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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춘실(李春實) |
출생 | 1906년[1] |
평양 (現 평양시) | |
사망 | 1999년 2월 10일 (향년 93세) |
중국 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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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중국의 의사이다.2. 생애
2.1. 해방 이전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항일운동을 하던 오빠들을 도와줬다고 한다. 역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이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대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이화림은 김두봉의 소개로 임시정부에 접한 이후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이봉창, 윤봉길 등과 활동하였다. 김구[3]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일제의 밀정을 색출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시절 이화림은 "동해"라는 가명으로 불렸다. 이화림은 임시정부가 자금난을 겪자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으로 스스로 생계를 마련하고 경비에도 보탰다. 이봉창이 일본으로 폭탄을 지니고 갈 때 바지단 안쪽에 주머니를 만들어 숨길 수 있도록 하였고 윤봉길이 훙커우 의거에서 폭탄을 던질 때는 부부로 위장하여 함께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화림은 일본어를 못해 당일에는 윤봉길만이 식장으로 들어섰다.
홍커우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자싱으로 옮길 때 이화림은 동지들과 함께 가지 않고 광저우로 가서 중산대학교에 입학했다. 법학과를 공부하다 간호과로 옮겼으며 공부를 하던 중, 유학생 김창국을 만나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1935년 늦가을 광주에 온 의열단 단원 윤세주를 만나 이듬해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당의 부녀국에서 의료보건사업의 책임을 맡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중경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3월 계림으로 가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41년 여름에는 화북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였다.
1941년에는 뤄양의 선견대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합류하였다. 1942년 화북조선인민간부훈련반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후 부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지역은 산악이라 식량이 늘 부족하였다. 이화림은 돌미나리를 뜯으며 도라지 타령을 불렀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그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1943년부터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일을 했고 1944년경 연안으로 들어가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의 휘하 밑에서 일했고 계속 조선의용군에서 활동을 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2.2. 해방 이후
해방 후 1946년 이화림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하얼빈에서는 의사로 활동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한다.[4]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선양으로 간 후 죽을 때까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이후 중국에서 의료 관련 일을 했으나 1960년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찍혀 고생을 했다. 1980년 은퇴 이후 조선족의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1999년 2월 10일 사망했다. 향년 93세
3. 여담
- 영화 파묘의 이화림의 모티브가 이 이화림 여사다.
- 북한에 가담하고 북한의 군인으로 참전해 서훈을 못 받았다. 다만 2017년 이화림의 서훈을 추진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