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고두환의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고사환(高士煥) |
출생 | 1894년 1월 1일 |
함경도 북청도호부 대속후사 하천리[1] (현 함경남도 금호지구 속후리) | |
사망 | 1932년 12월 |
함경북도 북청군 속후면 하천리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13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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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4년 1월 1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대속후사 하천리(현 함경남도 금호지구 속후리)에서 태어났다.1919년 3.1 운동 직후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관전현(寬甸縣)[2]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 그는 국내특파원에 임명되어 평안북도 지역에 파견되었고, 민양기(閔良基)·이명서(李明瑞)·박기영(朴技榮) 등과 함께 의주군·구성군 등 평안북도 관내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 5월에는 만주독립단원으로서 민양기·이명서·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변춘식(邊春植)·박기영(朴基永)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산하 무장독립대[3]를 결성했고,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 사이에 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에 반대하거나 자금 모집을 방해하는 자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국내로 진입해 황해도 송화군 구월산 부근 전역에 대한독립단 관련 기관을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했다. 특히 같은 해 8월 15일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은율군수(殷栗郡守) 최병혁(崔丙赫, 1878. 9. 24 ~ 1920. 8. 15)을 사살하는 등 성과를 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며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1920년 9월 10일, 평소 연락을 담당해주던 신천군 종산(鍾山)교회의 목사 우종서(禹鍾瑞)가 신천경찰서에서 심어 둔 밀정의 농간에 속아 구월산 독립단의 근거지를 알려주었고, 결국 당일 독립단원들은 현장에 급히 파견된 88명의 신천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교전 끝에 고두환은 총검에 4곳을 찔린 뒤 부상당한 채로 체포되었다.
1921년 7월 20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8월 1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된 뒤 두 차례 감형을 받아 1932년 12월 15일 오전, 10년 3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무리하고 만기출옥했다.
"구월산에서 경관대와 충돌하야 창상(創傷)을 네곳에나밧고형무소에 수용되엇슬 당시에는 다시세상을 보지못할줄 알엇습니다마는 지금세상과 다시대하게되니 다만감개만 무량합니다
그때에 현장에서 죽은5명[4]과 역시창상을밧고 체포되어 사형을바든사람[5]의 셍각을하니 그때의 사람으로는 나혼자남어잇는 셈이올시다
그동안 가정에 변화도잇섯슴니다 어머니께서는 지난9월에 도라가섯고 안해는 무긔징역을 바덧다는 소식을듯고 개가하얏습니다"
1932년 12월 15일 오전, 고두환이 만기출소하면서 남긴 소회.[6]
그때에 현장에서 죽은5명[4]과 역시창상을밧고 체포되어 사형을바든사람[5]의 셍각을하니 그때의 사람으로는 나혼자남어잇는 셈이올시다
그동안 가정에 변화도잇섯슴니다 어머니께서는 지난9월에 도라가섯고 안해는 무긔징역을 바덧다는 소식을듯고 개가하얏습니다"
1932년 12월 15일 오전, 고두환이 만기출소하면서 남긴 소회.[6]
그러나 옥고의 여독으로 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해 고향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고두환을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