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4:52:18

김홍서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6년 2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
사망 1959년 10월 28일
한반도 일대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 생애

1907년 1월 비밀리에 조직된 신민회의 전국 연락원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하다가 105인사건이 일어난 후 은신해 있었다. 1915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초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하순에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이동녕 등 68명의 의원과 같이 참석하여 국무원 비서장 조소앙, 내무차장 신익희 등의 사직원 수리와 차장제 폐지 및 위원제 사용을 결의했다.

동년 7월 하순에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상임위원회 군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때 군무위원장은 이희경이었고 이사는 김갑이었다. 이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같은 해 7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재하에 임시정부 사료편찬회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감사로 선임되었고 총재는 안창호, 주임은 이광수, 위원은 김병조 등 9명이며 조역은 김붕준 등 20명이었다. 여기서는 한일관계사료 등 여러 가지 민족의식에 관련된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대외적으로 홍보했다.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와 「한일관계사료집」 4권은 국제연맹에까지 보내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집으로 손꼽힌다. 이는 임시 사료편찬회가 편 가장 중요한 독립사업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이런 류의 서적이나 기타 주체적인 간행물은 해외 홍보용으로 크게 주목을 받아 우리의 처지를 십분 이해시킴에 기여했다.

역시 같은 해에 그는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과 상해교민단장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지원과 한국동포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헌신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당의 구제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20년 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와 동년 7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의 의사원이 되기도 했다.

1920년 12월 「조선에 있어서 일본군의 참해」라는 한문 등사문을 작성, 각 방면에 배포하여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1922년 7월에는 안창호 등 수십 명과 같이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그 회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침체를 탈피하게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노병회를 결성하였는데 그는 김구, 여운형 등 20여 명과 같이 기초위원이 되어 군인양성 및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을 위해 심신을 경주했다.

같은 해 한·중 양국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된 중한호조사의 문서과 주임으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6월에는 공성단의 대표로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활동했다.

1930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차이석 등과 함께 의정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33년 초에는 상해에서 흥사단 원동대회에 참여하여 제2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자금 조달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교민단 정무위원장에 뽑혀 세금 징수 등 임시정부 지원 방안을 강구하기도 했다.

1937년 1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와 행동을 함께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