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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동오(東吾) |
출생 | 미상 |
평안남도 중화군 지도면 상사리# | |
사망 | 1920년 4월 11일 |
중화민국 상하이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서훈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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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국사편찬위원회가 1986년에 편찬한 <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따르면, 안태국은 평안남도 중화군 지도면 상사리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1915년 2월 16일자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평양에서 비단장사를 했으며 1907년 3월에는 상인단체인 협동사 사장을 맡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신민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1908년 5월부터 신민회의 사업 중 하나인 태극서관을 운영했다.그의 경제적 형편은 그리 돈독하지 못해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힌 것 외에는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예수교 신자가 되었고 계몽운동 계열의 사람들과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안창호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서도총감을 맡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 일대에서 신민회의 조직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태극서관의 운영과 청년학우회의 조직, 대성학교의 재정적 후원 등의 사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안태국은 1910년 105인 사건의 핵심인물로 연루되어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은 후 6년 형을 선고받아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5년 2월 석방된 그는 국내에서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18년 무렵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해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만주와 시베리아 각지를 왕래했다.
1920년 3월, 안태국은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으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달 14일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안착했고, 다음날 안창호와 재회하여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3월 16일, 안태국은 의정원에서 안창호를 만나 노령의 일을 협의하고 환영회에 참석한 뒤 17일에 안창호의 소개로 김구와 대면했고 흥사단 단소에서 열린 환영회에 참석했다.
안창호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안태국은 안창호에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조직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미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성, 노령, 상하이 등 3개의 조직을 통합하여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다시 해체한다면 큰 혼란을 야기한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안창호는 안태국을 설득해 중아령의 통합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겨 노령으로 파견하고자 했다.
안태국은 안창호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상하이 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노령의 독립운동진영을 설득해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떠나기 전에 감기 기운으로 몸져누웠다. 하비로(霞飛路)의 신강병원(申江醫院)에 입원한 그의 병명은 감기가 아닌 장티푸스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병세에 대한 차도가 없자, 안태국은 안창호의 주선으로 당시 중국 상하이 최고 의료기관인 홍십자의원으로 이송되었다. 안창호는 김창세와 함께 밤을 세워 안태국을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4월 11일, 안태국은 홍십자의원 16호 병실에서 사망했다. 그가 상하이에 온 지 한 달도 안된 시점에서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안태국이 타계하자, 독립신문은 <아아, 안태국선생>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안창호도 무척 슬퍼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정도였다고 한다.
임시정부는 안태국을 위해 특별히 사회장으로서 장례식을 치른 뒤 정안사공묘에 안장했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중국 정부에 의해 상하이 송경령능원 내에 이장되었다가 1993년 8월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등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