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6 17:01:07

채원개

파일:채원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채형세(蔡衡世), 채군선(蔡君仙, 蔡君善), 채영석(蔡瀅錫)
거평(居平)
본관 평강 채씨[1]
출생 1895년 3월 24일
평안도 영원군 온창면 온양리
(현 평안남도 영원군 온양리)
사망 1974년 2월 16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암사동 주택복권아파트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암사중앙하이츠아파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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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채원개는 1895년 3월 24일 평안도 영원군 온창면 온양리(현 영원군 온양리)에서 종9품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과 통신사 전화과 주사(通信司電話課主事)를 지낸 아버지 채병묵(蔡秉默)[2]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의명소학교(義明小學校)를 졸업했고 1910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에 입학했지만 학교가 폐쇄되자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서 4년간 복무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경찰소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탈옥한 후 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훈련책으로 활동했다. 1921년 통의부(統義府) 대표로 김창환(金昌煥)·심용준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파견되어 국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중국 낙양육군강무학교에 파견되어 한국인 유학생의 지도책임을 맡았으며, 중국의 직봉전쟁(直奉戰爭)에 참가해 실전경험을 쌓았다.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육군대위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 평안대의원(平安代議員)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1926년 임시정부로부터 참의부군무위원(參議府軍務委員)에 임명되고, 1927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파견되어 유학생을 지도했다. 1930년 이후 중국육군제59사 작전참모, 중국육군제2사 참모처장, 교도단장, 중국제19집단군 총사령부 작전참모, 중국육군제78사 참모장 등 1939년까지 중국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광동지부 간부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가 광동으로 이전하자 이준식과 함께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에 임명되어 복무하였으며,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항일 활동을 지속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교포의 재산 보호 및 안전 귀환에 노력하다 1946년 12월에 귀국했으며, 이후 1949년 육군사관학교 3기특과(三期特科)를 나온 뒤 연대장·사단장을 거쳐 1950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4년 2월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암사동 주택복권아파트(현 강동구 암사동 암사중앙하이츠아파트)에서 숙환으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논란

이재전이 집필한 〈노병들의 증언〉과 국방일보 2003년 9월 18일자 기사에 따르면, 채원개는 사단장을 맡고 있을 때 보급물자로 받은 밀가루 수천 포대를 중공으로 빼돌리려 했다가 적발되었다고 한다. 이때 자신의 지시에 따른 부하 장교 혼자 뒤집어 쓰게 하는 바람에, 해당 장교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이재전은 이에 분개해 참모총장에게 탄원서를 냈고, 결국 채원개는 예편해야 했다고 한다. #


[1] 25세 석(錫) 항렬.[2] 이명 채병묵(蔡炳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