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서원준(徐元俊) |
생몰 | 1908년 5월 25일 ~ 1935년 4월 30일 |
출생지 |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임석리 |
사망지 | 평양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서원준은 1908년 5월 25일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임석리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정벽(徐正壁)으로, 목수 출인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은 채씨(蔡氏)다. 형제로는 동생 서향준(徐享俊)이 있었다. 그는 노동자 집안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보통학교에서도 교육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1933년 6월 17일 <동아일보> 기사에 게재된 모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총명했기에 동리 사람들이 늘 "원준이는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서원준은 부모를 졸라서 13살 때 평양으로 가서 여러 장사방에 다니면서 3년간 야학에 다니며 밤낮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서원준은 아버지를 따라 포목행상을 하다가 평양에 정착한 후 윤세식(尹世植), 김승기(金承基) 등의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했고, 양말직공으로 일하며 극빈한 가세를 도왔다. 그러면서 노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차별 대우에 대한 깊은 반감을 공유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2.2. 평양노동청년회
1924년, 서원준은 평양점원상조회(平壤店員相助會)에 가입했다. 그는 상조회의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러 인사들과 접했고, 일제가 1924년 8월 5월청년회, 양말직공조합, 노동동맹회, 점원상조회, 노농연합회 등 8개 단체 간부 50명을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는 것을 지켜보며 분노를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1925년, 그는 김가진(金嘉鎭), 김종성(金鍾聲), 박철(朴哲) 등과 함께 평양노동청년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가 해산된 후 여러 노동자 단체들을 모아 노동청년들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꾀했다. 또한 이들은 녿오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노동의 신성을 기초삼으며, 노동이 인격의 발전이라는 근본원리를 토대로 한 사회조직을 표방했다.
1927년 2월, 서원준은 동료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8년 1월 17일 '맑스의 사회주의로 사회해방운동'을 하자는 평양노동청년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을 적용되어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28년 9월 23일에 출옥했고, 약 8개월 간 일제의 눈을 피해 조용히 가세를 도우며 지냈다. 그러나 다시 평양노동연맹원으로 가담했고, 1929년 6월에는 평양노동연맹 제6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제7회 정기대회에서는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2.3. 조선혁명군
1930년 4월, 서원준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김관우(金官宇)가 출옥하자 그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두 사람은 봉천성 신빈현 왕청문에 정착했고, 그해 10월에 양세봉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서원준은 조선혁명당에서 약 2년 반 동안 피복제조창, 자치부, 지방정세조사부에서 활동했고, 1932년 조선혁명군 간부로 진급했다.1932년 11월, 서원준은 고이허로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당의 활동자금 5만원을 모집하고 중앙당의 연락기관을 설치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는 당으로부터 10연발 자동권총 2정과 탄환 60발을 받고 그해 12월 하순 왕청문에서 출발해 안동현으로 이동했다. 그는 김병모(金炳模)의 집에 이르러 잠입할 기회를 엿보다가 김병모의 소개로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었던 한신옥을 소개받고 그로부터 경의연선의 금융기관의 소재와 현금집산의 상황을 전달받았다.
1933년 1월 초순, 서원준은 한신옥과 함께 권총 2정과 탄환 30발을 휴대하고 압록강 철교를 통과하여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정차동에 쇚한 한신옥의 집에 은거했다. 서원준은 군자금 모금일을 1월 15일 남시 장날로 정했고, 선천읍내 포목상 삼중(杉中) 상점의 점원 코마츠 신이치(小松信一)로부터 금전을 빼앗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1월 15일 오후 6시, 남시에 도착한 서원준은 오후 7시 코마츠 신이치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돈을 내놓으면 목숨은 무해하다."고 말했다. 신이치는 그에게 현금 1,643원 14전과 72원짜리 수표 1매를 내줬다. 서원준이 나간 뒤 신이치는 평북 경찰부에 신고했고, 일제 경찰은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서원준은 신이치로부터 뺴앗은 금전 중 700원을 한신옥에게 주고 권총 1정과 탄환 15발을 맡겼다. 그리고 1월 17일에 한신옥의 집에서 출발해 18일 안동현의 김병모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김병모에게 군자금을 건네며 김관우와 김창선(金昌善)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 뒤 다시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남은 돈으로 의복과 자전거를 산 뒤 1933년 2월 14일 권총 1정과 탄환 14발을 휴대하고 자전거를 타고 압록강을 통과해 조선 내로 잠입한 그는 2월 16일 평양으로 짐입해 포목상으로 행세하며 자택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며칠 후 평양 동대원리 377번지에 거주중이던 의복상 주향규(朱享奎)의 집에서 기거하며 정세 조사를 벌이던 그는 일본 경관과 마주치자 자신의 신분과 위치가 노출될 것을 염려해 주현규의 집을 떠나 2월 24일에 서울노동청년회 간부 안영준(安永俊)의 집에서 잠복했다. 그는 안영준과 함께 평양부내에 있는 금융기관들을 조사하고 습격 장소를 계획했다. 그는 안영준에게 권총사격 방법을 가르쳤고, 가지고 있던 권총 1정과 탄환 15발을 건네주기도 했다.
서원준은 은행이 폐점하기 전 시간을 주의깊게 살피던 중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에 은행에 현금이 수송되어 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그 중에서도 현금 수송액이 가장 큰 식산은행 평양지점을 목표로 삼았지만 계획을 실행하려던 찰나 현금 운송 직원을 일제 경관이 변장한 것으로 오판하고 계획을 미뤘다. 여러 은행을 돌아다니며 계획을 수립하던 그는 일제 경관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1933년 6월 3일 오후 10시경, 평양부 상수구리를 지나던 평양 고등계형사 김원호(金源㤠)와 안악(安樂)은 안영준의 집에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수색했다. 이때 서원준이 집의 문을 열고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했고, 수구교를 건너 평양고보 운동장을 거쳐 만수대(萬壽臺)로 도주했다. 안영준 역시 형사의 수사를 피해 도주했다.
서원준은 만수대로 피한 뒤 김기진(金基鎭)의 집에서 의복을 입은 후 6월 4일 새벽 1시경 자전거를 타고 대동강 인도교를 거쳐 중화군으로 이동했다. 그는 오후 7시 반경 자신의 오촌인 서인익(徐仁益)의 집에서 옷과 현금 3원을 가지고 다시 몸을 피했다. 그리고 6월 7일 오후 5시 중화군 양정면 우현규(禹賢奎)의 집에 들린 그는 우현규에게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평양에 내려왔으며, 현재는 일제의 수사를 피해 도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후 우현규의 도움으로 머리를 삭발한 그는 우현규가 마련한 배를 타고 곤양강의 지류를 타고 대동강까지 이동하여 배를 정박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6월 9일 겸이포로 이동해 자신의 친족인 서관학(徐觀學)과 연락한 그는 중화군 경계가 매우 삼엄해 잠입이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원준은 본래 겸이포에서 하선하여 노동자로 변장해 도주하려 했지만 이 소식을 듣자 계획을 변경해 대동강 하류로 이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우현규와 헤어진뒤 자전거를 이용하여 안악군으로 이동했다. 안악군 안곡면 학산리에 거주하는 박문효(朴文孝)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그는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6월 10일 오전 7시 30분에 박문효와 아내와 아이와 함께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사리원으로 향했다가 박문효의 가족과 헤어진 뒤 오후 2시경 봉산군 서종면 대한리 오진규의 주막집에 들렀다.
그런데 하필 그 주막집엔 부전 순사부장과 김봉기 순사가 있었다. 두 순사는 서원준에게 5~6차례 질문을 하며 신체 수색을 진행했다. 그들은 서원준으로부터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약 10m 가량 거리를 두며 소지품을 검사했다. 그 순간, 서원준은 허리에서 권총을 빼들어 부전 순사부장을 쏴 복부를 관통시켰고, 이후 근처로 도주해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린 뒤 봉산군 서종면 잡화상 이종훈의 집에 있던 자전거를 타고 달아났다. 부전 순사부장은 사리원 도림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출혈과 장기손상이 심해 12일 오전 7시에 사망했다. 이후 황해도와 평안남도의 경찰 600여 명이 동원되어 서원준 체포 작전에 착수했으며, 13일부터는 평안남도 최초로 수사용 전서구(傳書鳩)가 사용되었다.
6월 11일 중화군 양정면 한교리의 원철(元哲) 음식점에 나타나 묵을 사먹고 원철에게 엿을 사달라고 했다. 원철은 그가 묵을 먹을 때에도 벽을 보며 먹고, 행색이 수상하다고 느끼고 서원준이 음식점을 나선 후 손자인 원대복(元大福)에게 신고하라고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서는 두 순사를 출동시켰다. 두 순사는 장총과 권총을 소지하여 그를 급히 추적하다가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양정면 후장교리(後長橋里)에서 서원준을 목격했다. 그들은 서원준에게 소리를 지르며 사격했지만 ,서원준은 몸을 피하며 뒤돌아 원대복을 향해 사격해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는 옆의 보리밭으로 몸을 숨겨 잠적했다. 두 순사는 장총을 8발, 권총을 2발 발사했지만, 서원준은 모든 탄환을 피하며 도주했다.
6월 11일 이후, 일제 경찰은 그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다. 이는 서원준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이 생각지도 못한 길로 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준은 대동강을 헤엄쳐 평양으로 들어간 뒤 다시 순안을 거쳐 안주로 향했다. 16일 오후 4시에는 안주군 대이면 용호리에서 만성주재소 순사와 마주쳐 서로 총격전을 벌인 후 순사가 탄환이 떨어진 틈을 타 도주했다. 그는 다시 경원군으로 몸을 피한 뒤 평원군 동송명 청룡리의 박재엽(朴載燁)의 주막에서 묵었다.
당시 그는 다리가 아파 하루 묵을 방을 달라고 한 뒤 박재엽에게 사인장(舍人場)까지의 거리를 묵고 바로 잠들었다. 이때 일제 경찰은 안주에서 서원준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뒤 수색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6월 16일 오후 11시, 경찰은 그가 박재엽의 주막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에 들이닥쳤다. 서원준은 "내가 서원준이오. 저항하지 않을 터이다."라고 말하며 가지고 있던 권총과 실탄 10발을 경관에게 넘겨줬다.
2.4. 최후
서원준은 체포된 뒤 평양경찰서로 호송되어 취조받았다. 그는 <매일신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주막에서 지내고 내일 아침에 어디로 갈 예정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성으로 나와 북행하는 열차를 타고 국경으로 갈 작정이었소."라고 답했다. 그의 예심은 1933년 7월 8일 오전부터 진행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취체규칙 위반, 동령시행규칙 위반, 강도급강도예비, 살인급살인미수의 죄명으로 결정되었고, 1934년 10월 2일 제1회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며, 10월 9일에 사형을 언도받았다.서원준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상고했지만, 1935년 2월 14일 최후판결 공판에서 치안유지밥위반, 강도예비, 살인, 살인미축,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동시행규칙위반, 사무집행 방해 등 총 8가지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후 "지난 일은 내가 판단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가 없음을 드러냈다. 이후 1935년 4월 30일 오전 10시 30분에 평양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서원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