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국신(國臣, 國信)[1] |
본관 | 개성 왕씨[2] |
출생 | 1872년 10월 26일 |
경기도 남양도호부 수산면 사강동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23번지) | |
사망 | 1951년 12월 24일 (향년 79세) |
묘소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3]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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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72년 10월 26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수산면 사강동(現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23번지)에서 아버지 왕진춘(王鎭春, 1852 ~ ?)과 어머니 조씨(趙氏, 1853 ~ 1942. 4. 17)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그의 12대조 왕무(王懋, 1467 ~ 1531)는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 종3품)[4]를 지냈고, 11대조 왕희걸(王希傑, 1505 ~ 1553. 3. 3)은 1534년(중종 29) 생원시[5], 1543년(중종 38) 문과[6]에 차례로 합격한 뒤 명종 때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랐다. 10대조 왕빈(王儐)은 선조 때 문화현령(文化縣令, 종5품)[7]에까지 올랐고, 9대조 왕경우(王景祐)는 1603년(선조 36) 진사시[8], 1605년(선조 38) 문과[9]에 차례로 합격한 뒤 선조 때 성균관 전적(典籍)[10]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8대조 왕락(王洛) 대 이후로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고, 왕광연이 태어날 때 집안은 이미 빈농으로 전락해 있었다. 왕광연은 초가집 6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타인의 밭을 소작하는 소작농이었다.#
1919년 3월 26일 아침에 김진홍(金鎭鴻)의 집에 갔다가 정오가 지난 후에야 귀가했다. 그리고 세금을 내러 송산면사무소에 가던 도중 홍효선(洪孝善)의 권유로 태극기를 들고 홍면(洪冕)을 비롯한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틀 후 사강리 장날인 28일에도 홍면(洪冕)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28일 당일 잠깐 외출하였다가 정오경에 돌아와 홍종업(洪種業)의 집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모여 있던 뒷산으로부터 총성이 들렸다.
이 때 그는 음덕면 남양리 사람으로부터 이 총성이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이 해산명령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던 홍면에게 가한 발포소리이며, 이 발포로 홍면이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노구치 고조는 분노한 군중을 두려워하여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망치고 난 뒤였다.
이에 그는 홍면의 동생 홍준옥(洪㻐玉)·장인 김명제(金命濟)·문상익(文相翊)·김교창(金敎昌)·김용준(金容俊) 등과 함께 추적하여 주재소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노구치 고조를 도로에서 포위하였다.
이 때 이태순(李泰順)이 발로 순사부장의 자전거를 차서 넘어뜨리자, 왕광연은 그를 죽이라고 외치고 뛰어서 도망치는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쳐서 넘어뜨리고 투석으로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여 그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으나 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그해 7월 5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후 복역 중 1924년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여 내려진 특별 사면에 의해 징역 9년 1개월 20일로 감형되었으며, 1927년 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히로히토 즉위를 기념하여 내려진 이른 바 쇼와 2년(1927) 칙령 제11호 대사령(大赦令) 제1조 제21호 제14호에 의해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사면을 받고 살인 및 소요 혐의에 대해서만 형법 제52조에 의해 형기가 정해져, 그 결과 징역 8년 10개월 20일로 감형되었다.#
1927년 12월 27일 만기 출옥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51년 12월 24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가족
- 12대조: 왕무(王懋) - 경흥도호부사[11]
- 11대조 : 왕희걸(王希傑) - 생원, 문과, 명종 때 홍문관 부제학
- 10대조 : 왕빈(王儐) - 용양위 중부장(龍驤衛中部將)[12],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13], 문화현령(文化縣令)[14]
- 9대조 : 왕경우(王景祐) - 진사, 문과, 성균관 전적(典籍)[15]
- 현조부 : 왕명인(命仁) - 현조모 : 김해김씨
- 고조부 : 왕경(儆) - 고조모 : 남양홍씨[16]
- 증조부 : 왕재성(載成) - 고조모 : 전주이씨
- 조부 : 왕윤록(允錄) - 조모 : 해풍김씨[17]
- 부 : 왕진춘(鎭春) - 모 : 조씨
- 배위 : 남양 홍씨
- 아들 : 왕화식(和植) - 며느리 : 전주이씨[18]
- 손자 : 왕의명 - 손부 : 남양홍씨
- 증손 : 왕기일, 왕규열, 왕규희, 왕금희
- 손자 : 왕의웅 - 손부 : 남양홍씨
- 증손 : 왕규형, 왕여진
- 손자 : 왕의항 - 손부 : 동래정씨
- 증손 : 왕규원, 왕희진, 왕아진
- 손자 : 왕대항 - 손부 : 남양홍씨
- 증손 : 왕계진, 왕선진
- 손자 : 왕부항
- 손녀 : 왕미숙 - 손서 : 전주이씨 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