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효암(曉岩) |
출생 | 1921년 6월 22일 |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고산리 | |
사망 | 2016년 2월 12일 (향년 94세) |
서울특별시 | |
종교 | 불교[1]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210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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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기업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21년 6월 22일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 운산면 고산리에서 아버지 유석규(柳錫圭)와 어머니 평강 채씨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에 고향의 여미공립보통학교(현 운산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구부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으로 이주하였다.1939년 7월, 칠곡군 왜관면의 철도노선 매립작업에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근로동원 되었었는데, 이때 대구사범학교 7기인 5학년생이 중심이 되어 평소 민족차별을 일삼던 악질 일본인 교사를 작업장에서 구타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후배인 2·3·4학년 학생들은 선배들의 항일저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39년 10월 초, 각 기수별로 윤독회를 조직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문학서적을 윤독하며 월 1, 2회 모임을 가졌다.
이때 대구사범학교 9기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흥수는 그해 10월 말에 학교 친구 이태길·강두안·문홍의·박효준(朴孝濬)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합의하고, 윤독회를 통하여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방학 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수집된 원고를 편집·제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 책자의 주요 내용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들이었으며, 책자는 약 200부가 발간되어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이와 같은 윤독회를 통한 대구사범학교의 항일학생활동은 1940년에도 계속되었는데, 그러던 중 학생들은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게 되었고 다가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1940년 11월 23일, 그는 박효준 등 동지들과 함께 당시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소재 이태길의 하숙집에 모여 문예활동을 가장한 항일학생결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운동방침으로서 비밀 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 감상 등을 결의하고 동지 포섭에 힘쓰는 한편, 같은 달 30일부터 1941년 3월 9일까지 약 9회에 걸쳐 회합을 갖고 민족문화 존중과 항일의식을 함양하였다. 1941년 3월에는 기관지 「학생」을 발간하여 이를 문예부원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한편, 문예부와는 별도로 대구사범학교 내에 1941년 1월에 임굉 등의 주도로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가 조직되어 「문예부」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조직은 겉으로는 학술연구를 위장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한 결사였다. 그런데 1941년 2월 무렵, 문예부원 일부와 8기생이었던 연구회원 전원이 졸업을 하게 되면서, 9기생을 중심으로 두 조직의 항일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고 비밀결사를 새롭게 조직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 그는 문홍의·권쾌복·배학보 등 15명과 함께 자신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위의 '문예부'와 '연구회'의 조직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서 교내 조직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 등 각 부서를 두었다. 이때 그는 문예 창작의 책임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당원의 절대 복종과 주2회 회합, 하급생 지도 등을 당의 규약으로 정하였으며, 1941년 3월부터 같은 해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 상황과 조직 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주로 일본인인 교내 연습과 학생과 대부분이 조선인인 심상과 학생에 대한 학교 측의 차별대우를 철폐하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그해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2년 1월에 예심에 회부되었는데, 1943년 2월 8일에서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 후 미결수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였으며, 1944년 2월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0년 서산군 운산면 부면장을 지냈고 1953년 고시위원회 주사를 거쳐 1955년 향우통상 중역에 취임하면서 섬유업게에 투신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거주하였고, 협진흥업(協進興業)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63년 1월 한국화학섬유공업협회[2]가 설립되면서 총무부장에 기용되었고, 1964년 상무로 승진했다. 광복회 창설 후 광복회 이사로 재직하면서 1975년 한국화학섬유협회 초대 전무이사에 취임하였다. 1977년 섬유업계가 정체기에 접어듬에 따라 발족한 기술개발촉진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화인양행 회장, 독립동지회 회장, 광복회 사무총장, 독립기념관 이사, 광복회 대의원 등을 역임했다.#
2016년 2월 12일 오후 서울특별시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6년 2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