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7 18:04:43

이광복(독립운동가)

파일:이광복 독립운동가.jpg
<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11월 20일
황해북도 금천군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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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내정보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이광복은 1891년 11월 20일 황해북도 금천군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뒤 그는 한영서원에 입학하였고 이후 개성사립학교, 금천 시변리 소학교, 해주 도립잠업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한 후 그는 금천군 잠업지도원으로 취업하였고 동군 호현면을 담당하고 있다. 1년간 근무를 하다 퇴직을 한 그는 고향에서 머물다가 1920년 4월 정희도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출처1]
이후 임시정부 국내정보원에 임명되어 반일선전문건 배포, 한인 관리들에게 독립사상 고양, 독립운동자금 모금, 임시정부 정보원 모집 등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다 동료인 정희도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자 신변의 위형블 느끼고 1922년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가 설립한 무료진료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쑤저우시에 있는 중국의 한 기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출처2]
그 후 상하이에서 흥사단 원동반에 참여하여 제3반 반장직을 맡았고 1935년에는 흥사단 원동지부 제4반 반원이 되었고 인성학교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동표 자녀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1934년 2월 김구가 투쟁역량의 강화를 위해 한인애국단을 꾸리자 이광복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모집원으로 활동하며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다.[출처1] 1935년 1월에는 상하이 조선인민회 고문으로 밀정활동을 벌이던 친일파 이용로를 암살하였다.[출처2]
1935년 3월 26일 밀정을 살해한 혐의로 일본 상하이 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1936년 4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3년을 받고 옥고를 치룬다. 1944년 9월 23일 가출옥되었고 이후 행적은 불문명하다.[출처1]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광복[출처2]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출처1] [출처2] [출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