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7 02:02:03

문장섭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봉오(鳳五) / 해강(海崗)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896년 5월 6일[2]
홍주부 임천군 내동면 북구천리
(現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3] 월촌마을 339번지)
사망 1967년 8월 31일[4] (향년 71세)
묘소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 월촌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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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6년 5월 6일 홍주부 임천군 내동면 북구천리(現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 월촌마을 339번지)에서 아버지 죽재(竹齋) 문상구(文相龜, 1868 ~ 1951. 4. 10)와 어머니 진주 강씨(? ~ ?. 2. 12)[5]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부여군 부여면(現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89번지로 이주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19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했고, 1920년 4월 총재 서일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국내에 잠입했다. 이후 서일의 비서역으로 있던 강철구(姜鐵求)·김동진(金東鎭) 등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18촌 지간의 족형(族兄) 문경섭을 비롯한 박길화(朴吉和)·김동순(金東純)·김정제(金廷濟)·김도균(金道均)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서무부장 김택(金澤)에 전달했다.

1922년 10월 모든 독립공채를 처분할 수 있게 되자 강철구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 본부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에 송치되었다가 1922년 12월 20일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공갈, 공갈미수 등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 이송되었다. 그리고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농업에 종사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철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967년 8월 31일 별세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군 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6,570표 (21.03%) 낙선 (3위)

[1] 순질공파-경숙공-면수재-신창파 29세 섭(燮) 항렬.[2]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5월 2일생으로 등재돼 있다.[3] 독립유공자 문경섭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1966년 7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5] 강신규(姜信奎)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