훙커우 공원 의거 虹口公園義擧 | |
폭탄 투척 직후의 모습 | |
일시 | 1932년 4월 29일 |
장소 | 중화민국 상하이시 훙커우(虹口) 공원 (現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구 루쉰(鲁迅)공원) |
목적 | 항일 무장 독립운동(일본군 주요 인사 사살) |
원인 |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자주 독립 요구 |
결과 |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 일본 제국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및 다수의 일본군 병사 사망[1]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오른다리, 일본 제국 육군중장 우에다 겐키치 왼다리 절단 일본 제국 해군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오른눈 실명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 중상 |
영향 | 윤봉길 사형 선고, 중화민국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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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훙커우 공원 의거 실제 영상 |
2. 과정
일본 제국은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며[2] 상하이시 훙커우(홍구)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쇼와 덴노 탄생 기념 행사[3]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졌다. 전날 구파 백정기도 중국인 아나키스트 왕야차오의 도움을 얻어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했으며 그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이시하야 감옥에서 옥사했고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혔다.다만 체포된 후 조서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
29일 아침 자동차를 타고 신공원(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찢어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폭탄을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려고 폭탄의 발화용 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하여, 도시락 상자 폭탄은 땅 위에 내려놓고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자결하여 중일 간의 분노를 고조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윤봉길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은 자살용으로 들고 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5]는 그 자리에서 직격으로 폭탄을 맞아 복부와 다리에 중상을 입어 창자가 끊어진 상태로 다음 날 3시 10분에 사망하고 상하이 파견군[6] 사령관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인해 상태가 악화되어서 5월 26일에 죽었다.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츠 마모루[7]는 오른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는 중상을 입었으며[8] 육군 제9사단장 육군 중장 우에다 겐키치 장군은 왼다리를 잃고 해군 제3함대 사령장관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9]은 우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 주변에서 그들을 호위하던 일본군 병사들 수십 명도 폭탄의 파편으로 인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때 부상을 입은 생존자 중 노무라 제독과 시게미쓰 공사는 각각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노무라 제독은 예편 후 외교관이 되었다. 본래 초급 장교 시절부터 해외로 나가는 국방무관으로 자주 활동해 외교 분야의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외교관으로 전향했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미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며 진주만 공습 직후 선전포고 문서인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 문서를 들고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간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의거 당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공사는 아이오와급 전함 USS 미주리 함(BB-63)에서 가진 항복 문서 조인식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나타나 일본의 전권 대사 자격으로 문서에 사인한 그 인물이다. 특히 시게미쓰 공사가 이렇게 장애를 가진 몸으로 불편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영상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으며 뉴스릴에서도 한국인 애국자(Korean patriot)로 언급되었다.[10]
이 거사에 숨은 조력자가 있으니 바로 미국인 선교사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인데 자신의 자동차 요인석에 윤 의사를 태우고 직접 홍커우 공원으로 운전했다. 피치 선교사는 이후 독일인 존 라베와 함께 난징 대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구하기도 했다.
2.1. 몇 시간밖에 쓸 수 없는 시계
위 사진의 시계는 독립기념관 제5전시관에 전시된 레플리카다. |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식장에 가는 길에 김구에게 남은 돈을 다 주었는데 김구가 사양하다가 받았지만 "돈 좀 가져가면 어때서 그렇소?"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자동찻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11]광복을 맞이한 후 김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생가를 찾아 윤봉길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에게 인사하고 윤봉길과 교환했던 시계를 보여주면서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원상 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아들을 사지에 내몬 김구가 원망스럽기도 한 것 같았다고 한다. 김구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한테 못 할 짓을 했다고 생각해 깊게 탄식하고 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고 시계를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나중에 백범기념관에 김구가 소지했던 윤봉길의 시계만 전시되었는데, 이후 윤봉길의 후손이 윤봉길이 김구에게 교환받은 시계를 가져왔고 현재 이 두 시계는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 전시 중이다.[12]
3. 체포와 순국
윤봉길은 이렇게 일본 군민과 관료들을 싹 날려 버린 후 현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일본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헌병들이 엄청난 구타를 가했는데 연행 후 고문받고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육군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1월 18일 일본기선 소속 1만4천 톤급 여객선 다이요마루(大洋丸)에 호송되어 오사카에 도착해 오사카 육군 위수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2월 18일에 가나자와 육군 구금소로 이감됐다.1994년에 일본의 시민 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일본은 윤봉길을 체포한 직후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즉결 처형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자신을 희생한 순국자의 모습이 돋보이게 되어 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만 강해질까 염려해서 이감 이튿날인 19일에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이때 윤봉길의 나이는 불과 24세. 그야말로 짧고 굵은 생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사형 집행 당일 윤봉길 의사의 최후의 모습. |
이후 가나자와시의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재일 독립운동가 박열과 이강훈 등이 백범의 지시로 유해를 찾기 위해 시도했다. 처음엔 공병 작업장에 묻혔으리라 믿어 찾아내려고 수소문했지만, 관계자들은 "그때 일은 너무 오래됐으며 당시 복무한 군인들이 한 거라 모르겠다."라고 했거니와 묘표가 없다 보니 찾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위수 형무소 간수(교도관)였던 시게하라의 협조로[13] 다시 유해를 찾아냈는데 카나자와 공동묘지 관리 사무소 근처 쓰레기 하치장이었다.
결국 수습단으로 간 사람들은 유해의 위치를 알고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유해가 매장된 곳은 공동묘지 관리 사무소로 들어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며 즉, 수습단 자신들을 포함해 14년이란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밟고 갔다는 얘기였다.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손뼈가 소나무 뿌리에 얽혀서 손뼈 7개만은 수습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암장지에 남아 있다.
해당 지역 인근에는 윤봉길 기념비와 총살당한 지역의 비석이 설치되었다. 링크
그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부산에서 봉환식을 거행했고 이어 서울에 도착한 후 태고사에 임시 봉안했다가 장례식을 치르고 용산 효창공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現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봉길이 호송차 승선했던 다이요마루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의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쓰이다가 1942년 5월 8일 미합중국 해군 소속 탬버급 잠수함 SS-210 USS 그레나디어(Grenadier) 함이 쏜 어뢰에 피격되어 승선원 817명과 함께 가라앉았다.
4. 반향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었고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오로지 윤봉길을 통해 한국이 독립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에 불과하지만 윤봉길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은 꽤나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될 정도다.실제로 이 사건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제 나라도 간수하지 못해 빼앗긴 주제에 중국에 밀입국해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는 불법 체류자, 일제의 앞잡이 등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 때문에 만보산 사건, 민생단 사건[14] 같은 화교 - 조선인의 대립까지 발생했다. 그러다가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상하이 사변을 자축하는 일제의 기념 행사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게 조선인 청년 한 명의 의거라는 것이 알려지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을 항일 운동의 동지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太極旗下正氣如虹。
多君三千萬衆、
春申江上巨彈殲敵、
愧吾四百兆民。
태극기 아래 정기는 무지개와 같다네.
(조선에) 군자가 많아봤자 3천만일 뿐이거늘
춘신강 위 큰 (폭)탄이 적을 쓸어내니
우리 4억 (중국) 백성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어느 중국인이 쓴 한시
더군다나 윤봉길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고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당하게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 극찬했다는 건 와전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문단 참조.多君三千萬衆、
春申江上巨彈殲敵、
愧吾四百兆民。
태극기 아래 정기는 무지개와 같다네.
(조선에) 군자가 많아봤자 3천만일 뿐이거늘
춘신강 위 큰 (폭)탄이 적을 쓸어내니
우리 4억 (중국) 백성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어느 중국인이 쓴 한시
4.1. 보론
한국과 중국은 각자의 입장 때문에 윤봉길의 폭탄 투척과 한중 항일 연대를 찬양하지만 배경한 교수는 2017년에 투고한 자신의 논문 〈윤봉길 의거 이후 蔣介石·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長期抗戰'〉에서 기존의 인식이 결과론적이며 실증적 검토 없이 퍼져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실상과 본의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장제스 일기, 국민당 내부 논의와 당시 최신 연구로 규명된 사실에 근거한다.이는 윤봉길 의사가 대단한 일을 해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20세기 초 한중 관계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즉,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가 의거에 감동받고 이를 찬양했다"거나 "결과론적으로 독립에 기여했다" 하는 서사에만 머물면 한중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일단 당시 서방 언론의 일차적 반응은 '비인도적 폭거'라거나 '반인륜적 만행'이라는 식의 비판을 제기하면서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일본군의 해외 침략에 있다는 점도 지적하는 양비론적 수준이었으며 일면 저항 일면 교섭, 장기 항전론을 대일 전략으로 잡은 중국국민당 정부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지극히 불행한 처사'라거나 일본인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한편 외교적 위문에 나섰는데 이는 국민당 정부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정전 협상을 통해 상하이 사변의 조속한 해결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한편으로는 오히려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이 재개되지 않을까 강하게 우려했고 중국의 책임이 아님을 강조했다. 당시 중국 관영 언론들도 신중하긴 마찬가지로 상하이 일보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양면적이었다. 물론 중국인들은 내심 일본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외교적 수사의 왕래에도 불구하고, 훙커우 공원 사건이 일반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장제스는 일기장에 "옛날 사마천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산 개인도 (그 정도가) 정말 심하다고 할 텐데 한 국가의 원수가 되어 원한을 산다면 (그 정도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라 했다."면서 "무력을 남용하며 침략을 좋아하는 자들 또한 (이번에) 뉘우치는 바가 있을까?"라고 적었을 뿐이다. "30만(혹은 100만) 중국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일개 한국인이 해냈다"는 문구는 『上海日報』 등 1932년 5월 2일 중국 언론 보도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장제스가 말했다는 식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년 뒤인 1933년 봄에 이루어진 김구와 장제스의 면담 내용에서도 이런 격찬과 감동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제스는 김구가 제안한 특무 공작을 거부하며 "천황을 죽이면 또 다른 천황이 있고 대장을 죽이면 다시 대장이 나타날 것이다. (그보다는) 장래 독립을 도모하자면 무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물론 험악한 분위기에서 이런 말이 오간 건 아니고 김구와 장제스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제안은 정중히 거절되었다.
줄여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윤봉길의 희생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되고 조선은 일제의 앞잡이로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일제랑 하등 다를 바 없다[18]며 폄하하던 중국의 언론을 바꿔 침체된 한중 민중 간의 분위기를 풀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일본 제국에 저항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다시 확인시켜 주었으며 대표성을 상실해 가던 임시정부 세력의 숨통을 틔워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 정부와 장제스는 자신들의 상황 때문에 이 사건에 즉시 적극적으로 찬동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장기 항전 전략에서 중요한 동북 지역에 한인들을 동원하기 위함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중화 국제 질서 부활"이 목적이었다.[19] 그나마 김구와 장제스의 친분 덕에 이만큼의 지원이라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항일 전쟁 시기 중국과 한국 양측에서 강조해 온 "항일(반제국주의)을 위한 동아시아인들의 연대(中韓互助)"와 "동아시아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면모였다는 점과 함께 그것이 가지는 한계성도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5. 평가
5.1. 이승만의 평가
이승만은 윤봉길의 폭탄 투척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 절하 했다.[20]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 독립론자[21]로,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에서 온 외부 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처단했을 때 미국 내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된 선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국제 사회에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과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된 '도왜실기' 서문에서는 "윤봉길의 희생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합을 가능케 한 사건이며, 카이로 회담에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즉, 윤봉길의 희생이 그저 사람 몇 명 죽이고 끝난 무장 투쟁이 아니라 카이로 회담에서의 한국 독립 결의에 기여하는 외교적 의미를 획득한 공로가 있음을 인정했다.5.2. 박헌영의 평가
박헌영은 윤봉길의 희생 정신 자체는 높이 평가했지만 방법론에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고 보았으며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 행위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사실 이것은 박헌영이 따르던 레닌과 비록 따르지는 않았지만 우연히도 유사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게 되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이기도 하다. 레닌은 당시 아나키스트들이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차르 암살 시도에 대해 의도는 좋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으며 트로츠키도 '마르크스주의와 테러리즘'이라는 책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의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투쟁론에는 위배된다고 언급하였다. 박헌영도 그러한 앞 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이 입장이 북한 정부에도 계승되었다.
5.3. 김원봉의 평가
의외로 같은 무장 투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2022년 4월 11일 중국 베이징대학 한반도연구소에서 김원봉이 1944년 중국국민당의 중앙비서장이었던 우톄청과 나눈 대화 기록을 공개했는데 이 대화 기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일제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이 한때 파문을 일으켰지만, 이는 교묘한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동으로 진정한 혁명가는 쓰지 않는 수단이다"라고 발언했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반일 황족 정권을 계승한 것도, 망국 후 민족 해방 운동가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자유 정부도 아니다"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다만 애초에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한편 일각에서는 김원봉의 이 발언이 윤봉길에 대한 평가 절하보다는 그만큼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강조하는 목적이 강하다고 보기도 한다.
5.4. 현대의 총평
한국의 독립운동은 크게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력 투쟁론으로 노선이 나뉘어 있었고 이 셋 중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엇갈린다. 하나 냉정하게 말하면 이 의거의 배경인 1930년대는 셋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던 상황이었다.외교로만 하자니 당시 국제 질서는 철저히 각자도생 시대였다. 당시 소련은 제 코도 석 자인 마당에 타국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까지 챙겨 주던 1910년대 말~1920년대 초와 달리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에 따라 경제 개발과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느라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여건도, 의지도 없었다. 또한 임시정부가 근거지를 두었던 중국은 군벌이 난립하는 데다 일제에 만주를 뜯긴 와중에 공산주의 반란 집단을 족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임정은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애초에 같은 독립운동가들에게조차도 완벽한 영향력을 행세할 수 없었으니 말 다 했다. 실력 양성론은 일제의 지배하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했고, 친일 부역자 양산에 이용될 뿐이었다. 자치론 역시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을 내부 분열시켜 팀킬을 유도하는 전략에 사용되었다. 무력 투쟁을 하자니 고작해야 소수 한인과 외국의 지원만으로 군을 꾸려야 했던 독립군과 일본 제국의 정규군인 일본군의 전력 차는 너무 명확했다. 만주와 러시아 극동의 치안 공백을 이용할 수 있던 1910년대와 달리 1920년대에는 봉천군벌이 자리를 잡고 소련도 안정화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되고 일본군이 아예 만주국을 세워버리면서 무장 투쟁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더해 임시정부는 1923년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갈등하여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이탈해 임정은 껍데기만 남은 조직이 되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의원 내각제로 개헌(국무령)까지 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다.
즉,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마지막 수단으로서 김구는 의거(義擧)를 택하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물론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조차 큰 비난이 있었지만 암울하던 1930년대에 이 의거만큼 눈에 확 띄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22] 결과적으로 한인애국단의 이 폭탄 투척 덕분에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 모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6. 사진 논란
한때 사건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의 사진이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윤봉길이 거사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주변 군인들(내지 중국 군인-민간인 포함)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이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가설을 채택하여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이 아니고 일본군 측이 자신들의 신사적인 대우를 어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여 연행한 것을 찍었다고 방영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실제 중국 측 신문도 자료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 내놓은 윤봉길전집에 의하면 윤봉길의 사진이 맞다. 위조되었다고 주장되는 사진은 왼편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일본병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윤봉길의 얼굴에 났던 상처가 가려졌을 뿐이며 이와 대조적으로 윤봉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위 사진에서 가려진 오른편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상처가 가려지지 않고 드러난 것이다. 윤봉길의 부인과 친족들, 그동안의 윤봉길 연구들 모두 윤봉길의 사진이 맞다고 확인했다.
7. 대중 매체에서
윤봉길 의사를 다룬 극화물에선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단독 작품으론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이용민 감독)>가 있으며 1992년 MBC 특집 드라마 <님이여>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 드라마 <김구> 13회에 짧게나마 나왔고 2019년 6월 22일 방영된 3·1 운동 100주년 기념 MBC 특별 기획 드라마 이몽 15회(2회 연속의 변칙 분량으로는 29~30화)에서 이 사건이 재조명되어 다루어졌다. 이 드라마에서 신인 배우 이강민이 열연했다. 관련 영상
8.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훙커우 공원 의거 훙커우 공원 사건 상해 홍구 공원 의거[23] |
중국어 | [ruby(虹口, ruby=hóngkŏu)][ruby(公园, ruby=gōngyuán)][ruby(爆炸, ruby=bàozhà)][ruby(事件, ruby=shìjiàn)] [ruby(虹口, ruby=hóngkŏu)][ruby(公园, ruby=gōngyuán)][ruby(义举, ruby=yìjǔ)] |
일본어 | [ruby(上海, ruby=シャンハイ)][ruby(天長節, ruby=てんちょうせつ)][ruby(爆弾, ruby=ばくだん)][ruby(事件, ruby=じけん)] [ruby(虹口, ruby=ホンキュー)][ruby(公園, ruby=こうえん)][ruby(爆弾, ruby=ばくだん)][ruby(事件, ruby=じけ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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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와바타는 창자가 끊어진 상태로 다음 날 3시 10분에 사망했고 시라카와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로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했다.[2] 결과적으로 상하이를 방어하던 19로군과 5군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를 위해 제공권, 제해권을 모두 장악했음에도 두 차례나 병력을 증원해야 했으며 무장도 빈약했던 중국군의 2배나 되는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이겼다고 하면 이긴 셈이겠지만 일본 측에서 자랑할 수준은 아닌 찜찜한 결과였으며 일본군 대대장이 포로로 잡히는 등 중국군을 상대로 전에 없는 참담한 결과들이 초래되었다.[3] 참고로 이날은 현대 일본에서도 공휴일이며 골든 위크의 첫날이기도 하다. 전후에도 천황탄생일이었다가 1989년 쇼와 덴노의 사망 이후에는 '녹색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공휴일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7년에 녹색의 날을 5월 4일(이전에도 두 휴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휴일로 지냈다)로 옮기고 '쇼와의 날'로 변경했는데 이것 때문에 주변 국가는 물론 일본에서도 말이 많았다.[4] 당시 신문 기사는 '기념식장에 별도의 매점을 운영하지 않으니 참석자는 1인당 도시락 하나, 물통 하나, 일장기 1개만 소지 가능하다'고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구는 김홍일에게 도시락형 폭탄과 물통형 폭탄 제작을 주문했다. 윤봉길은 기념식장 입장 시 폭탄을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 먹을 도시락"이라고 둘러댔다. 생각해 보면 '매점을 운영하지 않으니 도시락을 가져오라'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우나 '도시락만 소지 가능하다'고 표현한 것은 폭탄 테러 방지책을 둘러대서 말한 것이다.[5] 한국에서 간혹 이 인물을 사다쓰구라고 언급하는데 데이지가 맞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그의 지위를 상하이 거류민단 행정 위원회 회장으로 기록했다.[6] 해군 육전대만으로 국민당군의 방선을 뚫을 수 없자 해군 사령관이던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독의 요청으로 파견된 육군을 말한다. 초기에는 1개 사단+1개 혼성 여단으로만 구성되었으나 이 정도 병력으로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2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여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를 창설했다.[7]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핵 두 방 맞은 뒤 USS 미주리 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바로 그 인물이다.[8] 아들 츠토무씨가 당시 제례복과 안경을 기증하여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양재동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보관중이며, EBS에서 다큐 제작을 위해 후손을 찾는 과정에서 손녀 아야카씨가 방한하였다. #.[9] 훗날 진주만 공습 당시 주미 대사를 지내고 있었다.[10] 영상의 2분 10초에 "…who was wounded by a Korean patriot in Shanghai years ago and walks on an artificial leg." "(그는) 몇 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의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재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라는 부분이 나온다.[11] 당시 소학교 교사 월급이 20원이었고 쌀 한 가마닛값이 5~6원 정도였다.[12] 윤봉길이 떠날 때 김구가 "후일 지하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했는데 시계가 나란히 전시됨으로써 시계로 재회하게 된 셈이다.[13] 자진 참여 발굴단 중에 다행히도 이시카와현에 살던 박성조라는 재일 교포가 소속되어 같이 공부하던 소학교 일본인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에 나섰다. 그에게 요시다(吉田)라는 동창이 "범인이 총살 집행의 뜻을 통고받자 형틀까지 20여 미터를 당당하게 걸어가며 무슨 염불 같은 것을 외우고는 눈가리개는 필요 없다고 거부했다. 정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총살 때에 진노라는 육군 헌병이 입회했다." 하는 증언을 들었다. 그가 진노라는 헌병의 집을 찾아가자 "헌병이었던 동생은 도쿄에 살고 있는데 연락하겠다. 끝에 동생은 그때 형무관이었는데 아마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는 답을 들었다. 이튿날 다시 만난 진노는 암장 때 독경(讀經)을 해 준 여승이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그 여승이 바로 노다야마 가쿠손인(覚尊院)의 주지로 있었던 야마모토 료도(山本了道)로, 야마모토는 자신이 독경을 해 주었던 윤봉길이 묻힌 자리를 기억하고 그 지점을 가리키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는데 과연 그곳에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있었다고 한다.[14] 단 이는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15] 중일전쟁 중 충칭으로 수도를 옮길 때 차량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천 대로도 모자랄 지경에 1백 대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에 6대를 할당해 주었다.[16] 일본을 문명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17] 당시 만주사변으로 중국 본토였던 만주 땅 전체가 일본 제국한테 넘어가 장제스가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다.[18] 피지배 민족에게 더러운 일을 맡기고 내부 분열을 조장하여 지배하기 쉽게 만드는 건 제국주의 국가들의 흔한 패턴이었다.[19] 즉, 한반도에 친중, 반공 성향의 독립국을 세워 일본을 견제하고 아편 전쟁 이래 무너진 중화 질서를 복구시키려고 한 것이다. 비록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새로이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최종 목표는 중화 질서의 복구다.[20]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후술할 각주 참조)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다. 결국 국민대표회의 개최 후 임정이 급속하게 쇠락하고 이승만은 1925년에 탄핵당했다. 그가 탄핵당한 지 7년 후에 훙커우 공원 의거가 발생하였다.[21] 무장 투쟁이 아닌 외교적 노력을 통한 독립 획득을 추구하는 노선.[22] 5년 뒤 김일성이 병력을 데리고 보천보에서 난동을 피운 뒤 무기를 탈취해 도망친 보천보 전투 또한 김일성 스스로가 인정했듯 '조선 항일 세력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이었다. 이 선전은 동아일보가 덥석 잡아들고 대서특필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훙커우 공원에서 수뇌부가 큰 타격을 입고 5년 뒤 조선 항일 세력이 조선 본토 끄트머리 지역에서 난동을 피우고 가고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니 일본 제국이 짜증 날 것임은 당연지사.[23] 현지 발음으로 읽지 않던 옛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