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남우팔(南又八) |
자 | 우팔(禹八)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878년 4월 12일 |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도평동 (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2] | |
사망 | 1907년 9월 15일 |
대구형무소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승철은 그의 5촌 당숙(堂叔)이며, 남석술은 그의 6촌 형(재종형)이자 이종사촌형이다.2. 생애
남석인은 1878년 4월 12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도평동(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에서 아버지 남운하(南雲夏)와 어머니 월성 이씨 이종윤(李宗允)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3]그는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6년 4월 정용기가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서종락, 남석구(南錫球), 임중호(林中虎), 심일지(沈一之)와 함께 가담해 청송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남석인이 영천으로 가서 정용기를 방문하려 했을 때,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의 유인계에 넘어가 경주로 갔다가 체포되었고, 의병대는 병사들이 동요한 나머지 떠나버리는 바람에 해산되었다.
남석인은 다시 거사 준비를 하기로 하고 정용기의 사촌인 정사홍과 경주 출신 이운경(李雲景), 흥해 출신 정천여(鄭千汝), 그리고 자신의 육촌인 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들은 경주 하옥동에 도착한 후 이어 영덕 청련사로 진군하여 경주 출신 이한주(李漢主)가 이끄는 의병 30명과 합세한 뒤 전열을 정비했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에 선임되었고, 남석문은 좌익장, 정사홍은 우익장, 정천여는 소모장, 이한주는 중군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음력 4월 26일, 남석인은 의병 80명을 이끌고 경주로 진군했다. 그날 정오 영덕 적암지에 이르렀을 때 경주 진위대 30명이 기습해왔다. 남석인은 최선을 다해 응전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의병대를 해산하고 옥동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을 기약했다. 이후 영천에 거주하는 김성찬(金聖贊)의 집에서 2달간 머물렀다가 8월 초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1907년 5월,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가 재차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정사홍과 함께 군사 30명을 모집하고 영천 거동사에 머물면서 정용기에게 만날 것을 청했지만 정용기가 응하지 않았다.
남석인은 의병대를 거느리고 청송, 흥해 등지의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했지만 1907년 6월에 정사홍과 의견 충돌이 잦자 포군 20명 만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으로 들어가 주둔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을까지 머물려 했지만 일본군이 눈치챌 것을 염려해 영덕 입암으로 가서 포병을 모집하고자 청하 하옥계에 주둔했다. 그러나 1907년 6월 19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의병대는 와해되었고, 남석인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2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에 처해졌고, 1907년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남석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