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7e0707> 세계 대전의 양대 진영 | ||
제1차 세계 대전 | 협상국 | 동맹국 |
제2차 세계 대전 | 연합국 | 추축국 |
추축국 Axis powers | ||
1936년 ~ 1945년 | ||
■ 추축국 (추축국의 점령지 및 식민지[1]) ■ 연합국 (연합국의 식민지) ■ 진주만 공습(1941.12.) 이후 연합국 ■ 중립국 | ||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 |
결과 | 패전 | |
역사 | 1936년 11월 25일 방공 협정 1939년 5월 25일 강철 조약 1940년 9월 27일 삼국 동맹 조약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및 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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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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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헝가리 왕국의 줄러 굄뵈시(Gyula Gömbös) 헝가리 총리가 고안했으며, 추축국이라는 명칭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발언에서 유래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상호 협정으로 두 나라의 수도인 베를린과 로마를 잇는 선이 국제 정치의 중심축이 된다는 각오가 담긴 이름이다.
2. 과정
일본에서 제작된 선전 포스터 '사이 좋은 세 나라(仲よし三国)'.[2] |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선전 포스터 '이기리라(Vinceremo)'. |
2.1.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이 추축국의 리더격에 해당하는 나라였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이후 독일은 자국의 재군비에 제동을 거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노골적으로 재군비 준비를 했고, 급기야 1936년 3월에 라인란트 재무장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하며 재군비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이 무렵까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국은 적도 동맹도 아닌 미묘한 관계였다.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국제연맹의 질타를 받아 이미 1933년에 독일과 함께 국제연맹을 탈퇴한 나라였지만 문제는 이탈리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국제연맹에 잔류하면서 나름대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움직였다. 특히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히틀러를 탐탁찮게 생각했으며,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자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영국, 프랑스와 스트레사 체제를 결성하여 "만약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으며 독일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아무리 반쪽짜리 유사 열강 이탈리아라지만 이제 막 재무장을 시작한 독일이 영프를 뒷배로 둔 이탈리아에 덤벼들면 어떻게 될 지는 자명했고 결국 히틀러가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점점 국제 왕따가 되어가던 일본과 1935년에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으로 역시 국제 왕따가 되어가던 독일은 서서히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이들끼리 힘을 합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특히 독일, 일본 모두 강력한 반공 국가였는데, 두 나라 사이엔 소련이라는 이데올로기상 거대한 적국이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팽창을 같이 힘을 합쳐 견제하자는 발상을 했고, 그리하여 1936년에 독일과 일본 두 나라는 방공 협정을 체결해 사실상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이탈리아가 슬슬 꼽사리를 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협약 체결로 영국, 프랑스와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1935년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몰래 단독으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인정했다. 이탈리아는 기껏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했더니 영국이 그걸 먼저 깨버렸다고 판단하여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체제로 영불이 독일을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탈리아가 노리고 있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도 영불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여 1936년 전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는데 이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받아 이탈리아 역시 국제 왕따가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를 비난한 국가들에는 이탈리아가 대독일 동맹국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도 있었고 배신감을 느낀 이탈리아는 결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기대를 접고 독일에 접근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도 1937년에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했고, 그 해 11월 6일에 방공 협정에 가입해 사실상 추축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했던 이탈리아가 한 편이 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병합했고 같은 해엔 수테텐 지방 병합을 구실로 아예 체코슬로바키아까지도 모두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 평화주의자인데다 독일에 다소 우호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었고 또 이탈리아까지 독일의 편을 들어준 덕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독일은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영유권을 인정했고 무솔리니는 그걸 이용해 쥐트티롤의 이탈리아화를 단행했다.
그리고 1939년에 독일은 이탈리아와 강철 조약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우의를 다졌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이 3국은 소련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동맹을 구상했지만,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는데 왜냐하면 독일이 소련과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어 이 추축국들 사이에서 분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의 문제는 독일이 소련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이탈리아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독소 불가침 조약 방침을 사전에 통보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리벤트로프의 독단으로 스탈린과 접촉하고 조약을 맺어버렸으니, 일본과 이탈리아가 크게 당황했다.[3]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발칸반도와 아프리카를,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 세 나라는 1940년 9월 27일에 삼국 동맹 조약을 맺어 추축 동맹을 공식적으로 결성했다.
2.2. 이탈리아 왕국
사실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물론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지만, 무솔리니는 의외로 초반에는 나름 얌전한 편이었다. 나름 국제연맹에서 상임이사국으로 한 자리 하던 나라였고, 줄을 잘 선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과 함께 주요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과 행보를 발 맞춰 했다. 특히 1934년에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자 그 때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시엔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고 강경하게 맞서 히틀러의 야욕을 저지한 바 있다. 거기에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 중인 독일을 경계하여 영국, 프랑스와 함께 스트레사 체제를 결성하여 대독일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그러나 이런 대외적 행보와는 달리 대내적으로는 협상국 동지들과 차츰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우선 이탈리아의 제일 큰 불만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승전국임에도 정작 이탈리아에 돌아온 전리품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최대 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갖고 있는 이탈리아계 영토와 막대한 식민지를 약속한 영국과 프랑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졸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소모전을 걸어 국력의 막대한 소모를 유도하고[4] 보다 못한 독일의 개입에 대패를 당해 밀려났으나 항복하지 않고 버티며 결정타를 날리면서 결국 동맹국의 중추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혼자 힘으로 항복을 받아낸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렇게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승리를 거둔 이탈리아는 약속한 보상을 기대했는데 파리 강화 회의에서 평화 14개 원칙에 입각한 우드로 윌슨의 도덕외교로 인해 민족자결주의 명분으로 겨우 얻은 트렌티노알토아디제랑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와 자다르 정도만 얻었고 약속했던 달마티아의 대부분은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돌아갔으며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역시 영국과 프랑스 둘이서만 갈라먹자 이탈리아에서는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라면서 여론이 폭발했다. 분노한 국내 여론은 전쟁 종결 직후 무솔리니와 파시즘 세력이 쉽게 집권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거기에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통보를 하지 않고 단독으로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의 재건을 용인하자 무솔리니는 강한 배신감을 느꼈는데 여기에 영국, 프랑스와 사이가 틀어진 결정타가 바로 1936년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아프리카는 마치 유럽 국가들의 거대한 케이크가 되어 몇 개 나라를 빼고는 전부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 갈라먹은 상태였고[5],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이탈리아가 차지할 만한 식민지는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때 노린 나라가 바로 독립국이었던 에티오피아였다. 이탈리아는 40년 전인 1896년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침공했다가 아드와 전투에서 패하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한 바 있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식민지를 넓히고 40년 전의 패배를 갚을 겸해서 에티오피아에 50만 대군을 보내 고전 끝에 정복하고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에 노골적으로 비판을 가했다. 이에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니네 1차 대전 끝나고 독일 식민지 다 갈라 먹었으면서 우리가 식민지 늘리는 건 왜 안 되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에티오피아 정복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점점 국제연맹에서 고립되어 갔고, 결국 1937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탈리아는 새로운 연합 상대를 모색했고 결국 독일과 협력하게 되었다.
이후 1939년에 독일이 독단적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는 바람에 이탈리아는 잠시 독일에 불만을 품었으나 이미 에티오피아 침공 건으로 영국, 프랑스 등과 사이가 틀어졌기에 추축국을 이탈하는 건 불가능했고 결국 1940년에 독일, 일본과 함께 삼국 추축 동맹을 결성해 추축국을 완벽하게 결성하게 된다. 이후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는 독일군의 보조 역할을 수행했다.
2.3. 일본 제국
일본 제국은 추축국 중 유일한 아시아 국가이자 유럽 외 국가였다.[6] 그리고 근대 제국주의 국가 중 말석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협상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대열에 끼긴 했지만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전리품 분배 몫이 매우 적었다.그 이유는 일본은 협상국 측에 줄 선 덕에 전승국이 되었을 뿐 전쟁에서 한 발 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 산둥반도 일대에 주둔 중이었던 독일군과 전투한 뒤로 대부분은 협상국 측에 물건 팔아먹어 돈 벌기에만 골몰했다. 이 때 떼돈 벌었던 인물들을 일본에선 나리킨(벼락부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주 전선은 유럽이었고, 독일로서는 한낱 조차지인 산둥반도에 주력 부대를 투입시킬 순 없었다. 즉, 일본은 산둥반도에 있던 독일군 약체 부대와 싸워 이긴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유럽 전선으로 지원 병력을 보낸다든지 하는 짓은 전혀 안 했다. 그러니 연합국 측에서도 주도적으로 싸웠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보상이라고는 꼴랑 중국 내 독일의 조차지와 각종 이권들을 일본이 승계하는 것 외에는 주지 않았다.
1929년에 대공황이 터지자 일본 경제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토가 넓고 천연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했던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공황을 극복했고, 해외 식민지가 많은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정책으로 극복했다.[7]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라고는 조선과 대만 밖에 없었다. 거기다 조선과 대만 모두 천연 자원이 부족한 나라들이라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뽑아먹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식민지를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1932년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연맹은 일본을 비난했고, 서서히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일본은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한편, 그 무렵에 독일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며 막가파의 길을 걸었다. 이에 독일과 일본은 방공 협정을 체결해 함께 힘을 합쳐 소련을 견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엔 이탈리아가 방공 협정에 가입해 셋이서 힘을 합쳤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939년에 독일이 이탈리아와 일본 몰래 독단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일본은 크게 당황했다. 당시 일본은 소련-몽골 연합군를 상대로 할힌골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독일의 행위는 배신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방공 협정을 파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때의 여파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이 사퇴하는 등 큰 정치적 후폭풍이 불었지만 추축 동맹은 유지되었다.
독일이 폴란드와 베네룩스, 프랑스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자 일본은 중일전쟁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위해 독일과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노렸다. 1940년에 비시 프랑스와 협정을 맺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획득했고,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각국의 이해관계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있었다. 삼국 동맹 체결에 대해 가장 거세게 반발했던 곳이 바로 일본 제국의 해군이었다.[8] 이후 찬성으로 돌아섰지만, 삼국 동맹 체결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아 육군측과 삼국 동맹을 긍정하는 측의 여론에 의해 크게 비난받았다. 이러한 해군측의 삼국 동맹 체결에 반대했던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였다.
3. 결속력
추축군의 전차가 연합군의 국기들을 깔아뭉개는 이탈리아 왕국의 선전 엽서 |
일본 제국은 추축국이었지만 1939년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아베 노부유키 일본 총리가 앞장서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거세게 비난했다. 반소/반공 기조를 앞세우고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인 우방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추축국 강철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으나 히틀러의 독소 불가침조약, 곧바로 이어진 폴란드 침공으로 일본의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 국내에 있던 폴란드 대사관을 온전히 보존했고,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에 계속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히틀러의 기대와 달리, 일본이 소련을 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이 일본한테 뒤통수를 날린 것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1941년 연말 태평양 전쟁을 일본이 일으키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일본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대 일본 선전포고는 영국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선전포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폴란드 망명 정부 역시 형식적인 선전포고 이후 일본 제국과 1945년 9월 9일까지 별다른 전투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당시 지멘스의 중국 지사장이자 많은 중국인 난민들을 살린 존 라베가 일본 점령 하 난징의 참상을 히틀러에게 알리려 했지만, 이미 힘러가 보고를 받고는 독-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게슈타포로 대응했다. 히틀러는 난징과 존 라베에 관한 보고는 티끌만큼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존 라베가 반역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게슈타포도 알고 있었기에 주의만 주고 풀려났다. 존 라베는 전쟁이 시작되고 독일의 지멘스 본사에서 근무하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선에서 끝냈다.
이후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통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 북아프리카 전역을 벌이자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동맹을 맺고 대영제국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고 1941년 4월, 독일의 외교전략에 맞춰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고 독일, 소련과 함께 영국과 미국에 맞설 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불과 2개월 뒤, 독일 혼자 힘으로 소련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착각한 히틀러가 일본에게 어떤 언질도 주지 않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해 독소전쟁이 벌어져 일본의 큰 그림은 또 독일에게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이탈리아의 경우 독일보다 심각했는데,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고 1934년에 처음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도하자,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이를 막으려고 했다. 결국 아직 전쟁을 치를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 히틀러가 합병을 보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해서 국제적으로 왕따가 되었을 때 유이하게 독일, 일본만이 이탈리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후 독일이 프랑스 침공으로 승승장구하자 무솔리니는 이대로 가다간 독일이 전 유럽의 패권을 장악해 이탈리아가 독일의 따가리(...)가 될 것이라 우려했고 이탈리아의 몫을 챙기기위해 전쟁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히틀러와 상의없이 당시 친독정부였던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쳐발리는 트롤링을 벌였다.
게다가 연합국에는 절대강자인 미국에다가 역시 강대국인 대영제국, 소련, 프랑스 식민제국[13] 등이 있었지만, 추축국에 소속된 국가들 중에 제대로 된 강대국은 나치 독일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결국 전세계와 싸울 만큼의 국력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보자면 일본은 군부가 장악하고 있어 정부의 제대로 된 통제가 불가능했고, 이탈리아는 1870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기 직전까지 별 볼일 없는 도시국가 집단에 불과했다. 한편 독일도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다가 제2제국으로 통합된 시기(1871년)가 비슷하기는 하나, 독일은 강국이었던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통합된 것이고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의 혼자서 이끌 만큼 강대국이었다. 물론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긴 했으나, 전쟁 피해 자체는 보통 수 년 뒤면 복구되기 때문에 독일의 국력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혼란기를 제외하면 언제나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성했고, 전간기 말기에 독일을 휩쓸었던 대공황은 전세계가 휘말렸던 재앙이었으니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독일의 역량이 양면전선을 치르며 연합국들을 동시에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14] 결국 독일은 이들 모두를 상대해야 했다.
당장 이러한 열악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대전 기간 동안 생산된 전 세계 군수물자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던 미국의 압도적인 공업력이었다. 추축국의 핵심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쟁 기간 내 군수물자 생산력을 전부 합쳐도 미국 하나보다 모자랐다.
물론 추축국이 연합국에 비해서 살림에 여유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들도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는데 독일과 일본의 예가 단적이다. 독일은 최신 무기와 그 설계도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까지 잠수함으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공여해 주었으며[15], 일본 또한 해군 관련 기술을 독일에게 전수해주는 등 서로 도움을 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이고 독일 또한 그렇게 전수받은 기술을 써먹지 못했다.[16] 게다가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일본 간에 태평양 전쟁이 개시되자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공격에 기뻐하며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물론 이는 일본의 적국인 미국을 독일이 공격해주면 일본이 독일의 적국인 소련을 공격하거나 최소한 견제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기인한 판단이었으나, 이러한 히틀러의 생각과는 달리 일본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황이었고, 소련과의 대치 지대에 있는 관동군의 정예사단을 포함한 나머지 병력을 인도네시아에 몰빵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게 없다지만 당시 히틀러의 판단대로 관동군이 시베리아까지 진격은 무리여도, 최소한의 견제나 소련 병력 분산을 도왔다면 독소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물론 전체적인 전쟁 양상은 변함이 없다. 애초에 히틀러의 계획대로 일본 제국과 함께 소련을 점령했어도 추축국의 이념과는 아주 반대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17] 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져서, 일본은 1945년 8월 소련이 불가침 조약 만료 후 선전포고[18]될 때까지 독일과 전쟁 중이던 소련을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19]
독일과 일본이 이런 상황이면 이탈리아라도 제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당장 이탈리아는 지방의 힘이 더 강해서 무솔리니가 제대로 권력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독일과 일본은 초반에 선전이라도 했지, 이탈리아는 고작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역으로 털렸고 북아프리카에 잔존한 영국군도 스스로 못 물리칠 정도였으니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움을 줘야 할 판이다.[20]
더불어 다른 추축국들도 군사적인 면에 한정해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왕국은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루마니아가 빼앗아간 도브루자, 트란실바니아 같은 영토 문제로 인해 원수 관계였다. 1940년 군부 쿠데타로 미하이 1세가 복위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소전선에 참여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하이 1세는 군부를 축출하고 귀신같이 친소국가로 돌아섰다. 물론 연합국은 루마니아를 패전국으로 분류했고, 소련은 왕정을 무너뜨린 후 위성국가로 편입했다.
불가리아 왕국은 애초에 나치의 압력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가다시피 했었고, 역사적으로도 독일보다는 러시아와 더 굉장히 친밀했기에 독소전쟁에 참전하는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21] 하지만 히틀러가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넣은 덕분에 루마니아로부터 발칸 전쟁 때 잃었던 도브루자 등 영토 일부를 양도받고, 덤으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 일부도 나눠받아서 추축 진영에 가담했다. 그러나 끝내 독소전쟁에는 파병을 거부했고, 홀로코스트에 맞서 유대인들을 나치에게 넘기지 않으며 독일과 대립했다.[22]
바그라티온 작전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해지고 소련이 동유럽, 발칸 반도 일대로 밀고 내려오자, 불가리아는 바로 독일과의 국교, 동맹 관계를 파기하여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 영토들을 포기하고 소련에 붙어 독일군을 공격했다.[23] 그러나 얄짤없이 나치 패망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일당제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어 소련의 위성 동맹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경우 끝까지 독일과 함께 싸웠고 실제 이탈리아보다도 독일 전력에 도움이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은근슬쩍 강화를 시도했고 결국 독일군에 점령되어 독일의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다만 별개로 헝가리군은 독일군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헝가리는 소련에 점령당하여 공산화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추축국은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협조하질 않았다.[24] 애초에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부터가 서로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추축국의 주요국들은 모두 전쟁으로 자국의 영토를 넓히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이었고 이 때문에 의사결정 등에 있어 합리성이 결여되어 독일은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 뮌헨 협정, 폴란드 침공 등 외교적 신뢰를 깡그리 무시하는 짓을 저질렀고 이탈리아는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프랑스 침공, 북아프리카 전선, 그리스 침공 등 자국의 역량에 맞지도 않는 전쟁들만 일으켰고 일본은 아예 독일의 단점과 이탈리아의 단점은 둘 다 가졌다. 또한 일본은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있어 서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너무 멀었다. 이 때문에 독일-이탈리아와는 달리 도움을 주고받기 힘들었고 괜히 그들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이익이 침해당했다가는 본인이 독박을 뒤집어쓰는 구조였다.
4. 유엔의 적국 조항
현재는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지만[25], 지금도 유엔의 규칙 중에 '옛 추축국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일 경우 연합국이나 기타 국가가 선전포고 없이 바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 남아 있으며, 이게 흔히 말하는 적국조항이다. 유엔헌장 53조와 107조로 이곳을 참조.유엔 헌장 제53조 # |
1.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권위하에 취하여지는 강제조치를 위하여 적절한 경우에는 그러한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을 이용한다. 다만,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없이는 어떠한 강제조치도 지역적 약정 또는 지역적 기관에 의하여 취하여져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이 조 제2항에 규정된 어떠한 적국에 대한 조치이든지 제107조에 따라 규정된 것 또는 적국에 의한 침략 정책의 재현에 대비한 지역적 약정에 규정된 것은, 관계정부의 요청에 따라 기구가 그 적국에 의한 새로운 침략을 방지할 책임을 질 때까지는 예외로 한다. 2. 이 조 제1항에서 사용된 적국이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 대전중에 이 헌장 서명국의 적국(추축국)이었던 어떠한 국가에도 적용된다. |
유엔 헌장 제107조 # |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 헌장 서명국의 적이었던 국가에 관한 조치로서, 그러한 조치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부가 그 전쟁의 결과로서 취했거나 허가한 것을 무효로 하거나 배제하지 아니한다. |
5. 전쟁 이후
독일의 경우 전범들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고 영토가 갈기갈기 찢기는 운명을 맞이했다.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동프로이센 전역, 슐레지엔의 거의 전역, 포메른의 중부와 동부(힌터포메른), 브란덴부르크 동부(노이마르크), 작센의 극히 일부 등 동부 지역이 각각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되어 전 국토의 24%를 상실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부 출신 실향민들이 속출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병합도 무효화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의 영구 통일 금지를 맹세해야 했다. 게다가 남은 영토마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며 영토가 3분할되었다.그러나 서독은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발판으로 유럽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으며 68운동을 기점으로 과거사를 청산해 주변국들과의 신뢰를 회복했다.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고 이듬해인 1990년 동서독은 통일을 이루었으며 현재도 프랑스와 더불어 유럽연합의 쌍두마차이자 경제력 3위의 국제적 강대국으로 입김을 발휘한다.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전범들이 극동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처단되었고 점령지, 식민지(외지), 괴뢰국, 조차지, 조계지, 위임통치령 할 것 없이 모두 상실했으며 본토(내지)였던 가라후토와 치시마 열도마저 소련에 합병당해 전 국토의 11%를 잃었다.[26][27] 비록 독일과 달리 소련의 강점을 회피해 분단을 면했지만 상술한 영토 상실을 비롯하여 군대 해산, 재벌 해체, 평화헌법과 서구 민주주의 채택, 화족제 폐지, 구황족의 황적이탈 등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전후 일본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발판삼아 1960년대에는 서유럽 강대국들을, 1983년에는 소련을 넘어서 제2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비록 자민당의 독주체제와 21세기 들어 시작한 사회 내 우경화 분위기 등으로 비판받지만 어찌되었든 2009년 중국에 경제력 2위 자리를 빼앗기고 2024년 독일에 3위 자리를 빼앗긴 이후에도 제4의 경제대국이자 미국의 맹방으로서의 지위가 굳건하다.
이탈리아의 경우 1943년에 이르게 항복했기에 전범재판을 면했으나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에게해 제도를 비롯한 식민지, 점령지는 물론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의 자다르와 풀라 일대, 프랑스와의 접경지 일부 등 본토의 몇몇 지역들을 각각 유고슬라비아와 프랑스 등에 할양하여 전 국토의 3%를 잃었다. 서독,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후 경제성장을 통해 경제력 10위권 이내에 드는 준강대국으로 복귀했다.
그외에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추축국 진영에 속해있던 동부 유럽의 국가들은 소련군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자국내 공산당 세력들에 의해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같이 4분할되었으나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여 연합국 점령 신세에서 탈피했다. 크로아티아는 다시금 공산정권 유고슬라비아에 재합병당했다. 추축국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추축국과 함께 소련에 대적한 핀란드는 카렐리야를 비롯한 영토를 소련에 할양하고 중립국으로 남을 것임을 맹세했다.
6. 전쟁범죄
7. 주요 추축국
7.1. 나치 독일
퓌러 | 아돌프 히틀러 |
국가대통령 | 카를 되니츠 |
국가수상 | 파울 요제프 괴벨스 루츠 폰 크로지크 |
가입 목적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빼앗긴 땅 수복 레벤스라움 |
1936년 3월에는 재군비 선언과 라인란트 재무장을 함으로써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에 이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다.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주데텐란트(뮌헨 협정)와 리투아니아의 메멜란트[29] 1939년에 얻었다. 독일은 이어서 체코슬로바키아를 1939년에 점령하고, 곧 분할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독일에 합병하고,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만들었다.
1939년 8월 23일에는,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고, 독일은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한다. 1941년까지 독일은 유럽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으나 독소전쟁 시작 후,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과 쿠르스크 전투[30]에서 독일군 대부분의 군력을 잃게 되었다.[31] 그리고, 서방 연합군은 프랑스 상륙과 이탈리아 상륙을 전개했으며, 히틀러가 1945년에 퓌러붕커에서 자살하자 항복했고 연합국에 분할점령된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을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했고 동서독이 분단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기적적으로 통일할 수 있었다.
7.2. 이탈리아 왕국
국왕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두체 | 베니토 무솔리니 |
총리 | 베니토 무솔리니 피에트로 바돌리오 |
가입 목적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적은 영토[32]를 받은 것에 대한 불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 |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에 참가했다.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1941년에는 이탈리아 군대가 대패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이탈리아 전쟁과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의 패배의 결과였다.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침공 등 독일의 개입을 통해 이탈리아 군사의 붕괴와 도시 함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었다. 결국 1943년에 파시즘에 정나미가 떨어진 이탈리아 사람들은 무솔리니에 대한 신뢰를 잃고, 더 이상 전쟁을 지원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북아프리카를 5월에 점령하고 시칠리아를 7월에 침공했다.
1943년 7월 25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을 출범시켰으며, 무솔리니를 체포하며 연합국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1943년 9월 8일에 연합국에 가입하고, 연합국과 휴전하며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1943년 9월 12일, 떡갈나무 작전으로 그랑삿소 습격[33]이 성공함에 따라 두체는 탈출했다. 이후 두체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며 종속국의 상태에서 약간의 권력만 가지고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모양만 추축국의 일원으로 다시 참가한다.
하지만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역시 붕괴된다. 그리고 1년 후 1946년 이탈리아는 왕정이 폐지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7.3. 일본 제국
천황 | 쇼와 천황 |
내각총리대신 |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
가입 목적 | 대동아공영권에 기초한 일본 제국 확장 도모 중일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34] |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각종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일본은 이후 소련과 할힌골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1941년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하며 소련과 잠재적인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유럽에 관심이 집중되는 동안, 일본은 유럽의 식민지를 얻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비시 프랑스 동안, 독일은 인도차이나의 점령을 허락했으나 연합군은 일본과 전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수출 금지령을 선포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일본 제국 해군은 1941년 12월 7일 미 해군 태평양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에 진주만 습격을 지시했다. 일본군은 괌, 사이판, 말레이시아, 홍콩을 습격했다. 처음에는 연합국에 피해를 입혔지만 미국의 생산력이 증가하여 미국은 일본 열도를 향해 대규모의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군부가 항복을 하지 않자 1945년 트루먼 정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동시에 만주에서는 소련까지 침공해서 결국 항복했으며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군주제였던 다른 추축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을 계기로 모두 군주제를 폐지했지만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하여[35] 현재까지 이어지고있다.
7.4. 서로 비슷한 점
추축국 3국의 근대사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삼국 모두 전근대에는 통일 국가와는 한참 동떨어졌고 거의 비슷한 시점인 1860년대 후반~1870년대 초반에 각각 보신 전쟁(1869), 이탈리아 통일 전쟁(1870),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1)을 거치며 만성적인 봉건제, 지역주의를 해소하고 중앙집권적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또한 이들 3국 모두 늦은 통일로 인해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열강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상대적으로 적은 식민지만 보유 2류 후발주자 국가였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미국발 대공황 당시 배타적인 블록을 형성하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일련의 한계는 전체주의 사상과 결합해 추축국 3국이 1930~40년대에 팽창 지향의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동인이 되었다.8. 기타 추축국
8.1. 헝가리 왕국
섭정 | 호르티 미클로시 |
총리 | 지울러 굄베시 텔레키 팔 케레스피셔 페렌츠 바도시 라즐로 칼러이 미클로시 스조이 도메 제자 라카토스 살러시 페렌츠 |
가입 목적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트리아농 조약으로 빼앗긴 땅 수복 |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로 떨어져 나간 헝가리 왕국은 1939년에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1940년 11월 20일 트리아농 조약으로 빼앗긴 땅을 수복하기 위해 삼국 동맹 조약에 체결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 외에 처음으로 가입했고 1941년 11월 25일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축국으로 끌려가거나 자의반 타의반으로나마 추축군에 합류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와 달리 헝가리는 추축국 설립 아이디어를 낸 국가이다. 따라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추축국 사이에서 준 메이저 행세를 했고, 같은 추축국이던 크로아티아나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을 상대로 행패를 부려 트리아농 조약 이전의 영토를 어느 정도 되찾고도 독일과 이탈리아가 묵인하는 등 추축국 내에서도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가졌다. 1944년에는 전황이 기울자 열심히 눈치를 보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소련에 붙으려 했으나 이에 반발한 살러시 페렌츠의 화살십자당과 독일군이 호르티 미클로시를 감금하고 전 국토를 점령하면서[36] 일본과 함께 끝까지 독일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소련 등지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도 이탈리아보다 더 할 정도로 만만찮다. 심지어 전쟁범죄의 반성과 사과도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 시기 관련 자료들을 파기해 버렸다. 오르반 빅토르를 비롯한 자국 내 극우파들이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거나 전범 행위를 정당화하는 한편 트리아농 전의 영토를 복구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 있는 국민들 몇몇은 형제국 폴란드인들을 돕기도 하는 일면을 보여주었다.
전후 루마니아, 불가리아처럼 소련에 점령당해 공산화되었으며 1989년에야 동유럽 혁명으로 민주화되었다.
8.2. 루마니아 왕국
국왕 | 미하이 1세 |
콘두커토르 | 이온 안토네스쿠 |
가입 목적 |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베사라비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 수호 |
루마니아는 소련 공격에 1941년 6월 22일에 합류했다. 거의 80만명 이상의 루마니아 병사가 동부 전선에서 전투했다. 소련에 의해 합병되었던 영역은 다시 루마니아로 반환되었다. 1944년 말 전세가 연합국에게 돌아가자 미하이 1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이온 안토네스쿠 체포 후 나치와 동맹을 끊고 소련과 동맹을 맺었으나, 전후에 결국 소련에게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도 소련이랑 샅바 싸움을 하는 등 그다지 관계는 좋지 않았으며 1989년에 동유럽 혁명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의 모방하에 유대인 학살도 저질렀으며 이쪽도 나치 독일, 일본 제국, 헝가리 왕국 못지 않게 학살 등 전쟁 범죄도 만만치 않게 자행했다. 약 45만 명의 루마니아군이 전사했는데, 이는 독일, 일본을 제외한 추축국 국가 중에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수치이며, 심지어 국력과 인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보다도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8.3. 불가리아 왕국
차르 | 보리스 3세 시메온 2세 |
총리 | 보그단 필로프 페터르 가브로프스키 (임시) 도브리 보질로프 이반 바그랴노프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
가입 목적 | 나치 독일의 위협에 의한 반강제적 제2차 발칸 전쟁 및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빼앗긴 땅 수복 |
그렇지만 다른 추축국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전쟁범죄가 적었고[40] 가입 과정도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가담해야 했으며, 불가리아도 자신들이 추축국이나 그 부역국이 아닌 전쟁 피해국이라고 주장하는 등 과연 불가리아를 추축국의 일원으로 봐야 할지는 역사학자들마다 논란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도 나치 독일의 외압에 의해 일방적으로 독일과의 동맹 조약을 맺고 추축국에 들어간 뒤에도 독일군 점령지, 주둔지의 차별적 대우를 받고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는 등 불가리아 사람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은 그리 썩 좋지 않다고 한다. 오죽하면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서도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고 있는 체코나 폴란드 등 나치 독일에게 피해를 입었던 동유럽 연합국 국가들의 반대 입장을 적극 지지하며[41] 나치 독일이 유럽 일대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들먹이면서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한다. 그래도 발칸 전쟁 당시 루마니아한테 빼앗긴 남부 도브루자 지역을 나치 독일군의 지원으로 되찾는 등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국경선으로 되돌아가거나 오히려 그 이전보다 영토들을 전승국들에게 강제 할양당하고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이나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다른 추축국들[42]에 비하면 수혜자로 볼 수도 있다.
8.4. 유고슬라비아 왕국
국왕 | 페타르 2세 |
총리 |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 두샨 시모비치 |
가입 목적 | 국가 보전 |
1941년 3월 25일, 추축국들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것을 두려워했던 섭정 파블레 왕자는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다른 추축국들과는 달리 독일의 전쟁을 군사적으로 도울 의무가 없었던 대신 추축국의 병력 이동을 허용할 의무는 있어서 독일은 말라타 작전으로 이탈리아가 먼저 침공한 그리스을 점령하려 했다. 반대로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의 달마티아 지방을 노렸기에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에 가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동맹을 체결한 지 이틀 후 페타르 2세가 친연합 장교들과 함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세르비아 정교회로부터 대관식과 세례를 받았다. 물론 페타르 2세는 단지 파블레 왕자의 독단과 전횡에 질려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뿐, 반파시스트 신념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기에 추축국에 계속 남아 있으려 했다. 하지만 이 쿠데타의 뒤에 영국이 있었던데다가 유고슬라비아 시민들이 독일의 국기와 외교관을 모욕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결심한다.
독일의 침공은 1941년 4월 6일에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였으며 제대로 된 국가 정체성이 수립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거기다 세르비아인들이 자민족 우선주의를 드러내며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서 특히 이를 갈고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추축국의 침공 즉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군대는 지리멸렬하여 저항은 2주 동안만 지속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정부가 영국으로 달아나고 4월 17일에 항복, 나라가 분할되어 크로아티아 독립국, 세르비아 군정청[43],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왕국, 류블랴나 주 등 여러 괴뢰국이 수립되었다.[44] 유고슬라비아의 나머지 부분은 추축국이 분할 점령했다. 슬로베니아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중부 달마티아 지역과 코소보를 점령했다. 헝가리 역시 슬로베니아의 한 귀퉁이와 보이보디나의 일부를 점령했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일부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의해 괴뢰국들이 무너지면서 유고슬라비아는 해방되고 왕정이 폐지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들어선다.
9. 공동교전국
이 국가들은 추축국들과 같이 연합국들에게 대항했지만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축국이 아니다.9.1. 핀란드
대통령 | 리스토 뤼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
총리 | 요한 빌헬름 랑겔 에드빈 링코미에스 안티 학젤 우호 카스트린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
핀란드는 방공 협정은 체결했지만 삼국 동맹 조약은 체결하지 않아서 추축국이 아니다.[45]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은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후 북유럽으로 눈을 돌려 발트 3국을 압박함과 동시에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핀란드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약소국인 핀란드는 결국 소련에 항복하여 소련이 점령한 영토보다 훨씬 많은 땅을 소련에게 양도하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핀란드 국민들은 소련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편에 가담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소련의 눈치를 봐 핀란드의 도움 요청을 외면했기에 핀란드에게는 독일과의 동맹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특히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핀란드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핀란드는 추축국들과 같이 패전국으로 분류되어 소련에 오히려 배상금을 물었다.
하지만 핀란드의 경우에는 소련에 빼앗긴 지역만 되찾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SCAPIN 1757호와 1912호에선 대한민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발트 3국, 베트남, 스리랑카 등과 함께 특수 지위 국가(Special Status Nations)에 분류되어 있다. 또 공산화된 동유럽의 추축국들(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과는 달리[46]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적개심[47]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공산화를 면했다.
전반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의 침략 전쟁과 소련군의 전쟁범죄 행위를 미국, 영국 등 연합국들이 쉬쉬했기에 이와 같은 소련의 만행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추축국과 달리 핀란드는 전쟁범죄를 거의 저지르지 않았지만, 레닌그라드에서 추축군에 의해 어마어마한 소련 민간인이 학살당했기 때문에 결국 전후에 소련에 덜미를 잡혔다. 그래서 중립임에도 냉전 시절부터 소련 앞에서 굽힐 수 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군사 훈련이나 무장 등은 러시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태이다.
다만 핀란드가 제2차 세계 대전에 끌려가게 된 계기가 소련의 제대로 된 명분없는 선제 침략이었던 겨울전쟁이었고, 그 이후에도 첩보로 소련이 핀란드를 흡수하려 한다는 정보를 계속 입수하던 상황이었다. 앞서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의 동유럽 국가들이 빠르게 소련에 흡수되는 것을 바라본 핀란드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느꼈다. 따라서 핀란드는 연합군 측, 나아가 스웨덴에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핀란드를 외면했다. 게다가 추축국과 달리 핀란드는 고토 회복 범위 밖으로 나아가지 않아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략 행위에도 적극 동참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과도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군들을 자국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가담했음에도 어느정도 동정받는 편이다. 나치 독일에 협조한다는 사실에 대해 항의한 영국에게 핀란드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상황을 만든 게 누구인가? 악마와의 거래는 차선이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응답할 정도로 핀란드의 상황은 절박했다. 연합국들도 찔리는 바가 있는 지 전쟁 직후에도 소련을 제외하면 핀란드의 추축국 가담을 문제삼지 않았고 지금도 크게 비판받지 않는다.
핀란드는 지금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소련에 대항한 것을 계속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침략적 야욕으로 추축국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과 별개의 전쟁임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실제로 핀란드는 주권이 위협받았음에도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외면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핀란드인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연합국에 가세했다가 버림받은 폴란드, 이렇다할 저항도 못하고 점령당한 발트 3국, 추축국에 가세한 중부 및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핀란드는 마지막까지 주권을 지키고 공산화도 막았으니 크게 선방한 편이다.
9.2. 이라크 왕국
국왕 | 파이살 2세 |
총리 |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
그러던 중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반영 민족주의자들은 정변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독일 정책을 펴고, 1941년에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이라크의 석유를 독일이 차지할까봐 두려웠던 영국은 빠르게 대처했다. 결국 1달도 안 돼서 패배했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국화한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한다.
9.3. 태국
국왕 | 라마 8세 |
총리 | 쁠랙 피분송크람 |
1942년부터 태국은 일본의 협력국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우리는 억지로 일본과 손 잡았다."라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연합국들로부터 면벌부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들은 태국을 추축국의 일원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태평양 전선에서의 발언권은 미국에 있었다. 미국은 전쟁 당시 태국이 일정부분이나마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려갔던 이력이 있던 것을 감안해 태국을 용서했다. 사실 태국이 일본의 뒤통수를 친 것은 친일 군사 독재자였던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의 실각이 결정적이었다.
10. 괴뢰국 및 괴뢰정부
나치 독일의 괴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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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괴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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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친추축국 성향 국가
한때라도 추축국과 협력했던 국가들이 기술돼 있다. 엄밀하게는 추축국이 아니며, 나중에 연합국이 된 국가도 많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발트 3국) - 1940년 소련의 침공으로 점령당했고, 일시적으로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라는 이름하에 나치 독일의 영토로 들어섰지만, 전후부터 소련 붕괴 시기까지 소련의 지배를 받아 소련에 대한 앙금이 크기 때문에 지금도 대체적으로 (국가나 개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연간하면 소련보다 나치 독일에 훨씬 호의적이다.
- 스페인국 - 유사 파시즘 정권.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제2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리고 승리한 후 프랑코가 정권을 잡으며 친독 성향이 강해졌으며, 청색사단도 파병했다. 그러나 내전 수습 등의 이유로 의용군 외에 공식 참전은 하지 않았고, 일본의 마닐라 대학살로 바로 등을 돌리고 연합군에게 항구를 개방하는 등 적극 협력하여 프랑코는 전쟁 후에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초기 나치에 협력했던 친추축국 성향의 국가였음에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의 반란 세력들을 도운 독일에 의해 전쟁 피해도 극심하게 입은 피해국이었기에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왕정복귀가 이뤄진 이후에 게르니카 폭격 등 프랑코의 반란군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에 파병된 나치 독일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독일로부터 과거사 사과를 받기까지 했다.
- 스웨덴 - 유럽 온갖 국가가 독일에 공격받아 지배당하는 상황에 독일의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 노르웨이로 가는 군사통행권을 내주었으며, 독일이 필요로 하는 철광석 양의 절반 이상을 전쟁 기간 내내 퍼주고 일부 스웨덴인 자원병이 핀란드 전선[48]에서 싸우기도 하는 등의 협력을 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독일과 끝까지 싸우다 나라를 빼앗긴 노르웨이의 증오를 샀다. 다만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게 스웨덴을 둘러싼 세 나라 중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독일에게 점령되었고, 핀란드는 독일의 동맹국이라 말그대로 사면초가인 상황이었다. 여기서 스웨덴이 독일에 맞섰다면 순식간에 무너졌을 것이다. 물론 스웨덴은 명목상으로 엄연한 중립국이었으며 독자적으로 전차, 잠수함 등의 군사 기술을 개발했다. 이와 별개로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레벤스라움이 완성된다면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게르만인들은 독일 국민으로 대우해주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는 스웨덴도 결국 주권을 빼앗겼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 소련 - 처음에는 독일을 경계하여 좋지 않게 보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친화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양국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무시했다. 결국 소련은 히틀러에게 접근, 독소 불가침조약 이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용인하고 독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대량 수출함은 물론 발트 3국 점령과, 핀란드 침공 같은 팽창 또한 꾀했지만, 어디까지나 독소전쟁이 터지기 전까지의 일이며, 독일의 선제 공격이 시작된 이후에는 연합국의 가장 중요한 멤버 중 하나가 되었다.
- 이란 제국 - 팔라비 1세는 추축국에 호의적이었고, 독일과 석유 거래도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침공 이후 영국과 소련의 강압에 의해 연합국 측에 참전한다.
- 인도 제국의 일부 독립운동가 -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을 돕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마하트마 간디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무반응,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인도 독립을 보장받고 중국과 미국이 인도 독립운동진영을 지지해 준 뒤 연합국을 지지했다. [49] 그러나 인도 내에서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맞먹는 독립운동가인 찬드라 보스는 추축국과 협력하여 인도를 독립시킨다는 계획으로 추축국에 협력했다.
- 아르헨티나 - 친독일 성향이 강했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도망쳐 온 나치 잔당들을 숨겨주었다. 그래서 1950년대까지 KGB, MI6, 모사드, UDBA를 비롯한 각종 첩보 기관들이 나치 잔당들을 찾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사드는 기어코 잔당 중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 중화민국 - 중일전쟁 초기만 해도 독일은 일본보다는 중국의 편에 가까웠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도 1941년까지는 독일과 중국은 관계를 유지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도 중국군을 지원했다.
- 칠레 - 군복이 독일 국방군과 동일하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곡조를 이용해 만든 해병대 군가를 지금까지 사용할 정도로 이웃 국가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친독 성향이 강했다. 종전 이후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파울 셰퍼, 발터 라우프, 안테 파벨리치 등의 나치 독일과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구 추축국의 전범들을 숨겨주거나 도피 루트를 제공했다.
- 튀르키예 - 오스만 제국 시절 제1차 세계 대전 독일의 동맹이었으나, 같이 패전하여 나라가 멸망하는 일을 겪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1차 대전의 동맹이었던 튀르키예를 꼬드겨 추축국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튀르키예는 방공 협정에 가담하고,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등 친독 성향이 있었으나[50], 과거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는 뼈 아픈 경험을 한 뒤라 2차 대전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미 2차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히틀러에 대해서 제 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벌어질 세계 대전에 미국은 필연적으로 참전할 것이며, 미국에 의해 종결될 것이라 예언했다. 아타튀르크의 식견에 따라 튀르키예는 결국 마지막엔 연합군 측에 줄을 섰으며, 이후 줄곧 친미 국가의 길을 걸었다.
- 폴란드 -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독일, 헝가리 등 추축국 국가들과 같이 뮌헨 협정으로 주테텐란트, 테신 등 체코슬로바키아가 차지하던 영토들을 합병하기도 했고, 나치 독일의 히틀러 역시 폴란드와의 동맹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지만, 1939년 초 독일이 체코 전역을 점령하고 폴란드 회랑에 대한 영유권을 제기하자 연합국의 편에 섰다.
- 덴마크 - 독일이 침공하자 6시간만에 항복하고 독일의 보호령(덴마크 보호령)임을 선언했으며, 독일과의 협력 정책을 고수했다. 방공 협정에도 가담하여 사실상 추축국 가입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까지 보면 독일이 점령했으니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9년 5월 31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역사가 있다.
- 바티칸 - 사실 교황 비오 12세는 개인적으로는 나치를 혐오했고, 1937년에는 나치즘을 비판하는 독일어 회칙도 발표했으며 또한 유대인 난민들에 대해서도 협조적이었다. 다만 '종교로서의 가톨릭'이 아닌 '국가로서의 바티칸'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추축국의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무솔리니가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스스로를 홍보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주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비시 프랑스,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추축국의 괴뢰국들을 승인하기도 했다.[51]
- 스위스 - 독일의 전시 은행 역할을 담당했다.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며 화폐 가치가 급락했기 때문에 중립국의 화폐가 필요했고, 독일 마르크를 스위스 프랑으로의 환전해 무역에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쟁 내내 나치와 협조했지만 독일이 강제병합 의사를 보이자 청야전술까지 꺼내며 강경하게 반발했다. 탄넨바움 작전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
- 엘살바도르 - 후일 추축국이 되는 일본 제국이 세운 만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 코스타리카 - 위의 엘살바도르와 동일.
12. 추축국의 인물들
※ 유명하고 군의 간부 및 국가원수/정부수반들만 서술하기 바람.
추축국 주요 지도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나치 독일 | |||
아돌프 히틀러†S ,총통, | 빌헬름 카이텔C ,OKW 최고사령관, | 파울 요제프 괴벨스†S ,선전부 장관/총리, | 헤르만 괴링CS ,공군 제국원수, | |
하인리히 힘러S ,SS 국가지도자, | 에리히 레더C ,전쟁해군 원수, | 카를 되니츠C ,전쟁해군 원수/플렌스부르크 정부 대통령, | ||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 ||||
에마누엘레 3세-> ,국왕, | 베니토 무솔리니† ,두체/총리, | 피에트로 바돌리오-> ,총리, | ||
일본 제국 | ||||
히로히토 ,천황, | 고노에 후미마로S ,내각총리대신, | 도조 히데키C ,내각총리대신/육군대신, |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 | |
헝가리 왕국 국민단결정부 | ||||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 | 살러시 페렌츠C ,총리, | |||
루마니아 왕국 | ||||
미하이 1세-> ,국왕, | 이온 안토네스쿠C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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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3세† ,국왕, | 시메온 2세 ,국왕, | |||
(-> : 전향 혹은 전향 시도 | † : 종전 이전 사망 | C : 전후 재판을 받음 | S : 자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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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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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Luftwaffe | 1940 헤르만 괴링 | |||
원수 General-feldmarschall / Großadmiral · · / | ||||
육군 Heer | 1936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1940 발터 폰 브라우히치 | 페도어 폰 보크 | 빌헬름 카이텔 | 귄터 폰 클루게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빌헬름 리스트 | 발터 폰 라이헤나우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에르빈 폰 비츨레벤1942 게오르크 폰 퀴힐러 | 에리히 폰 만슈타인 | 에르빈 롬멜1943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에른스트 부슈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1944 발터 모델1945 페르디난트 쇠르너 | |||
명예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
해군 Kriegsmarine | 1939 에리히 레더1943 카를 되니츠 | |||
공군 Luftwaffe | 1940 알베르트 케셀링 | 에르하르트 밀히 | 후고 슈페를레1942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1945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 |||
: 1942년전까지 적용된 원수 계급장 : 1942년부터 적용된 원수 계급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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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군의 원수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원수 Maresciallo d'Italia / Grande Ammiraglio / Maresciallo dell'Aria | |
육군 Regio Esercito | 1926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926 피에트로 바돌리오1935 에밀리오 데 보노1936 로돌포 그라치아니1943 조반니 메세 | |
명예 움베르토 2세 | ||
해군 Regia Marina | - | |
공군 Regia Aeronautica | 1933 이탈로 발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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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원수 陸軍元帥 |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 | |
원수육군대장 元帥陸軍大將 | 1898년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189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1898년 오야마 이와오1915년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1915년 하세가와 요시미치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1919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1929년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1932년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1943년 데라우치 히사이치1943년 스기야마 하지메 | |
원수해군대장 元帥海軍大將 | 1898년 사이고 주도1913년 도고 헤이하치로1922년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 †1932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1943년 나가노 오사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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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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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陸軍 | 시라카와 요시노리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아베 노부유키 | 야마나시 한조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이하라 겐지 | 마쓰이 이와네 | 야마시타 도모유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이마무라 히토시 | 기무라 헤이타로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오카무라 야스지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 다치바나 요시오 | 아나미 고레치카 | 가와베 마사카즈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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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中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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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海軍 | 야마구치 다몬† | 오자와 지사부로 | 우가키 마토메 | 모리 쿠니조 | 기무라 마사토미 | |
소장 少將 | ||
육군 陸軍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이희두 | 조성근 | 왕유식 | 김응선 | 어담 | 이치키 기요나오† | |
해군 海軍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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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비아 구국정부
- 밀란 네디치
-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 이반 미하일로브
- 벨라루스 중앙 라다
- 라다슬라우 아스트로우스키
- 라오스 왕국
- 시사방봉
13. 추축국이 점령한 지역
추축국/점령지 문서 참조.14. 유사 사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독일이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서 패전했으며, 당시의 협상국을 연합국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독일 측 국가를 추축국, 그들의 군대를 추축군이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때의 독일은 속칭 제2제국으로 불리는 독일 제국이며 옆동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이 한편이었고, 이탈리아 왕국과 일본 제국, 루마니아 왕국이 반 독일 세력에 섰다. 영문 명칭은 Central Powers라고 부르며, 국가는 중앙(유럽)국, 동맹국으로, 군대는 중앙(유럽)군, 동맹군으로 부른다. 서유럽의 대영제국•프랑스와 동유럽의 러시아 제국 중간의 중부유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2년 1월 29일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서 제2단계 표적으로 이라크·이란·북한을 지명하면서 악의 축으로 총칭하기도 했다.
신냉전과 관련해서는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등도 추축국에 비유된다. 니얼 퍼거슨은 중국을 나치 독일에, 러시아를 일본 제국에, 이란을 이탈리아 왕국에, 북한을 루마니아 왕국에 대응시키기도 했다.
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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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왕국의 리비아,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일본 제국의 한반도, 타이완, 남사할린 등. 전쟁 전에 추축국이 점령 및 합병한 국가는 추축국 소속으로 참전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2] 가운데 있는 일본인은 고노에 후미마로 1938년 당시 내각총리대신이다.[3] 정작 일본은 소련과 그 해 5월부터 9월까지 할힌골 전투(일본명: 노몬한 전투)라는 국지전을 치르었다. 결국 일본은 1941년 4월 독자적으로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정작 그 해 6월에 독일이 소련을 무단으로 침공하면서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독일이야 멋대로 불가침을 맺고 끊고를 반복했지만, 서로간의 주적을 대항하느라 여념없던 소련과 일본은 4년간이 넘게 이 조약을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와중에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일각에서 소련의 중재 같은 헛꿈을 꾸고 있는 와중인 8월 8일 소련이 조약을 깨고 일본을 침공해 만주국, 몽강국, 식민지 한국 북부를 무너뜨렸고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탈취했다. 이렇듯 독일과 일본은 대 소련 정책에 있어 기막히게도 시기가 엇갈렸고 이는 추축국이 패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탈리아와 달리 3면 전선을 치러서 전력을 쏟아붓지 못한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동부전선은 전쟁 초반부터 그 러시아 제국에도 탈탈 털리고 갈리치아까지 내주자 보다 못한 독일이 동부전선에 개입하여 전세를 역전했고 이탈리아의 참전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력을 쏟아부은 발칸 반도의 남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다 훨씬 약소국인 세르비아 하나도 제대로 밀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다가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겨우 밀었다. 그렇게 불가리아의 도움으로 겨우 남부전선을 끝낸 후 주력 대부분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전쟁 중반부터는 사실상 이탈리아와의 1면전선이었던 셈이다.[5] 미국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라이베리아, 독립국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영국의 자치령으로서의 이집트,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하면 전부 직할 식민지였다.[6] 이라크 왕국과 태국은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기에 협력국으로 분류하지 추축국은 아니었다.[7] 근데 사실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광범위한 식민지 관리에 드는 비용은 영불에게는 부담이었다. 오히려 식민지를 탈취당한 독일국은 배상금 감면으로 내수를 살릴 수 있었다.[8] 때문에 패배한 이후 여론은 해군과 해군 출신 인물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9] 애초에 두 세력은 이념이 달랐던 나라로, 미국과 영국은 세계 최초로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를 경계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적백내전 당시 반혁명군을 지원했고, 병력을 보내 직접 개입했기 때문에 서구 국가들이 언제든 다시 침공해올 수도 있는 잠재적 적국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련도 외교적인 마찰을 자주 일으켰는데, 자국 영토에 불시착한 영국과 미군 전투기들을 갖은 이유를 대며 압류한 다음 멋대로 뜯어서 기술을 빼갔다. 이 외에도 연합국 대사관 직원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는 등 영국과 미국 수뇌부를 분노케 하는 짓을 소련은 태연하게 저질렀다. 특히 카틴 학살이 있다.[10] 제공권, 제해권도 일본군이 장악한 지라 함포와 항공폭격도 모자라서 중포와 독가스까지 아낌없이 들이부었으니 별 수 없었다.[11] 물론 이 갈아버렸다는 건 국지적인 전투일 뿐 큰 전투에선 대부분 중국군이 패했고, 그 증거로 중요 도시와 거점을 모두 잃었다.[12]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자 이를 저지했던 게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이다.[13] 물론 워낙 빠르게 무너져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14] 사실 소련의 경우 1941년 시점에서 단독 국력으로는 1:1 대결에서 해 볼 만한 상대였다. 소련은 미국 경제력의 1/4~1/3에 불과했고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방심한 사이에 불시에 기습적인 침공을 감행한 충격 효과와 대숙청 때문에 소련 내부의 사정이 혼란했다는 점 및 독일의 생산력 우위가 먹혀 초기에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양면전선을 치르는 독일 상황상 반쪽자리 국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고, 초기에 소련의 숨통을 끊지 못한 시점에 독일의 패배는 예정되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국제정치에서만 고립주의를 추구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압도적 국력의 초강대국이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아예 독일이 사실상 미국 본토를 타격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점과, 자원이 부족한 독일과는 달리 미국은 광활한 북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으로 두둑한 자본을 가졌다는 점, 그리고 쌍방간 기술력에도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일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숙적인 대영제국도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는데 영국 역시 독일 못지않는 산업규모와 과학기술력을 보유했고 경제력 역시 영국 본토만 치더라도 독일에 버금갔다. 거기에 영연방과 인도 등 식민지들에서 오는 추가적인 지원을 감안한다면 독일과의 국력 격차가 상쇄된다. 즉, 독일은 압도적인 최강자 하나(미국)와 독일급 강자 둘(소련, 영국)을 모두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15] 물론 일본 잠수함들이 운반하는 경우도 많았다.[16] 독일이 제공한 U-511, MG 151/20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군의 기술로는 어찌 써먹는 것이 한계였고 양산은 불가능했다. 독일 또한 우선순위에서 밀려 일본이 전해준 군함 건조 노하우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사실 독일 해군은 제대로 재건도 해보기 전에 노르웨이 전역에서 박살났기 때문이다.[17] 물론 관동군도 병력 규모로만 본다면 굉장히 위협적인 전력임엔 틀림없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처음 독소전쟁에 몰빵할 때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두려워했었다. 허나 리하르트 조르게의 첩보 덕분에 비로소 안심하고 대독 전선에 병력을 몰빵할 수 있었다.[18] 여담으로 일본 극우사관에서는 이걸 바탕으로 '1945년에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일본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한다. 그러나 소련은 전쟁에 돌입하기 이전에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것임을 선포했다. 게다가 4월에 이미 소련은 소-일 상호 중립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대일전 참여의사를 전달한 상태였으므로, 갑작스러운 침공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과거 일본도 불가침 조약 대상국은 아니었지만 청나라나 러시아 제국, 미국을 상대로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19] 물론 상식적인 국가라면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통보도 안 하고 쳐들어가는 짓 따위는 안 하는 게 맞다. 이와는 별개로 능력도 없었는데, 이미 미국만으로도 일본에 벅찬 상대였으며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까지 공격할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소련도 양면전선에 놓이지만 그래봐야 일본은 저멀리 극동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를 거쳐야 하니 소련의 중심부인 유럽 러시아로 진격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소련은 극동을 포기하더라도 국가 중심부를 사수하고자 했다.[20] 히틀러 자신도 멋대로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패배한 이탈리아에 분노해 처음에는 그리스의 승전을 축하하기도 했으나 그리스군이 알바니아 방면까지 진출하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를 지원했다.[21] 실제로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불가리아를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시킨 적이 있었다. 인종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슬라브계다.[22] 이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의한 유대인 사망자가 단 1명도 나오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집계되었다.[23] 루마니아로부터 얻은 남부 도브루자 지역과 기존 나머지 본토 지역은 유지했다.[24] 이 외에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에 가입하고 이틀 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추축국에서 탈퇴했고 추축국은 아니지만 추축국에 협력했던 핀란드 또한 소련에게 빼앗긴 카렐리야를 되찾기위해 독소전쟁에서 독일 편으로 참전하여 소련과 싸웠지만 후반에 독일 뒤통수를 치고 소련과 강화하는데 이어 라플란드에서 독일군들과 싸우기도 했다.[25] 냉전 때문에 연합국의 맹주였던 미영소 3국이 직접 흐지부지시켰다.[26] 본래 류큐 열도와 오가사와라 제도 등도 전후 미국에 의해 강점되었으나 1952년 토카라 열도 반환을 시작으로 1968년 오가사와라, 1972년 오키나와를 반환받아 영토를 일부 회복했다.[27] 단, 가라후토의 경우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이후 러시아의 영토였던 것을 러일전쟁 이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뜯어낸 것이며 이후 외지로 관리하던 것을 종전 직전이던 1943년에야 내지로 승격했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에서 순수한 본토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따라서 가라후토를 제외하면 일본의 국토 손실 비율은 단 3%에 머무른다.[28] 리비아인들의 독립투쟁을 겨자가스로 진압했고 일부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여성에게 강간을 저질렀다.[29]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독일 제국의 영토였다.[30]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회고록에서 '잃어버린 승리'라고 표현한 전투이다. 히틀러의 갖가지 개입과 잘못된 명령이 패전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게 만슈타인의 회고록의 주 논조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므로 이 책은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31] 결국 척탄병까지 편성하고, 히틀러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부대를 이끌고 공세에 나서라는 명령까지 내리기에 이른다.[32] 쥐트티롤,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런던 밀약에 따라 할양 받기로 한 아드리아해 근방 영토가 더 있었지만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무시라여 미국에 의해 씹혔다. 1920년에 유고슬라비아와의 협정으로 차라를 얻어내긴 했다.[33] 두체의 위치는 독일 측이 찾지 못하도록 시시각각 옮겨졌으나, 스코르체니는 첩보를 이용해 그랑삿소의 경비병 증강 징후를 포착하고 글라이더를 이용해 친두체 성향의 이탈리아 장군의 거짓말을 통해 두체를 구출했다.[34]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외교적으로 고립됐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만주 위에는 소련이 있었고 영국과 미국 입장에서는 만주를 소련이 먹느니 일본이 먹는게 더 나았기 때문에 만주를 일본이 먹는것은 허락해줬다. 일본이 진짜로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한것은 중일전쟁때부터다.[35] 다만 천황의 실권은 전부 폐지되었다.[36] 이 또한 두체 구출이라는 막대한 공적을 올린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의 작품이다.[37] 카롤 2세는 대천사 미카엘 군단을 이끄는 코드레아누를 지원했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어 그를 숙청한 바 있다.[38] 뒤에 차우셰스쿠도 내세웠다.[39] 당시 불가리아 왕가는 독일계였다. 보리스 3세의 부왕인 페르디난트 1세 문서 참고.[40] 아예 전쟁범죄를 안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정교회의 압력과 디미터르 페셰프(Димитър Йосифов Пешев)가 반유대주의를 진정시킬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낸 후 반유대주의 광풍이 급속도로 진정되었다고 한다. 페셰프의 편지에는 무려 43명이 서명했으며 그 중 30명은 총리의 압박에도 서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표적인 친독-친나치 인사였던 알렉산더르 찬코프 전 총리도 그 편지에 서명했다.[41] 심지어 이 국가들은 불가리아를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이 아닌 전쟁 피해국으로 인정한다. 나치 독일과 싸웠지, 불가리아와 싸운 게 아니라 악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리아에 의한 피해를 입었던 그리스,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등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최대 피해국인 폴란드와 체코가 독일의 만행에는 치를 떨면서도 마찬가지로 추축국이던 불가리아에는 동조하는 이중성을 보인다며 반발한다.[42] 일본-식민지(한국, 대만, 남사할린), 조차지(관동주, 톈진 등), 위임통치령(남양 제도), 괴뢰국(만주국, 몽강국) 등 세력권을 상실했음은 물론 본토의 일부였던 난세이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쿠릴 열도까지 각각 미국과 소련에 할양하면서 현재의 일본 열도 4대 섬(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으로 영토 축소(오가사와라 제도는 1968년 반환, 난세이 제도는 1952년부터 1972년까지 순차적으로 반환). 독일-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브란덴부르크 동부를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하고 자를란트를 프랑스에 자르 보호령으로 내주었으며 전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1957년 자를란트 반환 및 1990년 동서독 통일). 이탈리아-리비아, 에티오피아 등 식민지를 상실하고 이스트리아 반도와 리예카와 자다르, 로도스 섬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할양하고 대불 국경 지역 일부를 프랑스에 할양(1954년 트리에스테 일부 수복). 헝가리-뮌헨 협정,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빼앗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들을 원래 지배하던 주변국들에 다시 내주고 전쟁 이전이자 현재의 영토 면적으로 축소. 루마니아-베사라비아(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과 북부 부코비나를 소련에 할양.[43] 산하에 세르비아 구국정부가 있었다.[44] 그 중에서도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적극적으로 추축국과 협력했다.[45] 독일이 핀란드에게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라고 요구했지만 핀란드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다.[46] 그러나 불가리아는 좀 논란이 있다.[47] 핀란드계 유대인들조차 소련에 반대하여 나치 독일과 함께 싸웠으며, 몇몇 핀란드인들은 종전 이후에도 독일군에 입대해서까지 소련과 싸웠을 정도로 핀란드 내 반소감정은 엄청났다.[48] 다만, 이도 소규모의 지원병 수준이라 나중에 핀란드에도 썩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친추축국 성향이라지만 당연히 소련 눈치도 본 결과이다. 여러모로 이 당시 스웨덴은 자기 앞가림 하느라 급급해서 그동안 스칸디나비아 맹주를 자처했던 것 치고는 꽤 초라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주변국들에서 약간의 원성을 샀다. 근본적으로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 2, 3위 사이에 끼어있어 어쩔 수 없었다.[49]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의 땅은 한치도 작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독립 이야기를 무르려고 했는데 총선에서 탈식민화를 주장하는 노동당이 이겨버려서 결국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킨다는 약속을 지킨다. 물론 노동당 정권 시기에도 케냐 등 일부 식민지에서 독립을 외치는 시민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50] 특히 튀르키예의 희소자원을 독일에서 많이 수입했는데 전쟁 말 발칸 추축전선이 무너지자 육상무역로가 끊겨 극심한 부족에 시달렸다고 괴벨스는 일기에서 서술했다.[51] 다른 중립국들은 스페인을 제외하면 이런 짓을 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