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4 18:58:31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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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AAED><colcolor=#fff> 제43대 인도 국민 회의 의장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મોહનદાસ કરમચંદ ગાંધી

Mohandas Karamchand Gandhi
파일: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jpg
출생 1869년 10월 2일
영국령 인도 제국 포르반다르국 포르반다르
(現 인도 구자라트주 포르반다르)
사망 1948년 1월 30일 (향년 78세)
인도 자치령 뉴델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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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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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948)
재임 기간 인도 국민 회의 의장
1924년 12월 ~ 1925년 4월
신체 162cm, 46.7kg, O형[1]
학력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법학 / 학사)
런던 시티 대학교 로스쿨
소속 정당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1920년~1934년)
배우자 카스투르바 간디 (1883년 결혼~1944년 사별)
자녀 4남
종교 힌두교
별명 마하트마(Mahātmā)[2]
서명 파일: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서명.svg
언어별 명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19AAED> 한국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영어 Mohandas Karamchand Gandhi
구자라트어 મોહનદાસ કરમચંદ ગાંધી
힌디어 मोहनदास करमचंद गांधी
}}}}}} ||

1. 개요2. 생애3. 사상4. 어록5.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5.3. 총평
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1. 개요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3]
인도변호사, 정치인, 독립운동가.

대영제국의 식민 통치에 비폭력주의로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며,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인도에서 국부 격 인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국제적으로도, 21세기에 들어 그의 도덕적인 치부들이 드러나며 평가가 다소 하락하긴 하였으나, 여전히 가장 위대한 인권 운동가이자 식민지 해방 운동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칭호인 '마하트마'(Mahatma)는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며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붙여 줬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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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사상

그가 주창한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무상해)
였다. 그는 정치적인 폭력을 거부했으며 인류애를 통한 폭력 부정을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몇 개의 단어로 대변한다면
아힘사(비폭력)
도올 김용옥이 EBS <중용> 강의에서 해설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진리(사티아)를 거머쥔(그라하) 사람들이고, 따라서 우리가 강자이며 저들(영국)이 약자인데, 어떻게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느냐,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간디의 비폭력 철학이다. 사티아(진리) + 그라하(꽉 움켜쥠, 거머쥠)
브라흐마차리아(감각의 완전한 통제, 금욕)
아파리그라하(무소유)

등을 들 수 있다.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실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그 방식은 비폭력이었으며,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브라흐마차리아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실한 힌두교도였으나 다른 종교와 그 교리에도 관심이 많아 《성경》을 비롯하여 다른 경전도 많이 읽었다. 하나 된 인도를 꿈꾸었던 그가 여러 종교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여러 종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이나교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사상과 관련되어 그가 사용한 용어들도 자이나교에서 비롯되었다. 헐벗고 다니는 그의 모습도 자이나교 수련자들과 비슷한 면모이며 그의 금욕주의 또한 극단적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자이나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간디를 알기 위해서는 자이나교에 대해서 아는 것도 중요하다.
7가지 사회악(Seven Social Sins)

①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②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③ 인격 없는 교육(Knowledge without character)
④ 도덕 없는 상업(Commerce without morality)
⑤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⑥ 헌신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sacrifice)
⑦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위의 내용은 간디가 출판한 주간 신문인 《영 인디아》(Young India)에 1925년에 실렸으며 마하트마 간디 추모 공원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간디 본인이 위의 7가지를 엄선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 6개월 전에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프레드릭 도널드슨(Fredrick L. Donaldson)의 설교 중에 나왔던 말로, 해당 내용이 영국에서 출판되자 지인을 통해 이를 접한 간디가 감명을 받아서 따로 허락을 받고 인도에서 다시 기고한 것이다.

4. 어록

"나는 크리스천이자 힌두교도이자 무슬림이자 유대인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한다."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면 그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머물러 있겠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3등칸으로 여행해야 한다."
"남들이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검소하게 살라."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패배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우리는 힘사(폭력) 속에 갇힌 무력한 인간들이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선을 행한 듯 보일 때, 그 선은 일시적일 뿐이고, 그것이 행하는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의견) 차이는 대개 진보를 위한 건강한 신호다."
"자신의 지혜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가장 강한 것도 약해질 수 있고, 가장 지혜로운 것도 틀릴 수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 건강하다."
"절망에 빠졌을 때, 나는 기억한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진리와 사랑이 승리했다는 것을. 독재자도 살인자도 있었고, 그들에게 당장 대항할 수 없어 보여도 결국엔 무너진다는 것을. 이것을 생각하라. 언제나."[4]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더라도, 온 인도가 다 일어나서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나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나도 지금 우리 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신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신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고통받는 세계에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이 자신의 평생 동안에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절대 이 영원한 법칙의 오류는 아니다."
"항상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늘 생각을 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자제를 실행하는 한에서만 사람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소유를 내버릴 수 있을까. 내 몸부터 훌륭한 소유가 아닌가."
"내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내에 대한 나의 성실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노예의 쇠사슬을 끌고 정규 교육을 받느니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무지한 채로 돌을 깨는 편이 낫다."
"나는 민중을 알게 되었고 민중은 나를 알게 되었다."
"관용과 사랑과 참이 있을 때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유익했다."
"신에게 건강한 신체를 내놓는 일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처럼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동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 동포를 천대하면서 자기가 높아진 듯이 여기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늘 가난한 사람들 속에 뛰어들었고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에게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를 더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24시간 매분마다 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5]
동물 보호주의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나, 실제로 간디가 이 발언을 했는지의 여부나 출처는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세상에는 일곱 가지 죄가 있다. 노력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기도, 원칙 없는 정치."
※ 출처: 간디 자서전(한길사)
"내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십시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십시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나의 인생이 나의 전언이다."
"나는 당신들이 믿는 예수를 존경하오. 그러나 나는 예수쟁이들은 싫소.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도 닮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오."
"Victory attained by violence is tantamount to defeat, for it is momentary."
"폭력에 의한 승리는 패배를 잠시 미루는 미봉책과 같다."

"It is better to be violent if there is violence in our hearts, than to put on the cloak of non-violence to cover impotence."
"잠재된 폭력성을 표출하는 것이 비폭력의 가면을 쓰는 것보다 낫다.
이 어록은 영화 A특공대에서 마지막 작전을 준비하는 B.A.와 한니발의 대화에서도 나온다.[6]
"Your beliefs become your thoughts. Your thoughts become your words. Your words become your actions. Your actions become your habits. Your habits become your values. Your values become your destiny."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욕 타임스》는 지난 1,000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선정했다. 간디는 정치 운동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틴 루터 킹, 제임스 로슨, 넬슨 만델라 등의 정치 운동가들이 간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성웅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이순신이지만 중국 등 중화권에서 '성웅'이라는 단어는 중국사의 어떤 역사 인물이 아니라 거의 이 사람의 전용 칭호에 가깝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 바로 '성웅'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한자로 성웅 간디(聖雄甘地)라고 쓴다. 구글에서 '성웅'(聖雄)을 한자로 검색하면 간디만 뜨고 자동 완성도 된다.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으며 현대 인도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간디가 아니었으면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지금의 통일된 14억 인구의 남아시아 단일 정권이자 그 규모만으로도 남아시아의 지역 패권국이자 전 세계에서 제3세계의 리더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대국 인도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이며 간디의 사망일인 1월 30일은 '순교자의 날'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도의 모든 지폐(현재는 10, 20, 50, 100, 200, 500루피)에는 전부 간디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1969년에 간디 탄생 100주년 기념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기념주화도 여러 차례 발행되었는데 간디의 탄생 100주년인 1969년에는 이를 기념해 50파이스, 1루피, 10루피 은화의 3종 주화에 간디의 얼굴을 넣어 발행했고, 2005년 간디가 주도했던 소금 행진 75주년 기념주화에도 간디의 모습이 들어갔으며, 2019년에는 간디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서 150루피 은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매년 인도에서는 간디의 탄생일에 대형 물레를 마치 축제 가마나 상여처럼 짊어지고 기념 행진을 한다. 인도 독립 운동에서 간디와 물레는 떼놓을 수 없는 상징인데 간디는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하거나 물레를 돌려 실을 짓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독립의 메시지를 민중에게 꾸준히 던졌다. 영국의 경제적 침략의 상징이 바로 기계로 짠 옥양목이었고, 물레로 실을 자아내는 것은 인도의 전통적 면직 산업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모국인 인도뿐만 아니라 구미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1924년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로맹 롤랑이 《마하트마 간디》라는 저서를 쓰면서 간디에 대해 처음 논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라세르다 지모라(Maria Lacerda de Moura)는 평화주의에 관한 저서에서 간디를 소개했다.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간디와 편지를 교환했으며 그를 "인도인의 도덕성을 일깨운 롤 모델"이라고 칭찬했다. 이 외에도 한나 아렌트,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정치에서의 도덕성을 논할 때 간디의 철학을 참고했다.

영국의 음악가 존 레논은 비폭력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 간디를 언급했다.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도 마하트마 간디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제45대 부통령인 앨 고어는 2007년 기후 변화에 대한 연설에서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을 인용했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인도계 거주 구역은 간디의 이름을 따서 '마하트마 간디 구역'으로 명명되었다.

5.2. 부정적 평가

인도의 정신적 지주라는 간디도 생전에 실책과 과오를 숱하게 저질렀다. 쇼맨십이 상당히 강했으며 자기애도 강했다고도 전해진다. 간디의 이미지 자체를 뒤흔드는 도덕적 추문도 있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로는 여성 차별,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간디의 부정적 면모를 현대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태도 역시 지양해야 한다. 인도의 국부라는 타이틀에 묻혀 생각보다 간과하기 쉬운 사실로, 간디는 현 인도 공화국 시대엔 단 하루도 살지 않았고 이미 1948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밑의 카스트 제도 옹호나 성차별, 인종 차별 논란 역시 현대 기준으로나 잘못된 것이지 당시 인도인들의 통념상으론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20세기 초의 대부분의 국가 지도자들 역시 악랄한 제국주의자, 인종 차별 주의자들로, 전근대 군주들 또한 신분 차별과 노예제를 옹호한 폭군들로 평가가 지나치게 단순해질 것이다. 물론 사회 운동가로서 기존의 통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받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비난을 받을 이유 역시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목적으로 과장하거나 날조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더욱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하술하듯이, 간디는 이런 부정적인 부분을 평생토록 타파하고자 노력한 사람이면서도, 당대의 인도인들이 이를 극도로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 탓에, 이를 인도의 독립 문제와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고 죽을 때까지 애쓴 사람이었다.

간디는 다른 아리아계 힌두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1893년 간디는 남아프리카 의회에서 "식민지에서의 일반적인 믿음은 인도인이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야만족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남아공에서 열차를 탈 때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서 차별을 받은 일은 불쾌하게 여겼지만 정작 흑인을 남아공 사회 주류에서 배척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간디의 군 복무 기록과 각종 증언을 토대로 간디는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의견이 강하다. 그는 '카피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는 번역하면 '검둥이'라는 멸칭과 같다. 1896년에는 "검둥이들은 문명화가 되지않아 골칫거리이고, 더러우며, 거의 동물과도 같이 생활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특히 줄루족을 학살한 보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주간지인 《사고 리더 메일과 블로그》(thought leader mail & blog)의 2008년판에도 간디의 인종 차별 및 학대에 대한 기사가 작성될 정도로 흑인 사회에서는 간디를 흑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차별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과 일본의 간디 관련 위인전을 번역해 읽었던 대한민국에서는 간디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와는 다르게 직접 연관이 있는 서방에서는 이미 간디의 실체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기록과 그에 대해 분석한 저서가 넘쳐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서로는 G. B. 싱(G. B. Singh)이 쓴 《간디: 신의 가면 뒤에는》(Behind the mask of divinity)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간디 추종자들의 살해 협박을 피하기 위해 필명을 사용했으나 책에는 실제 기록과 자료를 인용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많이 왜곡된 것이다. 간디는 보어 전쟁에서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인도인 의무 봉사대를 조직하고 이곳에서 일했다. 당시부터 이미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던 그는 애초에 전투원이 아니었고 당연히 직접적인 전투 행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총탄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맨몸으로 환자를 실어 나르는 용기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적십자국경없는의사회가 전쟁터에서 의료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이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니 평화주의자가 아니다'라거나 '옳지 않은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다.'라고 주장한다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내였던 카스투르바이 "카스투르바" 모한다스 간디(Kasturbai "Kasturba" Mohandas Gandhi, 1869~1944)가 폐에 병이 났을 때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거절했으나 아내가 죽고 난 후 자신의 학질에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장염에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는 말이 있고, 이에 대해 일구이언적인 태도라며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의인지 아닌지 모를 심각한 왜곡이며 실제로는 영국인 의사라고 아내의 치료를 거절한 것이 결코 아니다. 간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디는 영국인을 차별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고 혼을 나눈 영국인 벗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의 제자 겸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미라벤[7]이라는 영국인도 있었다. 전술한 대로 간디는 젊었을 때 영국 유학을 하면서 세련되고 품위 있는 '영국 신사'를 동경하여 바이올린 연주나 무도회 같은 영국 상류층의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선 1944년 초 그의 부인, 카스투르바가 위독한 상태였을 때, 간디는 영국에 의해 감옥에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치료법의 선택권은 주로 카스투르바와 그녀를 돌보던 막내아들 데브다스에게 있었다. 이미 20여년 전에 폐렴에 걸려 서양식 수술을 받았던 카스투르바는, 그럼에도 폐렴이 재발하자 이번엔 서양 의학 대신 인도 전통 의학에 의한 치료를 선택했으나 결국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에 데브다스가 다시 서양 의학에 의한 치료를 결정했는데, 이전 수술 당시와는 달리 이젠 페니실린 요법이 개발된 상황이었으나, 치료 시점이 너무 늦어 장기 부전에 빠져버렸다. 결국 카스투르바는 1944년 2월 말에 사망했고, 간디는 독일과의 전쟁이 끝날 무렵인 5월 초에 풀려났다. 사실 간디 역시 감옥 안에서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위독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5월에 풀려난 것은 간디를 감옥 안에서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꺼린 영국의 결정 때문이었다.

아들인 하릴랄 간디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려고 했으나, 아버지 간디가 그것을 강하게 반대했고, 하릴랄의 결혼에 대해서도 평생 금욕을 강조한 내가 어떻게 네게 성을 즐기라고 할 수 있겠냐면서 반대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지나치게 완고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릴랄이 1911년에 가족과 절연했다는 말이 있다.

1990년대 이후 간디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짐에 따라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맹세 때문에 평생 금딸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대신 몽정으로 고생했다. 간디 스스로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부인과 부부 관계를 할 때야 괜찮았지만 중년 이후 부부 관계도 끊었기 때문에 무려 66세에도 몽정을 했다. 중년 이후에는 거의 끊겼다가 딱 한 번 했다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디가 택한 방법은 여러 아가씨와 함께 잠을 자는 의식이었다. 밤에 오한에 시달리던 간디는 친한 집안 처녀나 색시, 심지어 조카며느리와 증손녀뻘 되는 친척에게도 나체로 함께 잠자리에 들어 체온으로 몸을 덥혀줄 것을 부탁했다. 간디가 소아 성애자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이것 때문으로 보인다. 서양의 회춘법인 슈나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에 이 같은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인도의 전통 요법이라고도 한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로 잠자리에 들었다. 조카가 자기 아내 대신 자기가 잠자리를 덥혀 드리겠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금욕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서 벌컥 화를 냈다고도. 일간에서는 간디의 금욕 기준이 삽입 여부라고 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특이한 순결 시험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소년 소녀를 함께 목욕시키면서 목욕 중 성적인 대화나 접촉을 하면 벌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것도 현대에서는 두고두고 까이고 있는 중. 간디가 아내와 이혼한 이유가 남성 보디빌더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간디의 생활비는 부유한 상인 귀족 세 사람이 댔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간디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무척 많은 비용이 든다". 언뜻 보기에 간디의 생활에는 별 비용이 들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함께 생활하는 추종자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고, 간디는 고기만 먹지 않았을 뿐이지 음식에 매우 까다로웠으며, 대식가여서 식사를 자주 했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았다. 간디가 물 대신 마셨던 일상적인 음료는 레몬주스에 탄산 소다를 넣어 신맛을 없애고 꿀을 탄 것이었다. 그러니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간디 자신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너무 먼 거리라서 어쩔 수 없이 기차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무조건 도보로 이동을 했으며[8], 걸핏하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데다[9] 수시로 단식 투쟁을 일삼아서 사망 시에도 몸무게가 50 kg이 채 안 되었기도 했다. 그런 몸으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을 한다면 대식가적인 식성을 가지거나, 꽤 비싼 과일 에이드 같은 것으로 식사하느라고 생활비가 크게 들어간 건 당연지사다.[10] 게다가 인도가 독립을 했을 당시에 간디의 나이가 78세로, 한창 독립운동에 열을 올렸을 당시에는 이미 노인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험난한 길을 걸으려면, 식생활까지 검소했다간 뜻을 이루기도 전에 눈을 감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인도의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이는 매한가지여서, 자와할랄 네루는 원래 부유한 브라만 집안 출신인 걸 감안해도, 간디는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대놓고 상류층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간디의 또 다른 동지로, 자국에서 인도에서의 간디와 동급의 국부로 숭앙받는 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항상 말쑥한 양복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멋으로 모노클을 착용하는 등으로 패션에 신경을 많이 써서 아예 이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 허나, 네루나 진나는 영국 식민 당국과 자주 접촉해서 일선에서 독립을 위한 협상에 나선 사람들이니, 사치스런 사생활을 즐기는게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했다.[11]

간디는 힌두교를 인도 사회의 중추로 생각하고 인도인들이 힌두교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가 영국 정부와 독립 문제를 놓고 협상할 때부터 종교 문제는 인도의 가장 큰 현안이었다. 간디는 인도가 갈라지는 것은 반대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와 힌두교 간의 평등이나 소수 종교 보호 제도에는 소극적이거나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그 덕에 무함마드 알리 진나 같은 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간디가 충분히 인도 아대륙의 단결에 이바지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악화시켰으며, 그의 암살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분열에 간디의 책임만 묻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진나를 위시해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 또한 이기적인 망동을 하여 인도의 분열을 가속했다[12].

간디는 오랜 기간 동안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이를 위해 여러 차례 시위와 집회에 참가하고 다양한 운동을 조직했으며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단식을 하다 위험한 상태에 이른 적도 있었다. 또한 간디는 불가촉천민과의 교류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반발하는 가족들을 비판하고 질책해 가족들이 불가촉천민들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카스트 제도의 차별을 반대했다. 그는 불가촉천민 제도를 인도 사회의 저주나 오점으로 취급할 정도였고 불가촉천민 인권 운동을 전개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힌두교 우파들에게 테러를 당해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거나 총격을 당하는 등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노력한 간디의 헌신을 부정할 수는 없다.[13] 다만, 간디는 온정주의적인 입장에서 불가촉천민들을 대했으며 그들의 가장 큰 족쇄인 카스트 제도를 없애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힌두교 보수 세력의 눈치를 봐서 불가촉천민 해방 운동의 수위를 적당히 조절하는 행태를 보였다. 물론, 목숨을 여러 번이나 위협받았으니 활동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는 바이지만, 원래부터 간디는 사상적으로 카스트 제도를 긍정하고 옹호하면서도 이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는 대단히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간디는 직업 세습 제도가 유지되는 전통 사회를 이상향으로 인식해 '카스트' 제도의 차별은 완화해 나가고 '바르나'의 직업 세습은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간디의 인식은 동일한 뜻을 지닌 카스트와 바르나의 의미를 뒤섞어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려 한다는 암베드카르의 비판을 받았다. 암베드카르와의 갈등 이후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아이를 양자로 거두며 불가촉천민들에게 멸칭인 '찬달라'(부정 타는 자들) 대신 하리잔(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부르자는 운동을 펼쳤으나, 카스트 제도 자체에 반감을 가졌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이들을 달리트(억압받는 자)로 부르기로 하고, 카스트 제도 폐지 운동을 전개했다. 간디는 암베드카르의 운동과 불가촉천민들의 불교 개종을 힌두교 사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활동으로 인식했다.[14]

간디의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행적과는 별개로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에 대해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끝내 힌두교 근본주의자인 나투람 고드세에게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당대 기득권층의 반대를 뚫고 신분제를 없애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인도의 수상들이 카스트 철폐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카스트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고 그나마 현대에 이르러서 최소한 대도시에서나마 다른 카스트끼리 명목상으로는 얼추 어울려 다니는 수준에 이른 것이지[15] 간디 생전에는 도시에서도 노골적인 하위 카스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이어졌던 걸 보면 이미 종교 문제로 인해 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이 문제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남은 인도마저 공중분해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일선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간디가 이를 모를 리 없었으므로 당장의 카스트 철폐는 없을 것처럼 주장하면서 기득권층이 자신과 그 동지인 자와할랄 네루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과 독립운동을 훼방 놓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다.[16]

간디는 노동자들의 노동 쟁의권 자체를 부정하는 제도를 시도했고, 이 밖에도 임노동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킬 수 있는 제도에도 찬성했다. 자식이 하위 카스트와 결혼하려 했을 때 극구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은 하위 카스트가 아닌 무슬림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 반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와 화합을 바랐던 이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인도의 좌파 운동가 남부디리파드가 저술한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을 참고. 한편으로 간디는 천민들을 사랑과 온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보수적 성향의 상급 카스트들에게도 까이는데 애초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민들이 사랑과 온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인도의 근대화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21세기 인도에서조차 상급 카스트계 후손들이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17] 카스트 제도의 영향이 더 많이 남아있었던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는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되 천민들을 사랑과 온정의 대상으로 여긴 간디의 성향도 나름대로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의 이슬람 왕조들 및 인도 제국조차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를 완전히 없애는 데 실패했을 정도로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단지 암베드카르가 훨씬 적극적으로 카스트 제도 철폐를 주장했을 뿐 간디도 천민들에게 최소한의 사람 취급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 평가의 여지는 남아 있다. 간디가 무슬림들을 포용하려다가 힌두교 광신자의 손에 살해당했고, 그의 신분도 고위급 평민 계층인 바이샤였다. 당시 인도 기준으로는 가장 깨어있는 선진 영국식 교육을 받은 상류층 문명인이었음에도 인도의 독립 과정에서 영국 식민지 때보다 퇴보한 수꼴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통일 인도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중국의 사례를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인도가 중국처럼 통합하기에는 인도 내부의 분화된 언어 집단, 종교 집단, 인종 집단, 문화 집단이 너무 많이 분절되어 있고 그들의 이해가 너무 제각각이라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도에서 가장 큰 통합의 구심점인 힌두교를 내세울 수밖에 없고 그것이 힌두교의 근간인 카스트 제도의 긍정 등 수많은 구시대적 관습과 사회적 퇴보를 가져옴에도 그렇게 해야 이들을 인도인으로 간신히 묶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단 1명이라도 더 인도인을 늘리기 위해 이슬람도 포용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립 후 간디가 암살당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5.3. 총평

간디가 흠이 많고 결도 많은 사람인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그동안 인도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던 시크교도, 불교도, 소수자, 특히 여성주의 진영에서 간디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는 간디라는 사람이 완전무결한 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며, 더불어 그동안 인도에서 과할 정도로 신격화된 간디에 대한 반항적인 시각 역시 섞여있는 결과물에 가깝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1940년대에 활동하던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18][19] 인도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 중 하나로 도덕적인 기준과 사회적인 기준이 다른 세계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미진하였다. 심지어 현대에도 인도 북부의 일부 지역은 북한보다도 궁핍하여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의 수준이 서구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야만에 속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도덕 기준을 바탕으로 80~100년 전의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온당치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인도의 상황은 간디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갈등을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인도는 18세기까지 전 세계 GDP의 26%를 차지할 정도로 부강한 지역이었지만, 영국의 수탈로 인해 20세기 중반에는 그 비중이 2%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 거듭된 영국의 통치 속에서, 종교, 계급 등에 의한 갈등도 내전 직전의 수준에 이를 때까지 심해졌다. 역사적으로도 인도는 한국과 달리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가진 역사가 전무하며, 영국의 분열적인 통치 역시 극심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간디는 계급(카스트 제도)은 물론 지역(남인도와 북인도 그리고 벵갈), 종교(힌두교, 회교, 시크교, 불교 등), 인종을 뛰어넘은 전 인도의 통합을 주도해야 했다. 이러한 정체성들은 상호 적대적이고 때로는 학살까지 불러올 정도로 서로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에, 간디의 입장에서 다소 편협해 보이는 입장들은 그가 의도했다기보다도 시대의 산물, 당대 인도의 한계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간디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것에 가까웠다.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간디는 스스로의 잘못을 수정하고자 하는 여러 저작들을 남겼으며, 무엇보다도 인도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된 민족주의 운동을 간디만큼 효과적으로, 또 꾸준하게 전개한 사람 역시 전무하다.

즉, 간디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그가 과 같은 수준의 인물은 아니라는 선에서 신격화를 피하며, 그에게 여러 도덕적, 시대적 한계가 존재했음을 주지하되, 동시에 간디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참한 인도의 현실에 속해있었음을 주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6. 기타

  •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간디가 인도 총독 궁전 계단을 누더기를 입고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 실제로 처칠은 31세에 식민성 차관이 된 이래로 인도의 독립운동에 대해 늘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쟁하지 마세요"라고 충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번역은 여기서(삭제됨) 읽어 보면 알겠지만 뭔가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쓴 듯하기도 하다. 물론 지금 저 인간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정도의 정황으로, 해석하자면 당대 간디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2011년에 상영된 인도 영화 <Gandhi to Hitler>는 이를 소재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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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지 《젊은 인도》에서 간디는 인도가 피해야 할 7대 사회악으로 원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노동 없는 부, 도덕성 없는 상거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 희생 없는 신앙을 꼽았다. 현재 사회에도 통용되는 동서고금의 진리다.
  • 2009년 간디의 유품인 안경, 가죽 신발, 그릇 등이 미국 경매에 나오자 인도 전역이 한바탕 뒤집힌 적이 있었다. 이에 인도 정부 등이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결국 경매는 진행되었고, 다행히 인도의 재벌로 국민 맥주인 킹피셔 맥주의 모기업인 UB 그룹의 비자이 말리야 회장이 180만 달러에 구입해 인도 정부에 기증했다. 그 외에도 2020년에는 영국 경매에서 간디가 1910~1930년대에 사용했던 안경이 출품되기도 했는데 이 안경은 26만 파운드(한화 4억 1천만 원가량)에 낙찰되었다. 간디는 자신이 사용하던 물품들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나눠 주곤 했기 때문에 이렇게 간디가 사용했던 이런저런 물품들이 가끔씩 경매에 나온다고 한다.#
  • 인도의 초대 수상인 네루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비록 네루와 의견 차이로 싸운 적도 있지만 네루가 인도의 총리가 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1947년에 인도가 인도 자치령으로 독립했을 때도 비록 의견 차이로 충돌하기는 했지만 당시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네루는 간디에 대해 '선생님은 구닥다리'라고 절하하면서도 간디의 의견도 존중했다. 네루가 딸인 인디라 간디를 데리고 간디의 집에 방문하는 등 사이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인도 독립 후 간디가 암살당하자 네루는 국토의 반쪽을 잃었다며 힘들어했고, 장례식 때는 상주 역할을 했다.
  • 2007년 간디의 아들 4명에 대한 기사가 있다. 직계 아들 4명 모두 인도 중앙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7. 대중매체에서

7.1. 소설

7.2. 게임

  • <시리어스 샘 2>에서 중국과 비슷한 에피소드에 적들과 싸우기 전 이벤트 동영상으로 민간인이 얽히지 않게 하자고 샘이 말하자 적들이 동의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피하는데, 바로 간디와 비슷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느리게 피하는 통에 샘이나 적들 모두가 지루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100 m도 채 안 되는 길을 20분이 걸려 간다고 자막까지 나오며, 나중에 샘은 앉아서 졸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걸어가고 견디다 못한 적들이 벌떡 일어나서 할아버지를 옮겨준다.
  • <PLAYERUNKNOWN'S BATTLEGROUNDS>에서는 게임 플레이 방식의 일종으로 최대한 싸움을 회피하며 마지막까지 버티는 플레이를 '간디메타'로 부른다. 이와 반대로 눈에 보이는건 닥치는 대로 쏴 죽이는 호전적인 플레이는 '여포메타'라고 부른다.
  • Hearts of Iron IV에서는 기본판에서는 단순히 관계 개선의 효과를 올려주는 특성을 지닌 정치 고문으로 나온다.[21] 이외에도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이라 국민정신으로 있다.[22]
    제국의 무덤 DLC에서는 독립 시 사용 가능한 지도자로 나오는데, 히든 루트로 독립하기 전 '총독의 경호원' 중점을 미리 찍어서 암살을 피할 경우 흑화해 핵에 미쳐버린 간디로 바꿔버릴 수 있다. 얼굴도 온화한 표정에서 빡친 표정으로 바뀌고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를 패러디한 중점을 시작으로 총알에 우라늄을 도금하고 원폭으로 탄막 사격을 하는가 하면 핵폭탄으로 공장을 영구적으로 지워버고 자체 특성으로 핵폭탄 생산을 가속하는 등의 즐거운 뇌절 루트를 즐길 수 있다.
  •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영국의 1차 대전 패배로 세 조각으로 쪼개진 인도 중 사회주의 국가인 바라트 코뮌의 정치인으로 있다. 농본파를 대표해 집권할 수 있는데 그러면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전체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반대로 보스가 집권하면 간디의 농본파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7.3. 만화

  • 미국-캐나다의 성인 애니메이션 <클론 하이>에서는 간디의 복제 인간이 등장한다. 위인들의 DNA로 만든 복제 인간들을 고등학생으로 만든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배경 설정이다. 여기서 간디는 매우 경박스러운 성품의 눈새인 데다가 여자도 밝히고 실수로 감옥까지 들어가는 등 사고뭉치 그 자체로 나온다. 게다가 자기 입으로는 인도인이라고 하면서 정작 하는 짓이나 분위기는 영락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스테레오타입을 따라간다. 게다가 에 환장하고 심지어 잘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작중에서 그의 친구인 조지 워싱턴 카버의 복제 인간은 간디의 이런 짓거리를 유색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한다며 무지 싫어했다. 결국 인도에서 간디의 손자를 비롯한 150명의 정치인들이 해당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방영한 MTV의 인도 지부에 몰려가 단식 투쟁을 하고, 건물까지 봉쇄할 정도로 항의했다. 그래서 결국 <클론 하이>는 시즌 1을 끝으로 종영당했다. 출처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이렇게 거칠게 항의했는지는 간디가 나오는 부분들을 봐보자. 그래서 그런지 20년 만에 시즌 2의 티저 영상이 나왔지만 전 시즌의 레귤러 멤버들이 다 나오는데 혼자만 타 멤버들이 해동될 때 여전히 냉동된 상태로 등장하며 짤렸다.#
  • <원피스>의 오로성 중 하나인 에단바론 V. 나스쥬로 성이 간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험악한 인상이며 연로하신 중에도 유일하게 [23]을 들고 계시는 모습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결코 비폭력주의자는 아닐 것이라는 예상하는 독자들이 많았으며 최종장에서 이 예상에 걸맞은 강자로 나왔다. 그래서 지금도 원피스 팬들 사이에선 진짜 이름이 공개되었음에도 간디라고 불린다.

7.4. 영화

  • 1982년 개봉한 영화 <간디>에서는 인도계 영국인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했다. 정말로 간디와 닮은 모습으로 열연했기에 간디의 모습을 직접 봤던 인도의 노인들은 촬영장에서 놀랐다고 하며 간디의 환생으로 착각받은 벤 킹슬리는 촬영 때 고생했다. 의도된 캐스팅으로 킹슬리부터가 인도계로 킹슬리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간디와 같은 구자라트 출신이었다.
  • 1989년 개봉한 영화 <UHF 전쟁>에서는 주연인 위어드 알 얀코빅이 패러디한 인물들 중 1명으로 나온다. 상술한 영화의 후속작이랍시고 원작 영화의 드라마 장르가 아닌, 액션 장르로 나온 <간디 2>의 창작 예고편에서, 평화주의적인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악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양쪽에 여자들을 끼고 다니는 안티 히어로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채식을 실천했던 간디가 웨이터에게 스테이크를 미디엄 레어로 주문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다.
  • 1998년 개봉한 영화 파키스탄의 국부 모하마드 진나를 주인공으로 한 <진나>에도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등장했다. 여기서 간디역을 맡은 배우는 샘 다스터(Sam Dastor)로 피터 샐러스의 전기영화인 <피터 샐러스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Peter Sellers)>에서 할 애슈비역을 맡았었다.
  • 2003년 개봉한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하느님(모건 프리먼)이 브루스(짐 캐리)의 손가락을 7개로 만들어 브루스를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다. 브루스는 그냥 기겁하고 말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 간디는 너무 놀라서 2주간 단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때 <간디 올마이티>였던 셈.

7.5.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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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자와할랄 네루 · 모하마드 진나 ·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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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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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지도자들 & 혁명가들 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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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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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3선의 총리
1932년

1932년 미 대선
1933년

뉴딜 정책
1934년

뉴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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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침략
1936년

세 황제의 해
1937년


중일전쟁
1938년

팽창 야욕
1939년

공산주의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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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커다란(mahā) 혼(ātman)'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산스크리트어 별명이다. 영어로는 '그레이트 스피릿(Great Spirit)' 정도로 번역된다. 보통 '위대한 영혼'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본인은 이와 같은 극존칭을 매우 부담스러워했고 자와할랄 네루나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간디지'(ghandiji)나 구자라트어로 (양)아버지라는 의미의 '바푸'로 불렀다.[3]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프랑스 마르세유의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4] 이 말은 1983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간디의 전기 영화 마지막 장면에도 내레이션으로 나온다.[5] 그런데 근대 최초 동물 보호법을 시행한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을 수 있겠으나 사실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의외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동물 보호법이 구시대적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다.[6] 그러면서 한니발이 "간디는 신념을 위한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7] 본명은 매들린 슬레이드로, 모한다스 간디의 고결한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머리를 깎고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간디를 따라서 인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래서 인도가 독립한 후에, 영국인임에도 인도인들에게 인도의 국가적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다.[8] 인도 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콜카타에 머무르고 있던 인도 제국 총독인 윌링던을 만나겠다면서, 반대편인 서쪽 끝에 있는 펀자브 지역에서 직접 걸어서 이동한 일도 있었다. 비록 윌링던이 만나주지도 않고 안면몰수를 하여 회동은 실패하였으나, 중간에 험준한 히말라야산맥을 거쳐가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그곳까지 간 것이다.[9] 간디의 생애에서 감옥 생활을 한 기간이 도합 2,388일이나 된다. 인생의 몇 년 남짓한 기간을 감방에서 지낸 셈이며, 이 정도의 형기를 한꺼번에 채운 것도 아니고 수도 없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를 반복하면서 치렀다. 당연히 이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이런 수형 생활을 편히 치른 건 당연히 아니라서, 어떨 때는 비루한 독방에서 홀로 감금이 되거나, 또 어떤 때는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같은 방에 욱여넣어지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선진국에서조차 위생 관념이 엉망이고, 엄벌주의가 대세여서 교도소 내부의 환경이 극도로 열악했을 때였으니, 잠깐의 징역살이로도 영영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10] 무엇보다도 인도의 대부분이 열대 기후라서 열대 과일 구하기가 쉬운 것도 있고, 오랫동안 단식을 해와서 소화 능력이 크게 떨어진 사람인 만큼, 주스를 자주 마셨던 것은 간디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식습관이다. 실제로 기아나 그에 준하는 상황 때문에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소화 능력이 회복될 때까지 절대로 일반 음식을 안 먹이고, 미음이나 과일 주스를 먹이는 것이 상책이다. 이와 연결시켜보자면, 음식에 대해 까다로웠다는 것도 어쩌면 진짜로 입맛이 까다롭다기 보다는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는 상태여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1] 같은 이유로 역시 조선 총독부미국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여 외교전을 벌이는 일이 잦았던 안창호여운형 등의 실력 양성론파 독립운동가들도 평상시에는 고급스런 양복이나 한복을 입고 멋으로 콧수염까지 길러서, 당대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2] 물론 무함마드 알리 진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건 아니고,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무슬림들이 힌두교 신자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차별을 당하는 것에 실망해서 인도 합류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만이라도 종교 간 화합을 실현하고자, 소수의 힌두교 신자와 불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엄금하고 죽을 때까지 이들을 파키스탄인으로 융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랬던 사람이 간디와 대놓고 대립각을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당대의 인도 사회가 간디와 진나 모두가 보기에도 너무 노답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만 이런 상황에도 희망이 있다고 본 쪽이 간디와 네루라면,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본 쪽이 진나였다고 할 수 있다.[13] 간디 본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사바르마티 아시람이라는 마을에 불가촉천민이 이주해 오는 문제로 싸움이 나자 스스로 불가촉천민들의 마을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하면서 불만을 잠재워 버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 집에 세들어 살던 불가촉천민에게 화장실 사용을 금지한 부인을 크게 나무라고는 천민 전용인 요강을 신분으로 세입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부숴 버리라고 요구하기도 했을 만큼, 그들에 대한 포용의 의지는 컸다.[14] 현재 인도에서는 누구도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이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15] MBC의 예능 프로그램인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보면 대한민국에서 '럭키'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인도인 방송인인 아비셰크 굽타가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공인 계급인 바이샤 출신인 럭키를 배려해서 지속적으로 그를 편하게 대하려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기보다 높은 계급인 크샤트리아브라만이라는 것 때문에 친구들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나마 그가 차별 의식이 약한 대도시인 뉴델리가 고향인데도 이러는데 시골 출신이거나 어느 정도 옛날 세대 사람이라고 하면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16] 실제로 영국 식민 지배 당시에 영국 식민 당국을 향한 인도인들의 시선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았다. 하위 카스트들이야 자신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영국 정부를 적대시한 건 당연했지만 고위 카스트들은 식민 당국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친영파 성향이 매우 강했다. 당연히 간디가 카스트를 철폐하려는 본심을 섣불리 드러내는 순간 고위 카스트들이 영국과 손을 잡아서 독립운동을 집요하게 방해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당대에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자와할랄 네루 역시 인도의 수상으로 등극한 뒤에 인도 귀속을 선언한 각지의 지역 번왕들에게 정부 명의로 내탕금을 주고 달래가면서 이들이 인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고 이들의 기득권을 본격적으로 회수한 건 인도의 국가 체제가 탄탄하게 자리잡은 뒤에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집권했을 때나 가능했다. 당연히 그 전에는 누구든 카스트 철폐에 대한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17] 심지어 이슬람 국가인 영향으로 카스트 제도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이 인도보다도 더욱 부정적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도 이맘이 인도에서의 브라만에 해당하는 지위라서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없어졌다고 보기는 힘든데, 아예 국가 자체가 힌두교가 주류인 인도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18] 이는 마틴 루터 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평가이다.[19] 또, 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저자인 마크 트웨인에게도 비슷한 논리로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마크 트웨인은 당대에서도 가장 미국의 제국주의와 인종 차별을 비판하던 인물이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직접적으로 흑인 차별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럼에도 시대적 한계 때문에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겉에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디테일과 당시 시대의 상황을 챙겨 봐야 한다는 말이다.[20] <문명>의 시스템상 전쟁을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어서 협박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궁극적인 평화를 얻어내려는 설계를 해버린 결과 후자의 이미지가 되었는데 이게 의외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간디의 핵전쟁광 이미지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시드 마이어가 오버플로 버그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21] 연민 어린 신사: 관계 개선 의견 +15%[22] 매월 자치도 증가[23] 초대 귀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