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이응준 李應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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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최초의 태극기인 이응준 태극기. | |
출생 | 1832년 |
조선 (출생지 미상) | |
사망 | 1889년 이후 (향년 57세 이후) |
조선 또는 일제강점기 (사망지 미상) | |
국적 |
(1897~?) |
1. 개요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시기의 역관(譯官; 통번역 외무공무원)이다. 본관은 금산(金山)이다. 최초의 태극기 제작자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최초 제작자로 알려져 있던 박영효는 단지 이응준 태극기의 '사괘도'만 수정했을 뿐이라 한다.#2. 생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850년(철종 1년) 증광시(增廣試) 역과(譯科)에 2위로 합격하여 역관으로 등용되었다. 1882년 5월 14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을 앞두고 '근대국가의 조약 체결에는 국기가 필요하다'는 미국 공사 로버트 슈펠트의 요구가 있었다. 이에 고종과 김홍집의 명에 의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태극기이다. 비변사등록 1882년(고종 19년) 8월 17일자 “역관(譯官) 이응준(李應浚)은 공로를 바친 것이 이미 많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란 기사가 남아있는데, 이응준(李應俊)과 한자가 俊과 浚로 달라 '동일인인가? 아닌가?'의 논란이 있다.《고종실록》 26권, 1889년(고종 26년) 3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응준은 청나라 대신들에게 2만여 금(金)의 뇌물을 주며 '고종에게 사신 파견을 그만두기로 윤허를 받았다.'는 독자적인 자문을 올렸다. 이는 너무나 큰 외교적 결례이기에 큰 모멸감을 느낀 청나라 원세개는 '2만여 금(金)의 뇌물을 주며 사대를 끊겠다는 이응준을 엄벌하라', '2만여 금(金)은 어디서 났는가? 필히 협잡을 부려서 제 뱃속을 채운 것'이란 주장을 했다. 이에 고종이 의금부에 감처(勘處)하라고 명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응준의 기록에 전부다. 이후 이응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정황을 보면 이는 고종의 실제 지시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고종은 남은 기록들만 봐도 틀림없는 친미였고, 2만여 금(金)은 실록 표현 그대로 '하찮은 역관' 따위가 단독으로 좌지우지할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역관이 종9품~종7품에서 시작하는 낮은 관직[1]이었음을 감안하면 태극기를 만들고, 청나라와 사대(事大)를 끊고, 미국과의 교린(交隣)을 주장할 정도[2]로 상당히 강직하고 당찬, 뭣보다 고종이 무척 신임했을 인물로 추정된다.
3. 태극기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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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여담
- 동명이인의 친일파 이응준이 있는데, 한자까지 똑같다! 혼동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