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우용(又容), 구용(九容) |
본관 | 남양 홍씨 토홍계[1] |
출생 | 1878년[2] 2월 20일 |
경상도 순흥도호부 수민단면 원구리 (現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원구마을[3] 224번지[4]) | |
사망 | 1896년 4월 13일 (향년 18세) |
충주부 제천군 현우면 화산리 화산 (現 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남산) | |
묘소 | 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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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의 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홍사준은 그의 8촌 삼종제(三從弟)이다.[5]
2. 생애
1878년 2월 20일 경상도 순흥도호부 수민단면 원구리(現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원구마을 224번지)에서 아버지 홍성유(洪聖裕, 1855. 4. 25 ~ 1885. 1. 27)와 어머니 창녕 성씨(1852. 8. 7 ~ 1876. 2. 14)[6]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다가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성경(盛京)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던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 1586. 11. 22 ~ 1637. 3. 5)[7]은 홍사구의 11대조 홍익형(洪翼亨, 1581. 2. 29 ~ 1661. 11. 4)[8]의 첫째 남동생이다.10살 되던 1887년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 상석리(現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섬실마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안승우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홍사구는 평소 총명해 유교경전 및 역사 등에 능통했고, 글씨를 잘 썼다. 또한 인물이 수려할 뿐 아니라, 성품이 정직하고 청렴하여 가난했음에도 부모를 잘 봉양했고, 형 홍사억(洪思億, 1875. 7. 20 ~ 1955. 1. 20), 남동생 홍사익(洪思益, 1884. 6. 10 ~ 1964. 3. 6) 등과 우애가 깊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분노한 안승우가 충주부 제천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안승우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이후 충주군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병으로 인해 참전하지 못했으나, 병이 나은 후 다시 제천군으로 돌아가서 스승을 도와 맹렬히 싸웠다.
1896년 충주부 제천군 현우면 화산리 화산(現 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남산)에서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 1853. 1. 6 ~ ?)[9]이 이끄는 관군과 접전하던 중, 스승 안승우가 적의 탄환에 맞고 결국 체포되자, 다른 의병들은 모두 흩어져 의병진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홍사구만은 그대로 자리에 남아 안승우를 호위했다.
이때 안승우는
"나는 장령(將領)으로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네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은 무익하다. 속히 떠나서 훗일을 기약하라"
라고 권했다. 그러나 홍사구는"종사(從事)가 되어서 주장(主將)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제자가 되어서 스승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겠습니까. 친구간에도 환란을 당하면 비록 친구에게 어버이가 계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스승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안승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안승우가 관군에게 모욕을 당하자 관군들을 소리 높여 꾸짖으면서 말하기를,비록 너희가 금수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충신과 역적, 사람과 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大義)를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라고 말하면서 몸을 돌리며 막대 속에 감춰 두었던 칼을 빼어 급히 관군들을 내려쳤다. 이에 당황한 관군들은 총을 쏠 겨를도 없이 총대로 어지럽게 홍사구를 내려쳤고, 홍사구는 그 자리에서 결국 순절했다. 이는 1896년 4월 13일의 일로, 향년 18세의 나이였다. 이때 안승우와 홍사구의 최후를 목격한 관군들은 '지독하다', '무섭다'라는 소리를 자신들도 모르게 연발했다고 한다.이후 그의 유해는 제천시 금성면 위림리 갈마골에 안장되었다가 제천시 모산동 의림지 맞은편 산기슭에 이장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4년에는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원구마을 92번지[10]에 홍사구를 기리는 '의사남양홍공사구기념비(義士南陽洪公思九紀念碑)'가 건립되었다. 2007년 4월 16일 제천시 고암동 산28-9번지에 있는 순국선열 묘역에 이장되었다.
[1]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26세 사(思) 항렬.[2] 남양홍씨(토홍계)세보 5권 434쪽에는 187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집성촌으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다가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성경(盛京)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던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 초명 홍습(洪霫), 1586. 11. 22 ~ 1637. 3. 5)도 이 마을 출신이다. 홍익한의 충절을 기리는 봉화 충정공 홍익한 충렬비도 마을 관내에 있다.[4] 이 지번에 2007년 5월 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1호로 지정된 봉화 도천고택(奉化陶川古宅)이 있다. 이 고택은 홍사구의 고조부 홍중묵(洪重默, 1786. 10. 13 ~ 1852. 2. 3)이 1820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홍중묵의 장남 홍재면(洪載勉, 초명 홍채(洪埰), 1818. 3. 26 ~ 1886. 6. 25)가 함창 김씨 종손에게 매도했다가 홍재면의 사위인 진성 이씨 도천(陶川) 이인화(李寅和)가 이 고택을 다시 매입했고, 자신의 호를 붙여 고택의 이름을 지으면서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소유자는 이균식(1933. 5. 10 ~ )이다.[5] 두 사람은 족보상으로는 26촌 지간이나, 홍사준의 증조부 홍재순(洪載順, 초명 홍완(洪玩) 또는 홍훈(洪坃), 1815. 1. 25 ~ 1895. 1. 14)과 홍사구의 증조부 홍재면(洪載勉, 초명 홍채(洪埰), 1818. 3. 26 ~ 1886. 6. 25)은 본래 친형제지간이었다.[6] 성종진(成鍾震, 1809 ~ ?)의 딸이다. 성종진은 1835년(헌종 1) 증광 생원시에 2등 18위로 입격했다.[7] 초명 홍습(洪霫).[8] 초명 홍심(洪𩂈).[9] 본관은 인동(仁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1896년 1월 20일에 참령에 임명되어 남쪽 성들을 회복하는 데에 힘쓰고 호서의 골짜기들을 휩쓸며 편안히 했고, 나가서 남쪽 성들에 주둔하면서 제천 등 북쪽에서 군공부에 이름을 올렸다.(任參領, 刻復南城, 掃靖湖峽, 出駐南城, 堤川等北軍功簿.)'라는 내용이 나온다.[10] 이 지번은 1913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홍사구의 16촌 족제(族弟) 홍사국(洪思國, 1883. 2. 7 ~ 1969. 5. 14)의 소유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