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2:02:49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1. 개요2. 어려움
2.1. 그리스도교에서의 해석2.2. 결정론적 해석2.3. 죄질과 관점의 차이
3. 여담

1. 개요

  • 라틴어: 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
  • 영어: Hate the sin, not the sinner. / With love for mankind and hatred of sins.[1]

어떠한 이의 에 대해서 거론하거나 죄라는 것 자체에 대해 설파할 때에 주로 사용되는 말. 상당히 오래된 말인데, 보통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서신의 한 구절에서 퍼진 것으로 본다.[2]

특히 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는 그리스도교와 연관이 깊은 말이기도 하다. 용서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많이 강조되는 요소 중 하나다. 죄가 있는 사람들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히 생각해서 풀이하곤 하는데, 실제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대상을 맞닥뜨리게 되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을 분리시켜서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나, 사람의 견해에 따라 철학적, 종교적인 이유로 의미가 매우 달라지기 때문에 사용함에 따라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이러한 관용의 태도를 설파하는 이유는, 교리상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존재 자체가 죄인으로 태어났고, 항상 알게 모르고 많은 죄를 지어 왔으므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사람이 먼저다가 있다.

2. 어려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미울 때도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게 사람인데, 사람을 어떻게 안 미워할 수가 있습니까?
- 김상중[3]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좆같아하는 말이 뭔지 아냐?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거야. 정말 좆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좆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
- 영화 '넘버 3'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와 달리 범죄자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족이나 대규모 절도 및 폭행에 의해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범죄자 때문에 얻은 아픔과 괴로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를 이기고 범죄자를 용서하기 힘들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고 범죄자들을 용서하는 피해자도 물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려운 길이다. 실제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가 존경 받는 이유중 하나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것이다.

범죄나 악행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닌 제3자라 할지라도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면서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무리 악독한 죄라고 해도 죄는 어디까지나 개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죄를 '직접' 범하는 것은 명백하게 인간인데 그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공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탄생 배경은 종교적 사랑과 용서가 근본이지만 정작 목사개신교 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악용하기도 하며, 교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이 문장을 제 식구 감싸기, 내로남불 등으로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의 태도는 본 구절의 본래의 가치를 더럽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 뜻을 가려 안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2.1. 그리스도교에서의 해석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 문장이 그리스도교의 교부에게서 나온 문장인 만큼,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적용이 있어왔다. 현재 교파나 교인 개인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으나,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며, 불의를 심판하신다. 만약 누군가가 불의하다면 그가 회개하지 않는 이상 틀림 없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은혜 없이는 죄로 엉망진창이 될 수 밖에 없는 미련한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그의 죄는 미워하더라도 감히 교만한 마음을 품고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그 사람도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길 바라신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8장 12-13절 (공동번역성서)

따라서 그가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할 수 있도록 그를 사랑으로 대해주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가 실수할 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다듬어 가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웃의 죄인 여부보다는 그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주님의 형상대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하여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죄를 사랑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은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미워할 경우에도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없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 (공동번역성서)

다만 당장 윗 문단에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따른 철저한 회개와 믿음만이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죄와 사람이 하나로 뭉쳐져서 보인다면 육신에 속한 것이고, 죄와 사람이 분리되어 보이며 그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이 충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4]

2.2. 결정론적 해석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살인마 사이코패스 같은 최악의 범죄자들조차도 어떤 의미에선 불운한 사람들일 뿐이며 법적 처벌은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의지 항목 참조.

2.3. 죄질과 관점의 차이

물론 살인이나 폭행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 라면 그 죄를 지은 사람을 나쁘게 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죄라고 여겨지긴 하지만 타인에게 그다지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라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내치지 않는것이 타당할 수 있는 경우도 분명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성애혼전순결 같은 경우이다.

물론 근래에 들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보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그리스도교와 같은 일부 종교의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죄가 되는 경우도 있기에 신께서 지으신 자연질서에 위배된다고 보기에 동성애와 혼인 이전의 성적인 문제는 종교에선 죄가 되지만, 그렇다해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입장 처럼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딱히 끼치지는 않기에, 무작정 배척하거나 내치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보는 입장도 분명히 있다.

물론 극단주의적인 종파들에서는 그마저도 혐오하는 경우가 있기에 종교에서 그런것들은 죄로 본다는거 자체가 그것을 혐오한다는 것으로 일반화 할 수는 있지만 그또한 옳지는 않다. 분명 동성애와 혼전 성문제는 죄지만 그럼에도 그들도 사람이기에 이미 혼인전 성적인 문제가 있거나[5] 인해 아이가 생겼다 해도 그것만으로 무작정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기에 이미 지난것은 어쩔수 없고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혼인 전에 생긴 아이라도 그조차도 소중한 생명이고 신의 축복윽 받기에 충분한 한명의 인격체임을 당연히 인정하고 있으며, 동성애 성향이 있는 사람 또한 동성애가 종교적인 관점에 따라 죄가 될 수 있다이지, 동성애 성향이 있는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종교단체라면 그런사람들을 무작정 정죄하지 않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포용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내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가 죄있는 사람을 위해 왔다며, 당시 이스라엘에선 죄인이라며 배척하고 상종 못할 종자 취급 받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3. 여담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사고가 일어나면 사고의 책임자를 묻어버릴 생각으로 과거를 파헤치는데 이것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놀랍게도 이것이 맞다는 결과를 발견해낸 학술적 연구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팃포탯 문서를 참조.



[1] 보통은 간결한 전자의 표현이 많이 쓰인다. 후자는 위의 라틴어 구절을 직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죄를 미워하라"라는 뉘앙스에 가깝다.[2] 여러 설이 나오는데, 채근담에 나온다는 이야기, 공자, 소크라테스 등이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 첫 번째 문단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최신종을 다룬 회차의 엔딩 코멘트, 두 번째 문단은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오구탁의 역할로 연기하며 한 대사다.[4] 다만 믿음을 따르더라도 제 3자 입장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과 당사자 입장에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긍휼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난이도가 하늘과 땅 차이이긴 하다.[5] 여기서의 성적인 문제란 범죄 이외의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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