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7 15:18:37

신가귀


1. 개요2. 행적

1. 개요

申可貴
(1608년(선조 41) ~ 1659년 음력 6월 10일)

조선 후기의 의사.

자(字)는 시백(時伯)이다.
무관 출신이었으나, 침을 잘 놓는다고 하여 인조가 의관으로 삼았다.

2. 행적

본래는 무인이었지만 침술에 능했고, 손이 떨리는 수전증이 있었음에도 침을 잘 놓기로 소문이 났다.

1658년에 효종이 낙상으로 인해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이때 신가귀가 효종의 치료를 위해 볼려졌고, 신가귀가 침을 놓으면서 종기가 치유되었다. 효종의 건강이 회복되자 윤강, 유후성과 함께 품계가 올랐다.

1659년경 4월말에 효종의 얼굴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고, 탕약이 효과가 없자 침으로 치료를 하려고 했다. 5월 4일에 신가귀는 지병으로 집에 있다가 병을 무릅쓰고 궐로 나아가서 효종의 병에 대해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려 부스럼을 이루려 하니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진단했고, 다른 의관인 유후성은 종기가 머리에 나서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결국 효종이 침을 놓는 쪽으로 결정하면서 신가귀가 침을 놓았고, 침구멍으로 고름과 검붉은 피가 쏟아져나오며 상태가 조금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피가 멈추지 않았다. 알고보니 신가귀의 침이 피부의 종기에만 구멍을 낸 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혈락, 즉 혈관까지 구멍을 내버린 것. 다른 의관들이 지혈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면서 결국 왕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의료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신가귀는 그날부로 유후성, 조징규 등 5명과 함께 의금부에 하옥되었고,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거듭 올라온다. 다만 현종은 신가귀가 그 전에 효종의 종기를 고친 공로도 있거니와 사고 당시 효종이 신가귀에게 침을 잡도록 명했던 점 등을 고려하여 처벌수위를 참형보다는 한 단계 낮은 교형으로 정하였고, 6월 10일에 교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1]

조선이 의술은 부족했을 지언정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모르는 나라는 아니었고, 왕도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왕이 죽었다고 어의를 무조건 죽일 일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국왕이 사망하면 어의들은 알아서 사직하거나 형식상 유배를 갔다가 복직하는 정도로 끝낸 것이다. 어의 중에 가장 유명할 허준도 선조가 승하한 뒤 유배를 가긴 했지만 변방 유배지에 처박은 게 아니라 중간에 멈춰주는 중도부처 형태로 보냈고, 그나마 귀양기간이 한 해를 넘기자 광해군이 그만하면 됐다며 도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조선의 어의 중에 국왕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극형으로 물은 사례는 신가귀가 유일한데, 신가귀는 앞서 언급했듯이 명백한 의료사고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1] 유후성과 조징규 등 나머지 4명은 관례대로 유배를 갔다가 복직하였다. 특히 유후성은 훗날 종1품 숭록대부에 가자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