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제국 육군 제109사단 지휘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栗林忠道 | Kuribayashi Tadamich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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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91년 7월 7일 |
| 일본 제국 나가노현 하니시나군 니시조초 (現 일본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정) | |
| 사망 | 1945년 3월 26일 (향년 53세) |
| 일본 제국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지마 초 이오섬 (現 일본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섬) |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복무기간 | 1914년 12월~1945년 3월 |
| 최종계급 | 중장 → 대장(사후 추서) |
| 근무 | 제23군 참모장 제2근위사단장 제109사단장 겸 오가사와라 군집단사령관 |
| 주요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홍콩 전투 이오지마 전투 |
| 서훈내역 | 욱일장 ([ruby(旭日章, ruby=きょくじつしょう)]) 서보장 ([ruby(瑞宝章, ruby=ずいほうしょう)]) |
| 묘소 | 시신 미수습 |
1. 개요
내가 제군보다 먼저 적진에서 사라지는 일이 있다 해도 제군이 지금까지 바친 공훈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일본은 싸움에 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이 충군 애국 정신에 불타 오른 제군의 훈공을 칭송하고, 그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며 묵도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제군은 편안하게 나라를 위해 순교해야 한다.
최후의 야습 직전 남긴 훈시.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생존자가 증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상의 유언인 셈이다.
최후의 야습 직전 남긴 훈시.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생존자가 증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상의 유언인 셈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장군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총지휘한 장성으로 유명하다.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미군에게 "미국인이 전쟁 중 만난 가장 벅찬 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아 서구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1891년 7월 7일 나가노현 하니시나군 니시조초에서 마쓰시로번 향사가문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니시조초가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 지명이다. 그가 태어난 니시조초는 현재 마쓰시로 정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하니시나군에는 사카키정만 존재하고 있다.1911년 3월 나가노현립 나가노중학교(現 나가노현 나가노고등학교)를 11기로 졸업했다. 재학 중 그는 문예에 두각을 드러내며 동문회지에 여러 차례 게재되었다. 당초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던 구리바야시는 상하이 소재 고등교육기관인 동아동문서원 진학을 희망하며 입학 시험을 치러 합격했으나, 교사의 추천과 설득에 의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다.
2.2. 위관 시절
1911년 육사 입시에 합격, 동년 12월 입대하여 1년 간의 대부 근무를 마치고 1912년 12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14년 5월 28일 26기로 졸업하고(졸업성적 742명 중 125등), 치바현 소재 기병제15연대에 견습사관으로 배치되었으며 1914년 12월 25일 육군 기병소위로 정식 임관하였다. 1917년 10월 육군기병학교 을종학생(초군반에 해당)으로 입교, 1918년 7월 수료하며 중위로 진급했다.1920년 육군대학교 입시에 합격, 동년 12월 7일 입교했다. 육대 교육 중인 1923년 8월 대위로 진급하고 11월 29일 육대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은사의 군도를 수여받았다.
육대 졸업 직후인 1923년 12월 결혼했고, 원대인 기병제15연대 중대장으로 보임되었다. 이후 교육총감부 예하 기병감부의 부원으로 복무했다.
1927년에는 주미대사관 주재무관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군사 연구 목적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 잠시 공부하기도 하였고, 미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미국의 국력을 체험하여 "미국과 벌이는 전쟁은 절망적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2.3. 좌관 시절
주미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3월 소좌로 진급해 4월 육군성 군무국 과원으로 발령되었다. 육군성 근무를 마치고 1931년 8월 주캐나다공사관에 파견되어 포트 블리스(Fort Bliss)에서 기병훈련을 받으며 북미에 주재하였다.캐나다에서 귀국한 직후인 1933년 8월 중좌로 진급했다. 1933년 12월 30일 육군성 군무국 마정과의 고급과원(과 차석)으로 보임되었다. 육군성 근무를 마치고 1936년 8월 1일 기병제7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937년 8월 2일 대좌로 진급하여 다시 육군성에 배속되었고, 자신이 근무했던 육군성 병무국 마정과에 마정과장으로 복귀했다.
2.4. 장군 시절
1940년 3월 9일 소장으로 승진하여 자신의 원대인 기병제15연대의 상급부대인[1] 기병제2여단장이 되었다. 동년 12월 2일 기병제1여단장으로 전보되었다.태평양 전쟁 개전을 목전에 둔 1941년 여름 지나파견군 편성시 남지나방면군을 개편한 제23군이 만들어지고, 동년 9월 구리바야시는 육사 1년 선배인 가토 야쿠에이의 후임으로 제23군 참모장에 부임했다. 제23군은 남방작전에서 영국령이었던 홍콩 공략에 나서 홍콩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구리바야시는 1943년 6월 중장으로 승진하며 유수(留守)근위제2사단의 사단장으로 발령받았다.[2] 1943년 6월 1일부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파병되어있던 근위사단 병력은 근위제2사단이 되고, 도쿄의 유수근위사단 병력이 근위제1사단이 되면서 신편된 유수근위제2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1944년 4월, 유수근위제2사단장에서 동부군사령부에 배속되어 5월 7일 신편된 제109사단 사단장에 보임되었다. 이와 관련 1944년 5월 근위단 영내 화재 사고로 인해 제109사단의 사단장으로 좌천당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당시 사단장은 원칙적으로 중장 2차 보직이었으며 구리바야시가 중장 진급 후 사단장으로 보직된 유수근위2사단은 연대 규모의 유수(留守)사단으로, 보충대 역할을 하며 이후 근위3사단을 편성하는 기능을 수행한 부대이다. 그리고 간토지방과 도호쿠 남부지방을 방위하는 동부군사령부 예하의 109사단은 육상기지에서 발진하는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하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위수지역으로 하는 중요한 임무를 받은 부대였다. 결론적으로 구리바야시가 근위사단에서 지휘책임으로 좌천당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게 하타 이쿠히코의 관점이다.
제109사단장 구리바야시는 6월 8일 이오지마로 부임하였고, 7월 1일부로 육해군 통합지휘를 위해 대본영 직할부대로 편성된 오가사와라병단의 병단장도 겸임하여 오가사와라 일대의 해군부대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였다.
1945년 2월 16일 미군 전함과 전폭기의 맹렬한 상륙준비사격으로 시작된 이오지마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며 3월 16일 16시, 옥쇄하겠다는 결별 전보를 대본영에 타전하였다. 이후 3월 17일자로 전사가 추정된 구리바야시에게는 육군대장 계급이 추서되었다.
2.4.1. 이오지마 전투
전투를 대비해 방어선 구축을 지휘하는 쿠리바야시 출처
이오지마에서 쿠리바야시가 생각한 방어 전략은 어차피 이기지 못 할 것, 일본 본토로 미군이 못 가게 하루라도 더 붙잡고 늘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일본 육군의 방어 전략은 미군이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격퇴'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해안가 인근에 방어 병력과 시설을 포진하는 식이었다. 문제는 미군의 어마어마한 물량과 화력은 애초에 일본군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이렇게 해안가에 포진한 일본군은 미군을 막기는커녕 미군이 상륙하기 전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으로 거진 박살이 나기 일쑤였다.[3] 이렇게 해안 방어가 무력화된 후 미군이 유유히 상륙해 진지를 설치하면 이후 살아남은 한 줌의 일본군이 반자이 어택을 하다가 기관총 앞에 거름이 되는 것이 태평양 전쟁 당시 수도 없이 벌어졌다.
때문에 쿠리바야시는 처음부터 질 것을 전제로 하여 해안에서의 저항을 아예 포기하고, 미군을 섬 깊숙히 끌어들여서 소탕전에 시간을 쏟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쿠리바야시는 이오지마 지하에 복잡하고 방대한 지하 설비와 벙커, 참호를 구축해 미군의 상륙을 기다렸다. 유황도의 특성상 유황 가스 발생이 매우 심해 위험했기에, 1개 조 10명이 들어가서 딱 10분씩 교대로, 그것도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공사를 하였고 이 방어 진지는 전투 당시 80% 정도 완성되었다. 견고하고 미로 같은 지하 요새 덕분에 일본군은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을 받고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고, 해안에서의 저항이 거의 없어 의아해하던 미 해병대는 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해지는 반격에 뒤늦게 피해가 가중되기 시작한다. 아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지하 요새를 가리켜 '일본군은 지하 도시를 만들었다. 이들은 이오지마 안에 숨어 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2월 19일부터 쿠리바야시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3월 26일까지 일본군은 철저하게 지하 요새를 이용한 지연전을 펼쳤고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이오지마에서의 처절한 피해는 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와 함께,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몰락 작전을 감행한다면 엄청난 인명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쿠리바야시는 3월 26일, 남은 300여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구 일본 육군의 고유 스킬인 반자이 어택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공격을 취해 미군에 타격을 입히려 했으나 실패하고 전사했다고 추정된다. 3월 26일 당시 이오지마에 대략 2,000여 명 정도의 일본군이 남아있었으나 대부분 복잡한 동굴 속에 흩어져 있어 많이 모을 수가 없었다.
사망 추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쿠리바야시의 시신은 결국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쿠리바야시는 군도를 뽑아 들고 공격의 선봉에 섰다고 한다. 이는 대단히 특이한 일인데, 일본군 지휘관들은 거의 대부분 부하들에게 자살 돌격을 명해 놓고 자기 스스로는 할복 자살을 했지 쿠리바야시처럼 몸소 공격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쿠리바야시와 이치마루 제독이 전사한 뒤에도 일본군 패잔병들이 간간히 저항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때에 이오지마 전투는 종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탈출하려 했다는 루머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도주할 방법이 없으니 가능성은 낮은 이야기다. 고폭탄에 직격당해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공산이 크다.
3. 사적인 면모
개인의 입장에선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비슷하게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가족을 걱정하여 전쟁시에도 편지를 보낸 자상한 가장이기도 했다. 이 사람과 이오지마 전투에 관련된 서적으로는, 이 사람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정리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있으며 이 서적은 대한민국에도 정식발간 되었다. 한편 영화판 아버지의 깃발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같은 전투를 일본군 입장에서 본 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하였다. 쿠리바야시 역을 맡은 배우는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헐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와타나베 켄.물론 서적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쿠리바야시에게 우호적인 시각으로 집필되었다는 점은 감안할 점이다.
4. 평가
쿠리바야시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린다.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국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다보니 상대적으로 일본 국내에서는 과대평가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많다.구리바야시는 일본 제국 육군의 핵심을 이룬 '육유조(陸幼組)' 그러니까 육군유년학교 출신이 아니다. 일본 제국 육군에서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이 요직을 독점하고, 구제중학교 출신자는 곁가지에 불과했는데[4] 구리바야시는 (구제)나가노중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26기에 입학한 소위 '중학조'였기 때문에 성골놀이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 출신을 따져 차별을 받는 피해자였다. 나가노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동생 熊尾가 형님처럼 육사로 진학하고 싶다고 하자 쿠리바야시는 동생에게 "육군에서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자만 우대받고, 중학교 출신자는 육군대학교를 나온다고 하더라도 주류가 되지 못한다'고 하며 해군병학교 진학을 권했을 정도였다.[5]
심지어 이오지마의 방어 계획을 수립한 자가 쿠리바야시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쿠리바야시 자신이 원래 근위사단장이었다가 영내 화재 사고로 인한 문책으로 이오지마로 좌천된 것이니만큼 불평 불만이 많았고 일도 제대로 안 했다고 한다. 참모들과의 관계도 냉엄한 정도를 초월해서 사적인 이야기도 전혀 안 했다. 물론 그 본인과 참모들 모두 살아나오지 못했으니 실제로 어땠을지는 모른다.
육군대학교를 35기 차석으로 졸업하고 주재무관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돌고 하버드에서 교육도 받은 당시로는 드문 미국통이었다. 하지만 육대 우등 졸업생은 육군 강국인 프랑스나 독일로 연수를 가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이라[6] 미국으로 연수를 가는 것은 언더독이었다고 하고, 오히려 미국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배척당해서 이오지마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오지마의 방어 계획이 그동안의 일본군의 일반적인 방어 계획과 많이 달랐다. 이렇게 선제, 옥쇄 돌격을 금하고 철저하게 지연전으로 선회하는 전술은 펠렐리우 전투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나카가와 쿠니오 대좌가 먼저 생각해 냈지만 펠렐리우 전투의 인지도 자체가 워낙에 낮아서 쿠리바야시 장군이 최초로 해당 전술을 입안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오지마 방어 계획이 사령관인 쿠리바야시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이 수립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이오지마의 양쪽 진지를 잇는 지하 벙커 등 대공사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처럼 방어 계획에 대한 사령관 본인의 의지가 강했다. 설령 그 자신이 작전을 수립하지 않았더라도 최종적으로 이를 적용한 것은 그의 공이다.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최고지휘관 자리에 있던만큼 만일 쿠리바야시가 그러한 전략에 반대했다면 시행되지 못 하게 할 수도 있었으니 설사 그의 전략이 아니었다고 해도 최종적 공로는 인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에 큰 피해를 입히면 본토 결전 때 미국이 큰 인명 피해를 우려해 강화를 맺을지도 모른다는 미국통 쿠리바야시의 판단은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미국은 더 큰 피해를 우려하긴 했지만, 강화가 아니라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5. 사진
기병대 대좌 당시 사진.
1943년 광동에 파견됐을 당시 사진. 옆의 개와 같이 가운데 앉아 있는 인물이 쿠리바야시. 이 사진에는 일화가 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군속이 촬영장소에 지각했음에도 군말 없이 기다려주었다는 것. 장성급 장교의 권위, 그것도 제국시대임을 감안한다면 드문 일.
이오지마에서의 사진.
6. 기타
-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쿠리바야시 장군의 아들 '쿠리바야시 타로'가 등장하여 증언을 했다.
7. 매체에서
-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년작, 쿠리바야시 타다미치역 와타나베 켄)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광동국의 원수로 있다. 이 세계관에서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했기에, 말년에 요양하며 지내는 듯.
- Axis and Allies(RTS)에서는 일본군진영에서 선택가능한 4명의 장군중에 유일한 육군대장으로 나온다.
[1] 전투서열상 제1사단 기병제2여단 기병제15연대 순이었다. 기병제2여단 예하에는 기병제15연대 외에 기병제16연대가 편제되어있었다.[2] 참고로 근위사단은 일본 육군의 다른 정규사단들과 편성 방식 자체가 다르다. 지역에서 편성된 일반 사단과 달리 태평양전쟁 이전의 근위사단은 전일본의 징병 대상자 중에서 덴노에 대한 충성심이 확실하다는 촌장의 추천을 받은 장병들만을 받아들였다. 다만, 러일전쟁 이후 오랫동안 실전 경험을 쌓지 못한 근위사단은 일반 사단들이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으로 대거 중국에 파병된 후 "장난감 병정"으로 야유를 받는 존재가 되어 사단장이 천황에 건의하여 1939년 근위혼성여단을 편성해 남지나방면군 예하에 들어가 광동성에 파병된다. 이후 타 사단과 마찬가지로 파병된 부대를 충원하기 위해 도쿄와 그 주변 장정을 동원하여 유수근위사단이 편성되면서 근위사단도 편성 방식이 느슨해져 1943년 6월 1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파병되어있던 근위사단 부대는 근위제2사단이 되고, 도쿄의 유수근위사단이 근위제1사단이 되었다. 1944년 7월 18일 유수근위제2사단을 근간으로 근위제3사단이 편성되었다.[3] 이는 후술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앞부분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쿠리바야시가 도착했을 때 일본군들은 해안에 참호를 파며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쿠리바야시는 자동차 생산 등을 언급하며 미국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으니 전략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한다.[4] '帝国陸軍部内では、陸幼出身者が優遇され、要職を独占した。中学出身者は傍流であった。' 武石典史「陸軍将校の選抜・昇進構造 - 陸幼組と中学組という二つの集団 -」『教育社会学研究』第87集、日本教育社会学会、2010年、25-45頁[5] 그러나 동생은 해군병학교 입시에 실패해 결국 육사에 입교했고, 30기로 졸업했으나 폐결핵으로 요절했다고 한다.[6] 물론 쿠리바야시가 연수를 떠나는 1920년대에는 나치 독일 시절도 아니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군은 사실상 숨만 붙어있을 뿐 핵심 능력이 거세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