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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로우스 비행학교 Willows Korean Aviation School | |
| <nopad> 파일:윌1.jpg | |
| ▲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비행기와 학생들[1] | |
| <colbgcolor=#2F9AFF><colcolor=#fff> 이칭 | 대한인비행가양성소 캘리포니아 한인비행학교 |
| 설립 | 1920년 3월 |
| 개교 | 1920년 7월 5일 |
| 소속 | |
| 설립 목적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력 양성 |
| 주소 | |
|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 카운티 윌로우스 | |
| |
| <colbgcolor=#2F9AFF><colcolor=#fff> 광고에 게재된 학교 광고 |
| 훈련을 받는 학생들의 모습 |
1. 개요
1920년 3월 한민족이 스스로 세운 역사상 최초의 항공 학교이자,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기획한 공군력을 실제로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부대이기도 했다.'캘리포니아 한인비행학교', '대한인비행가양성소(Korean Aviation Corps, KAC)' 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2. 설립 배경
거국적인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창설은 일제에 대항한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정부 산하에 무력을 갖춘 군사 조직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여기에는 항공 무력, 즉 공군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5일 《임시정부 법률 제2호》를 통해 군제를 반포했고 여기에는 육군과 해군, 특히 해군 비행대를 명시했다.이 무렵 임시정부의 노동총판이었던 안창호는 독립운동을 위해 비행기 구입을 계획하고 있었다. 《안창호 일기》1920년 2월 17일에는 "비행기를 이용하여 국내인심을 격발케 하고 또한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촉기하려 함이라" 로 적혀 있어 비행기를 이용한 독립운동을 기획했음을 알 수 있으며 1920년 3월 2일 《임시정부 시정방침 제1호》에는 미국의 용기있는 청년들로 비행기대를 편성해 비행 제조와 비행전술을 학습하게 한다고 규정되었다.
한편, 대한제국군 출신의 노백린 장군은 1919년 9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가서 미국 서부 도시들을 순방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한인 비행사 양성을 통해 독립투쟁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북미지방총회는 리버사이드 비행학교에 한인들의 비행 교육을 요청했고 마침내 장병훈, 오임하, 이용선, 이초, 이용근, 한장호 등 미국의 한인들은 레드우드 비행학교 등에 입학하여 1920년 2월 5일 비행 면허를 따 미국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조종사 6인이 되었다. 노백린 장군과 북미지방총회 중앙총회장 윤병구, 곽임대 의사는 이들 조종사들과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노백린 장군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비행학교의 설립과 공군력 마련에 대해 논했다.
마침 미국 한인 사회의 거물로 통했던 '라이스 킹' 김종림 의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노백린 장군은 윌로우스에서 비행학교를 실현으로 옮기게 되었다. 김종림 의사는 한인으로 미국에서 대성공한 벼농사 경영인으로 당시 가진 재산이 120만 달러, 2010년 물가로 약 580억원에 달하는 거부였지만 독립운동에 재산을 쓰는 걸 매우 기쁘게 여겼다.
한인들의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소식은 윌로우스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한인들이 미국에서 공공연하게 공군력을 위한 비행 훈련을 한다는 사실은 일본제국에게 경악을 안겨 주었다. 자연스럽게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일본 제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3. 교육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40에이커(약 4만 9천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여의도 면적의 2배 넓이로 활주로와 격납고, 교육시설을 갖췄다.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건물은 쓰지 않고 있던 윌로우스의 퀸트 공립학교의 건물을 임차했고 훈련기로는 스탠더드 사의 J-1 3대가 쓰였다. 윌로우스 학교 소속 J-1에는 수직 미익에 태극마크가 도색되었고 동체에 KAC로 소속을 표시했다. 또한 교육생들을 훈련할 미국인과 한인 교관 조종사들도 고용되었다.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 출신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수석 교관이 되었고 정비사 2명도 합류했다. 다만 바로 비행 훈련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준비가 필요한 터라 2월부터 7월까지는 노백린 장군의 지도 아래 기본적인 육군식 훈련이 진행되었다.노백린 장군이 이동휘 총리에게 보낸 1920년 5월 19일 서신에는 교육생 30명에 42일간 초등 군사교육을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윌로우스 교육청에 신고한 교육 인원은 100여명이여서 학교 최대 교육 인원은 100명으로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생도들은 비행술과 역학, 비행기 정비, 군사전략 및 전술 등 군사학, 교련, 무선통신, 민족교육, 영어 등 종합적인 공군 장교 양성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그러나 1920년 11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대홍수가 나면서 캘리포니아 한인농장들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경영을 지원하던 김종림 의사도 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1921년 4월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경영난을 못이겨 문을 닫는다. 문을 닫기 전까지 교육생 77명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통해 비행기 조종을 배우고 졸업했다.
4. 의의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대한민국 공군의 시조입니다. 역사적 자료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기 위해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한 일입니다.
차만재 박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명예교수
차만재 박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명예교수
그동안 육군에 의한 지상전투방식에서 벗어난 최첨단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채택한 것은 큰 의의가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오래 지속이 되지 못해서 큰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런 시도를 바탕으로 해서 대한민국, 특히 국군사에 있어 공군 창설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아주 높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홍선표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홍선표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윌로우스 비행학교로 더 잘 알려진 이 군사학교는 우리나라 항공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족적(足跡)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며, 1세기가 넘는 오랜 한미동맹의 상징인 동시에 임시정부가 재미 동포들의 정성 어린 성금을 받아 외국에 세운 유일한 공군기지이기 때문이다. ... 일제강점기 당시로는 최첨단 무기인 비행기를 이용해 독립전쟁을 수행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노백린·곽임대·김종림 등 수많은 항공 선각자와 청년 전투비행사들의 충혼이 서려 있는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최영훈 공군역사기록관리단장 윌로우스를 기억합니다
최영훈 공군역사기록관리단장 윌로우스를 기억합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비행기가 무기로써의 가치를 인정 받은지 얼마 안된 1차 세계대전 전후에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주목을 받았고, 공군력을 양성하려 설립한 사관학교 성격을 띄었다. 비록 오래가지 못했으나 그 당시 가장 선구적인 무기체계로 일본제국을 공격하고자 한 것은 임시정부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윌로우스 비행학교 출신 조종사들은 학교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다방면으로 대한 독립과 공군 창설을 위해 활약했다. 박희성 이용근 의사가 국제항공연맹 조종사 면허를 따서 한인 조종사의 우수성을 입증했으며, 임시정부는 이들을 대한민국 육군 비행병 참위로 임명해 한국사 최초의 조종장교로 기록되었다. 곽임대 의사는 켄터키 장교 양성소에 입교해 흥사단으로 활약했고 이초 의사는 미국 OSS의 냅코 프로젝트에 참가해 국내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종철 의사는 중국군 조종사로 일제와 전투했고 김종림 조종익 등 다른 의사들도 일제와 싸우기 위해 미군에 입대했다. 이용근 의사는 광복 후 미군정청에서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공군사관학교는 교내 박물관의 윌로우스 비행학교 전시물을 통해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역사성과 후신임을 기리고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은 1층 실내 항공역사관 및 야외 전시를 통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한국 최초의 비행사 양성교육기관으로 안내하고 있다.
2025년 8월, 대한민국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과 운영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후손 20여명을 국내로 초청했다. 윌로우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현충원 참배 후 공군사관학교, 제1전투비행단, 국립항공박물관, 임진각을 들러 대한민국 발전과 공군의 위용을 확인하고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했다. #
5. 관련 영상
6. 같이 보기
- 대한민국 공군 공군본부 공보정훈실 발행 월간 《공군》
- 국립항공박물관 블로그 - 윌로우스 비행학교
- 대한민국 국방부 정책 브리핑 - “항공력으로 독립 쟁취” 원대한 꿈 펼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