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25 02:20:14

권석도

파일:권석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윤일이(尹一二)
명구(命九)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80년 9월 9일
경상도 함양군 백전면 동백리
(현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양백리 동백마을)
사망 1946년 4월 6일
경상북도 영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27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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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석도는 1880년 9월 9일 경상도 함양군 백전면 동백리(현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양백리 동백마을)에서 아버지 권위대(權緯大)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영종(尹永鍾)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그는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당하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했다가 다시 고광순 의병장의 부대에 합류했다. 1907년 10월 16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그는 남은 의병을 수습한 뒤 그해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박인환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에는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하동주재소에 구금중이던 1908년 7월 9일 탈출하여 도피 생활을 하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하순 박매지(朴每之)·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수비대와 마주치자 피신했다. 이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모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소위 일황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 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이후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10여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그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일제 경찰의 감시가 극심하자 가족과 함께 경상북도 영일군, 강원도 울진군 등 낯선 고장을 전전하였으며, 8.15 광복 후 영일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46년 4월 6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석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3월 11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복야공파 전(銓)계 33세.[2] 어머니 파평 윤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아버지의 첫째 부인인 의성 김씨 김재대(金在大)의 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