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0:22:25

야스히토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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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지치부노미야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秩父宮雍仁親王
파일:야스히토 친왕.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이름 야스히토(雍仁)[1]
미야고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출생 1902년 6월 25일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동궁어소
(現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어소)
사망 1953년 1월 4일 (향년 50세)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쿠게누마 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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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어칭호 아츠노미야(淳宮)
신위 친왕(親王)
경칭 전하(殿下)
부모 부친 다이쇼 천황
모친 데이메이 황후
형제자매 쇼와 천황
남동생 노부히토 친왕
남동생 다카히토 친왕
배우자 세츠코 비
자녀 없음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육군중앙유년학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종교 신토무종교?
오시루시
(お印)
[2]
소나무(若松)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43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22년 ~ 1945년
최종 계급 소장
병과 보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
파일:Yasuhito.jpg
소쿠타이(束帯)를 입은 야스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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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부노미야의 문장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입대2.3. 말년2.4. 사망
3. 결혼과 가정
3.1. 황실 가계도
4. 사회 활동5. 여담6.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일본의 황족으로, 쇼와 덴노의 첫째 동생이자 다이쇼 덴노의 차남.[3] 일본 육군 군인이었다. 최종 계급은 소장.

2. 생애

파일:external/www.geocities.co.jp/33.jpg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 당시 섭정이었던 형 히로히토 황태자, 동생 노부히토 친왕과 함께. 가운데가 야스히토 친왕.[4]

2.1. 어린 시절

어릴 적에는 형 히로히토, 그리고 동생 노부히토 친왕과 함께 자라 서로 우애가 좋았다고 한다.[5] 다이쇼 덴노의 황자 4명 중에서 가장 활발해 유약한 맏형인 쇼와 덴노와 비교되었는데 형제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싸울 때마다 그가 이겼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형이 없으면 의미 없는 벤케이(弁慶)"라 하며 소심해졌다고 하니 형에 대한 의존이 컸던 모양.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는 장난감을 사 주기는 했지만 공무 때문에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 메이지 덴노 사망 전까지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6] 대신 할머니인 쇼켄 황후[7]는 그와 자주 만나 놀아주었다 한다.

2.2.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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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한 후 1920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22년 10월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만 20세가 되던 이 해에 성인식을 행하여 지치부노미야(秩父宮)라는 미야고(궁호)를 받았는데 지치부(秩父)는 옛 무사시(武藏國)국의 명산 이름으로 그의 저택이 서북쪽이라 이런 명칭이 붙었다. 이 무렵부터 육사동기 니시다 미쓰기의 영향으로 기타 잇키의 사상에 지지를 표하면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황위 계승 서열 제1위로서 아키히토 상황이 태어날 때까지 황사였다.[8][9]

1928년 12월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11월 43기로 졸업했는데 이때의 동기가 바로 그 악명 높은 츠지 마사노부다. 참고로 야스히토 친왕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범생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츠지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와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그가 신는 두꺼운 구두와 무거운 군도[10]를 스스로 구해 패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할힌골 전투에서 보인 츠지 마사노부의 정신나간 행동을 보고 경악해 이후에는 도조 히데키에게 '츠지 마사노부와 무타구치 렌야[11]를 기용하지 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31년 제1사단 보병 제 3연대의 중대장으로 임관하였는데 상술하였듯이 육사동기 니시다 미쓰기의 영향으로 기타 잇키(北一輝)의 사상에 동조하여 황도파 장교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한 그는 아예 형인 쇼와 덴노에게 직접 "친정을 펼치고 헌법을 정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한 탓에 시종장인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와 쇼와 덴노의 근심거리였고 직접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직위에서 해제되어 참모본부 작전과로 자리를 옮겼다.

1936년 2.26 사건이 발생하자 다음날 도쿄로 와서 청년 장교들과 회담한 후 쇼와 덴노를 배알했는데 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는커녕 꾸중만 듣고 말았다.

2.3. 말년

1937년에는 유럽을 순방하면서 조지 6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스웨덴-네덜란드-독일을 방문했는데 독일을 방문했을 때 나치당 전당대회에 초청받아 아돌프 히틀러뉘른베르크에서 회담했는데 히틀러가 그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을 증오한다."고 이야기하자 지치부노미야는 "국제관계에서 상대국의 지도자를 증오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대꾸했고 히틀러는 그를 노려봤다고 한다.

이 회담이 끝난 후 부관인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에게 "히틀러는 변덕쟁이다. 그를 신용하기란 어렵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독일과 친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귀국 후 1주일에 3번씩 궁성에 찾아가 형 쇼와 덴노에게 "추축동맹을 체결하자."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헨리 스팀슨 미 전쟁장관은 태평양 전쟁 전후 처리에서 쇼와 덴노를 전범으로 재판대에 올리기 위해 야스히토를 덴노 자리에 앉히는 걸 검토했다고 한다.

1940년 폐결핵 때문에 요양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집필활동에 몰두하다가 1953년 1월 4일 만 50세를 일기로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에서 사망했다.

2.4. 사망

그는 유언으로 "시신을 해부용으로 기증할 것, 화장할 것, 장례식에 어떤 종교도 관여하지 않게 할 것."을 남겼는데 황족의 시신이 해부되고 화장된 사례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는 이례적이었지만 쇼와 덴노가 그 유언을 존중하여 받아들여졌는데 이렇게 황족으로는 처음으로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증한 사람이 되었다.

장례식은 1953년 1월 12일 황족, 스포츠 관계자, 외교사절 800여명과 25,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간단하게 화장한 시신을 평소 사용하던 집기와 함께 매장하는 식으로 열렸다. 장례식에는 천황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천황이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천황은 장례식 다음날 무덤에 성묘하였다.

그가 죽은 지 42년 후 1995년 8월 25일 아내 세츠코 비도 사망하여 지치부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3. 결혼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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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세츠코 비와 함께

1928년 9월 28일, 마츠다이라 세츠코와 결혼했다. 세츠코는 1909년 외교관인 아버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의 부임지이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이후에도 중국미국 등에서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낸 귀국자녀다. 야스히토 친왕은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워싱턴 DC의 주미일본영사관에서 세츠코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결혼은 세츠코의 개인적인 용모, 성품, 재능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 세츠코의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아이즈 번다이묘였는데 메이지 유신 당시 유신에 반대하여 맞서 싸운 인물이라 유신 이후 아이즈 번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상당히 처지가 좋지 못했다. 이러던 중에 세츠코를 황실의 비(妃)로 맞이한 것은 아이즈 번&마츠다이라 가문과의 화해 시도였고 야스히토 친왕과 세츠코의 결혼으로 아이즈 번&마츠다이라 가문은 복권되었다.

본래 세츠코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가 같은 한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하면서 한자를 勢津子로 바꾸었다. 이세 신궁이 있어 일본 황실과 인연이 있는 지역인 이세(伊勢)에서 勢를,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즈(會津)에서 津을 따와서 지었다고 한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 나가코 황후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어머니였으나 그 아래의 며느리들은 귀여워하였는데 특히 둘째며느리인 세츠코 비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히나마츠리 때면 세츠코 비는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 인형들을 장식하여 놓고 그것을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세츠코 비는 이를 두고 만년의 회상록 《은의 본보니엘(銀のボンボニエール)》에서 "아드님만 네 분이시니, 매년 즐거움으로 삼으신 일이었다."고 추억했는데 이는 사다코 태후가 자신과 생일이 똑같은 야스히토 친왕을 편애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에게 시집 온 며느리이니 더욱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는 화족 나베시마 가문의 딸로,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노부코는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면서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는데 1959년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 이 힘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노부코의 언니이자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도 이에 가담했다.[12]

세츠코 비도 친정어머니, 이모, 형님 나가코 황후, 아랫동서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 야나기하라 뱌쿠렌[13]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고 겨우 황실로 시집온 후에도 미치코 황태자비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노부코는 죽는 순간까지도 미치코 황태자비를 미워했지만 다행히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시간이 갈수록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미치코 황태자비와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야스히토 친왕과 세츠코 비에게는 한 번 아이가 생길 뻔했으나 2.26 사건 당시 야스히토 친왕이 세츠코 비와 함께 주둔지에서 도쿄로 올 때 추운 날씨에 세츠코 비가 몸을 해쳐 결국 유산으로 끝났고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자녀를 낳지 못했던 세츠코 비는 대신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의 자녀들인 나루히토 친왕, 후미히토 친왕,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친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특히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 키코 비에게는 자신이 오랫동안 맡고 있었던 결핵예방협회 총재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자신과 같은 귀국자녀 출신이며 친왕의 아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5년 세츠코 비가 사망함으로써 결국 지치부노미야 가문은 그대로 단절되었고 아카사카 토구 고쇼 내 부부가 살던 저택은 세츠코 비가 생전에 귀여워했던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일가가 물려받아 거주하게 되었다.[14]

3.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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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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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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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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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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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4. 사회 활동

사회 활동으로는 스키, 럭비 등 스포츠의 보급에 앞장서서 국민들로부터 스포츠의 왕자님이란 애칭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그 이름은 '지치부노미야 럭비장', '지치부노미야 기념 스포츠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1928년에는 홋카이도 시찰 시 장차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대형 스키점프대 건설을 제안하였으며, 역시 동계올림픽 개최를 대비해 삿포로 상공 회의소와 함께 1934년 삿포로 그랜드 호텔을 개업했다. 일영협회와 일본-스웨덴 협회의 총재를 역임해 국제친선사업에서도 힘썼으며 등산을 좋아해 영국 체류시 마터호른 등정을 완수했다. 그의 기념공원에 있는 동상도 후지산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5. 여담

  • 과묵하고 학자스러운 형 쇼와 덴노와는 달리, 테니스와 등산을 좋아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해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중심 인물이었다고 한다. 요양 중에는 현지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접해 학교 졸업식에 내빈으로 참가해 축사를 해 주기도 했으며 패전 후에는 적극적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하여 새로운 시대의 황실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 특히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에 대해 기대가 컸는데 1953년 영국엘리자베스 2세여왕 대관식 당시 아직 20세도 되지 않은 황태자를 대표로 보내는 것에 대해 궁내청에서는 상당히 고민이 많아서 다른 사람을 대표로 보내려고 했으나 황태자를 대표로 보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일본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다만 대관식이 열리기 전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6. 창작물

황도파와 밀접했기 때문인지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중 동아시아를 더 세세하게 구현한 모드인 8년 항전에서는 2.26 사건이 성공해 황도파가 집권하는 경로에서는 히로히토가 군인들에 반발하면 히로히토를 대신해 야스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된다.

같은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도 등장한다. 유신파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인 쇼와 유신이 성공하면 독재 체제에 반발한 좌익 암살자가 히로히토 천황을 암살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경우 암살은 실패하지만 암살이 성공하면 야스히토가 아키히토를 대신해 섭정이 된다. 섭정으로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유신파 내의 급진파 일부가 야스히토에게 접근해 천황으로 즉위할 것을 제안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또 카이저리덕스에서는 브리튼 왕국의 섭정으로 선출 가능하다.

다른 대체역사 모드인 Red Flood에선 히로히토가 이봉창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15] 에이겐 덴노로 재위하고 있다. 레드 플러드 세계에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석패했기 때문에 실제역사보다 나라가 부실한 상태고 식민지에선 독립 세력들이 진압되지 않고 준동하고 있다. 영원한 치세라는 연호가 무색하게 36년 게임이 시작되는 년도에 오카와 슈메이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열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식민지들이 독립해버린다. 혁명으로 일본 본토에서 쫓겨나면 조선 자치령(조선 총독부)으로 망명하지만 대부분은 독립군이 승리한다. 한국도 독립했다면 남만주로 망명하며 남만주도 멸망했다면 거기서 일본의 마지막 덴노가 된다. 러시아의 야쿠티아를 일본인들이 전복하고 집권하면 거기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망명 일본제국을 세우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 관동대지진과 기타 잇키의 삼균주의 혁명 와중의 혼란기에 천황으로 즉위한 뒤 이들을 팽하고 절대군주가 된다. [16]하지만 한국의 기습을 당하고 혼슈가 생화학 무기로 초토화되자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연합함대와 하와이로 망명했다. 결국 일본의 남은 해군 전력은 전멸 당하고 자신도 아내와 어뢰를 맞은 배에서 생을 마무리 한다. 죽은 후에는 조지원의 지시로 닮은 사람이 대신 전범 재판에 나가 일본의 역사와 민족 정체성을 지워버렸다.

대통령 각하 만세의 작가의 다음 작품인 한국 독립 전쟁에선 이봉창의 의거로 히로히토가 사망하면서 아키히토가 태어나지 못해서 그가 헤이세이 덴노가 된다. 그러나 그가 즉위하고 해군 출신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해군이 도쿄를 공격하게 되고 그 난리통에 탈출하던 도중 오인사격으로 1년도 못가고 사망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아키히토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전후 미국에 의해 히로히토를 대신해 천황이 된다. 히로히토가 전범재판에 서게 되자 맥아더에게 히로히토의 사형만큼은 면하게 해달라 부탁해보나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거절당한다. 결국 히로히토는 교수형당하는 전개가 나온다.


[1] 한국식 한자독음으로는 ‘옹인’[2]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3] 총 4형제이며 히로히토(1901~1989), 야스히토(1902~1953), 노부히토(1905~1987), 다카히토(1915~2016) 순이다.[4] 히로히토의 키는 165cm였고, 노부히토의 키는 168cm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야스히토의 키는 170cm 전후임을 알 수 있다. 셋 모두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는데 야스히토는 특히 상당한 장신임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170cm의 키는 일본 황실에서 2번째로 큰 키이다.[5] 막내동생 다카히토 친왕은 바로 위의 형인 노부히토 친왕보다도 10살이나 어려서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 내외는 오랜 관례를 깨고 막내아들만은 자신들의 곁에 두고 키웠다.[6] 굳이 공무 때문이 아니어도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메이지 덴노는 대인기피증이 심해 자신의 자식들조차 잘 만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7] 친할머니는 아니다. 쇼켄 황후불임이었고, 다이쇼 덴노메이지 덴노후궁 야나기하라 나루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8] 이때 지치부노미야는 황사로서 책봉식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아키히토 상황이 1933년에 태어나자 조용히 황사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점 때문에 2020년 4월로 예정된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의 입황사 의식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지치부노미야를 거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9] 다만 야스히토가 황사였을 때 형 쇼와 덴노와 형수 고준 황후는 20대 초중반~30대 초반으로 충분히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법한 나이였지만 후미히토는 형 나루히토 덴노와 형수 마사코 황후는 즉위한 2019년 5월 기준으로 이미 50대 중후반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는 차이점이 있다.[10] 츠지 마사노부는 육군대학 시절, 힘이 남아 돌았는지 아주 정력적으로 살았다. 그래서 신발이 자주 닳아 버려 두꺼운 가죽으로 된 구두에 징을 박아 신었으며, 보통의 지휘도는 가볍다고 하여 좀 더 무거운 군도를 썼다고 한다.[11] 임팔 작전의 병크를 터뜨린 삼대오물 중 한 명.[12] 이츠코는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나 버렸구나!!"라고 썼다.[13]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다이쇼 덴노의 생모인 야나기하라 나루코는 뱌쿠렌의 고모가 된다.[14] 세츠코 비 사망 전까지 후미히토 친왕 일가는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지내던 저택에서 지냈다.[15]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32년에 죽었다는 정황상 이봉창에게 암살당한게 확실하다.[16] 연호도 세이카로 바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