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유럽의 전쟁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장미의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잉글랜드의 내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ddd>전쟁 | 교전세력 |
무정부시대 1135 ~ 1153 | 스티븐 왕 VS 마틸다 | |
제1차 남작 전쟁 1215 ~ 1217 | 잉글랜드 왕실 VS 신성교회군 | |
제2차 남작 전쟁 1263 ~ 1267 | 잉글랜드 왕실 VS 의회파 귀족군 | |
장미 전쟁 1455 ~ 1487 | 요크 가문 VS 랭커스터 가문 | |
청교도 혁명 1642 ~ 1651 | 왕당파 VS 의회파 | |
명예혁명 1688 | 제임스 2세 VS 윌리엄 3세&메리 2세 |
<colbgcolor=#030> 장미 전쟁 Wars of the Roses | ||
기간 | 1455년 ~ 1487년 | |
시기 | 중세 시대 | |
장소 | 잉글랜드, 웨일스, 칼레 전 지역 | |
원인 | 헨리 6세의 총신인 서머셋 공작과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 요크 가문의 갈등 | |
교전 세력 | 요크 가문 | 랭커스터 가문 |
지휘관 | 요크의 리처드 †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 † | 헨리 6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 앙주의 마거릿 헨리 튜더 |
결과 | 헨리 튜더 및 튜더 가문의 승리[1] | |
영향 | 튜더 왕조 창건, 요먼, 젠트리 계층의 성장 100여 년의 절대왕정 시작 |
1. 개요2. 배경
2.1. 리처드 2세의 폭정 (1386~1398)2.2. 랭커스터 왕조의 성립과 도전 (1399~1413)2.3. 헨리 5세의 정복과 죽음 (1413~1422)2.4. 베드퍼드 공작의 노력 (1423~1430)2.5. 파리 대관식과 아라스 조약 (1431~1436)2.6. 요크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불화 (1436~1448)2.7. 노르망디 상실과 보퍼트파의 위기 (1449~1450)2.8. 잭 케이드의 난과 요크파의 런던 진군 (1450~1452)2.9. 헨리 6세의 정신 붕괴와 요크파의 반격 (1453~1454)
3. 1기 (1455~1464)3.1. 세인트올번스 전투 (1455)3.2. 마거릿 왕비의 역습 (1456)3.3. 샌드위치 습격 (1457)3.4. 화해의 행진 (1458)3.5. 블로어 히스 전투 (1459)3.6. 러드퍼드 다리 대치 (1459)3.7. 노샘프턴 전투 (1460)3.8. 웨이크필드 전투 (1460)3.9.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1461)3.10. 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1461)3.11. 토우턴 전투 (1461)3.12. 뱀버러 포위전 (1462)3.13. 생오메르 회담 (1463)3.14. 헥섬 전투 (1464)
4. 2기 (1464~1471)4.1. 에드워드 4세의 축출과 복위
5. 3기 (1483~1487)6. 결과와 영향7. 기타[clearfix]
1. 개요
장미전쟁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파들인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가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놓고 1455년에서 1487년까지 잉글랜드에서 벌인 내전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분파인 튜더 가문이 승리하여 헨리 7세가 즉위했다.전쟁 기간은 30여 년이지만 이 기간 내내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아니다. 장미 전쟁은 여러 개별적인 전쟁의 묶음으로 볼 수 있으며, 영어 원문으로도 'Wars'라는 복수형으로 표기한다. 장미 전쟁의 중요한 시기는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455년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를 든 때부터 1461년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할 때까지가 첫 번째, 1469년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1471년 다시 복위되기까지가 두 번째, 그리고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직후인 1483년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 이후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하고 1487년 요크 가문의 잔당을 진압할 때까지가 마지막 세 번째에 해당된다. 이 분쟁의 시기 중간에는 에드워드 4세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장미 전쟁이 전근대 전쟁 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포로 학살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전투에서 승리한 지휘관들은 민중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불필요한 살상을 금지했다. 평민들에게 자비를 보이는 대신 귀족들을 많이 죽였지만 내전에서 정적을 암살하거나 처형하는 것은 노르만 왕조 시절부터 늘상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튜더 왕조는 절대왕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장미 전쟁 시기의 잔혹성과 혼란을 과장했고, 이러한 사관이 반영된 셰익스피어의 사극이 불멸의 명성을 얻으면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참혹한 내전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셰익스피어 사극의 영향 때문에, 장미 전쟁의 기원을 1399년 리처드 2세의 폐위로 거슬러 올라가 15세기 전체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막장 정치극의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대중적인 관점이지만, 오늘날 15세기 전문 역사가들은 장미 전쟁의 기원이 1450년대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들이라는 데 모두 동의한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에서 왕위 계승 분쟁은 너무나 격렬하게 묘사되어 우리는 귀족들이 전쟁을 꺼렸을 리가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워릭은 토턴에서 '그렇다면 대지가 우리의 피로 취하게 하라'라고 외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무기를 드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VS |
이 내전이 장미 전쟁이라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가문 모두 상징이 장미, 즉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백장미였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용어가 아니라 《아이반호》의 저자인 19세기의 소설가 월터 스콧이 만들어낸 것으로 1829년에 그가 집필한 글에 처음 나온다. 당대에는 그저 내전(the Civil Wars)으로만 불렸다. 스콧이 이런 용어를 쓴 모티브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서 나왔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는 왕궁의 정원에서 요크 가문의 수장 요크 공작과 랭커스터 가문의 주요 인물인 서머셋 공작이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타협이 불가능해지자 요크 공작이 흰 장미를 꺾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흰 장미를 들어 지지를 표시해달라고 요청하고, 서머셋 공작은 붉은 장미를 꺾어 이에 대응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요크 가문의 문장은 백장미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색[2] 장미이긴 한데 둘 다 흔히 생각하는 겹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것.[3] 흔히 생각하는 겹꽃 장미는 그 당시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겹꽃 장미는 훗날 18세기에 중국에서 월계화 품종과 저 위의 분홍색 장미를 교배시키면서 나온 것이다.[4] 참고로 저 문장은 현재도 요크셔 주와 랭커셔 주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2. 배경
장미전쟁 시기 왕가의 계보. 왕위에 오른 인물들은 굵은 네모로 강조표시를 했다. |
이 장미 전쟁은 사건의 전개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시 잉글랜드 왕실의 계보를 살펴 보아야 한다. 장미 전쟁의 주역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람들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랭커스터 공작(곤트의 존)이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이고 4남 요크 공작(랭글리의 에드먼드)이 요크 가문의 시조이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2세가 왕위를 빼앗기고 후사가 없이 사망한 후 랭커스터 가문에서 헨리 4세 - 헨리 5세 - 헨리 6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후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요크 가문에서 에드워드 4세 - 에드워드 5세 - 리처드 3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며 마지막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에 속한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시작된다.
2.1. 리처드 2세의 폭정 (1386~1398)
[5]아들의 권리를 빼앗아라
시간으로부터 헌장과 관습의 권리를 앗아가
내일이 오늘을 뒤따르지 못하게 하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 2막 1장
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2기 (1360-1389) 문서 참고하십시오.시간으로부터 헌장과 관습의 권리를 앗아가
내일이 오늘을 뒤따르지 못하게 하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 2막 1장
백년전쟁 시기인 1370년 경, 잉글랜드의 명군인 에드워드 3세는 나이가 들어서 국정을 운영하기가 버거워지자 살아남은 아들 중 3남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실질적으로 섭정을 맡겼다. 곤트의 존이 후계자였다면 괜찮은 계승으로 이어졌겠지만, 문제는 후계자가 따로 있었다. 바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 하지만 흑태자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으로 보였고, 유력한 왕위 계승자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였는데 그 당시 5살도 안 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곤트의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고, 슬슬 정전협정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의 섭정 역할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흑태자가 먼저 사망했고, 이듬해 에드워드 3세마저 사망하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가 왕위에 올랐다.
곤트의 존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두세를 부과했고, 이로 인해 가난한 평민들에게 상당히 높은 금액이 부과되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와트 타일러의 난). 농민 봉기는 결국 진압되었지만 잉글랜드에서 곤트의 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1386년 곤트의 존은 카스티야 원정을 나가면서 잉글랜드에서 자리를 비웠다. 섭정인 숙부도 없어졌고, 머리도 굵어진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리처드 2세조차 숙부로부터 반면교사를 못했던 것인지 그의 첫 번째 친정은 최악이었다. 곤트의 존의 섭정 시절보다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고, 개혁을 요구하는 귀족들이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반역 혐의로 고발하는 청원을 제출하면서 결국 작게나마 내전이 벌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청원파[6]가 득세한 의회와 국왕의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1388년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청원파와 국왕을 중재하며 내전을 종결시켰다. 이 일로 다시 존의 위세가 높아졌고 아키텐 공국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존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나 그동안 조용히 충성파를 결집한 리처드 2세가 청원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으며, 곤트의 존도 왕국의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일단 자신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목숨이 저당잡힌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에 반하지 않고 조용히 섭정으로 지냈다. 숙부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확인한 리처드 2세는 살아남은 청원파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고, 존이 사망하자 헨리의 영지 상속을 막기 위해 랭커스터 영지마저 몰수했다.
2.2. 랭커스터 왕조의 성립과 도전 (1399~1413)
[7]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장기 휴전 (1389-1415)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로써 리처드 2세가 숙부와 그의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았으나 아직 불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숙청당한 청원파 잔당들은 외국으로 망명해서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왕권이 이렇게 불안한데도 리처드 2세는 1399년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 사이에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반란군을 조직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대세를 결정지었다. 그리하여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고 랭커스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잔존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헨리 4세는 이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게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상당히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원래 리처드 2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는 당시에 7살짜리 어린이였던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8]였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차남이었던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다.[9] 정확히 말하자면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친손자였다. 필리파는 라이오넬이 18세 때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나이 차이다. 가장 큰 이유는 리처드 2세가 흑태자가 38세 때 태어난 아들이었던 것이다. 리처드 2세가 후손없이 사망하면,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후손이 멸절되었으니, 차남인 라이오넬의 후손으로 왕위가 넘어갈 차례였다. 참고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곤트의 존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이도 어리고 자신에 비하면 한참 만만한 집안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왕이 되는 게 꼴보기 싫었는지,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 위해 더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을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왕위는 군주의 아들이 군주의 남자 형제보다 우선이며,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상속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흑태자 에드워드의 외동아들인 리처드 2세가 아들없이 죽으면, 흑태자 에드워드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왕위 계승자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라이오넬의 바로 아랫 동생인 곤트의 존이 후계이며, 곤트의 존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즉 여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아예 부정해버렸다.[10]
이 왕위 계승의 법칙은 동양에서라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서양에서는 꽤 생소했고,[11] 사람들의 반응은 "왕이 되고 싶어서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정도였다. 물론 실권자인 볼링브로크의 헨리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불만이 크게 없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했다. 다행히도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이자 보호자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왕위 즉위에 찬성했고, 이 덕분에 잡음은 많았을 망정 직접적인 반대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십여 년간 랭커스터 왕조는 웨일즈 반란, 스코틀랜드의 침공, 퍼시 가문의 반란, 프랑스의 가스코뉴 침공 등 내부와 외부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냈다. 게다가 가스코뉴 침공 실패를 계기로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이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하면서 프랑스에 내전이 일어났고, 그사이 잉글랜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2.3. 헨리 5세의 정복과 죽음 (1413~1422)
[12]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3기 (1415-1431) 문서 참고하십시오.
1413년 헨리 4세가 죽고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과감한 성격이었던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자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1415년 헨리 5세는 센강 하구의 요충지 아르플뢰르를 점령하고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전멸시킨다. 이후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와 장이 연달아 병사하면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이 격화되는 동안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대부분 점령한 뒤 파리를 포위했고, 1420년 부르고뉴 공작과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자신의 후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왕세자 샤를이 동맹인 스코틀랜드군의 지원으로 보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극적으로 부활한다. 이 전투의 결과로 많은 프랑스 귀족과 도시들이 왕세자파로 전향했다. 헨리 5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무리한 강행군과 공성전으로 몸을 혹사시켰고, 트루아 조약 체결 후 2년 만인 1422년 8월에 병으로 급사한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였다. 이때 '광인왕' 샤를 6세도 10월에 죽었지만 왕세자 샤를이 조약을 깨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2.4. 베드퍼드 공작의 노력 (1423~1430)
[13]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3기 (1415-1431) 문서 참고하십시오.
헨리 5세의 동생이자 그의 유언으로 프랑스의 섭정직에 임명된 베드퍼드 공작은 어려운 임무를 하나씩 해결하려 노력했다. 우선 1423년 크라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북부 프랑스의 거점들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다음 해 베르뇌유 전투에서 프랑스 주력군이 전멸하고 잉글랜드군 야전 무적 신화가 부활했다. 후방이 안정화된 잉글랜드는 메인 지방으로 공세를 시작하고, 프랑스로 편을 바꾼 브르타뉴도 침공해서 굴복시킨다.
한편 글로스터 공작과 저지대의 상속녀 자클린의 결혼이 동맹을 무너뜨릴 뻔했으나, 글로스터 공작은 결국 아내를 버리고 부르고뉴 공작이 저지대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메인 정복을 끝낸 잉글랜드는 보스 지방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몽타르지와 몽두블로에서 대승을 거두고 역습을 가했다. 하지만 곧바로 솔즈베리 백작이 공격적인 전략으로 보스 지방을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포위한다. 그러나 솔즈베리 백작은 포위공격 도중 포탄에 맞아 전사한다.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증원된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봉쇄하면서 불안한 대치가 이어졌다.
1429년 잔 다르크의 리더십 하에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의 오를레앙 봉쇄를 성공적으로 깨뜨렸으며, 이후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야전군의 큰 손실로 잉글랜드군이 재배치되는 동안 프랑스군이 트루아를 포위하고 점령한다. 이 승리는 랭스로 가는 길을 열어주어 샤를 7세의 대관식이 랭스에서 치러졌다. 프랑스군이 랭스에서 파리로 진군하며 센강과 마른강의 요충지를 점령하자 시민들이 봉기해 잉글랜드군을 축출한다.
2.5. 파리 대관식과 아라스 조약 (1431~1436)
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4기 (1432-1453) 문서 참고하십시오.
1431년 잉글랜드군이 루비에를 탈환하고 헨리 6세가 파리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수운 봉쇄로 인한 파리 시의 물자 부족,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한 잉글랜드인들에게 프랑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행사는 엉망으로 치러졌다.
파리 주교가 집전해야 하는 미사를 헨리 보퍼트 추기경이 대신 집전했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국왕의 손에 쥐어줘야 하는 검은 잉글랜드인인 스태퍼드 백작이 대신 건넸다. 국왕이 성찬주를 마신 뒤 대성당에 보관되어야 하는 금잔을 시종이 그냥 가져가 버렸다. 프랑스 대귀족 6명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잉글랜드 귀족들이 대신 배치되었다. 연회에서 상석에 앉아야 하는 파리 시의 유력자들과 고등법원 관료들, 파리 대학 대표들은 평범한 상인들과 함께 말석을 배정받아 나흘 전에 요리된 딱딱한 고기를 먹었다. 의식에 참석한 빈민들에 대한 자선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 죄수들에 대한 사면과 세금 면제도 없었다. 어린 국왕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짧게 연설했다.
크리스마스 직후, 헨리 6세와 수행단은 파리 시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대관식이 프랑스 전통이 아닌 잉글랜드 대관식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는 루머까지 퍼졌고 동군연합의 환상은 무너졌다.
이후 일드프랑스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면서 몽타르지와 생세느리 등 여러 도시가 점령되고 재탈환되었다. 코탕탱 반도에서도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지만 실패로 끝났다.
결국 1435년 9월 14일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하고, 며칠 뒤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이 파기되었다. 다음 해에는 프랑스가 파리를 탈환하면서 잉글랜드가 명백히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2.6. 요크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불화 (1436~1448)
[14]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4기 (1432-1453)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1437년 요크 공작이 베드퍼드 공작의 후임으로서 노르망디 총독직에 임명되었다.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친척으로, 제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4남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였다. 헨리 6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버지인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헨리 5세에게 반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백부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고, 헨리 5세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었으며, 리처드가 고작 4세였기에 반역자의 아들인 리처드에게 요크 공작령을 물려주는 선심을 썼다. 리처드는 이후 모계로 모티머 가문의 광대한 웨일스 변경 영지까지 물려받아 왕국의 대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요크 공작이 루앙에서 행정 제도를 복구하는 동안 존 탈보트가 노르망디를 회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동부와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한다. 암울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1443년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가 프랑스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여 격멸하기 위한 원정에 나서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원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요크 공작이 지키는 노르망디와 루앙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는 것이었지만, 서머셋은 시작부터 요크 공작과 갈등을 빚었다. 서머셋 공작의 병사들은 노르망디 곳곳에서 총독의 허락도 없이 물자를 징발하며 행패를 부렸고, 이후 완성된 87페이지에 달하는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서머셋의 군대가 저지른 무수한 갈취와 폭력 행위를 자세히 기록했다.
한편 중요한 임무의 실패와 대중의 비난에 충격을 받은 서머셋 공작은 코페 성으로 은퇴했고, 얼마 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사후 동생이자 1436년 칼레 포위전과 1439년 아브랑슈 포위전에서 활약한 영웅인 에드먼드 보퍼트가 서머셋 공작위를 계승했다.
결국 1444년 투르 조약으로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정략 결혼과 함께 휴전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서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졌고. 이에 프랑스와의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글로스터 공작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퍼트 파벌은 노르망디 총독인 요크 공작에게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웠다. 치체스터의 주교이자 유명한 법률가인 아담 몰린스는 루앙 정부의 회계를 검토한 뒤, 요크 공작의 무능함과 잘못된 통치를 노르망디의 쇠퇴와 잉글랜드군의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복무한 군인들을 데려와 요크 공작이 예산을 횡령했다는 증언을 하게 했다.
이에 요크 공작은 루앙 정부의 의원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데려와 혐의를 반박하며, 몰린스가 증인들을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헨리 6세를 설득해 요크 공작을 노르망디 총독직에서 해임하고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1447년 노스게이트 외곽의 세인트세이비어 구호소에 구금돼 있었던 글로스터 공작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글로스터 공작은 이미 56세 노인이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체포의 충격이 심장마비를 유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달변가이자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인물인 글로스터 공작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급사한 것은 보퍼트 정부에 너무나 유리한 사건이었다. 대중의 눈에는 글로스터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다. 정부는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했지만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한편 헨리 6세는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외할아버지인 샤를 6세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의 징후가 있었다. 폭력적이지는 않으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섭정들이나 가족 등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보호자의 의견에 그대로 따랐다. 이는 미성년 시기에는 겸허하고 공정하게 신하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평화적인 성군(rex pacificus)의 자질로 포장될 수 있었으나 1436년 섭정 기간이 끝나자 그가 나라를 통치하기는커녕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할 능력도 없다는 것은 이제 왕국 전체에 숨길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에드워드 2세나 리처드 2세의 선례처럼 잉글랜드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의 '선한 법'을 준수하겠다는 대관식 맹세를 어기고 자의로 권력을 행사하는 폭군은 왕국 공동체의 보호와 그밖에 여러 명분을 붙여서 폐위될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자신이 선택한 소수의 측근들의 말만 듣지도 않았고 자기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나이들거나 병들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한 왕이 폐위당한 전례는 없는데다 헨리는 그저 비정상적으로 우유부단할 뿐 멀쩡하게 걷고 말할 수 있으며 외할아버지처럼 이유 없이[15] 사람을 찔러 죽이지도 않는 등, 심신상실 상태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건강할 때는 섭정을 두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를 하나의 파벌이 장악하거나 적어도 파벌 간의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현명한 비공식 섭정들이 그나마 말은 잘 듣는 착한 왕을 조종해서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때문에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유력자들은 폭군도 아니고 단지 멍청해 보인다는 의심만으로 왕을 폐위시킨다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지주권을 보증하는 보통법 제도를 보증하는 왕권의 신성성을 돌이킬 수 없이 훼손할지도 모를 전례 없는 정치적 실험에 합의하기보다는 왕을 보좌하겠다고 나선 정치 파벌들의 동향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2.7. 노르망디 상실과 보퍼트파의 위기 (1449~1450)
[16]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4기 (1432-1453) 문서 참고하십시오.
1449년 아라곤 출신 용병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의 푸제르를 기습해 점령했다.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의 목적은 브르타뉴 공국을 중립 세력으로 되돌리는 것이었으나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이에 강력히 반발한다.
회담에서 잉글랜드측은 푸제르 점령을 쉬리엔의 단독 행동이라 주장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주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한 잉글랜드군이 주요 도시들로 흩어진 사이 프랑스군은 여러 전략적 위치를 점령하며 승기를 잡았다. 고작 4개월 만에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의 주도 루앙을 점령한다. 이때 루앙의 주민들이 프랑스군에 호응해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해야 했으나, 잉글랜드에서는 그가 프랑스에 매수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450년 1월 26일, 결국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의회에서 탄핵을 당했다. 그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앙주와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당한 법 절차와 정부 절차를 방해하거나 매수한 것이었다.
이에 서퍽 공작은 귀족 배심원 재판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왕의 자비에 맡겼다. 헨리 6세는 첫 번째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두 번째 혐의에 대한 처벌로 5년 동안 공작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공작은 이전까지 구금되어 있었던 웨스트민스터궁의 탑에서 비밀리에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여 명의 폭도들이 필즈의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그를 추격했고, 그곳에서도 결국 탈출에 성공했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붙잡히고 약탈당했다.
4월 30일, 서퍽 공작은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쓴 뒤 하인들과 함께 배 두 척과 보트 한 척을 타고 입스위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공작의 배는 '탑의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배에 의해 가로막혔다. 공작은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왕명에 따라 칼레로 파견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선장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작은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믿고 배에 올랐지만, 니콜라스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그를 반역자라 부르며 체포했고, 모의 재판 끝에 공작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다음 날인 5월 2일, 서퍽 공작은 니콜라스호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녹슨 검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 후 서퍽 공작의 시신은 도버의 모래사장에 던져졌고 머리는 나무 말뚝 위에 전시되었다. 그의 하인들은 무사히 해안으로 옮겨졌지만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
2.8. 잭 케이드의 난과 요크파의 런던 진군 (1450~1452)
[17]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4기 (1432-1453) 문서 참고하십시오.
한편 같은 해인 1450년 6월 초, 켄트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의 지도자는 잭 케이드라는 인물로, '존 모티머'라는 가명을 쓰고 스스로를 '켄트의 대장'이라고 불렀다.
6월 11일, 수천 명의 반란군이 블랙히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봉기에 참여한 전직 군인들의 조언에 따라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우며 진영을 구축했다. 주교들과 런던 시 유력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진영을 방문하자, 케이드는 메인과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아넘긴 서퍽 공작의 당파를 정부에서 모두 해임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암살한 이들을 재판에 회부해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역자 서퍽 공작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 우리의 주권자로부터 추방된 고귀하고 강력한 왕족 요크 공작'을 국왕의 고문으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 6세는 포병대가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블랙히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반란군의 주장에 동조하며 진압을 거부하자 겁을 먹은 왕과 귀족들은 케닐워스 성으로 도망쳤다. 이후 반란은 잉글랜드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윌트셔에서는 솔즈베리 주교가 폭도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잭 케이드와 반란군은 결국 런던에 입성했다. 하지만 반란군이 안전하게 밤을 보내기 위해 사우스워크에 구축된 진영으로 철수한 사이, 런던 시의 유력자들이 이끄는 자경대가 왕실 군대와 힘을 합쳐 런던 다리를 탈환했다. 이후 반란군은 국왕의 사면 약속을 믿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잭 케이드의 사면은 가명으로 발급되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케이드는 체포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1451년 1월, 요크 공작의 가신인 스티븐 크리스마스는 헨리 6세가 잭 케이드의 난의 복수로 켄트를 초토화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를 계기로 켄트에서 또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서머셋 공작과 존 탈보트는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백 명이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수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이 요크 공작에게 지지를 표했었지만 반년 만에 일어난 두 번째 민중 봉기는 젠트리와 도시 유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요크 파벌은 계급 투쟁으로 분열되었다.
다음 해인 1452년 2월,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정부를 장악한 서머셋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고,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흔히 말하고 전해지는 것처럼, 이 왕국의 주권자가 프랑스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을 지배하는 동안에 세상으로부터 잉글랜드 국민들이 얼마나 큰 영토, 존경, 명예, 그리고 용기를 누렸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잃었을 때, 특히 서머셋 공작이 그곳의 지휘와 책임을 맡았을 때, 어떻게 잉글랜드 국민들이 경멸, 상업의 손실, 명예의 손상, 그리고 악명을 짊어졌는지를 알 것입니다. 이러한 손실은 왕의 적들이 가스코뉴와 기옌을 정복하고 가지도록 부추기고 장려했지요. 이제 그들은 칼레를 포위하기 위해 매일 진군하고 있으며, 이렇게 커다란 힘을 가지고 그 땅으로 들어오려 합니다.
그리고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은 요크 공작을 도시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왕명을 충실히 따랐다. 서퍽 공작을 처형하고 요크 공작을 정부로 보내라며 열광하던 2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분위기였다.3월 초, 켄트에서 지지세력을 모으고 돌아온 요크 공작이 웰링에서 국왕군과 대치했다. 협상장에서 요크 공작은 서머셋 공작이 최근 칼레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된 것을 거론하며, 서머셋의 진짜 목적은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았듯이 칼레를 부르고뉴에 파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요크 공작이 기대했던 것 만큼의 호응은 없었고, 오히려 공작 자신이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굴욕적인 공개 선서를 한 다음 사면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5월에는 프랑스의 동맹인 피렌체와 베네치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샤를 7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요크 공작이 심판의 날처럼 예언해 온 프랑스의 칼레 침공 위협 자체가 흐지부지되었다.
2.9. 헨리 6세의 정신 붕괴와 요크파의 반격 (1453~1454)
그렇게 해서 요크 공작은 대부분의 귀족 지지자들로부터 버림받았고, 보퍼트 파벌이 불완전하게나마 일단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1453년 중반이 되자 서머셋 공작의 통치 역시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무기력한 국왕이 한쪽 파벌에만 힘을 실어주지도, 파벌들을 중재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요크파와 보퍼트 파벌 간에 갈등의 골이 한없이 깊어졌고, 지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 잉글랜드 전역에서 지주들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헨리 6세는 1453년 8월 서부 지방 순행 도중 정신이 나가버렸다. 존 탈보트가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여행이 연약한 신체에 악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국왕은 의사소통을 하거나 스스로 음식을 먹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이제 어느 누구도 왕이 제정신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섭정 의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러면 섭정 의회를 누가 이끌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1453년 10월 왕세자가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마거릿 왕비는 이를 근거로 섭정 지위를 요구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은 외국인 여성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서머셋 공작의 정부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반대 파벌인 요크 공작도 귀족들과 하원 의원들 사이에 위험한 대중선동가로 낙인찍혀 있었고, 서머셋 공작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고 권위 있는 통치자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요크 공작은 헨리 6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1454년 3월 27일 의회에서 호국경으로 선출된다.
3. 1기 (1455~1464)
3.1. 세인트올번스 전투 (1455)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요크 공작의 정부도 서머셋 공작과 똑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서머셋과 달리 그는 의회의 승인을 거친 합법적인 국왕 대리인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결국 요크 역시 서머셋과 마찬가지로 귀족에 불과했고 지주 계급의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없었다. 1452년 서머셋 공작이 승리를 거두고도 요크 공작을 제거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요크 공작은 서머셋을 반역 혐의로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고도 결국 죽이지 못했다.
1454년 크리스마스에 헨리 6세는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고, 1455년 2월 서머셋 공작이 석방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요크 공작의 호국경직이 종료되었다. 3월에는 솔즈베리 백작을 포함해 주요 관직에 임명되었던 요크파 인사들이 해임되었다. 대부분의 귀족들도 다시 중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때 요크 공작이 처한 상황은 1452년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그는 강력한 대귀족인 네빌 가문[18]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1455년 5월 21일 레스터에서 귀족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에 요크파는 최악의 사태를 우려했다. 자칫하다간 요크 공작도 글로스터 공작처럼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의문사'당할 수 있었다. 요크파는 3000명 이상의 사병을 소집해 레스터로 향하는 국왕 수행단의 행렬을 가로막았고, 버킹엄 공작이 국왕을 대신해 협상에 나서자 요크 공작은 서머셋 공작의 신병을 요구했다.
이후 요크파 군대가 국왕군을 기습하면서 시작된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는 전투라기에는 사상자가 많지 않았지만, 요크 공작 리처드는 서머셋 공작 등 보퍼트파 귀족 여러 명을 죽이고 국왕 헨리 6세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 직후 헨리 6세는 두 번째 광증에 시달리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11월 의회에서 요크 공작은 다시 호국경으로 선출되며 처가인 네빌 가문과 함께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3.2. 마거릿 왕비의 역습 (1456)
세인트올번스 전투는 요크파와 보퍼트 파벌 사이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치닫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심지어 승리한 요크파가 국왕의 신병을 확보했고 보퍼트 파벌의 지도자인 서머셋 공작이 제거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쪽 파벌을 지지하는 귀족의 숫자는 여전히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지난 10년 동안 언제나 그랬듯 파벌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척하고 중립을 지키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거릿 왕비는 이를 기회로 보퍼트 파벌을 흡수하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헨리 6세가 의식을 되찾자 요크 공작은 개혁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호국경직을 사임했으며, 혼란스러운 정쟁 끝에 8월에서 10월 사이 마거릿 왕비의 파벌이 헨리 6세의 신병을 확보했다.
3.3. 샌드위치 습격 (1457)
정치적 흐름이 요크와 네빌 가문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명백했지만, 아직 그 변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버킹엄 공작 등 많은 귀족들이 내전을 막기 위해 단호히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1457년 8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를 습격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인 왕비에 대한 대중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명성 높은 군인인 요크 공작과 워릭 백작의 인기를 높였다.
3.4. 화해의 행진 (1458)
1458년 3월 24일, 마거릿 왕비의 후원으로 세인트올번스 전투에서 전사한 보퍼트파 귀족들의 상속인들과 요크파 귀족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서머셋과 솔즈베리, 노섬벌랜드와 워릭, 심지어 요크 공작과 마거릿 왕비까지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했다.
이로써 세인트올번스 전투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어둠속에 묻으려 했던 중립파 귀족들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 치열하게 대립 중인 두 파벌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미전쟁은 화해의 장에서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1458년 5월 말, 워릭 백작이 지휘하는 칼레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6척의 배를 나포했고, 며칠 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중립 선박에 대한 사실상의 해적 행위는 이전부터 흔한 일이었고, 대중들에게는 심지어 적국 함대와의 교전에서 승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영웅적인 업적으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잉글랜드 제일의 정예군인 칼레 수비대를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마거릿 왕비는 이를 명분으로 워릭 백작을 런던으로 소환했다.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명에 따랐지만, 근위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다시 런던을 탈출해 칼레로 돌아갔다.
그밖에도 랭커스터파는 요크파 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해임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다.
3.5. 블로어 히스 전투 (1459)
1459년 6월, 마거릿 왕비는 코번트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요크파 귀족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이를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요크파 지도부는 러들로에서 자신들만의 회의를 여는 동시에 군사를 소집했다.
9월 23일, 오들리 남작이 블로어 히스에서 요크파 군대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패배하고 전사했다.
3.6. 러드퍼드 다리 대치 (1459)
우여곡절 끝에 러들로에 집결한 요크파 지도부는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에 마거릿 왕비는 오들리 남작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항복한 반란군을 모두 사면하겠다고 답했다.
1459년 10월 12일, 국왕군이 러드퍼드 다리에서 요크파 군대와 대치했다. 하지만 약 20년 간 계속된 무정부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랭커스터 왕조와 국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크파 지도부는 자신들의 적이 외국인 왕비일 뿐 국왕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헨리 6세와의 면담을 피하고 최선을 다해 국왕을 못 본 척했지만, 결국 이러한 연극은 실패로 끝났고 워릭 백작이 데려온 칼레 주둔군의 주도로 내분이 벌어졌다. 이에 요크파는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으며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로, 워릭과 솔즈베리와 요크의 장남인 마치 백작(훗날의 에드워드 4세)은 칼레로 도망쳤다.
11월, 코번트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6명의 요크파 귀족과 21명의 비귀족이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저항을 멈추고 항복한 이들은 사면을 받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났다. 러드퍼드 다리에서의 대치의 결과는 누가 봐도 랭커스터파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따라서 이는 패배한 요크파를 분열시켜서 더 쉽게 제압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지만, 워릭 백작에게는 랭커스터파가 예상하지 못한 비밀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여유만 부리다가 요크파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한 꼴이 되었다.
3.7. 노샘프턴 전투 (1460)
워릭 백작이 가진 진정한 무기는 군사적 명성과 그에 기반한 대중의 인기였다.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자들로부터 랭커스터파의 칼레 원정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수집하고 있었던 워릭은 1460년 1월 15일 새벽 샌드위치에 집결 중인 랭커스터파 함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6월 초, 칼레 함대가 샌드위치에 집결 중인 랭커스터파 함대를 또다시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후 치열한 전투 끝에 도시를 점령했고, 이로써 요크파는 본토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한편 워릭 백작은 군사작전 외에도 활발한 선전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잉글랜드 전역에 유포된 선언문을 통해 자신의 의도가 단순히 왕국의 고통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이 무렵 요크파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특히 남동부에서 인기가 높았다.
6월 말, 워릭 백작이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행군 도중 무수히 많은 '켄트, 서식스, 서리의 평민 보병'이 합류해 7월 1일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병력이 2~4만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 광경에 압도당한 런던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국왕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개혁하는 것이라는 반란군의 주장을 믿는 척하며 성문을 열었고, 요크파는 런던 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입했다.
7월 3일, 요크파 지도부는 오직 국왕에게 올바른 조언을 전하고자 할 뿐이라고(즉 왕을 폐위하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선서한 뒤, 약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여 노샘프턴 근처에서 왕의 군대와 마주쳤다.
7월 10일, 폭우 속에서 요크파 군대가 절반 정도 되는 국왕군을 공격했다. 선봉대 지휘관 루신의 그레이 경이 요크파에 매수되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탈영해버리자 국왕군은 30분 만에 무너졌다. 헨리 6세는 다시 요크 파벌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마거릿 왕비는 왕세자와 함께 북웨일스로 도망쳤고, 동맹인 서머셋과 엑서터에게 편지를 보내 헐(Hull)에서 북부군을 소집하도록 한 뒤 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나는 척하면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덤프리스에 상륙했다.
하지만 마거릿이 도착하기 직전, 록스버러 성을 포위공격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가 대포 폭발 사고로 치명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3.8. 웨이크필드 전투 (1460)
1460년 10월 16일, 요크 공작 리처드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왕처럼 행진하며 런던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서 요크 공작은 악수를 두는데, 귀족들 앞에서 옥좌에 직접 손을 올리는 행동으로 왕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무리 헨리 6세가 결점이 있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을 물러나게 할 생각은 없었고,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요크 가문은 '우리도 한번 뒤집어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뒤집고 랭커스터 왕조를 연 것처럼 우리도 못 할 게 뭐냐"는 생각에 따라 요크의 리처드는 자신이 단순히 헨리 6세의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플랜태저넷 왕조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 주장은 그의 아들 마치의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다.
이 논리에도 명분은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면 되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자녀없이 죽었고, 남자 형제가 없었다. 즉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하면 그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형제 또는 그 장남이 왕위 계승자였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큰누나인 앤 모티머는 제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어머니였다.[19]
12월 9일, 마거릿 왕비가 약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크로 진군하자 요크 공작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북상했다.
크리스마스경 요크 공작은 샌들 성에 머무르고 있었고, 왕비가 야만적인 북부인과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된 군대로 남부를 불태우려 한다고 비난하는 선전을 펼쳤다. 그동안 서머셋 공작은 요크 가문의 영토에서 공세를 펼쳤고, 샌들 성으로 전령들을 보내 여자를 두려워하여 성 안에 숨어 있는 요크를 모욕하는 말을 외치게 했다. 어쩌면 성 안에 자신의 부하들을 침투시켜 랭커스터파 군대가 실제보다 작다는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다.
12월 30일, 도발에 응해 밖으로 나온 요크 공작은 웨이크필드 외곽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둘째아들 에드먼드, 처남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까지 전사했다.[20] 마거릿 왕비는 숙적인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잘린 목을 요크 성문 위에 내걸고, '요크 공작은 요크 성이나 다스려야 한다'며 조롱했다고 한다.
3.9.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1461)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왕위 요구는 그의 맏아들 마치 백작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다. 웨일스 변경에서 군대를 소집하고 있었던 에드워드는 이제 마거릿 왕비보다 먼저 런던을 점령해야 했다. 그는 헤리퍼드에서 웨스트 미들랜드 군대의 소집을 명령하고 글로스터셔로 향했지만, 곧 그의 군대를 향해 진군해오는 오웬과 재스퍼 튜더의 웨일스 군대를 막기 위해 방향을 바꾼다.
1461년 2월 2일, 랭커스터파 군대가 러그 강 앞 교차로를 점령하고 있는 요크파 군대를 공격했다. 랭커스터 군의 좌익이 돌격해 요크 군의 우익을 밀어냈지만 중앙의 에드워드는 버텼다. 재스퍼 튜더 휘하의 랭커스터 우익의 돌격도 막혔고, 전투는 일시적인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웬 튜더가 다시 돌격했지만 격퇴당했고, 요크파의 반격에 랭커스터 군의 중앙이 무너졌다. 오웬 튜더는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곧 붙잡혔고 2월 3일경 헤리퍼드 시장에서 참수당한다.
3.10. 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1461)
1461년 2월 17일, 워릭 백작과 노퍽 공작이 이끄는 요크파 군대가 세인트올번스에 집결했다. 그러나 마거릿 왕비와 서머셋 공작이 이끄는 랭커스터 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며 국왕 헨리 6세까지 랭커스터파에게 탈취당한다.
다음 날 랭커스터 군은 세인트올번스를 철저히 약탈했으며, 헨리 6세의 반대를 무시하고 수도원까지 불태웠다. 이에 런던 시민들은 랭커스터 군이 런던에 입성하면 스코틀랜드인들의 손에 런던이 약탈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2월 21일, 랭커스터 군 선봉대가 런던 시 교외에 도착했지만 도시 입성에 실패하고 지역 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민심의 이반을 두려워한 데다가 스코틀랜드군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던 마거릿 왕비는 결국 런던 진군을 포기하고 미들랜드로 철수하는 악수를 둔다.
2월 27일, 요크 공작 에드워드가 노샘프턴에서 퇴각한 워릭 백작의 부대와 합류한 뒤 런던에 입성했다.
3월 3일, 런던 시민들의 탄원에 따라 요크파 의회가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요크 공작 에드워드를 왕으로 선출했다. 탄원서에 따르면 헨리의 통치 기간 동안 끝없는 무질서, 불의, 폭력, 약탈, 악행이 만연했는데, 이는 그가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눈 밖에 났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1460년 10월의 휴전 협정을 위반했으므로 위증자이다. 당일 요크 공작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4세로서 왕위에 오른다.
3.11. 토우턴 전투 (1461)
1461년 3월 28일, 피츠월터 경이 이끄는 요크군 선봉대가 페리브리지에서 에어 강의 도하 지점을 확보했지만 곧 랭커스터의 공격으로 격퇴당하고 다리는 철거되었다. 이에 요크파 군대는 캐슬포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강을 건너 북쪽 제방의 쏟아지는 우박 속에서 야영한다.
3월 29일,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파 군대가 토우턴에서 랭커스터 주력군을 궤멸시켰다. 바람이 북쪽으로 눈보라를 날려 랭커스터군 궁수들을 무력화시켰는데, 이것이 결정적 요인이었을 수 있다. 양측은 눈보라 속에서 백병전을 벌였고 해질녘까지 몇 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3월 30일, 에드워드 4세는 요크에 입성하여 아버지, 동생, 삼촌의 머리를 내리고 처형된 랭커스터파 귀족들의 머리를 걸었다. 마거릿 왕비는 남편, 아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도망쳤고, 북부와 남서부 웨일스는 재스퍼 튜더 휘하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6월, 마거릿 왕비가 스코틀랜드 군대를 이끌고 노섬벌랜드로 진입했지만, 워릭 백작의 동생인 몬터규 경 존 네빌에 의해 격퇴되었다. 마거릿 왕비의 사절단은 분열된 스코틀랜드 섭정 정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해 프랑스로 향한다.
6월 28일, 에드워드 4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7월 31일 워릭 백작을 스코틀랜드 동부 및 서부 국경의 관리자로 임명한다.
10월, 래글런의 허버트 경이 이끄는 요크파 군대가 재스퍼 튜더의 랭커스터군을 격퇴하고 카나번 성을 점령하면서 웨일스의 대부분이 정복되었다.
11월 1일, 의회에서 에드워드 4세는 9살 된 막내 동생 리처드를 글로스터 공작으로 임명하고 요크셔에 있는 미들햄 성에서 워릭 백작의 보살핌을 받도록 보냈다.
3.12. 뱀버러 포위전 (1462)
1462년 2월 13일, 스코틀랜드가 랭커스터 가문을 지원한 데 대한 보복으로 에드워드 4세는 스튜어트 가문의 최대 적수인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와 그의 동생 존을 헤브리디스 제도로 보내 '제도의 영주(Lord of the Isles)' 존 맥도날드와 웨스트민스터-아드토니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존은 잉글랜드 왕의 신하이자 포스 강 이북의 모든 스코틀랜드 영토에 대한 정당한 군주로서 북쪽에서 스코틀랜드 섭정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6월 13일, 남편 헨리 6세를 스코틀랜드에 놔두고 프랑스로 항해한 마거릿 왕비는 루이 11세를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루이는 그녀에게 칼레를 넘겨주라고 말했지만, 마거릿 왕비는 그러한 소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루이 11세는 랭커스터파에 2만 프랑과 2천 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약속한다.
10월 말, 마거릿 왕비는 약 2천 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랭커스터군은 던스탄버러와 안윅 성을 점령했지만 워릭 백작이 대군을 이끌고 진군해오자 베릭 성으로 퇴각한다.
11월 초, 에드워드 4세가 더럼에서 홍역으로 앓아누운 사이 워릭 백작이 주요 거점들을 탈환하고 뱀버러를 포위했다. 이에 랭커스터군 주력이 저항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로 후퇴하면서 요크파가 뱀버러와 안윅을 점령한다.
3.13. 생오메르 회담 (1463)
1463년 4월 말, 마거릿 왕비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다시 노섬벌랜드로 진군해 뱀버러와 안윅을 탈환했다.6월 28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중재로 루이 11세가 에드워드 4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이미 잉글랜드와의 동맹 쪽으로 마음이 기운 루이는 마거릿에게 지원금으로 겨우 1000크라운만 보낸다. 이에 스코틀랜드의 왕대비 역시 에드워드 왕자와 딸의 약혼을 파기했다. 동맹들로부터 버림받은 마거릿 왕비는 약 200명의 병력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다.
3.14. 헥섬 전투 (1464)
1464년 4월 25일, 궁지에 몰린 랭커스터파가 헤즐리 무어에서 요크파 군대를 매복 공격했지만 오히려 반격을 받아 패배한다. 랄프 퍼시는 전사하고 서머셋 공작은 도망쳤다.5월 15일, 서머셋 공작이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헥섬 전투에서 패배했다.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6월 23일, 잉글랜드 북부에 남은 랭커스터파의 마지막 거점 안윅이 항복하면서 내전은 요크파의 승리로 끝났다.
4. 2기 (1464~1471)
4.1. 에드워드 4세의 축출과 복위
에드워드 4세는 구 랭커스터파 정적들에게 관대한 편이었기에 치세 초기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인 워릭 백작 몰래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우드빌 집안의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우드빌 가문 사람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네빌 가문과의 관계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끌어들여 에드워드 4세를 납치했지만 국왕이 없는 상태의 국정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에드워드 4세를 풀어주었다. 에드워드 4세는 관대하게 두 사람을 용서했지만 이들이 다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사주했음이 밝혀지자 이들을 반역자로 선포했고, 두 사람은 프랑스로 망명했다.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에드워드 4세를 견제하고자 했고, 자신의 궁정에 있던 랭커스터파의 영수 마가렛 왕비가 구적인 워릭 백작과 화해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이 사주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1470년 가을, 워릭이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런던을 점령하여, 헨리 6세가 복위되었고,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려 에드워드 4세는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의 리처드 3세)와 함께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처음에는 에드워드 4세를 지원하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으나,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부르고뉴 침공을 계획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 병력을 지원했다. 에드워드 4세의 상륙 이후 랭커스터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진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 4세에게 합류하는 등 요크 지지파가 에드워드에게 집결하자, 에드워드 4세는 런던을 탈환하고 다시 헨리 6세를 확보한 이후 바넷 전투에서 네빌 형제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전사시키며 승리했다. 전투 승리 직후 헨리 6세는 런던탑에서 의문사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위협받지 않게 되었다.
5. 3기 (1483~1487)
5.1. 리처드 3세의 찬탈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서 평화롭던 요크 왕가에 그의 형제인에드워드 4세는 숱한 위기 때마다 자신을 충실히 보좌해준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신뢰했고, 죽기 직전 리처드를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자 호국경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어린 에드워드 5세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는 그의 외삼촌이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 앤서니 우드빌, 엘리자베스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호국경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윽고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런던탑에 감금했다. 이후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정당한 결혼이 아니므로 에드워드 5세를 비롯한 두 사람의 자식들은 사생아이며, 자신이야말로 에드워드 4세의 적법한 계승자이자 정당한 왕이라고 선포했다. 그렇게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리처드 3세로 즉위했고,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리처드 3세의 찬탈은 기존 요크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리처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의 생존자들 및 우드빌 가문 등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 상당수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후계자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22]와 연합하여 리처드 3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처드 3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요크 왕조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조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한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는데 리처드 3세의 지지층 이탈만 가속시킬 뿐이었고, 헨리 튜더는 자신이 즉위하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을 포용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5.2. 튜더 왕조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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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5년 웨일스에 상륙한 헨리 튜더의 반란군은 보스워스에서 리처드 3세의 진압군과 결전을 펼쳤다. 전투 도중 후방에 물러나 있던 헨리 튜더를 발견한 리처드 3세는 그를 죽이고 전투를 빨리 끝내기 위해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돌진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반란군에 포위당한 리처드 3세는 낙마한 끝에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왕관을 헨리 튜더가 쓴 순간을 잉글랜드에서의 중세의 끝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헨리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 헨리 7세로서 튜더 왕조를 세운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헨리 7세의 왕권은 보스워스에서 확립되었지만, 이후 1487년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헨리 7세가 요크파 칭왕자 램버트 심넬과 리처드 3세의 조카 링컨 백작 존 드라폴을 격파한 것도 장미 전쟁에 포함하기도 한다. 1495년 이후인 퍼킨 워벡의 난은 보통 장미 전쟁에 포함하지 않는다.
6. 결과와 영향
"나는 7년 전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새끼 고양이가 지배하던 궁궐은 힘든 곳이었다'란 말을 기억한다. 성경도 그 말씀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왕인 나라에 슬픔이 있을지니!' 그러니 그의 권위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한 명의 폭군을 제거한 결과가 가져오는 해악과 슬픔보다는 작은 손실이 더 나으니까. 궁궐의 고양이가 갑작스런 공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다면 시궁쥐들은 사람들의 옷가지를 씹고 우리 생쥐들은 맥아를 먹을 것이다."
윌리엄 랭글런드, '농부 피어스의 꿈'
윌리엄 랭글런드, '농부 피어스의 꿈'
현재로선 부정되지만 이 전쟁이후 영국에서 귀족들의 권한은 기존보다 약화되었으며, 젠트리, 요먼등의 중산층들이 지배층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설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죽어나가면서 '튜더 절대왕정'으로의 길이 열렸다는 믿음은 중세 후기 정치 사회 연구자인 K.B.맥팔레인(1903-1966)에 의해 오래 전에 폐기되었다. 최근의 연구들은 귀족들의 사망률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으로 대가 끊긴 귀족이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1436년 소득세 평가에 따르면 잉글랜드 전역의 젠트리 7133가구가 연수입 150000파운드 가치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귀족 51가구가 연수입 45000파운드 가치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이 시기 평신도 지주들이 보유한 토지의 약 70%는 젠트리 소유였다. 이 모든 지주들의 권력은 토지 소유에 기반했고, 따라서 토지 소유권의 안전을 보장하는 왕의 법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즉, 지주들은 지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이 필요했다. 현대의 공장 화재와 달리 전쟁으로 황폐화된 중세 경작지의 손실은 보험금으로 만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이라는 더 나은 대안이 있는 한 스스로의 무력으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주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모든 지주들은 질서가 무너져 무정부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계약은 국왕법정의 성장, 분할상속, 화폐경제와 토지시장의 발전 등으로 13세기 전후에 유명무실해졌고, 이 시기 귀족들의 권력은 부분적으로는 화폐를 매개로 한 보다 비공식적인 주종관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방 유력자이자 토지거래의 신뢰를 보증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 등 필수적이지만 중앙에서 일일이 통제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지방행정의 민간 보조자로서의 역할에 기반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전에서 승리하면 권력을 더 얻을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귀족들과 달리 대다수의 소지주들에게 장미전쟁과 같은 내전은 광기어린 재난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 젠트리들은 왕을 감시하고 교섭하는 역할을 지방 유력 귀족들에게 맡기는 대신 스스로 하기를 원했다. 귀족들이 샤이어 내부에서 리더십을 상실하면서 국왕은 그들을 따돌리고 젠트리와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샤이어의 문지기이자 지방민들의 대변인이라는 고유한 지위를 박탈당한 귀족들은 이전보다 취약한 위치에 놓였다. 그들은 이제 엄격한 통제를 받았고, 모호한 구실로 토지를 압류당할 수 있었고, 불확실한 혐의로 처형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장미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유일한 절대왕정인 튜더 왕조를 세웠다.
한편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이후로 지금까지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23]이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및 이후 영국 국왕이 보유한 비공식 칭호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명시적으로 랭커스터 공작의 칭호를 국왕에게 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랭커스터 공작령(Duchy of Lancaster)은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처럼 되어 있고, 관행적으로 국왕을 랭커스터 공작이라고도 부르는 등 관례가 남아있다. 특히 랭커스터에서...[24]
반면 랭커스터 가문의 맞수였던 요크 가문의 요크 공작(Duke of York) 칭호는 용도가 바뀌어서 주로 잉글랜드·영국 국왕의 차남에게 부여하는 칭호가 되었다. 이 관행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요크 공작의 칭호를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약 20명의 역대 요크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후손에게 물려 준 사례가 한 번도 없었다.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거나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앤드루 왕자 또한 남성 상속인이 없기 때문에 추후에 웨일스 공 윌리엄이 즉위한 후 윌리엄 왕세자의 차남인 웨일스의 루이 공자가 받을 가능성이 높다.
랭커스터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가 정기전을 치르는데, 서로의 특수한 관계성 때문에 장미전쟁의 영향을 받아 정기전 이름은 'Roses'라고 부른다.
조지 RR 마틴이 장미 전쟁에서 영감을 얻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의 《다섯 왕의 전쟁》의 설정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실 그 이전에 스타크 가문과 라니스터 가문의 이름부터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에서 따왔다.
현존하는 영국 귀족 가문들 중 가장 오래된 가문들은 이 시대와도 관련이 깊다. 영국 귀족 서열 1위인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은 리처드 3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존 하워드가 하사받은 공작위에서 기원하며,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네빌 가문은 리처드의 숙부의 계보인 애버개브니 후작으로, 네빌 가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노섬벌랜드 백작 퍼시 가문은 모계 계승을 거쳐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이어졌다. 랭커스터 왕조의 사생아 분파이자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던 서머셋 공작 보퍼트 가문은 다시 사생아를 통해 가문이 이어져 보퍼트 공작 서머셋 가문이 되었다. 이외에도 헌팅던 백작 헤이스팅스 가문, 데본 백작 코트니 가문, 더비 백작 스탠리 가문, 슈루즈버리 백작 탤벗 가문 등이 있다.
7. 기타
- <장미 전쟁> 온라인 게임
1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생각되는 웹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
유저는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 내에서 사냥을 다니거나 나라를 세워 왕노릇을 하거나 타 유저의 나라에 들어가 정치나 전쟁을 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
- 축구 더비 매치
자세한 내용은 로즈 라이벌리 문서 참고하십시오.
리즈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일컫는 말. 이름의 유래는 1번.
- 학교대사전
학교대사전에서 교사들끼리 서로를 증오하여 벌이는 사투를 일컫는 말. 이들은 수업시간에 서로를 욕하는데 학생들은 이들 선생을 아주 재미있게 구경한다. 유래는 1.
비슷한 말로는 영역싸움[25]이 있다.
7.1. War of the Roses: Kingmaker
자세한 내용은 War of the Roses: Kingmaker 문서 참고하십시오.7.2. 장미전쟁(보드 게임)
자세한 내용은 장미전쟁(보드 게임) 문서 참고하십시오.7.3.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
자세한 내용은 장미 전쟁(창세기전 시리즈) 문서 참고하십시오.[1] 튜더 가문이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이고, 랭커스터 가문 지지파들도 헨리 튜더의 편을 들었기에 딱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대결로만 보면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라 볼 수 있다.[2] 실제 꽃 색깔은 연분홍색이긴 하지만 위에서도 보이듯 문장 색깔은 새빨갛게 했기 때문에 붉은 장미란 말이 돈 것이다.[3] 어떻게 보면 해당화나 찔레꽃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4] 여기에 대해서는 장미 항목을 참고바람.[5] 1397년 헨리 볼링브로크와 노퍽 공작의 결투재판. 시작되기 직전 왕명으로 취소되었다.[6] 청원파의 목적이 왕권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청원파는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리처드 2세 및 헨리의 막내 숙부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필두로 한 왕의 친척들이 주도했다. 왕권이 약화되면 왕과의 혈연이 권력 기반인 그들의 권위도 낮아질 테니 이들은 도리어 왕권이 크게 약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청원파는 왕이 방계 왕족을 못살게 구는 것을 견제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이 권신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파벌이었다.[7] 1403년 퍼시 반란을 결판낸 슈루즈베리 전투. 이 전투에서 왕세자 헨리(훗날의 헨리 5세)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8] 참고로 할아버지인 제3대 마치 백작의 이름도 에드먼드였고, 숙부의 이름도 에드먼드 모티머였다.[9] 이 사람도 오래는 못 살고 29세 때 요절했다.[10] 이론적으로 완전 부정은 아니나 사실상 부정이나 다름없다. 실제 이 규칙이 적용된 프랑스 왕실에서는 1,0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여왕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규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문화되어, 곤트의 존의 5남의 손녀의 아들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11] 당장 《살리카법》은 외손자의 왕위 계승은 인정한다.[12] 1415년 아쟁쿠르 전투. 이 전투는 잉글랜드 내에서 랭커스터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종식시켰다.[13] 1424년 베르뇌유 전투. '제2의 아쟁쿠르 전투'라고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14] 1447년 글로스터 공작의 죽음. 시신에서는 상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그가 보퍼트 파벌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믿었다.[15] 사실 외할아버지 샤를 6세 역시 선량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절대로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을 찔러죽인 사고는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에서 "너 지금 배신당했다."라는 허황된 소리를 믿고는, 주변 시종들을 암살자라고 착각해 벌어진 사건으로, 샤를 6세의 생애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16] 1450년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붙잡혀 참수형을 당하는 서퍽 공작.[17] 1450년 잭 케이드의 난. 런던에 입성한 반란군은 길드홀을 점거한 뒤 보퍼트 파벌을 대상으로 한 모의 재판을 벌였다.[18] 요크 공작 리처드의 처남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그 아들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19] 참고로 앤 모티머와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6촌 친척이었다. 앤 모티머는 친척 할아버지뻘에게 시집간 셈이다. 실제 나이 차이는 많이 안 나서 리처드가 15세가량 연상이었다.[20] 요크파가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한 나머지 무지개 색깔을 외우는 방법 중 하나인 'Richard of York gave battle in vein'(요크의 리처드가 전투를 헛되게 내주었다)이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21] 이에 대해 리처드 3세를 지나치게 추남에 악마화한 것은 내전의 승자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를 띄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2] 어머니 혈통이 랭커스터 가문의 분파인 보퍼트 가문이긴 했지만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와의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들로 이루어진 집안이었다. 나중에 존과 캐서린은 정식 결혼을 했고, 이로써 사생아들도 적자로 취급받게 되었지만 헨리 4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 등, 정상적으로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23] 여성 공작일 경우에도 그냥 Duke를 쓴다. 여성형인 Duchess로 쓸 경우 남성 공작의 부인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남성형을 쓰는 것이다.[24] 랭커스터에서는 종종 God Save the King 1절 첫 부분 "God save our gracious King, long live our noble King"에서 noble King을 noble Duke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가사 내의 모든 King을 다 Duke로 바꾸는 건 아니고 딱 저 부분만.[25] 육식 동물들이 자신의 고유 영역을 지키듯 수업시간에는 교실이 교권 신수설에 의해 그 선생의 것이다. 이를 다른 선생이 침범하면...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이면 신경전이 더더욱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