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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권당일(權堂一) |
자 | 창로(昌魯), 경로(敬魯) |
호 | 청은(淸隱)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84년 5월 11일 |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서면 덕곡리 (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 | |
사망 | 1971년 9월 5일 |
충청북도 제천군 | |
묘소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용곡리 146-5번지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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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독립유공자 권용창은 4촌 동생이다.
2. 생애
1884년 5월 11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서면 덕곡리(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에서 아버지 권태인(權泰仁)과 어머니 초계 정씨 정만권(鄭萬權)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 권씨 화천군(花川君) 권감(權瑊)의 13대손으로, 17세기 초부터 충청도 제천현과 인근의 청풍도호부에서 세거해왔다. 하지만 그의 대에는 이미 몰락하여 형 권용연(權用淵)은 농업으로 가사를 돌봐야 했다. 11세 때 서당에 입학했으며, 이후에도 한학에 몰두했다.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01년 가을 18살 때 문득 장래와 가정형편, 국가정세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왜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구하여 강토를 보존하리라 다짐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지난 날 서당에서 배웠던 충·효·열의 세 글자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서당 선생님은 어린 그에게 "충·효·열의 의미를 잊지 말고 죽는 날까지 마음에 품어야 죽어서도 좋은 이름을 전하리라"라고 가르쳤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했던 그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무일푼으로 집을 나온 그는 곧 의식주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는 결국 행상을 하며 2년여를 보냈고, 이때 번 돈으로 우선 공부를 더해야겠다고 결심하여 공주의 친구 집에서 머물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 후 그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때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금오산에 들어가 병서 공부에 임했다.
권용일의 저서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에 따르면, 어느 해 이강년이 금오산을 지나던 중 산중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따라와 권용일을 만났다고 한다. 이강년은 권용일에게 병서를 읽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권용일이 "평세도 난세가 되고 난세도 평세가 됨은 천지음양의 이치인데, 문무 겸비를 어찌 괴이하다 하십니까"라고 대답하니 이강년은 내심 탄복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이후 민심을 살피러 각지를 전전하던 권용일은 1907년 원주에서 이강년과 재회했다. 두 사람은 척왜의 뜻을 모아 원주 병영의 무기를 거두는 한편 군사를 모으는 활동을 진행했다. 거둔 무기는 배양산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이를 근간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우군선봉장에 임명되었으며, 이강년이 충주성을 공격할 때 종군했다.
이후 의병대가 경북의 풍기, 문경 지역으로 이동할 때 탄환이 부족하게 되어 배양산에 숨겨둔 탄약을 가져와야 했다. 이에 권용일은 도총독장 이만원과 함께 숨겨둔 탄환을 가지러 떠났다. 두 사람은 변장을 하고 밤낮으로 걸어 배양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중량의 탄환을 어깨부터 허리까지 두르고, 그 위에 옷을 입어 감췄다. 돌아오는 길에 제천 송수동과 청풍 후평에서 적을 만나기도 하였지만 무사히 피하여 본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공적으로 도선봉으로 승진했다.
그가 가져온 탄환으로 무장한 의진은 문경 갈평에 일본군이 있음을 포착하고, 사방에 매복하여 이강년의 지휘아래 불시에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의병은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고 적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이강년 부대는 충청, 강원, 경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추워지는 날씨에 계속되는 적병의 추격과 탄환의 부족, 지역민들의 비협조, 의병들의 피로 누적 등은 부대의 사기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의진은 영춘 복상골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의병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다. 이때 많은 병사들이 흩어졌는데, 권용일 역시 본진에서 떨어졌다가 1908년 백남규와 함께 군사를 가까스로 보아서 본진과 합세했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의진은 안동 서벽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봉화 내성과 안동 재산에서도 일본군을 무찔렀다. 하지만 누차에 걸친 전투로 인해 탄환은 모두 떨어졌고, 일제의 끈질긴 탄압이 계속되면서 의진도 점차 해산되어 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강년은 새로운 근거지 마련을 위해 잔여 의병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제천 인근의 까치성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의진의 동향을 탐지한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으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로 이강년은 불행히 왼쪽 발목에 총상을 입어 체포되었다. 이후 권용일은 이강년의 옥바라지를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이때 이름을 바꾸고 의병 신분을 숨긴 채 이강년을 찾아다니다가 이강년이 평리원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갔다고 한다. 그는 이강년의 곁을 지키며 정성스레 옥바라지를 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강년은 1908년 10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에 한계를 깨닫고,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만주에서의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김규흥,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奎澈)과 함께 결의하여, 고종이 위안스카이에게 보내는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중국으로 가는 길에 나섰다. 그러나 도중 일제에게 발각되어 그를 제외한 3명은 체포되었고, 그 혼자만 정경노(鄭敬老)라고 이름을 바꾸어 간신히 망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왔다고는 하나, 자세한 내용은 기록이 부족해서 알 수 없다.
8.15 해방 후 귀국한 권용일은 제천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1년 9월 5일 사망했다. 장례는 단양군민장으로 치러졌고 제천시 청풍면 용곡리 146-5번지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권용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 시중공파-화천군파 성원(聖源)계 33세 용(用) 항렬. 아버지 권태인(權泰仁)은 32세 인(仁)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