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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왕영종(王榮鍾)
자 / 호 광일(光逸) / 두암(斗菴)
본관 개성 왕씨[1][2]
출생 1879년 11월 23일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
(현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사망 1925년 1월 8일
만주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83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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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왕회종은 1879년 11월 23일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 아미리(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서 부친 왕재만(王在萬)과 모친 우봉 이씨 이서병(李瑞炳)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학문을 익혀 18세부터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으며, 27세인 1905년 4월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이어 1907년 3월에는 숭의전 참봉(崇義殿參奉)[3]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고[4]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그는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1906년 마전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7월 17일 경기도 이천군 읍면에서 개성으로 피난한 사람이 "적성(積城)·삭녕(朔寧)·안협(安峽)·토산(兎山)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는데, 그 인원이 4, 500명에 이르렀고, 7월15일 의병 100여 명이 이천군에 기습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천군수는 무기를 모아 언제든지 피난한다고 하며, 의병은 평강·신계 방면에서 출몰하면서 격문을 매우 빠르게 전하고 있다."고 알렸다고 한다. 이 격문을 배포한 이는 왕회종과 김진묵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대저 일본은 임진왜란 이래로 한국인에게는 적이 되어 수십 년 동안 각지에서 침략을 횡행하니, 일본인과 함께 살면 한국 8도 인민은 멸망에 이를 것이므로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였으니, 돈과 곡식 등 물품을 능력에 따라 기부하라."

왕회종은 김진묵을 부장으로 삼고 5백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적군과 유격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북으로 진격하여 혜산진(惠山鎭)까지 올라갔다. 또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권준, 김진묵, 조인환(曺仁煥) 등과 함께 약 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양주·파주·적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일제는 보병 제51연대 전변(田邊)대위가 인솔하는 보병 1중대와 산포병 1소대, 공병 1분대, 보병 제52연대의 1중대를 파견하여 견제했다. 양회종은 이로 인해 약간의 손실을 입었지만 적의 추격을 따돌려 후퇴할 수 있었다.

이후 1907년 9월 11일에서 13일까지 사흘에 걸쳐 적성·삭녕·안협·토산 등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정을 모집하니 그 수가 400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맛보았다. 이는 그들이 기록한 <조선폭도토벌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 일대의 땅 및 경원가도 김화 부근은 특히 배일사상이 강렬하여 주민의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재 평양 보병 제52연대 제4중대장 우에다(上田) 대위는 부하 1소대를 인솔하고 평양에서 기차 편으로 금천에 하차하여 구화장을 경유, 토산으로 향하고, 또 동 중대에서 신계에 파견하였던 나카무라(中村) 소대에 명하여 시변리를 경유 토산으로 나아가 우에다 부대와 책응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에다 대위가 인솔하는 1소대 및 나카무라 소대는 도중 아무런 소득 없이 25일 토산에 도착하였다. 중촌 소대는 19일 시변리에서 폭도 약 60명을 공격하여 그를 토산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0일 중대와 합류 21일 밤 중대는 안협을 야습하였으나 이미 폭도의 대부분은 철원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으므로 아무 소득 없이 25일 각기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재 경성 보병 제50연대 제7중대는 금성 수비를 위하여 21일 경성을 떠나 양주·적성을 거쳐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면서 23일 토산에서 숙영하였다. 그 때 안협에 있던 폭도 약 2백 명은 그 후 철원을 습격, 우리 우편 사무원을 참살하였다는 보고에 접하고 24일 철원을 향하여 전진 중 석교(石橋) 서방에서 폭도 약 1백 명과 조우 그 14명을 사살하고 또 석교 촌민이 전부 폭도의 편임을 알고 그 촌락을 소각하여 버렸다.

1907년 9월 25일, 왕회종 의진은 철원 남쪽 심원사(深源寺)에 유진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하여 정보를 입수한 보병 제150연대 제6중대 1소대와 백정(白井)의 중대가 연합하여 심원사에 접근하여 26일 밤 포위하고 들어왔다. 그후 27일 새벽 3시에 법화동(法化洞)에서 의병 150여 명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의병 20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심원사를 철수하였으므로 일본군이 심원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텅 빈 절간이었다.

그날 오후 3시에 대광리 동북방에서 의진 중 250명이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의병의 피해는 80명이나 되었다. 28일 일본군은 모두 철원 일대에서 철수하였고, 10월에 왕회종 의진은 경원가도의 동부로 진격하여 춘천·낭천(浪川)·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경성 보병 제55연대 제5중대의 기병·공병 약간을 파견하여 의진의 활약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1908년 1월말에 서울 30리 지점까지 진격한 바 있던 13도 연합 의진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문경으로 돌아간 후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임진강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 일대에서 자리잡고 있던 왕회종 의진도 이에 합류했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중국 혁명당과의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 전국적인 규모의 연합 의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 총대장 허위가 체포되어 10월에 교수형에 처해지자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던 연합 의진은 다시 독자적인 의진 구성으로 흩어져 갔다. 그후 왕회종은 만주로 망명하여 청년교육에 힘쓰다가 의병 운동 중에 당한 부상으로 인하여 1925년 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왕회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10월 20일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했다.

3. 사건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평양공파-부사공파 28세 종(鍾) 항렬.[2] 숭의전참봉은 개성 왕씨만 할 수 있었는데, 왕회종은 숭의전참봉의 후임자로 내정되었다가 본인이 거절했다.[3] 왕회종은 1870년부터 1876년까지 숭의전 참봉을 지낸 왕재기(王在基)의 9촌 조카이며,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숭의전 참봉을 지낸 왕응종(王應鍾)의 10촌 동생이다.[4] 당시 후임자는 17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왕재형(王在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