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3:46:47

강기덕

파일:독립장 약장.png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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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춘곡(春谷) / 덕재(德齋)
본관 신천 강씨 [1]
출생 1886년 5월 4일[2]
함경도 덕원도호부 적전면 당상리[3]#
(現 강원도 원산시 적천동)
사망 몰년 미상[4]
함경북도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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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3.1 운동 당시 학생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해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강규진은 그의 5촌 당질(堂姪)이다.

2. 생애

1886년 5월 4일 함경도 덕원도호부 적전면 당상리(現 강원도 원산시 적천동)에서 태어났다. 원산 춘성(春城)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중등과,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법과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5] 주로 서북친목회(西北親睦會)·보성전문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선린상업학교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1 운동 직전에는 이갑성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 1,500장을 받아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각 중등학교 대표자들에게 이를 배부하고 학생 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3·1 운동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당초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갑자기 바꾸어 태화관에 모여 있자, 학생 대표로 태화관에 달려가서 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이들 33인의 민족대표들이 체포된 뒤에도 연희전문학교김원벽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고 후배 정재용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였다. 결국 거사 당일 현장에서의 독립시위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강기덕이 주관한 셈이었다.

3월 5일에는 서울역에서 대규모 시위를 총지휘하였다. 5천 명의 군중이 모인 시위 현장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대형 인력거를 탄 채 나타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수많은 인파들을 이끌었다. 시위대 최선두에 서서 행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의 칼날을 이마에 맞고 쓰러졌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1년 6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고향 땅인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가 그 지역에 뿌리를 박고 일제강점기 내내 ‘불령선인[6]으로 평생을 보냈다. 예를 들어 무산 계급·농민 계급의 참상과 그들의 활로를 언급했다거나, 또는 일제 경찰의 고문 끝에 숨진 독립운동가 박휘병의 장례를 주관했다는 따위 이유로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다.[7] 1920년 경성부에서 조선청년연합회가 결성되자 함경남도지부 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그 밖에 조선애국운동회 상임위원, 함경남도덕원청년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5년에는 김동명을 지원하여 일본에 유학을 갈 수 있게 해주었다.[8] 1927년에는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경성복심법원에서 금고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원산에서는 이주하 등이 주동하여 80일 간의 총파업투쟁이 일어났는데(이른바 '원산 총파업'), 강기덕은 그 원산총파업 투쟁기간 동안 노동자들과 사회주의 지도자, 민족지도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1930년대에는 신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 3월 21일 신간회 원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해 11월 9일 신간회 중앙집행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신간회 내에서 자치론을 주장하는 개량주의자들이 세를 얻기 시작하자, 이럴 바에는 신간회를 해체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신간회 해소파(解消派)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으로 선출된 뒤에는 평소의 소신대로 신간회를 해산해버렸다.

1933년 12월 8일에는 원산노동계(元山勞動界)의 중진으로 원산노동회관 문제에 관련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공갈죄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판결결과는 알 수 없다.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절대 다수가 사회주의자들이었던 분위기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띄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에는 초대 원산시장에 선출되었으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병사들이 우리 여성들을 강간하고 민중의 재산을 약탈하며 행패 부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대다수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이를 묵인하면서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입장을 고수하자, 반탁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곧 해임되어 자기 삶의 터전인 원산을 떠나 월남하였다.

1945년 9월 14일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건국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학관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건국대학교 역대 재단이사장 명단은 링크를 참조할 것.) 또한 이북5도위원회 개청 이래 초대 함경남도지사 역임 및 함경남도 중앙도민회 회장에 임명되었고 동북동지회 최고위원에 취임하기도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피살되고, 1948년 허헌이 월북한 뒤에도 계속 남한에 머물러서 중앙선거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6월까지 교화소 분소에서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9]가 결성될 때 안재홍, 조소앙과 함께 거기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후 함경북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 외에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수안·덕원파(곡산계)[2] 192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0년 5월 30일생으로, 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9년 5월 1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당중리·당하리와 함께 곡산(신천) 강씨 집성촌이다.[4] 1956년 이후 주측.[5] 3.1 운동 참가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역시 민족대표 33인이지만, 이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일 뿐이고, 실제로 3.1 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것은 강기덕이었다.[6] 不逞鮮人:후테이센진. 즉 반항적인 식민지 조선인.[7] <동아일보> 1926년 11월13일자. #[8] 그 후 김동명은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1930년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간행하는 등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에는 월남하여 1960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참의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9] 6·25전쟁 당시 납북된 남한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1956년 7월 2일 평양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북한의 대남선전과 통일전략에 납북인사를 활용하기 위한 의도에서 조직되었으며, 가입자 대부분은 비자발적으로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