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6:29:03

황적이탈

[[일본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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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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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후계자 대책 }}}}}}}}}


1. 개요2. 배경과 특징3. 주요 사례4. 해외 사례와의 비교

1. 개요

황적이탈([ruby(皇,ruby=こう)][ruby(籍,ruby=せき)][ruby(離,ruby=り)][ruby(脫,ruby=だつ)])은 일본 황실에서 황족이 신분을 잃고 성씨를 받아 평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천황의 신하의 호적으로(臣籍) 내려가는 것(降下)이라 보아 신적강하([ruby(臣,ruby=しん)][ruby(籍,ruby=せき)][ruby(降,ruby=こう)][ruby(下,ruby=か)])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황족이 아니게 되면 신하인 셈이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황실의 황녀가 황족이 아닌 남성과 결혼하여 황족에서 이탈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 경우는 일본어 발음이 같은 신적강가([ruby(臣,ruby=しん)][ruby(籍,ruby=せき)][ruby(降,ruby=こう)][ruby(嫁,ruby=か)])로 표기하기도 한다.

2. 배경과 특징

일본 황실성씨가 없고, 직계 황족도 천황과 천황의 후계자인 황태자 이외에는 성씨처럼 쓸 수 있는 궁호를 받는다. 직계 황족 남성은 친왕이라 불리는데, 황태자가 되지 않는 한은 이 궁호가 그대로 그의 가문명이 되고 그와 그의 아내, 그의 후손들은 이 가문명을 성씨처럼 사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문들은 친왕가 혹은 궁가(宮家, 미야케)로 불리는데, 이건 방계 황족으로서 직계 황족과 구별하기 위해 가문명이 붙은 것에 불과하니 황가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다. 전근대에는 이런 집안들도 시간이 지나면 분가해서 새로 집안을 만드는 방계 후손들이 생기는데, 이렇게 분가한 이들은 신적 강하했다고 하며, 귀족으로 신분이 내려갔다.[1]

그런데 직계긴 하지만 계승권이 낮은 황족 남성 중에서는 일찌감치 친왕가를 만들지 않고 신적강하해서 귀족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재원, 돈 문제였다. 고대 일본의 율령은 '황친(皇親)' 즉 황족의 범위를 역대 천황으로부터 직계로 몇 세 손이냐를 따져서 직계비속 4세까지만 왕/여왕으로 대우받았고, 5세까지는 그래도 왕/여왕이라는 칭호를 유지하며 종5위하 위계를 음서로 받을 수 있다가 6세부터는 칭호 자체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 헤이안 시대 전기에 들어서 간무 천황과 헤이제이 천황-사가 천황 형제, 이렇게 삼부자의 대에 엄청나게 많은 자녀들을 두게 된다. 황족의 수가 갑자기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규정대로라면 4세 손까지만 정식으로 황족 대우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 4세 이내의 황족이 헤이안 시대 전기에 천황 삼부자에 의해 엄청나게 생산되면서 이 많은 황자들에게 나눠줄 관위도, 작록도 부족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2] 황족 지위를 내세워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간무 천황은 자신의 이복 동생이나 후궁 소생의 두 황자[3]에게 각기 히로네(広根), 나가오카(長岡), 요시미네(良岑) 등의 성씨(가바네는 아손)를 하사하고 신적강하시킨 것을 시작으로 100여 명에 달하는 황자들을 다이라노 아손(平朝臣)의 가바네를 주어 4세까지 내려갈 것도 없이 일찌감치 신적강하를 시켜 버렸다. 헤이제이 천황이나 사가 천황 역시 자신의 아들들 가운데 제위 계승 서열이 밀리는 이들을 그들의 대에서 가바네를 하사하고 신적강하를 시켰다.

신적강하한 황족들은 새로 씨 및 가바네를 하사받아서 그 자신이 한 집안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별섭가'라고 해서 후지와라 집안 분가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태로 신적강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신적강하한 이들은 1, 2대 정도는 조정에서 '황씨(皇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신' 귀하신 분으로 대우받았지만, 3대 이후에는 별 거 없었다.[4] 황족 입장에서야 졸지에 종친의 지위와 특권을 잃는 셈이라서 이게 뭔 날벼락인가 싶지만, 황족으로써 취임할 수 있는 관직이나 녹록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공무상 골치 아픈 책임이나[5] 종친으로써 이런저런 견제를 받으며 살 바에는 제위 계승권이고 뭐고 필요없고 평민 취급 안 받는 게 어디냐 정도로 만족하고 살자고 생각하고 자진해서 '저 신적강하하겠습니다'라고 신청하는 예도 있었다. 이렇게 신적강하한 이들의 후손은 대부분 교토에서 몰락하다시피 해서 지방으로 내려가 현지에 눌러 앉아서 호족이 되거나, 무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귀족 가문은 대부분 황족이 신적강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귀족 사회에서는 가문의 시조가 황족이라는 건 별로 내세울 게 못 된다.[6]

위에서 말했다시피 황족이 아닌 천황의 신하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제위 계승권도 잃는다. 하지만 일단 황실과 가까운 친척이라서인지 천황의 계승권자가 지나치게 모자랐던 시기에는 신적강하한 이가 도로 황적에 복귀하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에 신적강하된 고코 천황의 7남 미나모토노 사다미(源定省)가 황적에 복귀하여 우다 천황이 된 예가 있다. 에도 시대에는 이렇게 천황의 대가 단절될 우려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신적강하하지 않고 대대로 친왕직을 계승하는 세습친왕가가 마련되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다이쇼 천황의 직계를 제외한 구황족들은 일체의 특권을 몰수당하고 모두 민간인이 되었다. 그래도 창성을 할 때는 궁호(미야고)에서 '노미야'만 빼고 그대로 창성해서 이들이 신적강하한 구황족인지는 성만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은근히 사회에서 떠받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현재 황실의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문제 때문에 구황족 복귀론이 일고 있다.

3. 주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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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8년(736년) 강하
덴표 11년(739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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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11년(739년) 강하
덴표칸포 3년(751년) 강하
덴표칸포 4년(752년) 9월 12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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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칸포 7년(755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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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호지 3년(759년) 복귀
덴표호지 8년(764년) 강하
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rowcolor=#FFF>
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진고케이운 3년(769년) 5월 강하
호키 2년(771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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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2년(771년) 복귀
호키 2년(771년) 7월 복귀
호키 2년(771년) 9월 강하
호키 3년(772년) 12월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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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5년(774년) 12월 복귀
엔랴쿠 6년(787년) 2월 5일 강하
엔랴쿠 21년(802년) 12월 27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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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23년(804년) 6월 21일 강하
엔랴쿠 25년(806년) 4월 16일 강하
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rowcolor=#FFF>
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덴초 2년(825년) 7월 6일 강하
덴초 3년(826년) 강하
<rowcolor=#FFF>
강하
덴초 5년(828년)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강하
조와(承和) 2년(835년)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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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承和) 11년(844년) 강하
닌주 3년(853년) 강하
조간 4년(862년) 강하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rowcolor=#FFF>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간교 4년(880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rowcolor=#FFF>
겐나 8년(884년) 6월 강하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복귀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rowcolor=#FFF>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간표 원년(889년) 5월 13일 강하
간표 3년(891년) 12월 27일 복귀
<rowcolor=#FFF>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조헤이 6년(936년) 강하
강하
<rowcolor=#FFF>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덴랴쿠 4년(950년) 강하
덴토쿠 4년(960년) 10월 2일 강하
강하
고호 4년(967년) 복귀
<rowcolor=#FFF>
조겐 2년(977년) 4월 17일 복귀
강하
강하
<rowcolor=#FFF>
조와(貞和) 5년(1016년) 강하
간닌 2년(1020년) 12월 26일 강하
만주 2년(1025년) 12월 29일 강하
겐에이 2년(1119년) 8월 14일 강하
<rowcolor=#FFF>
지쇼 4년(1180년) 강하
분에이 7년(1270년) 12월 20일 강하
고안 10년(1287년) 10월 4일 복귀
에이닌 2년(1294년) 강하
<rowcolor=#FFF>
분포 3년(1319년) 2월 18일 취득
가랴쿠 3년(1326년) 6월 13일 강하
겐토쿠 2년(1330년) 2월 11일 복귀
랴쿠오 원년(1338년) 8월 11일 강하
<rowcolor=#FFF>
분나 5년(1356년) 1월 6일 강하
게이초 10년(1605년) 강하
게이초 14년(1609년) 강하
간분 3년(1663년) 11월 강하
<rowcolor=#FFF>
간포 3년(1743년) 10월 27일 강하
분세이 9년(1826년) 강하
게이오 2년(1866년) 강하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복귀
<rowcolor=#FFF>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강하
메이지 23년(1890년) 12월 24일 강하
메이지 25년(1892년) 12월 26일 강하
메이지 26년(1893년) 11월 15일 강하
<rowcolor=#FFF>
메이지 32년(1899년) 9월 2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4월 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11월 27일 강하
메이지 36년(1903년) 2월 6일 강하
<rowcolor=#FFF>
메이지 37년(1904년) 11월 14일 강하
메이지 39년(1906년) 10월 28일 강하
메이지 41년(1908년) 11월 8일 강하
메이지 43년(1910년) 7월 20일 강하
<rowcolor=#FFF>
메이지 44년(1911년) 4월 17일 강하
다이쇼 3년(1914년) 1월 21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4월 30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7월 20일 강하
<rowcolor=#FFF>
다이쇼 4년(1915년) 9월 3일 강하
다이쇼 7년(1918년) 5월 29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7월 24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11월 9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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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2년(1923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5월 3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12월 9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0월 27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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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5년(1926년) 12월 2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13일 강하
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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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쇼와 4년(1929년) 12월 24일 강하
쇼와 6년(1931년) 4월 4일 강하
쇼와 6년(1931년) 5월 12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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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8년(1933년) 1월 17일 강하
쇼와 9년(1934년) 3월 26일 강하
쇼와 10년(1935년) 1월 7일 강하
쇼와 11년(1936년) 4월 1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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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11년(1936년) 4월 1일 강하
쇼와 14년(1939년) 4월 2일 강하
쇼와 15년(1940년) 10월 25일 강하
쇼와 16년(1941년) 4월 15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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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16년(1941년) 11월 7일 강하
쇼와 17년(1942년) 10월 5일 강하
쇼와 18년(1943년) 6월 7일 강하
쇼와 18년(1943년) 12월 29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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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0년(1945년) 4월 22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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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5년(1950년) 5월 20일 강하
쇼와 27년(1952년) 10월 10일 강하
쇼와 35년(1960년) 3월 10일 강하
쇼와 41년(1966년) 12월 28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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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58년(1983년) 10월 14일 강하
헤이세이 17년(2005년) 11월 15일 강하
헤이세이 26년(2014년) 10월 5일 강하
헤이세이 30년(2018년) 10월 29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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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3년(2021년) 10월 26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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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강하할 때 써야 하는 성씨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미나모토타이라라는 은 보통 신적 강하한 천황의 자손에게 내려진 성이라서 미나모토나 타이라 성을 쓰는 귀족은 대부분 방계 황족인 경우가 많았다.[7] 이 경우 조상이 되는 천황의 이름을 따서 구별하곤 했는데 예컨대 무라카미 천황의 후손은 무라카미 겐지, 간무 천황의 후손은 간무 헤이지라고 하는 식이다.

직계 황족 중에서 신적강하한 대표적인 경우로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아버지[8]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는 사가 천황의 12남 미나모토노 토오루(源融)가 있다.

3.1. 구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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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한 미야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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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총사령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황실은 1947년 10월 14일에 다이쇼 천황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을 신적강하시켰다. 이 때 신적강하한 황족을 일컬어 구황족이라고 한다.
<rowcolor=#DCA600>
궁가
현칭
창건
황적이탈
비고
후시미 씨
(伏見氏)
* 후시미노미야 히로아키 왕
→ 후시미 히로아키
  • 히로요시 왕비 도키코
    → 후시미 도키코
  • 미츠코 여왕
    → 후시미 미츠코
  • 아야코 여왕
    → 후시미 아야코
세습친왕가
단절 예정
간인노미야
(閑院宮)
간인 씨
(閑院氏)
* 간인노미야 하루히토 왕
→ 간인 하루히토
  • 하루히토 왕비 나오코
    → 간인 나오코
세습친왕가
적류 단절
야마시나 씨
(山階氏)
*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 왕
→ 야마시나 다케히코
적류 단절
기타시라카와 씨
(北白川氏)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미치히사 왕
기타시라카와 미치히사
적류 단절
나시모토 씨
(梨本氏)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나시모토 모리마사
  • 모리마사 왕비 이츠코
    → 나시모토 이츠코
적류 단절
구니노미야
(久邇宮)
구니 씨
(久邇氏)
* 구니노미야 아사아키라 왕
구니 아사아키라
  • 구니요시 왕비 지카코
    → 구니 지카코
  • 구니아키 왕
    → 구니 구니아키
  • 아사타케 왕
    → 구니 아사타케
  • 아사히로 왕
    → 구니 아사히로
  • 아사코 여왕
    → 구니 아사코
  • 미치코 여왕
    → 구니 미치코
  • 히데코 여왕
    → 구니 히데코
  • 노리코 여왕
    → 구니 노리코
  • 다카 왕비 시즈코
    → 구니 시즈코
가야노미야
(賀陽宮)
가야 씨
(賀陽氏)
* 가야노미야 츠네노리 왕
→ 가야 츠네노리
  • 츠네노리 왕비 도시코
    → 가야 도시코
  • 구니나가 왕
    → 가야 구니나가
  • 하루노리 왕
    → 가야 하루노리
  • 아키노리 왕
    → 가야 아키노리
  • 후미노리 왕
    → 가야 후미노리
  • 무네노리 왕
    → 가야 무네노리
  • 다케노리 왕
    → 가야 다케노리
히가시후시미 씨
(東伏見氏)
* 요리히토 친왕비 가네코
→ 히가시후시미 가네코
적류 단절
아사카 씨
(朝香氏)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아사카 야스히코
히가시쿠니 씨
(東久邇氏)
다케다 씨
(竹田氏)
*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왕
→ 다케다 츠네요시
  • 츠네요시 왕비 미츠코
    → 다케다 미츠코
  • 츠네타다 왕
    → 다케다 츠네타다
  • 츠네하루 왕
    → 다케다 츠네하루
  • 모토코 여왕
    → 다케다 모토코
  • 노리코 여왕
    → 다케다 노리코

4. 해외 사례와의 비교

  • 한국사의 왕조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와는 이질적인 현상이다. 동아시아에서 대체로 성씨는 부계로 절대 바뀌면 안 된다는 개념이 확립되었고 이에 따라 역사를 봐도 군주가 폐서인시키거나, 아예 왕가 전체가 몰락하지 않는 이상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왕족으로 살았다. 더욱이 종친도 엄연히 신하라서 종친과 신하를 구분하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9] 한국에도 방계를 직계와 따로 분류하고 너무 멀어진 방계는 사실상 왕족으로서 지닌 특권 대부분을 잃긴 하지만,[10] 그렇다고 왕족이 아예 아닌 건 아니다. 이건 가까운 친척으로 인식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조선은 보통 8촌까지는 직계로 구별했지만 일본은 사촌 이후부터는 딱히 교류하지 않으면 가까운 친척으로 인식을 하지 않는다.[11]
    • 중국 대륙에서도 원칙은 종친도 세대가 지나면 일반 사족으로 격하되어 황족의 특권을 제공받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왕손들이 점차 귀해지자 일본의 세습친왕가들처럼 왕과 가까운 왕족들이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나더라도 왕족으로써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들이 나타나긴 했다. 물론 그 경우 후손 전체가 왕족의 특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가들만 해당 가문을 개창한 군()의 특권을 유지했다. 무엇보다도 왕족의 특권만 없을 뿐이지 왕위계승권은 아주 까마득히 멀지만 존재하기는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삼수의 옥인데 삼수의 옥에서 밝혀진 내용이 전부 사실인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는 점을 제쳐둔 채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본다면 삼수의 옥에 가담한 이들은 경종을 폐위/시해/독살한 뒤 이이명을 옹립하고자 했는데 언뜻 보기에는 왕족으로서의 품계가 전혀 없는 이이명을 왜 지목했는지 의아하겠지만 실은 그가 세종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왕실과 멀어진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어쨌거나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역성혁명은 아닌 것이다. 한나라만 해도 복벽거듭 해냈는데 복벽군주가 모두 황실과 대가 황족이나 안팎에서 모두 같은 왕조로 인정하고 송나라도 궁가같은 거 없이 송효종송고종의 양자가 되어 계승하고 송이종송녕종의 양자가 되어 계승하였으나 모두 같은 왕조로 인정받는다.
    • 다만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사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주나라만 해도 천자제후의 후손이 대가 멀어지면 윗 문단에서 카페의 분가가 발루아나 부르봉으로 성을 갈듯이 성()을 안 쓰고 씨()를 쓰게 되었다. 희성(姬姓)에서 삼환이나 칠목과 같은 여러 씨를 지닌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든지 초나라국성(國姓)인 웅씨(熊氏)에서 소씨(昭氏)·경씨(景氏)·굴씨(屈氏) 등이 갈라져 나온 게 그러하다.[12] 다만 씨를 쓰게 되어도 부계혈연이 같기에 서로 혼인이 금지되었다. 북위만 해도 탁발씨와 같은 부계혈연이면서 성이 다른 열 겨레를 십주(十胄)라 부르며 오랑캐 귀족 2등급으로 정하고 서로 혼인을 금지했다. 부계혈연이 같으면 혼인이 금지되는 게 일본과 다른 점이다.
    • 귀실씨(鬼室氏)며 흑치씨부여씨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도 같은 제도가 있었던 듯 하다.
  • 베트남 응우옌 왕조 시기에는 응우옌씨(阮氏) 종실의 수가 너무 많아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자, 황실 직계가 아닌 광남국 응우옌씨(阮氏) 종실의 후예들[13]에게 대거 똔텃([ruby(尊室,ruby=Tôn Thất)], 존실)이라는 성을 내려[14] 제계(帝系: 가륭제로부터 내려오는 황실 직계) 및 번계(藩系: 가륭제의 형제들로 내려오는 황실 방계)와 구별하였다.[15] 명명제 항목과 종인부/베트남 항목으로.
  • 류큐는 일본과 비슷했는데 여기는 재미있게도 국성이 상()씨라서 종친이 대가 멀어지면 팔()을 빼서 상()씨가 된다.
  • 서양에서는 일본과 비슷하게 왕족이 분가하여 다른 가문을 만드는 게 흔했다. 이는 봉건제적 전통의 특징이 유사했기 때문으로, 방계 왕족의 경우 계승권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왕족의 예우를 계속 해주기에는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분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프랑스의 경우 카페 왕조에서 분가된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있다. 영국의 경우도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로 랭커스터, 요크 가문이 개창되었다.[16][17] 다만 일본의 신적 강하와는 이유가 다르므로 계승권을 인정했다. 그래서 본가가 단절되면, 후에 왕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것 때문에 유럽에서 계승권을 두고 나라끼리 싸운 적도 제법되는 편이다.[18]
    • 류리크 왕조는 일본처럼 종실이 따로 국성이 없다든가 성을 갖게 되면 다른 겨레로 갈라진다든가 그렇게 갈리지면 계승을 할 수 없게 되는 점이 같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혼란 시대 참고.

[1] 현대 일본 황실은 영세황족제(永世皇族制)를 실시하여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적법한 혼인을 통해 태어난 천황의 부계(父系) 자손이면 황족의 지위를 잃지 않는다(다만 여성은 황족 외 평민 남성과 혼인 시 황족의 지위를 상실한다.). 다만 천황의 직계로 3촌 이상 떨어지면 친왕/내친왕이 아닌 왕/여왕의 작호를 받는다. 그리고 애시당초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화족제도를 폐지하여 황족 외엔 별도의 귀족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2] 반도 지역의 히타치, 가즈사, 고즈케 3개 구니를 이른바 '친왕임국'으로 지정하여 그 최고 수령(카미)을 친왕으로 임명한 것도 이러한 사태와 관련이 있다. 기요하라노 나쓰노(清原夏野)가 덴초(天長) 3년(826년)에 준나 천황에게, 간무 천황 이래로 황자들이 너무 많아서 이들에게 줄 관직이 부족하고, 또 당시 친왕들은 팔성(八省)의 장관인 경(卿)을 겸무하는 관례가 있는 것도 문제라며 친왕들만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쿠니를 지정해 두자고 제언한 것이 시초였다.[3] 모계 쪽이 신분이 낮아서 제위 계승 자격에서 진작에 밀려나 있었다.[4] 겐지모노가타리히카루 겐지처럼 생모의 출신이 미천하면 일찌감치 신적강하시키거나 승려로 출가시켜 후계 구도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물론 소설이라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신적강하시켜도 히카루 겐지처럼 천황의 총애에 따라서 황족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는 것은 가능한 모양.[5] 예를 들어서 친왕은 일본 조정에서 중앙의 관청의 최고 장관을 겸직하는 것이 당시 일본의 관례였지만, 그 관청에서 뭔가 사고가 터지면 그 책임은 사고의 직접적 당사자뿐 아니라 지휘라인상 최고 책임자인 장관에게 최종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장관이 친왕일 경우에는?[6] 물론 모든 일본 귀족 가문의 시조가 황족인 건 아니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역시 일본 역사에 막대한 흔적을 남긴 후지와라씨(藤原家)가 있다. 그 중 후지와라 북가 계통의 가문들이 우대 받았는데 천황가에서 신적강하할 경우 잘 해봐야 대신가(메이지 유신 이후 백작 격으로 대우)의 가격(家格)을 부여받았으나 이들은 후지와라 북가의 직계인 섭관가(섭정과 관백을 할 수 있는 가문이라는 의미, 고노에, 다카쓰카사, 구조, 이치조, 니조 가문.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 격으로 대우)와 섭관가의 방계인 청화가(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 격으로 대우)보다 낮은 가격의 가문들이었다. 구가와 히로타다가 유일하게 청화가의 격을 받은 겐지계 공가이다. (다만 섭관가 중, 고노에가, 다카쓰카사가, 이치조가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 적남(嫡男)의 대가 끊겨 황실이나 친왕가로부터 양자를 들여 대통을 이었다. 이 세 가문을 황별섭가(皇別攝家)라 한다.)[7]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겐지도 미나모토 씨라는 것이다.[8] 그는 헤이제이 천황의 아들이지만 반역에 연루되는 바람에, 그와 그의 자식들 모두 아리와라라는 성을 받고 신적 강하했다.[9] 일본에서도 그걸 의식했는지 황적이탈로 부르는 일이 많다.[10] 5대 이상 지나야 종친에서 벗어난다.[11] 그래서 사촌끼리 결혼이 가능했고 십악대죄에서도 8촌 이내에 해를 끼치는 불목죄가 빠졌다.[12] 특히 초나라 왕실의 분가인 세 집안을 다스리기 위해 삼려대부(三閭大夫)를 두었는데 이것이 종정과 구실이 같다고 하니 이 세 집안은 초나라의 어삼사가 아니었나 싶다.[13] 정확하겐 광남국 조조 ~ 예종의 대에서 분기한 자손들. 광남국 정립 이전(조조 이전) 분기한 응우옌씨들은 종인부의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14] 원래는 종실(宗室)이어야 하지만 헌조 장황제의 즉위 전 휘가 복면종(福綿宗)이라서 피휘를 하느라 존()으로 바뀌었다.[15] 제계와 번계를 합해 황친(皇親)이라 일컬었다.[16] 이 두 가문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자 왕위 계승을 놓고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것이 장미전쟁.[17] 발루아, 부르봉, 랭커스터, 요크 등의 가문 이름이 지명에서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방계 왕족은 자신의 영지명을 따서 새 가문을 개창한 것.[18] 이러한 이유는 왕가끼리 결혼이 매우 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자국 내에서만 결혼했다면 타국이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겠지만 혼맥이 거미줄처럼 얽힌탓에 계승권 주장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예시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직전에는 서로 다른 국적의 계승 후보가 셋이나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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