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안지청(安志靑)·안동만(安東滿, 安東晩) 안지만(安池滿)·안봉천(安鳳天)·왕여남(王汝南) |
본관 | 순흥 안씨 |
출생 | 1898년 11월 25일 |
평안남도 안주군 문곡면 동칠리[1][2][3] (현 평안남도 안주시 운송리) | |
사망 | 1977년 5월 11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화곡동 424-86번지 자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72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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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재환은 1898년 11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문곡면 동칠리(현 안주시 운송리)에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에 입학한 후 훈련을 받았으며, 1924년 9월 박은식의 양자인 같은 학교 학생 박시창·송욱동(宋旭東) 등 몇 명 및 국민혁명군의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白得林) 등과 같이 호북성 우창현(武昌縣)에서 우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여 동지 훈련과 광복운동 선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그는 유자명·신공제·김규식 등과 손잡고 중국인, 베트남인, 인도인 등과 강소성 남경시에서 연합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고 김규식을 동 연합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한국부 상무(韓國部常務)로 활약하다가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한·중·영문(韓中英文)으로 발간하여 민족독립의 당위성 및 절박함을 호소하였다.
1929년에는 난징에서 민병길·신익희·김홍일 등 10여 명과 한국혁명당을 조직, 활동하였다. 이어 그는 무력행동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으며, 나월환 등 10여 명을 중견 단원으로 하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김규식이 김두봉·신익희·최동오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할 때 그는 남경한교회(南京韓僑會) 간부로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남경한교회 주석으로서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1935년에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교관으로서 군 간부양성에 주력하며 한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같은 해 여름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미주대한인독립당 등 5개의 정당 대표가 난징에서 회합하여 통합당으로 「민족혁명당」을 조직할 때, 그는 실무간부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 「민족혁명」을 발간하였다.
1937년에는 민족혁명당 상하이 특별지부장이 되어 김원봉 등과 함께 적색분자를 제거하는 청당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약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적극적 지도 임무를 띠고 군자금 모집 및 밀정처단 등 후방교란에 대해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말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
그 직후 그는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193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상고가 기각되면서 평양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였으며, 1943년 3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처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거주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1977년 5월 11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화곡동[4] 424-38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77년 7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