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김덕제(金德濟,) |
생몰 | ? ~ ? |
출생지 | 강원도 원주시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덕제에 대한 기록은 극히 소략해 그가 언제 태어났으며 가계가 어땠으며 관직 경력이 어땠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강원도 원주 출신이라는 사실만이 전해질 뿐이다. 1907년 8월 정미 7조약에 따라 군대 해산령이 내려졌을 때, 김덕제는 원주 진위대(鎭衛隊) 정위를 맡고 있었다. 그는 봉기하려 했지만 대대장인 참령 홍유형(洪裕馨)의 만류로 중단했다. 그러나 홍유형이 상경하자, 그는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와 함께 봉기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했다.8월 3일, 김덕제는 민긍호와 함께 병사 250명을 거느리고 봉기해 원주의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했다. 이후 8월 5일 충주 수비대장 이궁(二宮) 소위가 부하 19명을 인솔하고 원주 방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적발하고 2시간 동안 교전해 격파했으며 우편취급소, 군아(郡衙), 경찰분서, 일본인 가옥을 기습하고 원주읍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에 서울의 일본군 보병 47연대 제33대대 2개 중대가 기관총 4정으로 무장하고 공병 1개 소대를 대동시켜 원주로 급파되었다.
김덕제, 민긍호 등은 8월 10일에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원주를 떠나기로 했다. 김덕제는 1부대를 이끌고 평창, 강릉 방면으로 진출해 양양, 간성, 고성, 통청, 흡곡 일대에서 적과 교전했고, 민긍호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제천, 충주, 죽산, 장호원, 여주, 흥천 등지에서 적과 교전했다. 김덕제는 강원도 일대의 지방 의병들과 연합한 뒤 각지의 일본 수비대, 헌병 분파소, 경찰관 주재소, 군아 등을 습격하고 일본 관원들을 사살했다. 또한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파들을 철저히 수색해 사살했다.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회피해 강원도 동해안 쪽으로 진출한 김덕제는 그곳 의병들과 함세하여 3,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갖추고 1907년 8월 14일 평창 진부를 점령하고 우편국원 2명을 사살했으며, 심부름꾼 1명을 체포해 격문을 사방으로 살포하게 하여 강원도, 평안도 일대로부터 많은 의병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후로 그가 어떤 행적을 남겼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덕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