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rowcolor=#000,#ddd> 성명 | 서훈 내역 | 비고 |
| 이승화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당숙 | |
| 이상룡 | 건국훈장 독립장 (1962) | 본인 | |
| 이준형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장남 | |
| 이병화 | 건국훈장 독립장 (1990) | 장손 | |
| 이상동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동생 | |
| 이형국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이상동의 장남 | |
| 이운형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이상동의 차남 | |
| 이봉희 | 건국훈장 독립장 (1990) | 동생 | |
| 이광민 | 건국훈장 독립장 (1990) | 이봉희의 장남 | |
| 김우락 | 건국훈장 애족장 (2019) | 배우자 | |
| 김대락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김우락의 큰오빠 | |
| 김락 | 건국훈장 애족장 (2001) | 김우락의 여동생 | |
| 이만도 | 건국훈장 독립장 (1962) | 김락의 시아버지 | |
| 이중업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김락의 배우자 | |
| 김도화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종고모부 | |
| 강호석 | 건국훈장 애족장 (2011) | 사위 | |
| 김태동 | 대통령표창 (2003) | 이상동의 사위 | |
| 허은 | 건국훈장 애족장 (2018) | 이병화의 배우자 | |
| 허위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 허은의 재종조부 | |
| 이원기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허길의 장남 | |
| 이육사 (이원록) | 건국훈장 애국장 (1990) | 허길의 차남 | |
| 박경종 | 건국훈장 애족장 (1990) | 매부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50~1961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7명 | |||||||||
| 1950 모리스 윌리엄 | 1950 어니스트 베델 | 1950·1968 일라이 M. 모우리 | 1950 제이 제롬 윌리엄스 | 1950 존 W. 스태거즈 | ||||||
| 1950 찰스 에드워드 러셀 | 1950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 1950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 1950 프레드 A. 돌프 | 1950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 ||||||
| 1950 호러스 뉴턴 알렌 | 1950 윌리엄 L. 로버츠 | 1952 리처드 J. H. 존스턴 | 1952 올리버 R. 에이비슨 | 1959 에템 멘데레스 | ||||||
| 1959 (취소) | 1961 아이작 D. 화이트 | 1961 카터 매그루더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2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26명 | ||||||
| 1962 강무경 의병 | 1962 고광순 의병 | 1962 고두환 만주방면 | 1962 기삼연 의병 | 1962 김덕제 의병 | ||||||
| 1962 김도원 국내항일 | 1962 김도현 의병 | 1962 김동식 국내항일 | 1962 김마리아 국내항일 | 1962 김봉학 계몽운동 | ||||||
| 1962 김석진 계몽운동 | 1962 김수민 의병 | 1962 김승학 임시정부 | 1962 김예진 중국방면 | 1962 김원벽 3·1 운동 | ||||||
| 1962 김정련 중국방면 | 1962 김정익 의열투쟁 | 1962 김진묵 의병 | 1962 김철 임시정부 | 1962 김태원 의병 | ||||||
| 1962 김학규 광복군 | 1962 김혁 만주방면 | 1962 김홍일 광복군 | 1962 나철 의열투쟁 | 1962 문일민 임시정부 | ||||||
| 1962 민양기 만주방면 | 1962 박세화 의병 | 1962 박장호 만주방면 | 1962 박재혁 중국방면 | 1962 박치의 만주방면 | ||||||
| 1962 반하경 계몽운동 | 1962 변학기 의병 | 1962 서일 만주방면 | 1962 선우혁 임시정부 | 1962 손정도 임시정부 | ||||||
| 1962 송계백 일본방면 | 1962 송병선 계몽운동 | 1962 송학선 의열투쟁 | 1962 심남일 의병 | 1962 안경신 만주방면 | ||||||
| 1962 안명근 계몽운동 | 1962 안승우 의병 | 1962 안태국 계몽운동 | 1962 안희제 계몽운동 | 1962 양세봉 만주방면 | ||||||
| 1962 여순근 만주방면 | 1962 오강표 계몽운동 | 1962 오광선 만주방면 | 1962 오기호 의열투쟁 | 1962 왕회종 의병 | ||||||
| 1962 우덕순 의열투쟁 | 1962 우동선 의병 | 1962 유관순 3·1 운동 | 1962 유근 계몽운동 | 1962 유도발 계몽운동 | ||||||
| 1962 유림 임시정부 | 1962 유명규 의병 | 1962 유시연 의병 | 1962 윤병구 중국방면 | 1962 윤세복 만주방면 | ||||||
| 1962 윤세용 만주방면 | 1962 (취소) | 1962 윤현진 임시정부 | 1962 이갑 계몽운동 | 1962 이강 계몽운동 | ||||||
| 1962 이경섭 3·1 운동 | 1962 이광호 국내항일 | 1962 이규갑 임시정부 | 1962 이남규 의병 | 1962 이만도 계몽운동 | ||||||
| 1962 이면주 계몽운동 | 1962 이상룡 임시정부 | 1962 이상철 계몽운동 | 1962 이석 의병 | 1962 이석용 의병 | ||||||
| 1962 이소응 의병 | 1962 이수흥 만주방면 | 1962 이애라 만주방면 | 1962 이윤재 문화운동 | 1962 이인식 3·1 운동 | ||||||
| 1962 이종암 중국방면 | 1962 이종호 만주방면 | 1962 이준식 광복군 | 1962 이중언 계몽운동 | 1962 이진룡 의병 | ||||||
| 1962 이진무 만주방면 | 1962 이학순 계몽운동 | 1962 이한응 계몽운동 | 1962 이현섭 계몽운동 | 1962 이회영 만주방면 | ||||||
| 1962 이희승 문화운동 | 1962 임병찬 의병 | 1962 (취소) | 1962 장진홍 의열투쟁 | 1962 장태수 계몽운동 | ||||||
| 1962 전덕기 계몽운동 | 1962 전덕원 만주방면 | 1962 정동식 계몽운동 | 1962 정용기 의병 | 1962 정인승 문화운동 | ||||||
| 1962 정태진 문화운동 | 1962 정한경 미주방면 | 1962 조경한 임시정부 | 1962 조도선 의열투쟁 | 1962 조맹선 만주방면 | ||||||
| 1962 조병옥 국내항일 | 1962 조인환 의병 | 1962 지용기 의병 | 1962 차도선 의병 | 1962 차병혁 3·1 운동 | ||||||
| 1962 차이석 임시정부 | 1962 채응언 의병 | 1962 채찬 만주방면 | 1962 최시흥 만주방면 | 1962 최양옥 만주방면 | ||||||
| 1962 최용덕 광복군 | 1962 최재형 임시정부 | 1962 최팔용 일본방면 | 1962 최현배 문화운동 | 1962 표영준 의열투쟁 | ||||||
| 1962 한징 문화운동 | 1962 함태영 3·1 운동 | 1962 현익철 만주방면 | 1962 홍만식 계몽운동 | 1962 홍범식 계몽운동 | ||||||
| 1962 홍진 임시정부 | 1962 황학수 임시정부 | 1962 황현 계몽운동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3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224명 | ||||||
| 1963 강명규 만주방면 | 1963 강순필 국내항일 | 1963 강창제 임시정부 | 1963 강철구 만주방면 | 1963 계화 만주방면 | ||||||
| 1963 고운기 광복군 | 1963 고인덕 의열투쟁 | 1963 고제량 의병 | 1963 곽재기 의열투쟁 | 1963 곽종석 3·1 운동 | ||||||
| 1963 구연영 국내항일 | 1963 권영만 국내항일 | 1963 권용일 의병 | 1963 권쾌복 학생운동 | 1963 기산도 의열투쟁 | ||||||
| 1963 김경태 국내항일 | 1963 김관오 광복군 | 1963 김광진 만주방면 | 1963 김규식 만주방면 | 1963 김기한 만주방면 | ||||||
| 1963 (취소) | 1963 김동수 광복군 | 1963 김두만 임시정부 | 1963 김만수 만주방면 | 1963 김병로 문화운동 | ||||||
| 1963 김병록 의열투쟁 | 1963 김보형 만주방면 | 1963 김복한 의병 | 1963 김봉수 만주방면 | 1963 김상길 학생운동 | ||||||
| 1963 김상태 의병 | 1963 김석창 만주방면 | 1963 김성근 임시정부 | 1963 김성엽 만주방면 | 1963 김성호 만주방면 | ||||||
| 1963 김세환 3·1운동 | 1963 김승만 만주방면 | 1963 김영숙 만주방면 | 1963 김영철 만주방면 | 1963 김우근 만주방면 | ||||||
| 1963 김원국 의병 | 1963 김원조 국내항일 | 1963 김재근 국내항일 | 1963 김준승 만주방면 | 1963 김지환 3·1 운동 | ||||||
| 1963 김창곤 만주방면 | 1963 김창근 중국방면 | 1963 김창환 만주방면 | 1963 김천익 만주방면 | 1963 김최명 만주방면 | ||||||
| 1963 김태오 3·1 운동 | 1963 김태원 만주방면 | 1963 김평식 만주방면 | 1963 김한종 국내항일 | 1963 나월환 광복군 | ||||||
| 1963 나중소 만주방면 | 1963 나창헌 임시정부 | 1963 남정각 중국방면 | 1963 노기용 국내항일 | 1963 노복선 광복군 | ||||||
| 1963 민강 국내항일 | 1963 민영구 광복군 | 1963 민필호 임시정부 | 1963 박기성 광복군 | 1963 박기제 만주방면 | ||||||
| 1963 박기한 만주방면 | 1963 박민항 만주방면 | 1963 박상진 국내항일 | 1963 박세건 만주방면 | 1963 박시창 광복군 | ||||||
| 1963 박연백 의병 | 1963 박응백 만주방면 | 1963 박중서 만주방면 | 1963 박찬익 임시정부 | 1963 방순희 임시정부 | ||||||
| 1963 백기준 임시정부 | 1963 백기환 의열투쟁 | 1963 백낙주 만주방면 | 1963 백남규 의병 | 1963 백시찬 만주방면 | ||||||
| 1963 백운한 만주방면 | 1963 백정기 중국방면 | 1963 변춘식 만주방면 | 1963 서상교 학생운동 | 1963 서상렬 의병 | ||||||
| 1963 서상한 일본방면 | 1963 손기업 만주방면 | 1963 손창준 만주방면 | 1963 송병조 임시정부 | 1963 송진우 문화운동 | ||||||
| 1963 신공제 임시정부 | 1963 신덕영 만주방면 | 1963 신송식 광복군 | 1963 신숙 만주방면 | 1963 신영삼 임시정부 | ||||||
| 1963 신우현 만주방면 | 1963 신팔균 만주방면 | 1963 안규홍 의병 | 1963 안병찬 계몽운동 | 1963 안상익 3·1 운동 | ||||||
| 1963 안세환 3·1 운동 | 1963 안재환 중국방면 | 1963 안지호 3·1 운동 | 1963 안춘생 광복군 | 1963 양기하 만주방면 | ||||||
| 1963 양우조 임시정부 | 1963 엄순봉 중국방면 | 1963 여행렬 의열투쟁 | 1963 연병호 임시정부 | 1963 오면직 중국방면 | ||||||
| 1963 오복원 의열투쟁 | 1963 오상서 만주방면 | 1963 오운흥 국내항일 | 1963 우승창 만주방면 | 1963 우재룡 국내항일 | ||||||
| 1963 유기동 만주방면 | 1963 유상렬 임시정부 | 1963 유창순 국내항일 | 1963 유흥수 학생운동 | 1963 윤준희 만주방면 | ||||||
| 1963 윤창하 학생운동 | 1963 이건석 의열투쟁 | 1963 이광 임시정부 | 1963 이광세 국내항일 | 1963 이교재 임시정부 | ||||||
| 1963 이규채 임시정부 | 1963 이기송 3·1 운동 | 1963 이동수 의열투쟁 | 1963 이명상 의병 | 1963 이명하 만주방면 | ||||||
| 1963 이민화 만주방면 | 1963 이상만 임시정부 | 1963 이상호 학생운동 | 1963 이서현 만주방면 | 1963 이설 계몽운동 | ||||||
| 1963 이세영 임시정부 | 1963 이순모 3·1 운동 | 1963 이신애 국내항일 | 1963 이용담 만주방면 | 1963 이우영 만주방면 | ||||||
| 1963 이원직 임시정부 | 1963 이유필 임시정부 | 1963 이인 문화운동 | 1963 이장녕 만주방면 | 1963 이재현 광복군 | ||||||
| 1963 이정 만주방면 | 1963 이정렬 국내항일 | 1963 이준용 만주방면 | 1963 이창용 만주방면 | 1963 이춘영 의병 | ||||||
| 1963 이치모 국내항일 | 1963 이탁 임시정부 | 1963 이한구 의병 | 1963 이홍래 만주방면 | 1963 이화익 중국방면 | ||||||
| 1963 이화주 만주방면 | 1963 임국정 만주방면 | 1963 임봉주 국내항일 | 1963 임의탁 임시정부 | 1963 임창모 의병 | ||||||
| 1963 장관주 국내항일 | 1963 장기천 만주방면 | 1963 장덕준 문화운동 | 1963 장덕진 만주방면 | 1963 장두환 국내항일 | ||||||
| 1963 장해평 중국방면 | 1963 장형 국내항일 | 1963 전좌한 중국방면 | 1963 전태선 의열투쟁 | 1963 전홍섭 만주방면 | ||||||
| 1963 정남용 국내항일 | 1963 정봉화 만주방면 | 1963 정순경 만주방면 | 1963 정신 만주방면 | 1963 정의도 임시정부 | ||||||
| 1963 정이형 만주방면 | 1963 정인복 만주방면 | 1963 정찬조 만주방면 | 1963 정태희 임시정부 | 1963 조경환 의병 | ||||||
| 1963 조길룡 학생운동 | 1963 조명하 중국방면 | 1963 조병준 만주방면 | 1963 조시원 광복군 | 1963 조원세 국내항일 | ||||||
| 1963 조인제 광복군 | 1963 조종대 국내항일 | 1963 조지 새넌 맥큔 | 1963 조지 쇼 | 1963 조진탁 3·1 운동 | ||||||
| 1963 조창호 의열투쟁 | 1963 주기철 문화운동 | 1963 주명우 3·1 운동 | 1963 주병웅 만주방면 | 1963 지달수 광복군 | ||||||
| 1963 차병제 만주방면 | 1963 채기중 국내항일 | 1963 최관용 만주방면 | 1963 최낙철 학생운동 | 1963 최능찬 3·1 운동 | ||||||
| 1963 최병선 중국방면 | 1963 최병수 3·1 운동 | 1963 최병호 만주방면 | 1963 최석준 만주방면 | 1963 최수봉 의열투쟁 | ||||||
| 1963 최은식 3·1 운동 | 1963 최지관 만주방면 | 1963 최진동 만주방면 | 1963 최천호 의열투쟁 | 1963 한봉수 의병 | ||||||
| 1963 한상렬 의병 | 1963 한상호 만주방면 | 1963 한흥근 의열투쟁 | 1963 함석은 만주방면 | 1963 허형 의열투쟁 | ||||||
| 1963 현순 임시정부 | 1963 현천묵 만주방면 | 1963 홍사구 의병 | 1963 홍성익 임시정부 | 1963 홍주 만주방면 | ||||||
| 1963 홍찬섭 3·1 운동 | 1963 황덕환 만주방면 | 1963 황병길 만주방면 | 1963 황상규 중국방면 | 1963 황학봉 만주방면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5~1969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94명 | ||||
| 1965 체스터 니미츠 | 1966 천궈푸 | 1968 고이허 만주방면 | 1968 궈타이치 | 1968 권준 중국방면 | ||||||
| 1968 (취소) | 1968 김기형 임시정부 | 1968 김명권 만주방면 | 1968 김봉식 만주방면 | 1968 김상옥 만주방면 | ||||||
| 1968 김석 중국방면 | 1968 김성택 만주방면 | 1968 김시중 의병 | 1968 김용구 의병 | 1968 김원범 의병 | ||||||
| 1968 김원식 만주방면 | 1968 (취소) | 1968 김진성 만주방면 | 1968 김진준 만주방면 | 1968 김천성 광복군 | ||||||
| 1968 김태연 만주방면 | 1968 김학섭 만주방면 | 1968 김홍서 임시정부 | 1968 노병대 의병 | 1968 노태준 광복군 | ||||||
| 1968 다이리 | 1968 로버트 그리어슨 | 1968 류용야오 | 1968 마수례 | 1968 모더후이 | ||||||
| 1968 문창학 만주방면 | 1968 박도경 만주방면 | 1968 박인화 의병 | 1968 박태열 만주방면 | 1968 박희광 만주방면 | ||||||
| 1968 백삼규 만주방면 | 1968 서원준 만주방면 | 1968 서의배 국내항일 | 1968 손승억 만주방면 |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
| 1968 신정백 의병 | 1968 신태식 의병 | 1968 신현구 국내항일 | 1968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 1968 양승우 만주방면 | ||||||
| 1968 양한규 의병 | 1968 여준 만주방면 | 1968 유득신 국내항일 | 1968 유상근 의열투쟁 | 1968 유택수 만주방면 | ||||||
| 1968 윤이병 계몽운동 | 1968 이규선 3·1 운동 | 1968 이규창 중국방면 | 1968 이기 의열투쟁 | 1968 이명균 국내항일 | ||||||
| 1968 이병묵 만주방면 | 1968 이병욱 만주방면 | 1968 이붕해 만주방면 | 1968 이성구 중국방면 | 1968 이성우 의열투쟁 | ||||||
| 1968 이양섭 3·1 운동 | 1968 이응서 만주방면 | 1968 이의준 만주방면 | 1968 이진택 만주방면 | 1968 이창덕 만주방면 | ||||||
| 1968 이현규 의병 | 1968 이희경 임시정부 | 1968 임치정 계몽운동 | 1968 장소진 3·1운동 | 1968 장윤덕 의병 | ||||||
| 1968 장쥐 | 1968 장진원 중국방면 | 1968 장췬 | 1968 전덕명 만주방면 | 1968 정서송 3·1 운동 | ||||||
| 1968 조지 애쉬모어 피치 | 1968 조창선 국내항일 | 1968 주석환 만주방면 | 1968 주칭란 | 1968 차병수 임시정부 | ||||||
| 1968 차희식 3·1 운동 | 1968 채세윤 만주방면 | 1968 채원개 광복군 | 1968 천리푸 | 1968 최규동 문화운동 | ||||||
| 1968 최도환 의병 | 1968 최세윤 의병 | 1968 최영걸 만주방면 | 1968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1968 한훈 의열투쟁 | ||||||
| 1968 한흥 만주방면 | 1968 홍원식 의병 | 1968 황병학 의병 | 1968 황줴 | 1968 황창오 국내항일 | ||||||
| 1969 세바스티안 우가르테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77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84명 | ||||||||
| 1977 쉐웨 | 1977 강상모 만주방면 | 1977 강진원 의병 | 1977 권기옥 중국방면 | 1977 김교헌 만주방면 | ||||||
| 1977 김대규 의병 | 1977 김동신 의병 | 1977 김성수 중국방면 | 1977 김순애 임시정부 | 1977 김승곤 광복군 | ||||||
| 1977 김약연 만주방면 | 1977 김용재 광복군 | 1977 김이직 만주방면 | 1977 김중건 만주방면 | 1977 김진만 국내항일 | ||||||
| 1977 (취소) | 1977 나태섭 광복군 | 1977 남궁억 문화운동 | 1977 남석인 의병 | 1977 노원섭 의병 | ||||||
| 1977 노응규 의병 | 1977 노임수 의병 | 1977 문상익 3·1 운동 | 1977 문창숙 만주방면 | 1977 민용호 의병 | ||||||
| 1977 박승길 만주방면 | 1977 박영준 광복군 | 1977 박영희 만주방면 | 1977 박인항 국내항일 | 1977 박춘실 의병 | ||||||
| 1977 서상용 만주방면 | 1977 서영석 3·1운동 | 1977 손양윤 만주방면 | 1977 송병순 계몽운동 | 1977 송주면 계몽운동 | ||||||
| 1977 신건식 임시정부 | 1977 신언성 만주방면 | 1977 안경근 임시정부 | 1977 안병무 임시정부 | 1977 양진여 의병 | ||||||
| 1977 염온동 임시정부 | 1977 오광심 광복군 | 1977 오성술 의병 | 1977 왕광연 3·1 운동 | 1977 원심창 중국방면 | ||||||
| 1977 유민식 만주방면 | 1977 유병기 의병 | 1977 유석현 중국방면 | 1977 유장렬 국내항일 | 1977 유지명 의병 | ||||||
| 1977 유해준 광복군 | 1977 윤병구 미주방면 | 1977 이강산 의병 | 1977 이강훈 중국방면 | 1977 이관석 만주방면 | ||||||
| 1977 이기손 의병 | 1977 이병채 의병 | 1977 이상정 임시정부 | 1977 이승길 계몽운동 | 1977 이우식 문화운동 | ||||||
| 1977 이원대 중국방면 | 1977 이재윤 의병 | 1977 이종건 광복군 | 1977 이종희 광복군 | 1977 이진영 광복군 | ||||||
| 1977 이형우 만주방면 | 1977 이화일 만주방면 | 1977 임용상 의병 | 1977 장한성 만주방면 | 1977 정용대 의병 | ||||||
| 1977 정운경 의병 | 1977 정춘서 의병 | 1977 조용하 미주방면 | 1977 조정인 의병 | 1977 차천모 만주방면 | ||||||
| 1977 채광묵 의병 | 1977 최욱영 의병 | 1977 최익형 계몽운동 | 1977 최중호 중국방면 | 1977 최해 만주방면 | ||||||
| 1977 한성수 광복군 | 1977 허빈 만주방면 | 1977 홍준옥 3·1 운동 | 1977 홍충희 만주방면 | 1977 황재운 3·1운동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80~1990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01명 | ||||
| 1980 강원형 계몽운동 | 1980 강인수 중국방면 | 1980 권인규 의병 | 1980 금달연 의병 | 1980 기우만 의병 | ||||||
| 1980 김대지 임시정부 | 1980 김봉원 만주방면 | 1980 김인전 임시정부 | 1980 김일두 임시정부 | 1980 마진 만주방면 | ||||||
| 1980 박문용 임시정부 | 1980 사도덕 | 1980 서종채 의병 | 1980 손영각 의병 | 1980 안무 만주방면 | ||||||
| 1980 양근환 일본방면 | 1980 양윤숙 의병 | 1980 오의선 임시정부 | 1980 왕주이 | 1980 이구연 임시정부 | ||||||
| 1980 이능권 의병 | 1980 이봉우 만주방면 | 1980 이종혁 만주방면 | 1980 임이걸 3·1 운동 | 1980 장석영 3·1 운동 | ||||||
| 1980 조훈 만주방면 | 1980 진치언 의병 | 1980 진희창 임시정부 | 1980 한봉근 중국방면 | 1980 한정만 의병 | ||||||
| 1982 김석황 임시정부 | 1982 김성숙 임시정부 | 1982 김영백 의병 | 1982 류인식 문화운동 | 1982 윤세주 중국방면 | ||||||
| 1982 윤인순 의병 | 1983 정현섭 중국방면 | 1983 조윤하 만주방면 | 1982 최창식 임시정부 | 1986 권석도 의병 | ||||||
| 1986 김갑 임시정부 | 1986 김영현 만주방면 | 1986 이명순 만주방면 | 1986 정순만 만주방면 | 1986 황준성 의병 | ||||||
| 1987 신언준 중국방면 | 1987 안정근 임시정부 | 1988 유동하 의열투쟁 | 1989 고창일 노령방면 | 1989 엄항섭 임시정부 | ||||||
| 1989 원세훈 중국방면 | 1990 강기덕 국내항일 | 1990 박봉석 의병 | 1990 서병희 의병 | 1990 손덕오 의병 | ||||||
| 1990 염인서 의병 | 1990 이은영 의병 | 1990 이충응 의병 | 1990 이필봉 의병 | 1990 이현 3·1 운동 | ||||||
| 1990 이황룡 의병 | 1990 이희룡 3·1 운동 | 1990 임하중 의병 | 1990 장인초 의병 | 1990 정기찬 의병 | ||||||
| 1990 정철화 의병 | 1990 조병두 의병 | 1990 지석용 3·1 운동 | 1990 최산흥 의병 | 1990 추삼만 의병 | ||||||
| 1990 김상덕 임시정부 | 1990 김의한 임시정부 | 1990 김일곤 중국방면 | 1990 김형빈 만주방면 | 1990 명제세 임시정부 | ||||||
| 1990 박건웅 임시정부 | 1990 오영선 임시정부 | 1990 윤해 만주방면 | 1990 이관직 만주방면 | 1990 이광민 만주방면 | ||||||
| 1990 이병화 만주방면 | 1990 이종건 만주방면 | 1990 장도빈 국내항일 | 1990 장철호 만주방면 | 1990 정인보 문화운동 | ||||||
| 1990 조지영 임시정부 | 1990 최이붕 중국방면 | 1990 김춘배 만주방면 | 1990 김치홍 의병 | 1990 박여성 의병 | ||||||
| 1990 박인호 3·1운동 | 1990 양경학 의병 | 1990 윤동주 학생운동 | 1990 이대극 의병 | 1990 이명서 만주방면 | ||||||
| 1990 이봉희 만주방면 | 1990 장일환 국내항일 | 1990 정기선 의병 | 1990 최동오 임시정부 | 1990 태양욱 의병 | ||||||
| 1990 한이경 국내항일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2~1995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14명 | ||||||||
| 1992 곽중규 임시정부 | 1992 김철남 임시정부 | 1992 이달 중국방면 | 1992 고평 만주방면 | 1992 손기혁 의병 | ||||||
| 1992 현정건 중국방면 | 1992 현정경 만주방면 | 1993 이철형 의병 | 1993 강기운 만주방면 | 1993 김태원 의병 | ||||||
| 1993 문석봉 의병 | 1993 박건병 중국방면 | 1993 박치화 만주방면 | 1993 이필희 의병 | 1993 이흥관 임시정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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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 강이봉 의병 | 1995 강제하 만주방면 | 1995 강진해 만주방면 | 1995 계봉우 임시정부 | 1995 권순명 의병 | ||||||
| 1995 권준 의병 | 1995 금기철 의병 | 1995 김강 만주방면 | 1995 김경운 의병 | 1995 김난섭 만주방면 | ||||||
| 1995 김덕순 의병 | 1995 김덕흥 의병 | 1995 김동수 의병 | 1995 김문희 임시정부 | 1995 김범이 의병 | ||||||
| 1995 김법린 국내항일 | 1995 김병조 중국방면 | 1995 김병태 의열투쟁 | 1995 김봉규 의병 | 1995 김선여 의병 | ||||||
| 1995 김성범 만주방면 | 1995 김수곡 의병 | 1995 김영란 국내항일 | 1995 김영렬 만주방면 | 1995 김용대 만주방면 | ||||||
| 1995 김원국 만주방면 | 1995 김원식 의병 | 1995 김율 의병 | 1995 김응백 의병 | 1995 김이섭 만주방면 | ||||||
| 1995 김일봉 만주방면 | 1995 김일원 의병 | 1995 김정원 의병 | 1995 김종철 의병 | 1995 김준택 만주방면 | ||||||
| 1995 김창균 만주방면 | 1995 김태연 중국방면 | 1995 김훈 만주방면 | 1995 나병삼 만주방면 | 1995 나시운 의병 | ||||||
| 1995 나정구 만주방면 | 1995 노을룡 중국방면 | 1995 노종균 중국방면 | 1995 문양목 미주방면 | 1995 문일평 중국방면 | ||||||
| 1995 박경순 임시정부 | 1995 박차정 중국방면 | 1995 성익현 중국방면 | 1995 송종익 미주방면 | 1995 송헌주 미주방면 | ||||||
| 1995 신석우 임시정부 | 1995 신창룡 의병 | 1995 신창현 의병 | 1995 안공근 임시정부 | 1995 안국형 만주방면 | ||||||
| 1995 안원규 미주방면 | 1995 안현경 미주방면 | 1995 엄주필 노령방면 | 1995 오상원 의병 | 1995 유광흘 만주방면 | ||||||
| 1995 유성삼 만주방면 | 1995 유일한 미주방면 | 1995 윤덕보 만주방면 | 1995 윤흥곤 의병 | 1995 이광복 중국방면 | ||||||
| 1995 이교영 의병 | 1995 이대위 미주방면 | 1995 이덕삼 중국방면 | 1995 이범직 의병 | 1995 이병진 만주방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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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 최진하 미주방면 | 1995 최천유 의병 | 1995 한시대 미주방면 | 1995 허근 만주방면 | 1995 홍석호 만주방면 | ||||||
| 1995 홍언 미주방면 | 1995 홍학순 만주방면 | 1995 황봉신 의병 | 1995 황봉운 의병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6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73명 | |||||
| 1996 강윤희 의병 | 1996 김치보 노령방면 | 1996 이중집 만주방면 | 1996 장명도 만주방면 | 1996 추푸청 | ||||||
| 1996 남공선 만주방면 | 1996 안광조 의병 | 1996 엄해윤 의병 | 1996 윤상열 3·1 운동 | 1996 정인국 의병 | ||||||
| 1996 최봉준 노령방면 | 1996 최영호 만주방면 | 1997 김호 미주방면 | 1997 백일규 미주방면 | 1997 임성우 미주방면 | ||||||
| 1997 조병요 미주방면 | 1998 김용성 미주방면 | 1998 김찬수 만주방면 | 1998 박사화 의병 | 1998 심용준 만주방면 | ||||||
| 1998 차천리 만주방면 | 1999 신우여 노령방면 | 1999 후쭝난 | 2000 이호원 만주방면 | 2000 이성화 의병 | ||||||
| 2001 김학무 중국방면 | 2002 김규면 노령방면 | 2002 신현규 국내항일 | 2002 채영 노령방면 | 2003 이필상 의병 | ||||||
| 2004 윤자영 중국방면 | 2005 권오설 국내항일 | 2005 조동호 국내항일 | 2005 김철수 국내항일 | 2005 김태연 국내항일 | ||||||
| 2005 김한 중국방면 | 2005 정헌태 국내항일 | 2005 최윤구 만주방면 | 2005 한위건 중국방면 | 2006 고지형 3·1운동 | ||||||
| 2006 박영 만주방면 | 2006 이재유 국내항일 | 2006 이민환 노령방면 | 2006 한봉철 만주방면 | 2007 이자해 중국방면 | ||||||
| 2007 전일 노령방면 | 2008 유기석 중국방면 | 2008 이춘숙 임시정부 | 2009 장기초 만주방면 | 2009 길선주 3·1 운동 | ||||||
| 2009 이운혁 국내항일 | 2010 이경호 국내항일 | 2010 김창헌 만주방면 | 2010 김호 만주방면 | 2010 신광삼 만주방면 | ||||||
| 2010 유찬희 만주방면 | 2010 임기홍 만주방면 | 2010 이웅해 만주방면 | 2011 강영소 미주방면 | 2011 유상돈 노령방면 | ||||||
| 2012 임성섭 국내항일 | 2013 박창철 만주방면 | 2014 프레더릭 매켄지 | 2014 백남준 만주방면 | 2014 송중직 국내항일 | ||||||
| 2014 이진산 중국방면 | 2015 강익록 국내항일 | 2015 전병현 임시정부 | 2017 조응순 만주방면 | 2019 이봉구 3·1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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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 자 | 관필(觀必) |
| 호 | 향산(響山) |
| 본관 | 진성 이씨 하계파(下溪派) |
| 출생 | 1842년 1월 28일 |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하계 마을 | |
| 사망 | 1910년 10월 10일 (향년 68세) |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청구동 | |
|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 |
| 서훈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이만도는 1842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에서 아버지 복제(復齊) 이휘준(李彙濬)과 어머니 야성(冶城) 송씨(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의 11대손이며, 조부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은 순조 11년(18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고, 부친인 이휘준도 철종 7년(185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 명망 높은 관리였다. 이만도는 일찍부터 부친과 족형인 이만각(李晩慤)에게서 퇴계학을 전수받았고, 18살 때 봉화 유곡의 안동 권씨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 권승하(權承夏)는 아우인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와 함께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저명한 학자였기에, 이만도는 이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박민영의 저서 <거룩한 순국지사 향산 이만도>에 따르면, 이만도는 15살 때 과거에 응시하기로 결심하고 "내가 벼슬하지 않으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후 왼손 엄지를 10년 동안 굽혔다가 1866년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야 비로소 폈다고 한다. 또한 <향산전서>에 따르면, 부친은 이만도에게 입지(立志)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고 한다.
선비란 뜻을 세움을 귀중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마치 가슴 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이 하는 법이다. 위로는 머리로 하늘을 꿰뚫듯이 하고, 아래로는 발이 땅의 움직임을 꿰뚫어야 하니 한 순간이라도 마음이 흔들린다면 사업을 이루어 낼 수 없다 .
이후 이만도가 25세에 장원 급제하자, 부친은 이만도에게 관리로서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내가 이미 관직이 높고, 너 또한 장원이 되니 기쁜 것이 아 니라 실로 두렵다.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다가는 집안을 망친다’는 유계(遺戒)가 지엄하니 너는 마땅히 깊이 새겨야 할 것이 다. (중략) 선비가 나라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나라가 평온하면 치화(治化)로서 은혜를 갚을 것이며, 위급함을 보면 마땅히 목숨을 던져야 한다. 지금 변경이 위급한데 만약 조정이 너를 죽을 자리에 두면 반드시 죽음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신하로서의 의리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임이 어찌 크고 무겁지 아니한가?
2.2. 관직 경력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사간원 정원,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 및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집의 등을 거쳤다. 1873년에는 홍문관 동료들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청한 최익현에게 엄형을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1876년에는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자 사간원 집의로서 대사간(大司諫) 이재경(李在敬), 사간(司諫) 신석구(愼錫九), 장령(掌令) 오인영(吳麟泳)과 함께 최익현을 추국해 죄를 캐물을 것을 요청했다.이후 성균관 사성, 홍문관 응교 등 여러 관직을 지낸 이만도는 양산군수로서 세금 징수를 너그럽게 하고 물난리를 만나 곤경에 처했던 백성을 도와 칭송을 자자했다. 이 공으로 한양으로 상경한 그는 홍문관 수찬에 이어 1882년 통정대부 및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월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6월 임오군란이 발발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했다.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아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고향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했다.
1885년, 경상도의 안동 유생 김진우 등이 상소를 올려 이만도 등 도산 서원 문인들을 탄핵했다.
작년 가을 경주(慶州) 유생인 진사(進士) 이능모(李能模)가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 것과 관련하여 내린 비지(批旨)에서, ‘억울한 것을 풀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조처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도신(道臣) 조강하(趙康夏)가 성상의 비지(批旨)를 받들고 열읍(列邑)에 감결(減結)하여 신칙하기를, ‘내직(內職)으로는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외직(外職)으로는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지내는 사람이 연이으며 심지어 종묘(宗廟)의 제사에는 모두 다 축사(祝司)의 관리로 추천되고 문묘(文廟)의 제사에는 다같이 헌관(獻官)과 집사(執事) 반열에 참가하니 조정에서는 차별이 없고 성균관(成均館)에서도 두루 통한다.
그런데 어째서 경상도(慶尙道) 한 지역에서만 견문이 막히고 제한하는 데에 빠져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직임을 주지 않고 조상의 제사에서 배척하면서「신유(新儒)와 구유(舊儒)의 차이는 백세(百世)를 가도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하니, 이 사람들로 하여금 원통한 마음을 품게 하고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한번 내린 임금의 말을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대양(對揚)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치로는 유임(儒任)을 통행(通行)시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혹시 구유(舊遊)라고 칭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못된 짓을 답습하는 경우에는 이름을 지적하여 치보(馳報)하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조처하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안(禮安)의 도산 서원(陶山書院)은 임금의 명에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윤리를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해치는 변고가 이를 계기로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전 참의(前參議) 이만도(李晩燾)와 유학(幼學) 이만응(李晩鷹)은 임금의 명을 거역할 계책을 제창하고 겸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푸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여러 이씨(李氏)들을 서원 뜰에 많이 모아놓고 그 서자(庶子) 족속의 항렬(行列)이 높은 자 몇 사람을 잡아다가 뜰 아래에 결박하여 꿇어앉히고 장(杖)을 치고 태(笞)를 치며 노예처럼 취급하고는 ‘서자(庶子) 부류를 허락하지 말라.〔勿許庶類〕’라는 네글자의 글을 크게 써서 벽에다 붙였습니다.
그런데 본읍(本邑)의 현감(縣監) 이학연(李鶴淵)은 조정의 명령을 거행할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교지를 받드는 신유(新儒)들을 잡아들이고 형리(刑吏)를 시켜 ‘조령(朝令)’이라는 두 글자를 먹으로 지워버리게 하고는 형장을 세 차례 엄하게 쳐서 몇 달 동안 단단히 가두어 놓고 있으니, 아! 통분할 일입니다. 교화에 저항하고 임금의 명을 거역한 무리들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이 무리들처럼 군명(君命)을 어기고 기강을 문란시키는 자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잘 살펴서 헤아려보고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명을 거역한 죄를 다스리고, 특별히 엄한 교지(敎旨)를 내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여 향교·서원·향당(鄕黨)의 여러 직임을 속히 통행(通行)시켜서 사람 축에 낄 수 있게 하고 전하의 혜택을 영원히 칭송하게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종실록 고종 22년 6월 9일자 기사
그런데 어째서 경상도(慶尙道) 한 지역에서만 견문이 막히고 제한하는 데에 빠져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직임을 주지 않고 조상의 제사에서 배척하면서「신유(新儒)와 구유(舊儒)의 차이는 백세(百世)를 가도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하니, 이 사람들로 하여금 원통한 마음을 품게 하고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한번 내린 임금의 말을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대양(對揚)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억울함을 풀어주는 조치로는 유임(儒任)을 통행(通行)시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혹시 구유(舊遊)라고 칭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못된 짓을 답습하는 경우에는 이름을 지적하여 치보(馳報)하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조처하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안(禮安)의 도산 서원(陶山書院)은 임금의 명에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윤리를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해치는 변고가 이를 계기로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전 참의(前參議) 이만도(李晩燾)와 유학(幼學) 이만응(李晩鷹)은 임금의 명을 거역할 계책을 제창하고 겸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푸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여러 이씨(李氏)들을 서원 뜰에 많이 모아놓고 그 서자(庶子) 족속의 항렬(行列)이 높은 자 몇 사람을 잡아다가 뜰 아래에 결박하여 꿇어앉히고 장(杖)을 치고 태(笞)를 치며 노예처럼 취급하고는 ‘서자(庶子) 부류를 허락하지 말라.〔勿許庶類〕’라는 네글자의 글을 크게 써서 벽에다 붙였습니다.
그런데 본읍(本邑)의 현감(縣監) 이학연(李鶴淵)은 조정의 명령을 거행할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교지를 받드는 신유(新儒)들을 잡아들이고 형리(刑吏)를 시켜 ‘조령(朝令)’이라는 두 글자를 먹으로 지워버리게 하고는 형장을 세 차례 엄하게 쳐서 몇 달 동안 단단히 가두어 놓고 있으니, 아! 통분할 일입니다. 교화에 저항하고 임금의 명을 거역한 무리들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이 무리들처럼 군명(君命)을 어기고 기강을 문란시키는 자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잘 살펴서 헤아려보고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명을 거역한 죄를 다스리고, 특별히 엄한 교지(敎旨)를 내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여 향교·서원·향당(鄕黨)의 여러 직임을 속히 통행(通行)시켜서 사람 축에 낄 수 있게 하고 전하의 혜택을 영원히 칭송하게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종실록 고종 22년 6월 9일자 기사
하지만 조정은 이만도를 비롯한 도산 서원 유생들을 잘 타이르는 선에서 그칠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경상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도산 서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사족들의 지지를 잃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3. 을미의병
1894년, 일본군이 동학 농민 혁명으로부터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인천에 상륙한 뒤 경복궁을 장악하고 김홍집을 위시한 내각을 구성해 갑오개혁을 단행하게 했다. 이에 이만도는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끊은 것에 비판을 가했다.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잊을 수 없지만 지금 원수같은 이웃의 협박에 따라 청을 배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관리의 직제는 조종에서 정한 것이고 복색은 황명의 구제이다. 오랑캐의 법으로서 중화를 훼방하는 것은 불가하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이만도는 "신하된 몸으로 천고에 없는 변을 당했는데도 의거를 일으켜 복수하지도 못하고, 상례(喪禮)를 치를 여지조차 없으니"라고 개탄했다. 게다가 그해 11월 17일 일제가 단발령을 발표하자, 그는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만도는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될 때부터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고려했지만 왕명이 없이 스스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죄를 얻을 것이 두려워 주저했다. 그러다가 단발령 발표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도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895년 11월 29일 예안에서 이중린(李中麟), 이인화(李仁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장이 되었고, 이중린은 선봉장, 이인화는 유격장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보다 앞서 거병한 안동 의병대가 관군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겁을 먹은 예안 의병대는 결성된 지 9일 만인 12월 8일에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에 이만도는 탄식하며 남은 이들에게 말했다.
오합지졸의 농민들이 황겁하게 흩어지는 것을 굳이 나무랄 것이 없다. 영이 없어도 흩어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차라리 영을 내려 흩어지는 것이 오히려 살아남게 되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너희들은 각자 돌아가 본업에 종사하면서 다시 알릴 때까지 기다려라
이렇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의병대가 와해되는 걸 지켜본 이만도는 근처의 산에 입산한 뒤 수년간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그의 밑에서 선봉장을 맡았던 이중린이 진성 이씨 문중의 이중목(李中穆), 이중언(李中彦), 이인화(李仁和), 이빈호(李彬鎬), 이중엽(李中燁), 그리고 이만도의 큰아들 이중업(李中業)과 함께 의병대를 재결성하고 풍기, 영주, 순흥의 의병대들과 합류한 뒤 1896년 3월 30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로 저녁 무렵에 수세에 몰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중린은 청량산에 들어가 전열을 재정비했지만 일본군이 급습을 가해오는 바람에 와해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상계마을에 있던 퇴계 종택에 불을 질러 가옥 일부와 사책들을 불태웠다.
2.4. 을사조약을 반대하다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과 대신들을 강압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에 이만도는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근자에 만국이 개화한 이후에 저들이 곧 그 맹세를 어기고 먼저 개항을 요청하였는데 어기지 못하였고, 다음으로 도성에 들어와 거주하려고 하였는데,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태평 시대가 오래되어 안일이 풍속을 이루어 세력으로 볼 때 적수가 될 수 없어서 그런 점이 있으나, 실로 5적과 같은 무리가 저들 과 체결하여 외세의 원조를 끌어들여 권병(權柄)을 장악하기 를 도모한 소치입니다. (중략)
아! 저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 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이완용(李完用) 등 5 적이 저들과 더불어 5조(條)의 계약을 정하고 성명(聖明)을 협박하여 마침내 조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5적은 대대로 벼슬하여 국가와 좋고 나쁨을 함께 한 신하로서 교묘히 위기를 틈타 협박을 자행하였으니, 그 마음을 따져 보건대 도리어 원수보다 더 흉악합니다. (중략)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살펴 결단을 내리셔서 먼저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의 죄를 바로잡아 서 시조(市朝)에서 처형하고, 다음으로 만국에 통행하는 공법 에 질정하여 협박에 의해 정해진 조약은 폐기해야 합니다.
향산집
아! 저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 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이완용(李完用) 등 5 적이 저들과 더불어 5조(條)의 계약을 정하고 성명(聖明)을 협박하여 마침내 조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5적은 대대로 벼슬하여 국가와 좋고 나쁨을 함께 한 신하로서 교묘히 위기를 틈타 협박을 자행하였으니, 그 마음을 따져 보건대 도리어 원수보다 더 흉악합니다. (중략)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살펴 결단을 내리셔서 먼저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의 죄를 바로잡아 서 시조(市朝)에서 처형하고, 다음으로 만국에 통행하는 공법 에 질정하여 협박에 의해 정해진 조약은 폐기해야 합니다.
향산집
또한 이만도는 조약의 폐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만국공법에 남의 내정을 간섭하지 말며, 남의 재물을 취하지 말며, 나라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행할 것이니,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조약은 비록 군주가 친필로 서명하였더라도 폐기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향산집
향산집
그러나 아무런 비답을 받지 못하자, 이만도는 크게 실망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통곡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병든 신하는 대궐 아래에서 머리를 찧어 죽지도 못하고 누워서 절뚝거리며 남의 손을 빌려서 상소만 올렸다. 이미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성이 없으니 비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니 지은 죄가 극심하다. 어찌 감히 살아있는 사람과 나란히 살면서 집에서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선조의 무덤아래에서 생매장을 당함이 마땅하다.
이후 그는 일월산 명동의 선영 아래에서 죄를 질면서 거친 밥을 먹고 헤진 옷을 입었으며, 죄인은 편히 머무를 자격이 없다면서 광덕, 모암, 명동, 사동, 고림 등을 떠돌아다녔다. 특히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재산에 자주 머물며 그 앞에 엎드려 근신 생활을 했다. 1907년엔 가선대부, 1910년엔 자헌대부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거부했다.
2.5. 순국
1910년 9월 4일, 이만도는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과 권재훈(權載勳)으로부터 한일병합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하다가 이윽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9월 17일, 그는 단식을 시작하면서 자식들에게 말했다.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을미년 국모시 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년 5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도 두 번째로 죽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에 들어와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였던 것은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 그러한 기대가 없어졌으니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변란의 소식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미루어 둔 것은 자진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방법을 찾았고 뜻도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는 이에 대해서 말하 지 마라.
단식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맏아들 이중업이 통곡하며 중단할 것을 간청하자, 이만도는 거부했다.
나라의 위태로움에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내가 받은 가르침인데, 이제야 그 때를 만났다. 그러나 죽음 또한 분수가 있다. 나는 외척의 대신도 아니고,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신하도 아니며, 한 지역을 맡은 신하도 아니다. 산속에서 병든 몸으로 뒤늦게 변고를 들은 사람이다. 굳이 칼로 자결하거나 독약을 삼 키지 않고 마땅히 조용하게 죽음에 나아가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순종에게 순국 결행을 알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소(遺疏)를 지어 올렸다.
삼가 아룁니다. (중략) 권신(權臣)이 권세를 다투어 왜인(倭人) 을 끼고 국가에 화란을 끼칠 조짐이 벌써 30년 전에 있었는데, 신은 그 당시 시종의 직에 있으면서 한 번도 조정에 간쟁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을사년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신은 병상에 쓰러져 있어 궁궐 계단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여 간신적자와 죽음을 다투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위호를 잃었는데 신만 분수에 넘치는 직질을 받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로서 원수의 백성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면서 전혀 수치스러움 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신에게 이 네 가지의 죄가 있으니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바입니다. 이에 오늘 부터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죄를 씻을 수도 없고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향산집
신에게 이 네 가지의 죄가 있으니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바입니다. 이에 오늘 부터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죄를 씻을 수도 없고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향산집
이만도가 말년에 기거하던 처소의 주인인 이강호(李綱鎬)는 이만도가 단식을 시작한 후 사망할 때까지의 24일간 벌어진 일을 <청구일기(靑邱日記)>로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단식을 시작한 지 9일째 되던 날인 9월 25일에 군수 이경선(李敬善),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阿多中一), 순사 권대균(權大均)이 와서 회유했지만 이만도는 듣지 않았고, 권대균이 나서서 단식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에 아타 나카이치가 칼을 풀어놓고 모자를 벗은 뒤 공손한 자세로 엎드려 음식 들기를 권하자, 이만도는 고개를 홱 돌리며 대꾸했다.
나라가 이미 망한데다가 몸 또한 병들어 이제 죽음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먹고 안 먹는 것이 외국인에게 무슨 상관인가?
9월 27일, 이만도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순국'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선생'이라는 말도 쓰지 말라면서 제문에 그러한 말이 들어있으면 삭제하고 읽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이는 자신이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나온 당부였다. 10월 3일, 단식한 지 17일이 지났지만 그의 정신과 기색이 크게 상하지 않았다. 이에 이만도는 “내가 때때로 냉수를 마셨더니, 물기가 장부를 적셔 죽지 않은 것 같구나.”라고 말하면서, 물 마시는 것마저 그만두었다. 이튿날, 제문을 받으면 꼭 점검하여 ‘선생’ 두 글자를 고치라고 거듭 일렀다.
10월 7일, 단식 21일째 되던 날, 예안주재소 일본인 경찰 1인과 수비병과 순검 각각 3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니, 지금 정신이 없다면 모시는 사람들이 왜 음식을 올리지 않는가.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나섰다. 이 무렵 이만도는 며칠 전부터 기운과 호흡이 미약하고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협박 소리를 듣자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
그리고는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2품 관리다. 어떤 놈이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결국 경찰과 수비병, 순검들은 물러갔고, 이만도는 10월 10일 단식 24일 만에 사망했다. 향년 68세. 그의 유해는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만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대를 이은 독립운동
이만도의 큰아들 이중업(李中業, 1863~1921)은 을미의병에 가담했고, 아버지가 순국한 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파리 장서 운동에 가담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 서명을 받아내는데 힘을 보탰으며, 1920년 중국에 독립 청원을 하기 위해 장남 이동흠을 봉화 사동에 머물던 권상익에게 보내 청원서 작성을 부탁해 초안을 받아낸 후 중국으로 가지고 가려 했다. 그러나 1921년 7월 23일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중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이만도의 며느리이자 이중업의 부인인 김락(金洛, 1862~1929)은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 이동흠(李棟欽)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으며,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두 눈을 모두 실명하고 11년간 고통 속에서 살다가 1929년 2월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중업, 김락 부부의 아들이자 이만도의 손자인 이동흠(李棟欽. 1881~1967)은 1917년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아우 이종흠(李棕欽, 1900~1976)과 함께 중국에 독립군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6년 또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고향에 은거했다가 1967년 9월 1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동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아우 이종흠 역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