 나라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행할 것이니,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조약은 비록 군주가 친필로 서명하였더라도 폐기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향산집

그러나 아무런 비답을 받지 못하자, 이만도는 크게 실망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통곡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병든 신하는 대궐 아래에서 머리를 찧어 죽지도 못하고 누워서 절뚝거리며 남의 손을 빌려서 상소만 올렸다. 이미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성이 없으니 비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니 지은 죄가 극심하다. 어찌 감히 살아있는 사람과 나란히 살면서 집에서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선조의 무덤아래에서 생매장을 당함이 마땅하다.

이후 그는 일월산 명동의 선영 아래에서 죄를 질면서 거친 밥을 먹고 헤진 옷을 입었으며, 죄인은 편히 머무를 자격이 없다면서 광덕, 모암, 명동, 사동, 고림 등을 떠돌아다녔다. 특히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재산에 자주 머물며 그 앞에 엎드려 근신 생활을 했다. 1907년엔 가선대부, 1910년엔 자헌대부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거부했다.

2.5. 순국

1910년 9월 4일, 이만도는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과 권재훈(權載勳)으로부터 한일병합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하다가 이윽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9월 17일, 그는 단식을 시작하면서 자식들에게 말했다.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을미년 국모시 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년 5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도 두 번째로 죽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에 들어와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였던 것은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 그러한 기대가 없어졌으니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변란의 소식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미루어 둔 것은 자진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방법을 찾았고 뜻도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는 이에 대해서 말하 지 마라.

단식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맏아들 이중업이 통곡하며 중단할 것을 간청하자, 이만도는 거부했다.
나라의 위태로움에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내가 받은 가르침인데, 이제야 그 때를 만났다. 그러나 죽음 또한 분수가 있다. 나는 외척의 대신도 아니고,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신하도 아니며, 한 지역을 맡은 신하도 아니다. 산속에서 병든 몸으로 뒤늦게 변고를 들은 사람이다. 굳이 칼로 자결하거나 독약을 삼 키지 않고 마땅히 조용하게 죽음에 나아가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순종에게 순국 결행을 알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소(遺疏)를 지어 올렸다.
삼가 아룁니다. (중략) 권신(權臣)이 권세를 다투어 왜인(倭人) 을 끼고 국가에 화란을 끼칠 조짐이 벌써 30년 전에 있었는데, 신은 그 당시 시종의 직에 있으면서 한 번도 조정에 간쟁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을사년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신은 병상에 쓰러져 있어 궁궐 계단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여 간신적자와 죽음을 다투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위호를 잃었는데 신만 분수에 넘치는 직질을 받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로서 원수의 백성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면서 전혀 수치스러움 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신에게 이 네 가지의 죄가 있으니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바입니다. 이에 오늘 부터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죄를 씻을 수도 없고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향산집

이만도가 말년에 기거하던 처소의 주인인 이강호(李綱鎬)는 이만도가 단식을 시작한 후 사망할 때까지의 24일간 벌어진 일을 <청구일기(靑邱日記)>로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단식을 시작한 지 9일째 되던 날인 9월 25일에 군수 이경선(李敬善),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阿多中一), 순사 권대균(權大均)이 와서 회유했지만 이만도는 듣지 않았고, 권대균이 나서서 단식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에 아타 나카이치가 칼을 풀어놓고 모자를 벗은 뒤 공손한 자세로 엎드려 음식 들기를 권하자, 이만도는 고개를 홱 돌리며 대꾸했다.
나라가 이미 망한데다가 몸 또한 병들어 이제 죽음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먹고 안 먹는 것이 외국인에게 무슨 상관인가?

9월 27일, 이만도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순국'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선생'이라는 말도 쓰지 말라면서 제문에 그러한 말이 들어있으면 삭제하고 읽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이는 자신이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나온 당부였다. 10월 3일, 단식한 지 17일이 지났지만 그의 정신과 기색이 크게 상하지 않았다. 이에 이만도는 “내가 때때로 냉수를 마셨더니, 물기가 장부를 적셔 죽지 않은 것 같구나.”라고 말하면서, 물 마시는 것마저 그만두었다. 이튿날, 제문을 받으면 꼭 점검하여 ‘선생’ 두 글자를 고치라고 거듭 일렀다.

10월 7일, 단식 21일째 되던 날, 예안주재소 일본인 경찰 1인과 수비병과 순검 각각 3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니, 지금 정신이 없다면 모시는 사람들이 왜 음식을 올리지 않는가.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나섰다. 이 무렵 이만도는 며칠 전부터 기운과 호흡이 미약하고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협박 소리를 듣자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

그리고는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2품 관리다. 어떤 놈이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결국 경찰과 수비병, 순검들은 물러갔고, 이만도는 10월 10일 단식 24일 만에 사망했다. 향년 68세. 그의 유해는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만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대를 이은 독립운동

이만도의 큰아들 이중업(李中業, 1863~1921)은 을미의병에 가담했고, 아버지가 순국한 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파리 장서 운동에 가담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 서명을 받아내는데 힘을 보탰으며, 1920년 중국에 독립 청원을 하기 위해 장남 이동흠을 봉화 사동에 머물던 권상익에게 보내 청원서 작성을 부탁해 초안을 받아낸 후 중국으로 가지고 가려 했다. 그러나 1921년 7월 23일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중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만도의 며느리이자 이중업의 부인인 김락(金洛, 1862~1929)은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 이동흠(李棟欽)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으며,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두 눈을 모두 실명하고 11년간 고통 속에서 살다가 1929년 2월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중업, 김락 부부의 아들이자 이만도의 손자인 이동흠(李棟欽. 1881~1967)은 1917년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아우 이종흠(李棕欽, 1900~1976)과 함께 중국에 독립군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6년 또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고향에 은거했다가 1967년 9월 1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동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아우 이종흠 역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