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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7대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 Yamamoto Isoroku | |||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 1884년 4월 4일 | ||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 |||
사망 | 1943년 4월 18일 (향년 59세) | ||
호주령 솔로몬 제도 부건빌섬 (현 파푸아 뉴기니 부건빌주 부건빌섬) | |||
묘소 |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타마레이엔(多磨霊園) 쵸코지(長興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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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해군차관 | ||
서훈 내역 | 국화장 (菊花章, 2등급) 욱일장 (旭日章, 1등급) 서보장 (瑞宝章, 1등급) 금치훈장 (金鵄勲章, 1등급과 2등급)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 ||
군사 경력 | |||
복무 | 일본제국 해군 | ||
1901년 ~ 1943년 | |||
최종 계급 | 원수[1] | ||
최종 보직 | 연합함대 사령장관 | ||
주요 보직 | 해군성 차관 해군항공본부장 제1항공전대 사령관 해군항공본부 기술부장 항공모함 아카기 함장 경순양함 이스즈(동음이의어) 함장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 ||
주요 참전 |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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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해군 제독으로,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했다.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했고 주미 일본제국 대사관 국방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한 미국통이었기에 미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래서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진주만 공습을 입안 및 성공시켜 일약 전쟁영웅이 된다. 이후로도 약 2년간 일본 해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및 기타 여러 해상/공중전을 지휘했다.
근현대식 항공모함 운용법을 최초로 개척한 항모전술의 대가라, 전쟁사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 4월 18일,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폭격기로 이동하던 중 이 정보를 입수한 미합중국 육군이 출동시킨 쌍꼬리의 전투기에 의해 부건빌 섬 상공에서 격추당해 사살됐다.
2. 생애
2.1. 군 경력
- 소위 후보생 1904년 임명
- 군함 닛신 승조 (1905)
- 소위 1905년 임관
- 해군포술학교 보통과학생 (1907)
- 중위 1907년 진급
- 해군수뢰학교 보통과학생 (1907)
- 연습함 소야 분대장 (1909)
- 대위 1909년 진급
- 연습함 소야 분대장 (1909-1910)
- 해군대학교 을종학생 (1910-1911)
- 해군포술학교 고등과학생 (1911)
- 해군포술학교 교관 겸 분대장 / 해군경리학교 교관 (1911-1912)
- 사세보예비함대 참모 (1912)
- 군함 니이타카 포술장 (1912-1914)
- 요코스카진수부 부관 겸 참모 (1914)
- 해군대학교 갑종학생 (1914)
- 소좌 1915년 진급
- 제2함대 참모 (1916-1917)
- 해군성 군무국 국원 (1917)
- 해군교육본부 부원 / 해군기술본부 기술회의 의원 (1917-1919)
- 하버드 대학교 스페셜 스튜던트 (1919)
- 중좌 1919년 진급
- 하버드 대학교 스페셜 스튜던트 (1919-1921)
- 군함 키타가미 부장 (1921)
- 해군대학교 교관 (1921-1923)
- 대좌 1923년 진급
- 카스미가우라 해군항공대 부장 (1924-1925)
- 주미 일본제국 대사관 국방무관 (1925-1928)
- 경순양함 스즈메 함장 (1928)
- 항공모함 아카기 함장 (1928-1929)
- 런던 해군 군축조약 해군측 전문위원 (1929)
- 소장 1929년 진급
- 해군항공본부 기술부장 (1930-1933)
- 제1항공전대 사령관 (1933-1934)
-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 예비교섭 해군측 수석대표 (1934)
- 중장 1934년 진급
- 해군항공본부장 (1935-1936)
- 해군성 차관 (1936-1938)
- 해군성 차관 겸 해군항공본부장 (1938-1939)
- 연합함대 사령장관 (1939-1940)
- 대장 1940년 진급
- 연합함대 사령장관 (1940-1943)
- 전사 (1943)
2.2. 어린 시절
부친의 나이가 56세였을 때 그를 낳았다고 하여 56을 뜻하는 이소로쿠(五十六)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2] 본명은 다카노 이소로쿠(高野五十六)이다.[3] 이후 1916년에 과거 번(藩)의 유력가였던 야마모토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로 개명하게 된다.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싸우게 된 미국은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 문화를 조사하다가, 일본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장남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 그래서 이소로쿠라는 이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5]
2.3. 가계
- 계보
- 타카노 사다미치-타카노 사다요시 → 타카노 이소로쿠
- 미나미토 노 미츠마사-야마모토 요시미치 →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타카노 가[6]
- 아버지: 타카노 사다요시(타카노가의 데릴사위)
- 어머니: 타카노 미네코(사다미치의 장녀)
- 장남: 타카노 유즈루(타카노 사토루)
- 차남: 타카노 미노루
- 3남: 타카노 타이조
- 4남: 타카노 토메키치
- 5남: 타카노 季八
- 장녀: 타카노 加壽
- 야마모토 가
- 양부: 야마모토 요시미치(야마모토 다테와키)
- 장녀: 야마모토 하츠로
- 차녀: 야마모토 타마로
- 본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 아내: 야마모토 레이코
- 첩: 카아이 치요코
- 장남: 야마모토 요시마사
- 차남: 야마모토 타다오
- 장녀: 야마모토 스미코
- 차녀: 야마모토 마사코
- 친척
- 삼촌[7]: 노부라 테이/타다노 (해군소장), 처의 조카
- 아내의 사촌의 딸: 유카와 레이코(본명 유노카와 카즈코)
2.4.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야마모토는 이 전투에서 대포를 조작하던 중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다.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 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 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압도적인 생산 능력, 풍부한 물적/인적 자원, 기술력과 교육 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히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인구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기준으로 1억 3천만명을 돌파하여 러시아와 맞먹던 상황이었으니… 더 무서운 건 농노나 빈민층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와는 다르게, 미국은 이렇게 전 국민을 동원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루머로 디트로이트의 광활한 공장 지대, 애팔레치아의 광대한 광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농장, 심지어 야마모토가 몰다 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아줌마가 뚝딱 고쳐내던 경험[8]에 의해 반대를 한 것이고,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이 노상 카페의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져있었던 것도 그에게 있어 쇼크였다고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적어도 자동차 고치는 아낙네 이야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이 대위로 육군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 한다.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멕시코에 밀입국해서 유전 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흑역사라 할 수 있다. 에드윈 팔머 호잇(Edwin P. Hoyt)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했으며, 이 시절 야마모토는 "머리가 굳은 거함거포주의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항공대가 실적을 올려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니, 제군은 더욱 더 훈련과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라고 항공주병론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부잣집 도코노마[9]는 훌륭한 장식품이다. 그 자체로는 실용적인 가치는 낮지만, 그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로서의 무형적인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함은 실용적인 가치는 하락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전함 주병 사상이 강해 국제적으로 해군력의 상징으로서의 큰 영향력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함을 도코노마의 인형이다라고 생각하고 전함을 건조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반대하지는 마라."라는 훈시를 하기도 했다.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 '포격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함은 항공기들의 공격에 격침당할 것이다.' 며 반대하기도 했다.[10]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점감요격작전의 일환이었고, 항모전 자체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후에도 사카이 사부로 같은 해군 조종사들에게도 대차게 비판받기도.
'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 라는 발언이나, 전함 야마토의 건조가 한창이던 구레 해군 공창을 방문했을 때 설계자인 후쿠다 케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다만 자넨 조만간 실직할 거야, 이제 우리 해군도 항공 전력이 중요하지 거함거포같은 건 필요없게 될 거다." 라고 말했고, 여기에 후쿠다는 "불침함은 무리라도, 침몰시키기 어려운 배를 만들겠다."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출처 바람)
말년에 국회에 출석하며.[11] |
그러나 현실 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 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 강경파와 심하게 대립했다. 이때 하도 암살 위협에 시달려 제독의 집 앞에는 상시 육군 헌병들과 해군 육전대의 장갑차가 경호를 위해 대기했고,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다.[12]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 해군군축조약 준수를 주장하고, 나치독일과의 군사 동맹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
2.5. 진주만 공격
그러나 같이 개전을 반대하던 요나이[14]가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15]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 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다.[16][17] 관동군처럼 본국의 의사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대미 전략으로서 점감요격작전과 남방작전을 상정해온[18] 일본 해군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집는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걸며 끝내 관철시킨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미국의 당시 가용 전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었으나,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 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다.[19]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 해군은 이 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한다…는데, 일본도 전쟁 전에 항모 건조 계획이 있어서 개장할 배를 미리 만들어두기도 했다. 문제는 생산력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미국은 전함을 포기하고 항모에 올인한 게 아니라, 진주만에서 가라앉은 전함 대부분을 인양해 업그레이드해서 재투입하고 계획된 전함을 찍어내는 건 계속 하면서 항모를 따로 찍어냈다.
진주만 공습 이후에 그가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깊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 기반이 동부에 집중돼 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을 테니 이 때 선심 쓰는 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야마구치 다몬이 상부에 제출한 계획도 대충 이런 식. 다만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 "조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점령하는 완전 승리까지 가능하다" 고 믿고 있었다.[20]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 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뻘짓[21]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 항모 4척[22]이 모두 격침되는 대참사를 당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 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 사항이었다고.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미드웨이 해전 문서 참고. 한편 미드웨이 해전때 나구모 기동부대의 300해리 후방에 있었던 일로 항모 아카기의 전투기대 대장인 이타야 시게루 소좌에게 '전쟁 구경이라도 할 참인가.'라며 비판당했다.
목재와 종이로 지어진 일본의 도시들은 쉽게 타버릴 것이다. 육군은 허풍을 떨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해 공습이 일어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23] 해군기들이 충돌해서 해상에 기름이 뿌려졌을 때 물 위에서 기름이 어떻게 타는지 본 적 있는가?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 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2.6. 사망
사망 사흘 전, 라바울에서 촬영된 사진 |
1943년 1월 말에서 2월 초,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난 뒤,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은 과달카날뿐만 아니라 뉴기니 지역에서도 맥아더의 공세(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에 밀려서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일대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은 연합군이 가져갔으며, 뉴기니 지역의 일본군에겐 동부 뉴기니 북쪽 내륙과 해안 지대의 방어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동부 뉴기니를 잃어버리면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동부 뉴기니 방면에 병력 증원을 기도했지만, 이 시도를 알아차리고 단단히 준비한 연합군에 의해 수송 선단이 증발하고 증원 병력의 절반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가 1943년 3월 3일.
수송 선단의 끔찍한 피해도 피해였거니와 이때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설 조짐[24]이 보이자 야마모토는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렸다. 조급해진 야마모토는 지상기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산타크루즈 해전 이래 재건 중이던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 부대들까지 총동원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의 연합군 지역에 대해 대규모 항공 공격을 가했다.(이호 작전: 1943년 4월 7일 ~ 4월 16일[25]) 야마모토는 4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선을 격침 또는 파괴하고, 180대에 가까운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 또는 파괴하였다는 작전 결과를 보고 받고는 만족해했다. 하지만 이 전과는 터무니 없이 부풀려진 것으로, 실제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일본군이 보고한 것의 7분의 1에 불과[26]했다. 실상 연합군의 전투력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었지만[27]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그 당시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본군 최전선 기지가 있던 부건빌 섬 행차를 최종 결심한다. 부건빌 섬의 바로 코앞에는 동남쪽으로 솔로몬 제도가 이어져 있었고, 제도의 남쪽지역엔 이젠 미군의 핵심 작전기지가 된 과달카날이 있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예정대로 부건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다. 문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28]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미 해군 군사정보대 하와이 기지가 4월 14일 대본영이 관계 지역에 타전한 야마모토 시찰 스케줄을 감청하였던 것이다. 이때 일본 해군은 수주 전 암호를 초기화 시켰지만 초기화된 암호가 일선까지 전달 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미국에게 해독당하던 코드로 송신한 게 문제가 되었다. 1차로 해독한 암호는 전체 내용 중 15%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적힌 것은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도착 시각이었다.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초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암살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 작전)"으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다.[29]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 해독을 통한 정보 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이 작전은 단순한 군사작전을 넘어 미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단 이 부분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며, 시간 정황상 니미츠 제독이 홀시 제독의 일차적인 작전 브리핑을 받고 녹스 장관은 니미츠 제독에게 결정권을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암호 문건 NTF131755은 1943년 4월 14일에 발신되었으며 니미츠 제독이 작전을 승인한 것이 1943년 4월 17일로 3일간의 갭에 킹 제독→녹스 장관→루스벨트 대통령의 각료회의까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건빌 섬 부인(Buin) 일대의 비행장 상공은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미군 전투기들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이를 우려한 연합함대 참모들은 부건빌 시찰을 계속 만류했으나, 야마모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찰 계획이 확정된 뒤엔 현지 항공대 지휘관이 호위기를 더 배치하자[30]고 하였으나 야마모토 본인과 참모진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아군 기지에 가는데 그렇게 유세떨 거 있냐는 이유였다.
이외에도 호위기 세력을 적게 가져간 데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후반부부터 솔로몬 제도의 미군 항공 전력이 계속 강화되었지만 솔로몬 제도에서 본격적인 공세 작전, 특히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쯤 본격적으로 가동한 부건빌 남부지역 일대의 비행장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수행하기에는, 이 당시의 미군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일단, 1943년 3월 시점에서 솔로몬 일대 양측의 항공 전력은 아직 미군이 수적으로 열세였다.[31]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결과에 놀란 일본 육군이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일대에 배치한 육군항공대 전력 200대를 전부 철수시켜서 뉴기니로 돌려버리면서 수적 우세가 바뀌었지만[32],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전투기 전력의 경우, 미군의 주력 전투기들은 제로센에 성능적으로 열세인 F4F, P-40, P-39가 주력이었고, 제로센에 성능상 우위를 가진 F4U, P-38은 배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숫자가 부족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항공 전력에 대적할 수 있는 전력만 따져보면 수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미군 전투기의 행동 반경은 과달카날에서 부건빌까지의 직선 코스로 비행할 때 가능한 행동반경이었으며, 이 코스는 솔로몬 제도 한복판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때문에, 과달카날을 제외한 솔로몬 제도와 그 일대 해역 대부분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발견되기 딱 좋았으며, 이들의 조기경보를 받은 부건빌의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리 요격에 나설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당시 부건빌보다 먼 라바울에서 출격하여 행동반경 끝에 있던 과달카날에서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던 일본군이 처했던 상황이, 이 당시 부건빌을 노리던 미군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실제로 미군은 1943년 2월에 당대 최신형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과 F4U 콜세어의 호위하에 부건빌에 대한 폭격을 시도했으나, 수적 열세와 지상 및 해상에서의 조기경보로 인해 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한 바 있었다.[33]
이 상황에서 벌어진 이호 작전으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미군 항공 전력이 대 피해를 입었으므로 당분간 미군이 항공 작전을 벌이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호작전 당시에도 미군이 출격시킨 항공 전력은 일본군이 투입한 전력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폭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34]가 아니었다면 상술한 과장된 전과 보고가 상당 부분 실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이 시점에서 부건빌 상공의 방공 작전은 일본군에게 유리하였으므로, 설령 '이호 작전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미군 전투기들의 위협이 있다 해도 부건빌보다 먼 곳에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호 작전의 '대전과'와는 별개로 솔로몬 일대의 일본군 항공 전력도 피해를 입어서 재정비 중이었던 데다 이호 작전을 위해 파견되었던 부대들도 모두 원대 복귀해서 전체 전력이 줄어든 사정에 지휘관 순시 같은 일회성 이벤트에 대규모 전력을 동원하기엔 부담스러웠기도 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호 작전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적어서 미군의 항공 전력이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던 데다, P-38 라이트닝이 당시 P-38용으로 막 개발되어 배치되던 신형 대용량 보조 연료탱크[35]까지 가득 채우면 일본군의 눈을 피해 솔로몬 제도를 우회하더라도 부건빌 상공을 아슬아슬하게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야마모토 이하 일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복수 작전"으로 명명한 이 암살 계획을 육군 항공대에 맡기고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공격 임무는 P-38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육항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가 담당하였다. 미처 제독과 현장지휘관 존 미첼 육군 소령은 339 대대를 포함하여 당시 과달카날에서 P-38을 운용하던 3개 전투 비행대대들[36][37]로부터 최상의 기체들과 조종사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G4M(베티) 폭격기 2대 + 호위 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미군은, 18대의 P-38[38]를 출격시키로 결정했다. 이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동안 P-38이 2대씩, 두 조를 이루어 폭격기 1대씩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키고 빠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조기 경보와 요격을 피하기 위해 솔로몬 군도 남서쪽 50마일까지 저공 비행한 후 부건빌 방향으로 이동하고 부건빌 근처에 도달하면 부인 비행장 방면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부건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남쪽 멀리 돌아서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 비행을 해야 했다. 비행 거리가 늘어날 뿐 아니라 기압이 고고도보다 높은 초저공의 특성상 평상시보다 연료 소모량이 늘어나는 상황. 이 때문에 신형 대용량 보조탱크를 동원[39]해도 부건빌 인근 상공에서 P-38이 매복할 수 있는 시간은 10~15분 남짓이었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또는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 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야마모토는 기함 무사시에서 출발하여 라바울로 이동하여 육군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때 라바울 지역 지휘관 또한 연합함대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부건빌로 가는 일정의 취소를 요청했으나 야마모토는 무시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사실 일정 강행이 잘못된 게 아닌 것이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부건빌 일대의 제공권은 여전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암호 체계가 변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미첼 소령의 지휘하에 18대의 P-38이 이륙하였다. 그러나 공격조에 속했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고, 공격조는 2대만 남게 되었다(토마스 랜피어 대위, 렉스 바버 중위). 이 때문에 예비조의 2대(베스비 홈즈 중위, 레이먼드 하인 중위)가 공격조에 편성되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 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들었지만, 이때 예비조의 P-38중 1대(홈즈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하인 중위와 함께 이탈하여 최초 교전한 P-38은 14대(호위기 상대 12대 + 수송기 공격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숫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뿐더러,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다가오는 P-38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토마스 랜피어의 P-38이 호위기를 가로막는 사이 렉스 바버 중위가 2대의 폭격기를 뒤쫓았다. 2대의 폭격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폭격기인 G4M으로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40]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했던 1대의 G4M이 P-38의 집중사격을 받고 밀림에 바로 추락했다.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이 탑승한 나머지 1대의 G4M은 최초 교전 시작 당시 이탈했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재합류한 예비조 P-38 2대 및 1번기 격추 후에 달려온 바버 중위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야마모토 탑승기는 탑승자 11명 전원이 전사, 우가키 탑승기에선 우가키 제독을 포함한 3명이 격추 직후 달려온 단정에 구조되었다. 우가키 제독은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회복했다.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한 일본 육군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긴급발진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 육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 육군의 손실은 두 번째 G4M에 달려든 예비조의 P-38 중 1대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 피격된 기체의 조종사 레이먼드 하인(Raymond K. Hine) 육군 중위도 전사했으나, 렉스 바버(Rex T. Barber) 육군 중위가 G4M를 격추시켰다. 일본 해군 측 손실은 폭격기 2대였다. 폭격기 2대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 살아 있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육공기의 추락 소식을 전달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패닉에 빠졌다. 추락 다음날 함대 참모 와타나베가 비행정에 탑승해 추락 현장을 확인하고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수색대는 추락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후 육군에 연락하여 6사단 소속 보병포중대 병력을 추락 현장에 파견하였다. 지휘관 하마쓰나 육군 대위는 신원 확인을 시도했지만 죄다 불타버려 식별이 불가능했고, 간신히 비행화나 단화에 적힌 이름으로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조종사 좌석에 앉은 야마모토의 시신을 확보하여 부건빌 육군 기지로 운구하였다.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을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기체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G4M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G4M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 육군은 그 즉시 추락 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41]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뒤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색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폭격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의 범위 바깥의 나무 아래에 의자채로 튕겨나와 폭격기를 등진 채 군도를 꼭 쥐고 앉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튕겨나온 시신이 어떻게 그런 자세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이 있다. 근처에 죽어있던 군의장이 추락 이후에도 살아있었기에 그가 야마모토의 시신을 품위있는 자세로 고쳐놓고 죽었다는 설, 야마모토가 추락 이후에도 살아있었으나 부상이 심했기에 최후를 직감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자리에 앉은 후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야마모토도 다른 시신들과 다를 바 없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그를 영웅화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각색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군이 야마모토의 사망을 발표할 당시 일본군의 공식 발표로는 왼쪽 어깨 아래 등으로 들어간 관통상 하나, 그리고 왼쪽 턱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눈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관통상 하나가 있어서 후방에서 가해진 총격 혹은 그것에 의한 파편이 치명상을 입혔다고 하였다. 이대로라면 전투기 총격 직후에 사망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는 일본군 내에서 엇갈린 기록이 있어서 후대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세는 아래 항목 참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장례식 |
야마모토의 시신은 현지에서 4월 21일 화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기함이었던 전함 무사시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한 달 뒤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6월 5일에 요나이 미츠마사 제독을 위원장으로 하여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원수 칭호[42]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 제도[43]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야마모토의 유해는 러일전쟁 시절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명사들이 다수 묻힌 도쿄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위치한다. 일본에서 야마모토 제독의 신사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평소 그의 성격을 잘 알던 해군 원로 요나이 제독이 "그의 영혼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미국은 암호 감청 및 해독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작전의 실체를 속였다.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에게 실시한 브리핑에서는 암호 감청 및 해독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연합군 해안 감시원들[44]의 보고에 의해 야마모토의 행방을 파악했다고 얘기했다. 작전이 끝난 뒤엔 야마모토 탑승기의 격추와 관련된 조종사들의 보고를 전부 기밀에 부치고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냥 침묵만 지킨 게 아니라 해당 작전이 통상적인 작전 중에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꾸몄다. 작전 2일 뒤에 미군의 대일본 선전 방송[45]은 "부건빌 인근에서 전투기가 호위 중이던 폭격기들을 발견하여 폭격기 2대와 전투기 2대를 격추하였다."라고 수많은 전과 선전 사이에 짤막하게 방송하였다. 거기에다 이 작전 이후에도 전투기들을 부건빌 상공으로 계속 보내서 마치 암살 작전이 있었던 그날부터 미군이 부건빌 상공에서 통상적인 작전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만,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이 기만작전에서 배제되었다. 혹여나 포로가 되었다가 암살 작전의 내용이 흘러들어 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한 달 뒤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였지만, 6월 17일에 미국 방송이 앞서의 선전 방송과 별다를 거 없는 브리핑을 내놨을 뿐, 야마모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일본군은 암호 해독을 강력히 의심했지만, 그 확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한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군기들을 유인함으로써 확인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미군은 이를 철저히 회피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진상 조사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이 작전의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미국 애니메이션 루니 툰의 프로파간다 에피소드인 Tokio Jokio. 야마모토는 '백악관에 가서 평화 협정을 맺자'고 주장하는 모습으로 희화화된다. |
미국이 야마모토를 죽인 이유가 야마모토의 '호전성'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게 그 이유.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니, 미 본토를 점령해서 백악관까지 진격할 능력이 없으면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46]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의 대본영이나 야마모토의 발언의 진의는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진주만 이후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항전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장관 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약한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기 등에 부정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부러 양쪽 모두 발언의 맥락을 무시하고 야마모토의 호전성을 부각하는 형태로 프로파간다를 했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어차피 전쟁과 전투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살해'의 대상이다. 더구나 야마모토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한 고위장성이었으므로 제거할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면서 + 덤으로 저런 발언까지 한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있어 좀 더 각별한 제거 목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참조 링크 1: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 야먀모토의 최후(1) (작전 배경)
- 참조 링크 2: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 야먀모토의 최후(2) (세부내용 및 그 후의 결과)
참고로 위 참조 링크에서는 후술된 전공 논쟁과 관련하여 토마스 랜피어를 지지하고 있다. 전공 논쟁의 상세는 아래 항목 참고.
- 참조 링크 3: 당일 작전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동영상
아래는 야마모토 사망 발표 이후의 미국의 뉴스 보도와 전후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다만 이 작전에 참가한 P-38들에는 건카메라가 없었으므로[47] 격추 장면들은 다른 전투에서의 격추 영상이 들어가 있다.[48] 건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 전과를 누가 거두었는지를 두고 지리한 논쟁이 벌어졌다. 상세는 다음 항목 참고. 실제 전투 장면이 없으므로 두 영상 모두 의도적인 연출로 보이는 장면이 많고, 편집과정에서 등장 기종이 오락가락한다. 본 사건에 대한 미일 양측의 시각을 참조하는 정도로만 보자.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에서의 피격 장면. 영화적 연출 때문에 피격된 폭격기가 꽤 오래 활공하는데, 실제로는 집중 사격을 당한 직후 추락했다. 또한, 제독 일행이 후술할 해군 제3종 군장이 아닌,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피복인 사관용 육전의를 입고 있는 고증 오류가 있다.
2.6.1. 그의 죽음과 후일담들
야마모토 사살 이후 미군 내에서는 전공을 두고 지리한 논쟁이 이어졌다. 시작은 G4M 공격조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랜피어였다. 그는 귀환 직후부터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며 떠들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작전은 극비였기 때문에 현장 지휘관 존 미첼과 공격조의 렉스 바버를 비롯한 특별 공격 대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 크게 당황해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는 전공과는 별개로 기밀 사항의 누설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한다.어찌 되었든 공격대의 일원 중 누군가는 야마모토를 처치한 건 확실하였으므로 미군은 공격대 총지휘관 존 미첼, 공격조의 토마스 랜피어, 렉스 바버, 베스비 홈즈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하였지만[49] 이후로도 논란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랜피어가 있었다. 랜피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토마스 랜피어가 기고한 수기
법정까지 갈 정도로 논쟁이 이어지자 1984년에 야마모토 격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교차검증에 나선다. 그 와중에 토마스 랜피어는 1985년에, 작전 당시 전체 지휘를 맡았던 존 미첼이 1994년에 죽었다. 미군은 랜피어 사후에 야마모토 격추의 전공을 렉스 바버와 토마스 랜피어의 공동 격추로 기록하여 논란을 봉합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 위원회는 두 당사자의 주장 및 관련 기록들, 격추당한 G4M에 대한 현장 조사, 야마모토에 대한 부검 보고서, 작전 당시 일본군 호위기 조종사의 증언 등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싶은 모든 자료들을 취합하여 교차검증을 하였고, 1997년에 그 결과를 미국 전투기 에이스 협회에 제출하였다. 위원회가 도출한 결과는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건 렉스 바버라는 것이었다. 렉스 바버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야마모토 사살 작전의 진행과 이후 논쟁 및 교차검증 과정에 대한 이야기
야마모토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 일본군의 공식 발표는 총격 직후 전사였다. 이 발표를 곧이 곧대로 믿자면 격추 이후 하루가 지난 뒤에 발견된 시신 상태는 여러모로 끔찍했을 것이다. 전투기의 총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었을 것이며[50], 설령 총상이 아닌 파편상이라 해도 덥고 습한 열대지역에서 시신은 금방 부패된다. 그러나, 일본군 수색대를 지휘한 하마스나 육군 소위의 발견 보고에선 시신에 심각한 손상이 없어서 신원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으며 구더기가 발견되거나 부패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때문에 일부에선 야마모토 제독이 추락 이후에도 생존한 상태였고, 사망시간은 시신 발견 당일 오전 6시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건빌 현지에서 최초로 시신을 부검했던 현지 군의관 나나가와 육군 중위는 시신엔 턱 외상이나 구강 내 출혈이 없고, 사망 원인을 전신타박상 또는 내장 출혈로 인한 쇼크사라고 기록했으며, 야마모토는 당초 생존해 있었으나 상술한 이유로 인해 19일 새벽쯤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야마모토의 죽음을 각색하기 위해 최초 부검 이후에 시신을 일부러 훼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군의 수장이 아군 지역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것 만으로도 문책감인데, 사정이 어찌되었건 간에 발견이 늦어져서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못 살렸다는 얘기마저 나돈다면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추궁당하기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군의 패전, 졸전에 대해 은폐, 기만, 책임 떠넘기기가 만연했던 당시 일본군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야마모토 사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전함 무사시의 빈소에서 와타나베 대좌(아마 상술된 함대 참모로 보임.)라는 자는 "탑승객들은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 기내에서 스스로 방패가 되었다. 장관은 무사히 탈출했으나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권총으로 자결했다." 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마모토 사망 직후 현지 부대 내지 관할군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각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의 사망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입막음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은 패전 소식을 숨기기 위해, 살아 돌아온 항모기동부대원들을 외부와 차단한 채 격리, 연금시키고 대다수는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낸 전력이 있다. 야마모토 사망이 미드웨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일임을 감안하면 이 의혹 또한 설득력을 가진다. 야마모토 호위를 맡았던 6인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사건 이후 호위 임무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자 최일선 비행장으로 자진해서 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자원을 가장한 강제 전출 또는 일선으로의 자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51] 실제로 이들 중 4명은 이 사건 이후 3개월 이내에 전사하였고, 다른 1명은 1943년 중 계속 이어진 솔로몬 제도에서의 항공전 와중에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다.[52] 종전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1명 또한 1943년의 격전중에 오른손을 잃었다.[53] 하마스나 소위 및 그 휘하 수색 인원들도 최전선에 배치되어 하마스나 소위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전쟁중 전사했다. 최초 부검의인 니나가와 중위 역시 일선에 계속 있다가 전쟁 후반기에 전사하였다. 하마스나 소위의 경우, 야마모토 추락 지점 발견의 공으로 일본 본토로 전출되어서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의혹이 진짜라면 실상은 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해 해전 항목의 후반부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야마모토 사후 2달을 갓 넘긴 1943년 6월 하순부터 미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서 11월 초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시찰을 갔던 부건빌 섬에 미군이 들이닥치고, 미처 해를 넘기기도 전인 12월 말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출발했던 라바울 코앞까지 미군이 육박했을 정도로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굳이 강제 전출이 아니래도 시점의 차이는 생길 뿐, 결국 남태평양 전선에 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에 의해 사살될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채택된 최신 녹색 전투복인 사관용 '3종 군장'(#)을 생애 처음으로 입고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해군의 흰색 하정복인 사관용 '2종 군장'(#)을 입고 있었지만, 육군 장병들을 만날 예정이라 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 군장이 재수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참고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 군의 실질적인 수장이 전사한 유일한 사례다. 물론 연합함대 사령관이 명목상으로는 해군성과 군령부의 지휘를 받는 형태지만 사실상 일본 해군이나 다름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으니 실질적 수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장성급 지휘관이 항공기 등으로 이동하던 도중 공격받아서 사망한 사례는 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야마모토만큼 권한을 가진 사례가 없기는 하다.[54]
1944년 6월 20일 미국 부통령 헨리 아거드 월레스가 장제스와의 회담을 위해 충칭을 극비 방문하자 일본군 제5 항공군 사령관 시모야마 다쿠마 중장은 야마모토의 복수를 위해 월레스가 탑승한 비행기를 격추코자 하였다.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가 입수한 월레스의 스케줄을 바탕으로 작전을 세웠으나 작전 당일 정찰기가 월레스의 탑승기를 찾지 못해 결국 작전은 중단된다. 전후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가 입수한 월레스의 스케줄 자체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을 해독한 암호해독반의 일원 중 한 사람인 존 폴 스티븐스 해군 소령은 훗날 미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이 되었다. 그는 전후 암호 해독의 공로로 동성훈장을 수여받는다. 훗날 스티븐스 대법관은 야마모토 제독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맞지만 정작 야마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썩 유쾌해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장이라지만 잠시나마 미국에서 살고 미국인 친구들을 만든 사람에게 일말의 재고도 없이 사살을 명령한 상부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그가 훗날 법관으로 재직할 때 사형을 최대한 줄이는 판결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2010년에 대법관을 사직한 뒤 2019년 타계할 때까지 사형을 목소리내어 반대하는 법조인 중 하나였다.
3.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종군한 일본군 장성들 중에서 나름 유능하고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나 일본 해군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이며, 상당부분 미화가 된 부분도 존재한다.[55]진주만 공습이 대성공하자 이때의 기동함대(3개 항공전대, 항모 6척)에서 4척은 남방 작전에 투입하고 5항공전대(항모 2척)로 동쪽의 미국을 막게 하였다. 기동함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아무도 생각 못 한 항모의 집중 운용 전술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에 비해 미국은 일본의 전술을 보고 배워 이후 항모를 집중 운용한다.[56] 미국의 사료를 보면 전쟁 초 상황이 매우 긴박함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타임 리미트로 잡은 약 6개월-1년동안 태평양 방면에서 정면에서 맞대응할 정도로 운용할 만한 전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57] 그러나 일본은 더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기동 함대로 동쪽을 계속 공격해서 몇 척 안 남은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거나 최소한 고착 견제만 해도 남방은 저절로 일본의 손에 들어오는 상황이였다. 실제로 분산되어 남방 작전에 투입된 항모 4척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미국의 전함이나 항모가 남쪽에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상 폭격에 동원되는 것이 고작이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진주만 공습의 비행 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외 회고록에 "(적이 없어서) 폭탄을 떨어트릴 목표를 찾으려고 고생하는 작전에서, 일본 해군 함대 결전의 주력인 항공모함 여러 척을 투입해도 괜찮은지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야마모토 대장이긴 하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평범한 제독이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라며 비판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 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km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 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58]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 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 체계에 문제가 많았으며, 야마모토는 이 점을 해결하기는 커녕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 게 드러난다. 즉, 나구모가 지휘했든 야마모토가 지휘했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조.
실전부대의 톱으로서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싸움에서는 항상 안전한 전함에 타 후방으로 빠져 있었고, 이것은 연합함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마저 깨는 계기가 된다.[59] 아예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는 연합함대에 사실상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후방에 빠져있었고, 이것은 미 육군 수송선단 격파라는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된다.
사령장관직을 걸고 벌인 진주만 공습에서도 그가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구모를 보내고 자신은 본토의 기함 나가토에 머물러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시 야마토급 전함을 기함으로 하여 먼 후방에 있었다. 정작 미드웨이의 대패 이후로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60] 전함을 트럭 정박지로 끌고 오면서 피 같은 석유와 물자를 낭비한다.
반면에 태평양 섬 전투에는 신경을 써서 지상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자주 시찰을 다녔다. 그의 사망 역시 부건빌 전선에서 육군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날아가다 죽은 것으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싸움을 피했다는 것과는 별도로 전선을 시찰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연합함대 사령관의 전선 시찰 계획, 즉 특급 군사 기밀이 고스란히 적국에게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니미츠가 야마모토를 경시했다는 이야기가 국내에서 유명한데, 야마모토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보고받은 니미츠 제독이 "더 유능한 놈이 대신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계획을 입안한 정보장교 레이튼 중령은 '일본군의 정신적 충격이 매우 클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임이 될 사람 중에서 "그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라고 설득했다고 하고[61], 니미츠는 마지못해 승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표현만으로 니미츠가 야마모토를 경시했다고 보는 건 비약이다.[62] (다른 구체적인 발언이 있다면 추가 요망)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는 암호 해독이라는 엄청난 이점을 걸고 야마모토를 제거하려는 도박을 하고 있는 건데, 암호 해독이 간파당하고 야마모토 후임으로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와 버리면 삽질한 건 거꾸로 미국이 된다. 그런 리스크에 대해서 확인을 하는 것은 상관의 당연한 역할이지, 임팔 작전처럼 보급 문제가 답 없는게 뻔히 보이는데 모르는 척 그냥 승인해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니다. 정말 니미츠가 그렇게 믿었다면 애초에 작전을 강하게 반대했어야 맞고, 니미츠가 반대하면 누가 작전을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 역시 상술한 대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63]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사실은 평판에 거품이 대단히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특히 일본에서는 해군선옥론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일본 육군에 책임을 물으면서 일본 해군에는 관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야마모토의 주도로 인한 실책조차 육군 측에 떠넘겨지는 식으로 미화된 사례도 존재한다. 야마모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체에 대한 참조글.#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해당 링크들은 전반적으로 야마모토의 실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몇몇 부분에서 야마모토 개인의 잘못이 아닌 부분을 야마모토의 잘못으로 지목하는 경우가 있다.
1. 폭격기 만능주의는 야마모토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야마모토도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1936년)에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은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지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미 육군 항공대도 폭격기 만능주의의 영향으로[64] B-17이 호위기도 없이 무리한 주간 폭격을 했다가 수많은 승무원들이 전사한 전적이 있다. 오히려 1936년의 시점에서 폭격기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호위 전투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면 두헤의 사상을 박살낸 항공전 사상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은 부분은 까일 거리가 맞다.
2. 진주만 공습에서 타란토 공습도 제대로 못 베껴서 주간으로 했다는 것은 다소 미묘. 야마모토는 타란토 공습을 참고해서 야간에 뇌격으로 승부를 걸자는 입장이었으나 겐다 미노루 중좌가 정확한 공격을 위해서는 주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후 2차대전의 해전을 들여다봐도, 야간에 육군 폭격기들이 활동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해군의 전투기와 급폭기, 뇌격기가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야간기습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에 가까웠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 3차 공습을 단념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야간 착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3. 진주만 공습은 단지 소거법의 결과일 뿐이다라는 것도 다소 미묘. 일단 불가능한 방법들을 골라내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고 그렇게 골라내서 그래도 쓸만한 방법을 찾아낸 것은 인정할만한 부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여운 온갖 어거지와 똥꼬집은 빼도박도 못할 까일거리이다. 그리고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정한 것은 야마모토가 아닌 것도 사실.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목한 것은 겐다 미노루와 오니시 중장이었다.
4. 진주만 공습의 효과에 대해서도 초반에 다수의 전함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한동안 미 해군의 작전에 제약을 가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 해군을 탈탈 털어먹고도 야간에 후퇴해야 했던 이유가, 당시 일본 해군의 전함에 맞설 전력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 결과이다.[65] 미군의 기본 전술방향마저 바꿔놓은 진주만 공습이 보잘것 없는 전과라고 하기는 어렵다.
5.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육군이 주둔한 과달카날을 시찰하지 않았다고 까는 것도 미묘. 아무리 과달카날의 문제가 해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지만[66], 과달카날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인데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시찰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사례를 드는 것도 다소 부적절한 것이, 과달카날에는 미 육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 해병대 또한 주둔하고 있었고 니미츠의 경우 태평양 해역의 해군, 해병대, 육군을 전부 지휘하는 입장이었기에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고질적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이건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33년 해군 항공본부 기술부장 시절, '적 공격기의 선회기총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개발/훈련해야 한다'라는 시바타 타케오[67]의 진언을 "제국해군의 오늘이 있기까지 육박필중의 전통 정신이 있었다. 향후 1미터라도 사정거리를 늘리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는 말로 일축한 일까지 있다.
군사적인 부분과는 별도의 단점으로는 카와이 치요코(河合千代子)라는 첩과의 관계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틀 전에도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애교였고, 심지어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작전 기간에 대한 정보까지 전달했었다. 이런 치요코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야마모토의 평판에 금이 갈 것은 분명했기에 야마모토 사후 몇몇 장교들이 자살을 권유할 정도였다. 치요코는 자살 대신 대부분의 편지를 군부에 넘겼으나 몇 장은 숨기고 있었으며, 그 남은 일부의 편지가 그 모양이었다.
또한 심각한 도박 중독자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68] 물론 이런 기질이 작전 지휘에서 드러난 경우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문제는 그런 기질이 나와서 제대로 말아먹은 전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이후 일본군이 제대로 공세로 나서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야마모토의 도박 중독자로서의 면모는 전투지휘 자체보다는 그 이외에서 드러나는데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기의 출격 이후 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일화도 남겼고[69] 해군 내에서 포커로는 야마모토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상기 링크된 지휘관 좌담의 증언을 보면 블러핑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어쩌다 이겼을 때 고수처럼 보이는 것뿐이고 실제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 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함대파에게 강경하게 반응해서 조약파가 쓸려나갈 때 커리어가 끝날 뻔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70]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후시미노미야는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케케묵은 전함우위사상에 물들어서 그렇지. 단지 야마모토가 자신과 다른 라인이었을 뿐.
해군 내 항공주병파의 거두로서 그의 라인에는 오자와나 야마구치 같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도 있었다.[71][72] 그러나 카미카제의 공식적 발안자인 오오니시 타키지로, 찬반양론이 갈리는 겐다 미노루, 연합함대 참모로 야마모토의 실패를 함께한 쿠로시마 카메토 등 야마모토 파벌의 항공주병파라고 꼭 유능하지는 않은 게 함정.
그래도 일본군에서 미국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73]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커녕 10대 1로 벌어질 것이다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74] 3국동맹에도 불만을 가졌고 진주만 공습 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구두쇠 기질이 있어서, 집에만 오면 옷 닳는다며 훈도시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4. 어록
苦しいこともあるだろう。言い度いこともあるだろう。不満なこともあるだろう。腹の立つこともあるだろう。泣き度いこともあるだろう。これらをじっとこらえてゆくのが男の修行である。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私たちは真珠湾を空襲して6ヵ月間は勝利ができるだろう。 しかし、それ以降は断言できない。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してみて、言って、させて、誉めてくれなければ人間は動かないだろう。
행동으로 보여주고, 말로 들려주고, 해보도록 시키고, 칭찬해주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말로 들려주고, 해보도록 시키고, 칭찬해주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5. 매체에서
가공전기나 대체역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대부분 주역으로 등장하고 아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들도 있다.5.1. 만화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몽키 D. 루피로 분했다. 원래는 란스 시리즈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코스프레를 시킬 셈이었는데 너무 매니악해서 교체당했다고 한다.허니와 클로버의 일본 해군빠인 하나모토 슈지가 좋아하는 인물. [76] 하지만 역자가 밀덕이 아니여서 '야마모토 고주로쿠'로 잘못 표기되었다.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군함 야마토에서 어찌어찌 루즈벨트 대통령과 휴전협정을 맺게 된다. 하지만 휴전협정 조인식 당일 츠지 마사노부가 소련을 침공해 분노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돌아가 버리고 이소로쿠를 우선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 이후 역사대로 복수 작전으로 사망한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다. 주인공 쿠루토의 조언으로 계속 벙커에 숨어 지냈다. 이후 오키나와까지 도망친다. 독자들은 오키나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대면하게 될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핵피엔딩. 그리고 역사개변 무효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77]에서는 주인공인 카이 타다시를 지원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장차 해상전이란 것은 항공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될 테니 덩치만 큰 전함 따위는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는 인물로 나온다. 게다가 거대한 모 호텔을 자신이 미는 설계안[78]보다 싼 건조비로 책정해 놓은 걸 보고 "대체 세금을 뭐라 생각하는가! 이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고 폐하에 대한 반역이다"라고 주장하는 상당히 정의로운 인물인 듯 묘사한다. 당연히 반대측인 군령부는 권력 유지와 삥땅칠 돈만 생각하는 악역들로 나오는 중. 이후 한동안 비중이 거의 없다가 2차 런던 군축 조약에 일본 대표로 참여한 뒤 항공본부장으로 9시(試) 단좌전투기의 개발을 주도하면서 다시 출연이 늘어나는데, 전투기에 방어력은 필요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카이를 멘붕시킨다. 이 작품의 영화 판에서는 서부경찰 시리즈에서 하토무라 에이지, 타츠미 소타로 역을 맡았던 타치 히로시가 연기.
하이 스쿨 플릿에서 주인공의 함인 구축함 하레카제의 고양이가 이 칭호를 받는다.[79][80] 또한 대함장(?)이라는 임시보직도 내려준다.[81] 차후의 공적을 세우자 또 대제독이라는 칭호를 내려준다.[82]
5.2. 영화
진주만 공습을 다룬 영화에는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편이며 도라도라도라,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영화) 등에 등장한 바가 있다. 진주만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거의 다 일본군 측의 어느 정도 개념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감이 있다.- 1968년작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개봉한 바가 있다. 미후네 토시로가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분했다. 뜬금포로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이 영화를 보고 야마모토 이소로쿠빠가 되어 자신의 졸개들을 '연합함대'로 칭한 일화가 있다.
- 1970년작 도라 도라 도라에서는 야마무라 소가 분했으며 거의 일본측 주인공급으로 나온다.
- 1981년작 연합함대에서는 고바야시 게이주가 분했다.
- 2001년작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에는 일본계 미국배우 이와마쓰 마코토가 분해서 역시 일본측의 주인공을 맡아서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일본의 입장에선 미국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하는 역할을 맡는다.
- 2011년 12월, 진주만 공습 70주년 기념으로 개봉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에서는 야쿠쇼 코지가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분했다. 감독은 《8일째 매미》의 나루시마 이즈루이다. 에모토 아키라가 요나이 미쓰마사 역을, 아베 히로시가 야마구치 다몬으로 출연한다. 영화의 성격상 그를 꽤나 미화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일례로 미드웨이 해전 패배의 책임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아니라 군령부 측에 전가하고 있다.[83] 실상은 애초에 주력 함대는 몇백km 밖에서 관전만 하고 있고, 공격을 전담해야 하는 항모를 적의 미끼로 쓴 작전 구상 자체의 문제였고, 야마모토 본인이 지위를 이용해 이런 되도 않는 작전을 밀어붙인 것이 그 원인이었다.
몇몇 인물 미화 부분[84]과 개판 고증 부분[85]을 스킵하고 보면, 전반적으로 3국 동맹이나 미국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부추기며 혹세무민에 앞장섰던 당대 일본의 언론이나, 짧은 이익에 집착하며 여기에 편승, 호응했던 일반 국민들[86]의 모습도 비추는 등 제법 볼만한 영화다. 작중 이런 흐름에 비판적인 사람은 야마모토와 절친한 사이인 호리 테이키치 예비역 중장을 비롯해서 몇 명 뿐인데, 호리 제독은 실제로도 당시 일본에서 손꼽을 만큼 올바른 전쟁관을 지닌 인물이었다.[87]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들 중 과달카날에 상륙한 병사들이 고립된 상태에서 "지금이야말로 거함거포를 쓸 때가 아닌가!"라며 함대결전을 주장하는 함대 사령관이[88] "기름이 없다."[89]라는 대답을 듣고 조용히 주저앉는 장면이 유명하다. #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그밖에 물만쥬 먹방 장면 또한 유명하다. #
- 2019년작 미드웨이에서는 토요카와 에츠시가 분했으며 미국에서 만든 태평양 전쟁물에서 그렇듯이 일본측의 개념인 주인공 포지션을 맡았다.
5.3. 소설
추축국이 승리한 소설인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 판에서 언급되는 몇 안 되는 실존 인물로 이미 사망해서 샌프란시스코에 그의 신사가 마련되어 있다.본인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에서 그의 어록 중 하나를 인용하는 식으로 언급된다.
역시 본인 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고생들이 참가하는 2차세계대전 시뮬레이션 대회를 주제로 하는 라이트노벨 여고생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있다. 놀랍게도 일러스트삽화를 담당한 게 배틀 비드맨, 슈팅 바쿠간시리즈, 스캔2고, 메탈 파이트 베이블레이드 그리고 최근 MAZICA PARTY 애니의 케릭터 디자이너인 애니메이터 나가모리 요시히로.
대체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 일본 제국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등장하지만 작중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괴멸하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자신도 무사시와 함께 연합군의 공습에 수장되어 사망한다.
대영제국 함장이 되었다에서는 미영독과 일프이가 동맹을 맺고 전쟁을 벌이는 대체역사라 영국 제독인 주인공에 대항하는 최종 보스로 나온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한국이 약조를 깨고 장강을 넘은 것에 분노해 당장 한국을 공격하려는 관료들을 말리며 전쟁 전에 연료를 비축하자며 한 달만 기다리자고 시간을 끌었는데, 그 사이 추분으로 일본군 장병들이 고향에 내려간 틈을 타 한국이 먼저 일본에 기습을 가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가토에 탑승해 수병들을 이끌고 한국과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수병들 역시 누구 하나 퇴함하지 않고 이소로쿠를 따르며 명예롭게 옥쇄하지만... 그리하여 미치광이 군국주의자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물고기 밥으로 전락했다는 문구로 비웃음을 받는다.
조아라에서 연재되었다가 카카오페이지에 리메이크작으로 연재 중인 격랑의 바다에서도 일본군 중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산호해 해전에서 원 역사보다 더 큰 손실을 입었지만, 이내 추스르고 순양전함을 인도양으로 파견하여 통상 파괴전을 획책하는 등 영국은 물론 한국인과 이들에게 정보를 받은 미국 당국의 골머리를 썩히게 만든다. 그래도 후반부로 갈수록 자기보신주의를 버리지 못한 채 이런저런 실책을 벌이다가 필리핀에서 연합함대가 전멸하여 그곳에 사령부를 설치한 자신의 안위마저 위험해지자 시찰이란 명목 하에 대만으로 도주하려고 했으나, 곧이어 한국군-필리핀 연합 특수부대에게 생포당했으며, 전후 재판에서 최소 교수형만은 면하기 위해 광복군과 거래하여 선전방송에 동원되는 대굴욕을 겪는다.
높은 하늘의 한국인에서는 비행기 타고 섬 기지 시찰하러 왔다가, '새벽에 공습받아서 활주로가 박살났다. 조금만 기다렸다 와라'라는 무전을 받고 잠시 기다리다 간다. 문제는 그 기지가 새벽에 점령당했고, 저 무전은 점령한 미군과 점령당한 기지의 '일본 육군'이 보냈던 것. 그렇게 일본군 기지였던 미군 기지에 착륙한 이소로쿠는 그대로 포획되고, 훈제 햄마냥 익어가는 바비큐들 위에 꺼꾸로 매달려 미군과 육군의 조롱을 받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구출작전으로 위장된 사기극에 또 낚여 미 항모 요크타운까지 가 플레쳐 제독에게까지 농락을 당한 후 주인공이 고간킥을 날리는 장면이 촬영되며 전 세계에 고자 인증을 하고 말았다. 이후 사지가 묶인 채 자살방지를 핑계로 기저귀까지 차게 되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독일이 일본 측에 사실확인을 하나 '그런 사람은 없다'는 답을 들었다는 언급으로 일본에선 존재 자체마저 부정당하는 꼴이 되었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2차대전의 전개가 달라지며 원 역사와 달리 항공모함의 진가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바람에 상부의 지시로 진주만 공습을 전함까지 투입해 3차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후소가 해안포에 격침당하며 3차 공습은 실패로 끝났다. 원 역사와 달리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아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육군이 폭주하여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장하여 같이 회부되어 기소된 장군들이 광분한다. 결국 전쟁 이전부터 계속 대미개전을 반대해온 점과 반성하는 태도를 인정받아 금고 25년을 선고받는다.
해병문학에서는 진주만 대장난을 계획하는 오도조 히데키 해병에게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가 해병 와규가 되는 황룡 포지션으로 등장하였다.
5.4. 게임
Easy Tech게임 에서는 공군 1티어 능력으로 등장해 항모에 태워보내면 다 씹어 먹는다.게임 월드 오브 워쉽에 고증 함장으로 등장하며 특수 능력과 전용 특전을 제공한다.
hoi4에 일본 제국 해군 5성 제독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가히 게임 내 제독들 중에 가장 좋다고 할 정도. 아무런 디버프는 없는 건 물론, 훈장도 주렁주렁 달고 나와 버프도 미친 듯이 달려있다.
인리스티드에서 초상화를 주었으나 그렇고 그런 문제때문에 삭제되었다.
6. 관련 문서
- 기름이 없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란스 시리즈): 본 인물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란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1] 사후 추서[2] 실제로도 아버지 다카노 사다요시(高野定吉)는 1827년생이다. 1913년 사망.[3] 가공전기 소설 감벽의 함대에서도 이 이름으로 나온다.[4] 예: 一郞(이치로), 二郞(지로), 三郞(사부로), 四郞(시로), 五郞(고로). 만일 장남이 사망한 상태에서 차남으로 태어나면 준이치로(準一郞).[5] 위의 말처럼 아들의 이름에 숫자를 붙여 짓는다면 이소로쿠는 56번째 아들이란 뜻이니... 비슷한 시기 사람인 건축가 요시다 이소야(吉田五十八, 1894-1974)도 아버지가 58세였을 때 태어났다.[6] 이소로쿠는 5남 혹은 장녀 뒤에 태어났을 확율이 크다.[7] 또는 숙부, 고모의 남편.[8] 1936년에 만든 제너럴 모터스의 수동변속기 교육 영상이 현대의 교육 매체보다 톱니바퀴의 원리에 대해 더 직관적이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을 정도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반인에게 기본적인 기계공학 지식을 가르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9] 床の間. 일본식 건축물에서 방의 한 부분을 다른 곳보다 높게 만든 곳. 족자나 수석, 인형 따위로 장식한다.[10] 그리고 그 예언은 아주 정확히 이루어져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만든 전함 야마토는 단 한번도 대함전을 치르지 못한 채 항공 어뢰에 두들겨 맞은 끝에 격침당했다.[11] 사진을 보면 군복이 아닌 정장을 입은 이유가 당시 일본에서는 사시사철 군복 차림을 선호하던 육군과 달리, 해군은 근무 시간 이외 및 외부 출장 등엔 사복 정장 착용을 선호하는 경향이 컸다.[12] 당시 해군대신은 요나이 미쓰마사로서 이노우에 시게요시 해군성 군무국장과 함께 삼국동맹에 반대해서 셋 다 암살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요나이 대신이 야마모토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한게 암살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설은 지금은 정설로 다뤄진다.[13] 이소로쿠의 판단은 정확했다. 진주만 공습 성공에서 부터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까지 걸린 기간이 6개월이었다.[14] 개전을 반대했기에 총리가 되자마자 육군측의 육군대신 사퇴로 내각 붕괴에 대한 위협을 받았고 결국 6개월도 못 갔다. 이후 잠시 은퇴했다가 전쟁 말기 해군대신으로 복귀해 무조건 항복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육군과 끝까지 대립했다.[15] 왜 그랬는지 하면 육군의 협박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16] 여기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참고하면 일본군 육군이 대륙에서의 일이 끝나면 해군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 2차대전 패전 이후에 해군반성회에서는 육군의 쿠데타를 우려해서,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우리가 전쟁을 주도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17] 또한 해군 입장에선 지난 십수 년간 대미 결전을 위해선 해군 전력을 증강해야 한다면서 십수 년간 엄청난 예산과 자원을 가져다 썼는데, 이제 와서 미국하고 전쟁 못한다고 하면 해군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고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는 외통수에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육군이 전쟁을 압박하자 해군 상층부는 승산이 없는 걸 알면서도 더 호전적으로 돌변하였다.[18] 미국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남방 자원 지역이 목표라고 예측하고 있었기에, 하와이가 공격받는 사태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19] 진주만 공습 성공 소식을 듣고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것은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이다. 미국의 뺨을 맛깔나게 때린 적군의 탑 포지션이니까 잘 그려준 것.[20] 미군의 하와이 방위태세와 일본군의 상륙전 대비를 고려하면 현실은 하와이 점령도 불가능했다.[21] 애초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자신이 나구모 주이치를 싫어했다. 파벌도 야마모토는 조약파인데 반해 나구모는 함대파이기 때문. 그리고 진주만 공습 때도 야마모토는 항공모함을 노려서 공격하려 했는데, 공습 예정일 당일인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에는 항공모함이 1척도 없다는 보고가 기동함대와 본대에 들어갔음에도 나구모를 중심으로 한 기동함대가 멋대로 진주만을 공격한 것이다. 만약이지만, 나구모가 아닌 오자와 지사부로가 진주만 공습을 맡았으면 항공모함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을지도.[22]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23] 길게 갈 필요 없이 도쿄 대공습 항목에 들어가서 읽어보면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24] 비스마르크해 해전이 벌어지기 전인 2월 21일, 미군은 과달카날 서북쪽의 러셀 제도를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미드 더 퍼시픽 중반에 렉키 일행이 휴양하였던 파부부가 바로 여기에 있다.[25]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작전 종료를 선언한 날. 실제 공격은 14일이 마지막이었다.[26]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피해 합계는 함선 6척, 항공기 25대였다.[27] 이호 작전 당시, 부건빌을 작전권에 두고 있는 과달카날의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전투기 7대에 함선 3척에 불과했다. 이호 작전 직전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의 미군 전투기들을 꾀어냈을 때에도 겨우 6대만 잃었을 뿐이었다. 이호 작전 당시 과달카날에서 출격한 미군 전투기가 총 76대 였으므로 이호 작전 종료 후에도 최소 69대의 전투기가 과달카날의 미군에게 있었다는 얘기이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이호 작전도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미군을 모두 제압하겠다는 과도한 목표 때문에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초기에 과달카날을 공격한 일본군 조종사들의 '함선 15척 격침/대파, 적기 41대 격추'라는 과장된 전과 보고를 곧이곧대로 듣고 과달카날에 대한 공격을 그대로 끝내버린 야마모토의 실책 때문이었다.[28]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전간기 군축조약 협상할 시절에 이미 미국은 일본 정부의 암호를 해독해서 재미를 보았다. 나중에 낌새가 있다고 독일에서 일본에 알려주었지만, 일본은 큰 대비를 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은 여전히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 때의 유명한 식수 타령은 최종 확인을 위한 작업이었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진주만 공습조차도 모호하지만 일본이 무언가 하고 있단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건 연합군이 암호를 너무 잘 뚫은 것도 있다.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도 영국 본토 항공전 무렵에 앨런 튜링이 참여한 GC&CS에 의해 이미 줄줄 새고 있었는데도 독일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는 조금 더 버티고 중간에 한번 방식을 바꾸기는 했는데 그것도 뚫어버릴 정도. 이것 때문에 U보트 함대 작전이 와해됐다.[29] 사실, 처음에는 해당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알래스카와 다른 하와이에서도 같은 정보가 들어오자 정확성을 인정받았다.[30] 6대에서 20대로 증강[31] 일본 390(+150) VS 미군 319(+200)[32] 이로 인해 이호 작전 당시 야마모토가 솔로몬 제도 일대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항공 전력이 말그대로 반토막 났고 이 때문에 항모부대의 항공 전력까지 끌어다 작전에 투입해야 했다.[33] 이후에도 미군의 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일본군 비행장들을 공습하곤 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 일본군 항공 전력의 발을 묶기 위해 이뤄진 작전이었다. 미군 항공 전력이 지속적인 공세에 나서는 건 신형 전투기들의 세력이 확충된 43년 중반부터의 일이다.[34] 과달카날 전역을 거치면서 일본 해군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 대다수가 사라졌고, 이 자리를 대신 차지한 신참들은 과장된 전과 보고의 예에서 보듯이 전반적인 기량과 자질이 크게 떨어졌다. 주력 전투기인 제로센은 미군의 신형 전투기들에게 성능적인 열세를 보이면서, 이 신형 전투기들과 연계 작전을 벌이는 구형 전투기들조차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게 된다.[35] P-38 라이트닝이 많이 쓰던 보조 연료탱크의 용량은 150갤런이었지만 이 신형 연료탱크는 그 2배인 330갤런짜리였다.[36]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와 70 비행대대, 그리고 18 비행단 소속 12 비행대대[37] 핵심 임무라 할 수 있는 전체 편대 선도조 및 야마모토 공격조는 거의 대부분 339 비행대대로 채워졌다.[38] 이 숫자도 나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이호 작전 중 과달카날 공습 당시 요격을 위해 출격한 P-38은 12대였다. 과달카날 공습이 끝난 지 1주일만에 더 많은 숫자를 동원했다는 건 공습과 암살작전 사이의 그 짧은 기간에 전력이 보강되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예비 전력이 충분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이 당시 과달카날 후방의 미군 기지에는 200대의 각종 예비 기체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답 안 나오는 상황이다.[39] 이 330갤런 신형 연료탱크는 막 일선에 배치되고 있어서 수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야마모토 제거 작전에는 대당 1개씩만 장착되었고 나머지 한쪽엔 원래 쓰던 165갤런 연료탱크를 달았다.[40] 당시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조종사들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극비 임무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막중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폭격기 공격조는 자신이 격추되는 한이 있더라도 임무를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한다.[41] 항공기를 통해 추락 지점에서 발생한 화재를 통해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한 뒤 수색병력을 투입했다.[42] 일본에서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다. 원수 항목 참조.[43] 쉽게 말해,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서는 최하위인 2급 철십자 훈장부터 시작해 하위 철십자 훈장들을 모두 받아야 한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 등 다른 비 독일인 수훈자들은 모두 2급, 1급 철십자 훈장 수훈 후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44]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 안에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연합군 병력들이나 현지 거주민들이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일본군의 동향을 감시하여 연합군에 보고하고 있었다.[45] 일본에서 일부러 들으라고 일본어로 방송.[46] 아예 야마모토가 이 발언을 하고 있는 미국의 전시 선전 포스터(#)도 나왔다. 영화 <도라!도라!도라!>에서도 저 대사가 나오는데, 미국판의 자막은 그냥 순화시켰다.[47] P-38 라이트닝에 건카메라가 부착된 건 1943년 후반기에 나온 후기형 기체들 부터이다.[48] 특히, 일본쪽 다큐멘터리 영상 중 일부는 전쟁 말기에 자살특공기 오카를 탑재한 G4M을 격추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49] 사실 이정도 전공이면 명예훈장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나 기밀 누설 건이 불거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기밀 누설에 분노한 홀시 제독은 십자훈장마저 취소하고 격을 낮춰 서훈하려고도 했다. 전사한 레이먼드 하인 중위에게는 해군십자훈장, DFC (Distinguished Flying Cross), Air Medal 및 퍼플 하트가 추서되었다.[50] P-38의 탑재 무장은 50구경 M2 브라우닝 4정 + 20mm M2 기관포 1정, 둘 다 맞으면 형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대구경 화기이다. G4M의 동체에 이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는 방탄 장갑이 장착되는 시기는 야마모토의 사망 이후인 1944년이다.[51] 참고로, 위키백과에서는 이 사건 이후 해당 조종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불이익은 없었던 걸로 기재되어 있다.[52] 이 사람은 사카이 사부로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걸로도 잘 알려진 일본군 에이스 스기타 쇼이치였다. 그는 솔로몬 제도에서는 살아 돌아와서 전쟁 말기엔 343 해군항공대의 일원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1945년 4월에 전사한다.[53] 이 사람은 야마모토 호위기의 조종사로서는 유일하게 상술한 진상 규명 위원회 활동 당시까지 생존하여 야마모토의 피격 상황을 증언하였던 겐지 야나기아이다. 그는 야마모토의 피격 상황을 증언하면서 자신이 하인 중위를 격추했다고 주장하였다.[54] 지프를 타고 이동하다 공격받아 전사한 미 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소장, 브리스톨 봄베이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독일 공군에게 공격받아 사망한 윌리엄 고트 중장, 타고 있던 Fi 156이 소련군에게 격추당한 테오도어 아이케 SS대장 등이 있다.[55] 이러한 점은 전근대적인 사고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던 이홍장이나 독일 내에서 자기네들의 소왕국을 건설했고 그에 따라 파벌주의적 경향을 보인 독일군의 수많은 장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사항이다.[56] 미국도 집중 운용에 대한 개념 자체는 있었다. 다만 이것이 현실화된 것은 미 해군의 전함이 진주만 공습 당시 주요 목표물로 격침되었거나 대파되어 운용이 불가능하게 된 이후였다. 당시 항공모함은 모두 진주만 밖에 나가있어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반강제로 항모 중심의 기동부대로 재편성하여 운용하는, 말하자면 꿩 대신 닭이었던 셈. 그러나 이 항공모함들은 이후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때까지 지원함 격에 지나지 않던 항공모함의 위상을 전략무기급으로 올려놓았다. 알고 보니 닭이 사실은 봉황이었던 것.[57] 미드웨이 해전 당시 산호해 해전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귀환한 요크타운을, 니미츠 제독이 괜히 3일안에 땜빵 처리해서 전투에 투입하라고 지시한 게 아니었다. 실제 당시 태평양 함대가 가용 가능한 항공모함은 3척뿐이었고, 이 부대들은 태평양 함대의 전부였다. 만약 미드웨이 해전에서 진다면 태평양 함대는 새로 건조되는 함선들이 투입되는 약 1년여 가까이 진주만에 갇혀있어야 했으므로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다해 부딪혔다.[58] 실제로 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야간을 틈타 미 함대에게 돌격하여 포격, 수뢰전을 펼치는 것을 고려했으나 그것이 거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다 아침이 오면 항공 전력이 박살난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어 포기하고 후퇴했다.[59] 현대 해전에서는 통신수단의 발달이나 전방에서의 생존성 및 그에 따른 지휘계통 혼란 문제도 있어 선두 지휘는 단점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니미츠는 이를 고려해 자기가 직접 일선 함정에서 근무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후방의 사령부나 본토에서만 일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일본군의 관료제 하에서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일선 부대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 역사와 인물 쇼와 56년 5월호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 # #번역 그리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니미츠처럼 후방 관리 행정 업무만 처리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전부대를 직접 지휘해야 하는 직책이다. 야마모토에게 니미츠처럼 아예 선진적인 업무 분담 시스템을 구축한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그런 생각이었다면 결전을 대비한 주력 함대로서 전방 정박지에 진출한 전함에 좌승해 있어야만 하는 이유도 설명될 수 없다.[60] 오자와 지사부로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었을 때 이미 지휘할 함대가 없었지만, 1기동함대 사령장관 때는 최신예 항모 다이호를 기함으로 세워 직접 지휘를 맡고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와 같은 전함들은 전방에 세운 것과 비교된다.[61] 혹은 "그는 제독님(니미츠)과 같은 존재라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없다"라고 했다고도 한다.[62] 태평양 전쟁사에 대해 더욱 활발히 이야기되는 영미권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논란이 없다. 사실 야마모토는 미국에서는 자주 니미츠와 비교되며, 위 일화도 니미츠와의 라이벌 구도로 보기도 한다. 단순히 번역의 뉘앙스 차이로 일어나는 오류로 보인다.[63] 사카이 사부로가 여러 서적에서 그를 제대로 비판한다. 비행총대장 후치다 미쓰오 역시 그의 책에서 야마모토를 그저 그런 범장이라고 까고 있다.[64] 미군의 당시 이 분야 대표 주자가 석기시대 마니아인 커티스 르메이였다.[65] 실제로 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야간에 미 함대에게 돌입하여 함대결전을 펼치려 했으나, 당시 야마모토 함대는 수백km 밖에 있었던 지라 당시 함대가 낼 수 없던 30노트(약 55km/h)의 속도로 달려와도 7~8시간이 걸렸으며, 미해군이 제자리에 가만히 떠있을 리도 없으므로 현실적으로 함대결전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함대결전사상 자체가 일본 해군의 환상과도 같은 교리였다.[66]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미군간 연락을 차단하고 추가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써 해군이 비행장을 만든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걸 막고자 미 해병대가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여 일본군 육군이 축차투입하다가 판이 커져버린 것. 당시 일본 육군은 중국 전선과 동남아 전선이 메인 무대였고 태평양쪽은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67] 야마모토의 파벌이던 겐다 미노루와 동기로, 항공전에 대한 의견 차이로 대립 관계였다.[68] 이런 모습을 11년작 영화에서는 틈만 나면 쇼기를 두는 것으로 묘사했다.[69] 미와 요시타케 대좌와 맥주 내기를 했는데 야마모토는 리나운 격침, KGV 대파에 내기를 걸었고(당시 일본은 함급까지만 파악한 상태였다) 요시타케는 2척 전부 격침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과는 요시타케의 승리. 야마모토는 기뻐하면서 원하는 만큼 맥주를 주라고 지시했다.[70] 이 시기는 큰 배의 함장, 특히 전함의 함장으로 근무하는 것이 제독으로 승진하는 정석적인 코스였다. 실제로 장관급까지 못 갔던 사람들은 아무리 잘 타도 순양함 함장이 커리어의 끝이었다. 그리고 연습전함 히에이에는 쇼와 덴노도 종종 좌승하곤 했다.[71] 다만 연공서열을 비롯한 기기묘묘한 일본 해군의 구조 덕에 그들은 필요한 순간에 함대를 지휘할 자리에 앉지 못했다.[72] 나구모는 그가 데려온 게 아니라 연공 서열로 어쩔 수 없이 앉히게 된 케이스였다.[73] 물론 야마모토만 알고 있던건 당연히 아니다. 일본에도 바보 군인이나 천치 공무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미국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전쟁 전에 일본 정부와 군부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산이 있느냐를 각각 연구했는데, 그 결과는 당연히 승산 없음.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군부와 군부 출신 정계의 고위직들이 그걸 싸그리 무시했고, 반발하고 비판한 자들을 징병해 내보내거나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미국이 그 정도로 강력한 나라라고 생각한(일본이 이길 수 없다 정도가 아니라 최강급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추축국 전체를 뒤져도 없다시피 하니 패스.[74] 정확히는 미국 한정. 하지만 미국은 혼자서 1대 10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벌려버렸다. 미군과 일본군 간 해군 격차가 가장 거대했던 시점(1945년 7월경)의 비율은 1대 40에 가까웠다.[75] 이 발언은 일본에서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라는 혼잣말(한국에는 이쪽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진주만 공습 직후 발언으로 알려진 "잠자던 거인을 깨우고, 결기를 불어넣고 말았다."라고 와전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진주만 관련 영화에는 십중팔구 야마모토의 이 발언이 인용된다. 2001년 진주만이 개봉했을 때는 한국 반미 진영이 이를 미국 우월주의의 소산이니 뭐니 매도하는 무식한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76] 오해할까 덧붙이지만 만화는 밀리터리랑 전혀 상관이 없다. 그냥 지나가는 컷으로 언급되는 수준.[77] 드래곤 사쿠라의 작가 미타 노리후사의 신작.[78] 대공 방어와 어뢰 방어에 주력한 고속전함. 당연히 야마토 보다 작고 싸다.[79] 어느날 고양이가 승선한 것을 보고 이름을 정해줄 때 야마모토 이소로쿠라고 정해줬다.[80] 당연히 부함장과 승무원들은 의아했다만 차차 익숙해진다.[81] 대함장이라는 칭호는 역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고 제일 높은 계급은 제독이다.[82] 구축함 함장이 대함장을 임명하고 나중에 대제독으로 진급까지 시키는 초유의 사태.[83] 가령, 해군 군령부는 전선을 동쪽으로 밀기 위해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라고 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 함대 격멸로 잡았다. 그리고 군령부 총장이 자기네 라인인 나구모를 불러 미드웨이 섬 점령을 우선하라고 한 장면이 나온다.[84] 대표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함대 초계기 중 연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파일럿이 경례를 하고 갑자기 미국 항모의 위치로 워프해서 역사에도 없던 카미카제 하는 모습[85] 대표적으로 제로센이 후크도 안 걸고 수직착륙 하듯이 갑판에 착함한다던가, 반대로 활주 없이 수직이륙하듯이 발함하는 모습[86] 예를 들면 전쟁 터지면 일거리가 많아진다며 좋아하는 공장주라든가.[87] 호리 제독은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을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고 동기생중 최선두로 진급하는 등 당시 해군내에서 승승장구하던 인재였으나,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 체결을 주도하면서 강경파들의 미움을 사서 1933년 예비역 편입이란 형식으로 군에서 추방된다. 사관학교 졸업성적이 평생 따라가는 당시 일본군 시스템에서 수석졸업생을 한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당시 군부가 미쳐있었다는 것이다.[88] 카도쿠라 소지 중장. 영화에서만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다.[89] 원문은 "油がないんだ。" . 나름 격식 있는 자리에서 '重油(중유)'도 '燃料(연료)'도 아닌 '기름'이라는 어감을 가진 '아부라'라는 투박한 말을 쓸 정도로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