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강철구(姜鐵求) |
호 | 해산(海山) |
생몰 | 1894년 2월 8일 ~ 1943년 10월 21일 |
출생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
본관 | 진주 강씨 |
사망지 | 중국 목단강성 가목사 형무소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종교 신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철구는 1894년 2월 8일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등 면학에 열중하다가 국권회복운동에 관심을 갖고 대종교 신자가 된 뒤 1917년 만주로 망명해 북간도 연길현 동불사 천영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한인 자제들의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20년 1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 서일의 비서가 되었으며, 그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하고 만주로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전달했다.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 모집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을 포섭하고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을 포섭했으며,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포섭했다. 그리고 그해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 김재설, 김삼현, 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했다. 그는 군자금 모집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강경에서 김찬형(金燦亨), 김철수(金哲洙) 등을 포섭해 이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했다. 그해 10월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의 집에 은신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김정제(金廷濟), 조창호(趙昌鎬), 김목현(金穆鉉) 등을 다시 동지로 확보하고, 부호가택을 은밀히 방문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뒤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활동을 소상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동지 박창규, 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려 했지만 형사에게 체포당했고,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대종교 포교에 진력했으며,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에서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을 지속했다. 1942년 만주 동경성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만주 독립운동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그해 11월 19일 미행하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목단강성 가목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10월 21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강철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91년에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