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07:19:10

박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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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박찬익.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박창익(朴昌益)
이명 박정일(濮精一)·박순(濮純)
남파(南坡)
출생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목 백석면 파주리 마산동
(현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마산마을)
사망 1949년 2월 20일[1]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창신동 숙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2호
본관 반남 박씨[2]#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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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시정부의 외교관을 맡은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박영준은 그의 막내 아들이다. 백범 김구 전문 배우 이영후는 박찬익의 손녀사위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목 백석면 파주리 마산동(現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마산마을)에서 아버지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관립상공학교[3]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4월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 염직과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단군 신앙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키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해 대종교를 선택한다. 이후 만주로 떠나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해 중국에 건너온 동포들을 지원하는데 힘쓴다.

1913년에는 중국과 교섭을 벌여 총 300정과 수류탄 150발 등을 얻는 등의 성과를 거둔다. 이때부터 외교적 성과가 있던 박찬익은 차후 임시정부의 외교관으로 여러가지 노력을 하게 된다. 한편 당시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데 노력한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참여하고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도 참가한다.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의 독립선언서와는 별개의 것으로 외국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을 모아 결사항전을 하자는 의미의 선언이었다. 같은 해 4월 10일부터 12일까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우는데에 참여한다. 4월 23일에는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손정도 등과 함께 평정관이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상하이 임시정부와 한성 임시정부가 통합되고 박찬익은 1921년에 상하이로 가서 정식으로 임시정부 요인이 된다.

임시정부에서 그는 후원회 의원,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맡다가 신규식이 서거한 이후로 외무부 외사국장 및 외무차장을 겸해 임시정부의 외교를 맡는다. 당시 임시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외교 대상은 당연히 중국으로 중국 당국과의 외교 협상 뿐만이 아닌 독립운동가의 석방에도 나선다. 1925년에는 미쓰야 협정으로 이강훈, 신갑수가 체포되었을 때에도 그의 노력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의 난징 지부 대표를 맡는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난징에 있었기에 중국과의 외교를 전담하던 그가 자연히 맡게 된 것. 내친김에 1930년에는 국민당에 아예 들어가서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와의 연결통 역할을 한다.

1932년에는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김구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제의 타깃이 되자 업무도 자연히 임시정부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와 교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 박찬익과 안공근, 엄항섭이 교섭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33년에는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을 성사시킨다. 회담의 성과로 한인들이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초급장교로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다음엔 중국 정부로부터 독립 지원금을 받아내는데에 성공하는 등 외교적 성과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에 지원금을 분배해서 줘야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박찬익과 김구가 노력하여 좌파 계통의 독립단체들을 임시정부에 합류시켜 하나로 통합하는데에 성공한 것. 이때 의열단 관련 세력을 이끌던 김원봉과의 갈등이 있었으나 그의 노력으로 다른 의열단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좌파 계열 독립단체들을 임시정부 하에 통합하는데에 성공했다.[4]

1945년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찾아온다. 그는 민필호 등과 마찬가지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귀국시키고 중국에 망명한 한인들을 안정화시키는 등의 뒷마무리에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을 외교관을 양성하고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정부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끝내 임시정부가 승인받지는 못했고 이에 대한 미안함과 한이 남는다. 1948년 5월 귀국했으며, 그해 건강 악화를 무릅쓰고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오랜 외교 경력으로 김일성 등의 인물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2월 20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창신동[5] 숙사에서 향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각종 외교적 노력과 공적이 인정되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중랑구 망우동 망우역사문화공원안장되었다가 1993년 11월 19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54~257p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서울현충원묘적부 등에는 3월 9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2] 오창공파 26세 찬(贊)◯ 항렬.[3] 공과 위주의 관립농상공학교로 변경 후 공과는 공업전습소(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관립경성공업학교→경성공립공업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 전신), 상과는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농과는 수원농림학교(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학).[4] 단, 김원봉은 이후로도 지청천, 민필호 등의 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벌여 임시정부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된다. 자세한 것은 김원봉 문서 참조.[5]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