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민효식(閔孝植) |
자 / 호 | 경무(景武) / 석촌(石村) |
본관 | 여흥 민씨[1] |
생몰 | 1854년 12월 5일 ~ 1910년[2] |
출생지 | 황해도 해주목 (현 황해남도 청단군 마룡리)[3][4]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효식은 1854년 12월 5일 황해도 해주목(현 황해남도 청단군 마룡리)에서 진사 민영태(閔泳泰)[5]와 어머니 아산 이씨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8월 황해도 연백과 평산 일대의 유학자 신재봉(申在鳳)을 비롯하여 신석(申襫)·신필수·채홍두(蔡洪斗)·우병렬·변석현(邊錫鉉)·조도환(曺道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평산군 마산면의 도평산(挑坪山)에서 거병해 전 목천군수 박정빈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그러나 의병대가 일본군에게 격파되고 신재봉 등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자,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1908년 2월 허덕천(許德天) 의병장의 부대와 연합하여 600명 가량의 의병을 거느리고 해주, 옹진, 송화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했다. 이들은 낮에는 은신했다가 밤이면 활동하는 방식으로 그해 2월 재령군에서 변절자를 처단하고 5월에는 일본군 헌병 정찰대와 교전했다. 민효식과 허덕천은 장연, 태탄, 평산, 송화, 은율, 청단, 재령, 옹진, 신천 등 황해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부역배들을 처단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1908년 4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감행하면서 위세가 약해졌고, 결국 1910년경 일본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민효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감사공파 29세 식(植) 항렬.[2] 여흥민씨세보에는 1929년 2월 24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3] 구한 말 해주군 추이면 이리·삼리·사리 → 1914년 해주군 추화면 마룡리 → 1938년 벽성군 추화면 마룡리 → 1945년 경기도 연백군 추화면 마룡리 → 1950년 황해도 남연백군 추화면 마룡리 → 1952년 황해도 청단군 용포리 → 1991년 황해남도 청단군 마룡리[4] 여흥 민씨 집성촌이다.[5] 1835년(헌종 1) ~ 1915년 11월 28일. 자는 형보(亨甫), 호는 취간(翠澗). 아버지는 학생(學生) 민범행(閔範行). 1894년(고종 31) 식년시 진사시 3등 24위로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