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해은(海隱) |
본관 | 해남 윤씨[1] |
출생 | 1908년[2] 4월 9일 |
전라남도 해남군 화이면 용덕리 (現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 용덕마을[3] 472번지[4]) | |
사망 | 1984년 12월 29일[5] |
전라남도 광주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05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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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되었다.독립유공자 윤옥하는 4촌 형이다.[6]
2. 생애
1908년 4월 9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이면 용덕리(現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 용덕마을 472번지)에서 아버지 윤주백(尹柱伯, 1879. 6. 10 ~ 1949. 11. 3)과 어머니 밀양 박씨(1879. 6. 11 ~ 1942. 6. 14)[7]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정(現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 박중규(朴重圭)의 집에 기거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같은 학교 학우 이경채(李景采)가 조선 독립에 관한 격문을 살포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자, 이에 대항해 일으킨 동맹휴학에 참가했다. 이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이듬해인 1929년 6월 장재성(張載性)이 일본 주오대학에서 퇴학당한 뒤 귀국해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생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광주사범학교 재학생 송동식(宋東植),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조길룡 등 광주군 관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金基權)의 집에 모여 조직적인 활동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활동 방안을 논의한 끝에 '독서회 중앙본부'가 조직되었다. 이때 윤창하는 강달모(姜達模)와 함께 재무위원에 선임되어 회비 징수 및 기타 회계사무를 담당했다.
또한 같은 달 김상환·김보섭 등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우 20여명과 무등산에서 만나 광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를 조직하고 윤창하는 조사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독서회원들을 모두 5개조로 나누고 각 조별로 책임자를 정해 연구활동을 실시했는데, 윤창하는 조 책임자에 선출되었다.
이후 독서회 중앙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 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아울러 조직확대를 위해 하부조직으로서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계획했다. 이에 윤창하는 장재성을 비롯한 임원들과 여러 차례 소비조합 설치에 대해 논의하고 1929년 9월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및 상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금고형 4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했으나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가 없다는 판결을 받아 금고형 4개월(법정 미결구류 통산 16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했다.
그러나 기존에 전개하던 독서회 중앙본부 및 학생소비조합 운동, 광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 등과 관련해 다시 기소되었고, 1930년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7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일부 감형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65일[8]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8월 11일에는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혐의에 대해 선고된 집행유예 판결에 대한 재심이 광주지방법원에서 개정되었고, 이날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인해 1930년 5월 15일 선고된 형 집행유예 판결이 취소되고, 결과적으로 징역 4개월형이 추가되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되었다.
1984년 12월 29일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96년 10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호군공파(護軍公派) 26세 하(夏) 항렬.[2] 해남윤씨대동보 권2 444쪽에는 1906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해남 윤씨 호군공파(護軍公派) 집성촌이다. 윤영일 전 국회의원과 윤한덕 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독립유공자 윤옥하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 마을은 본래 율동마을과 한 마을로서 해남 윤씨 호군공 윤종(尹種, ? ~ ?. 1. 26)의 5대손 윤후강(尹厚綱, 1579. 4. 21 ~ ?. 11. 28)이 본래 전라도 해남현 화일면 시목동리(現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송산리 시목마을)에 살다가 율동마을을 개척한 뒤 윤후강의 차남 윤상은(尹相殷, 1607. 10. 14 ~ 1684. 4. 14), 3남 윤광은(尹匡殷, ? ~ ?. 1. 12.), 4남 윤취은(尹就殷, 1616. 3. 15 ~ 1681. 12. 9) 등이 이곳으로 옮겨 와 개척한 것이라고 한다.[4]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윤창하의 아버지 윤주백(尹柱伯, 1879. 6. 10 ~ 1949. 11. 3)의 소유였다.[5] 음력 11월 8일.[6] 윤옥하의 아버지 윤주엽(尹柱燁, 1873. 12. 7 ~ 1950. 11. 10)과 윤창하의 아버지 윤주백(尹柱伯, 1879. 6. 10 ~ 1949. 11. 3)은 본래 친형제로 각각 윤석호(尹奭浩, 1840. 3. 28 ~ 1913. 10. 18)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다. 그러나 각각 1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윤현호(尹賢浩, 1832. 12. 26 ~ 1886. 7. 19), 윤인호(尹仁浩)에 입양되면서 족보상 12촌 지간으로 멀어졌다.[7] 박흥배(朴興培)의 딸이다.[8] 수형인명부에는 369일로 기재되어 있고, 집행원부에는 재판미결구류통산 365일, 법정미결구류통산 4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