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포시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운
성명 | 김경운(金景云) |
이명 | 김윤서(金允西) |
본관 | 경주 김씨 |
생몰 | 1861년 ~ 1908년 12월 9일 |
출생지 | 경기도 통진도호부 소이포면 시암리 (현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1] |
사망지 | 경성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김경운은 1861년생이며 경기도 통진도호부 소이포면 시암리(현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출신이다. 그는 경시청 감옥에 복역하고 있던 1907년 9월 18일 서울 수표교 부근 외역장을 탈출하여 경기도 광릉 내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박내병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통진, 고양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 경기도 통진·고양 일대에서 군자금품 수합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통진군에서 엽전 2,300냥과 군수품, 그리고 고양군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으로 수합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 시기 박내병 의병장의 지휘 아래 경기도 통진·고양 일대의 선등사·석지원·송래기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3차례 교전하는 등 대일 무력투쟁에도 참전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된 그는 1908년 11월 6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12월 9일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경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처인구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운
성명 | 김경운(金敬云) |
생몰 | 1879년 3월 13일 ~ ? |
출생지 | 경기도 용인현 수여면 금양장리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
사망지 | 미상 |
추서 | 대통령표창 |
김경운은 1879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현 수여면 금양장리(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8일 용인군 수여면 금양장리에서 임원호(任元鎬)와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주민들에게 만세시위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모두 용인군청 앞으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제안하여 주민의 동의를 얻어냈따. 이후 주민 약 300명과 함께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인군청 앞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김경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