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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ais 칼레 | |
시기 | |
문장 | |
국가 | <colbgcolor=#fff,#191919>프랑스 |
레지옹 | 오드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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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레(Calais)는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이다. 오드프랑스 주의 파드칼레 현에 속해 있으며, 도버 해협을 끼고 영국과 마주 보고 있다. 해저터널에 있는 철도나 도로를 이용해 영국으로 갈 수 있다.[1] 자가용이나 유로라인 등 국제버스는 출입국심사 후 자동차 수송용 기차 안에 차가 통째로 들어가서 터널을 건넌다.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벨기에, 그러니까 플랑드르(플란데런) 지역과 참 가깝다. 그러다 보니 됭케르크처럼 네덜란드계(플랑드르계) 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후술할 내용처럼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고 지리적으로도 잉글랜드와 가깝다 보니, 바다를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의 후손들도 살고 있다.
영어식 발음은 '캘리스'였으나 요즘은 원어 발음에 가까운 '캘레이'라고 읽는다.[2] 중세 영어나 중세 프랑스어로는 Calaisis라고 썼다.
2. 역사
2.1. 백년 전쟁 이전
도시를 처음 세운 건 로마인이었다. 로마시대 당시 명칭은 칼레툼(Caletum). 갈리아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칼레를 브리타니아 침공의 거점으로 삼는다. 로마인이 물러간 후엔 프랑스왕을 명목상 주군으로 따르던 플랑드르 백작의 영지였다. 플랑드르 백작은 다른 저지대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작위만 낮을 뿐 독립세력이었으므로 로마 이후 본래 프랑스 고유의 영토였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고 고유한 국가가 존재했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2.2. 잉글랜드 왕국의 점령(1차 칼레 공방전)
그러다 칼레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백년전쟁 중인 1347년의 일이다. 당시 친히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크레시 전투 등에서 승리하여 프랑스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내에 전진 기지를 설립하여 본국에서부터 보급품도 받고. 또 겨울철에 병사들이 숙영할 수도 있게 하려 했는데, 그런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도시가 칼레라고 판단했던 것. 일단 이중의 해자 덕분에 방어에 유리할뿐더러,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잉글랜드 본국과 대단히 가깝기 때문이다.1340년의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대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백년전쟁 중의 전쟁터가 거의 대부분 프랑스인 것이 전쟁 초반에 제해권을 잉글랜드에 내주었기 때문이며, 칼레를 전진기지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제해권이 잉글랜드 쪽에 있었기 때문. 이런 상황은 프랑스가 스페인(보다 정확히는 카스티야) 함대와 연합하여 잉글랜드 함대를 격파한 1372년의 라 로셸 해전(Battle of La Rochelle) 때까지 계속된다.
2.3. 칼레의 시민들 (노블레스 오블리주)
로댕의 동상, "칼레의 시민" |
다만 이 일화는 오늘날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과장된 이야기라는 주장이 있다.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기록한 사료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료는 같은 시대의 프랑스인(정확히는 저지대 에노Hainaut 출신)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의 연대기인데, 오늘날 학자들은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는 백년전쟁 전반기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사료라고 인정하면서도 세세한 오류가 많아서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3] 하지만 이후 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일화가 문자 그대로 100%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정확히 번역하면 '칼레의 시민'이 아니라 '칼레의 부르주아(버거;Burgher, 공민)'가 보다 정확한 말이라고 한다. 대표 여섯 명의 항복 자체는 인정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다
그 외에도 이 일화에서 착안한 게오르크 카이저의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줄거리는 자진해서 나온 사람이 일곱 명이 되자 한 명이 다음 날에 지정된 장소로 가서 불참하는 사람이 빠지기로 제안했는데, 그 다음 날에 그 제안을 한 자는 지원한 사람들이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결했다. 그 뒤 전개는 동일하다.[4]
문단 맨 위의 사진은 이 일화에서 등장한 여섯 명의 공민들을 기리는 조각상이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용감한 행적과는 달리 곧 다가올 죽음의 공포에 떨며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레와 칼레 시민 전체의 운명을 위해 나섰다는 것을 주지시킴으로써 이들의 용기와 희생을 부각시키려는 로댕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공개된 직후에는 영웅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기대했던 대중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 로댕의 작품 의도가 수용되며 걸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2.4. 백년전쟁 이후 잉글랜드의 지배
이후 칼레는 백년전쟁이 끝난 뒤로도 유럽 내륙 내에 위치한 유일한 잉글랜드 영토로 남았고, 그 상태 그대로 백년이 흘렀다. 정확히는 잉글랜드의 관점에서도 엄밀히 말하면 잉글랜드 땅이 아니라 프랑스 땅이었는데, 잉글랜드 국왕이 백년전쟁이 끝났어도 명목상 프랑스 국왕이라고 참칭했으므로 잉글랜드 국왕이 자칭 프랑스 국왕이자 칼레의 영주로서 지배한 것이다.2.5. 프랑스의 탈환
결론부터 말하면,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하게 된 것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노라고 작정한 결과라기보다 어쩌다 보니 탈환했다고 하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1494년 이래로, 프랑스는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과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문화, 경제적으로는 더 없이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군사력은 허약하기 그지없는[7] 상태로, 결과적으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 볼 때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기 때문. 하지만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연합[8]에 번번이 밀리고 있었고, 백년전쟁 때 프랑스 내에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도 프랑스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과 함께 간간이 프랑스를 공격했다.
그러던 1558년 8차 이탈리아 전쟁(1551~1559) 중에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칼레 공격을 명했다. 이 명령엔 잃어버린 영토 회복이라는 목표도 물론 있었지만, 당시의 프랑스로서는 스페인의 동맹으로서 자신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잉글랜드의 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메리 1세는 의회가 결사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고[9] 그에 따라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국왕과 의회의 사이가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전쟁 따위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이에 앙리는 잉글랜드부터 확실히 꺾어버리고 스페인과의 최종 결전에 임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칼레를 공격하는 프랑스군의 수가 2만 7천에 그 지휘관은 이탈리아 전쟁 후반기 프랑스 최고의 맹장(猛將)인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로렌(Francis de Lorraine II, Duke of Guise)이었던 데에 비해[10], 잉글랜드 측의 수비군은 꼴랑 2천 5백 명에 불과했다. 당시 칼레의 수비군 대장이었던 토머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는 일찍부터 프랑스군의 공격을 내다보았던 터라 잉글랜드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했지만, 2백년 동안이나 잉글랜드령이었던 도시가 쉽게 함락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국왕과 의회의 갈등 때문인지 잉글랜드는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으로 일관했다. 아니나 다를까 칼레는 공방전이 시작된 날로부터 일주일도 채 못 되어 함락당하고 만다.[11]
칼레 탈환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꽤나 기뻐했던 모양이다. 같은 해 1월 23일에 친히 칼레에 입성하여 프랑스 영토임을 선언했던 것인데, 당시의 통신이나 교통을 생각해보면 탈환 소식을 받자마자 칼레로 향했던 듯. 또한 앙리는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지방행정조직을 재편하여 칼레를 정식 영토로 수복하는 후속조치를 완료했다.
하지만 칼레 탈환 이후의 '스페인과의 결전' 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칼레 함락 이후 앙리는 프랑수아 드로렌에게 곧바로 룩셈부르크로 진격할 것을 명하는 한편 폴 드테르메(Paul de Thermes)에게 군대를 주어 베네룩스로 진격하게 했는데, 1558년의 그라블린 전투(Battle of Gravelines)에서 폴 휘하의 군대가 네덜란드 출신의 지휘관인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 판에흐몬트(Lamoral van Egmont, Count of Egmont)에게 개박살[12]. 앙리는 할 수 없이 이듬해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 이탈리아 거의 대부분이 스페인 영토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13].
한편 잉글랜드는 칼레 함락이라는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프랑수아 드로렌의 배려로 살아남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잉글랜드에 무사 귀국한 토머스 웬트워스는 곧바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는데, 그 죄목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반역죄. 일찍부터 지원군을 거듭 요청했던 토머스의 입장에서는 심히 억울한 일이었을텐데 다행히도 머지않아 무죄 석방됐다. 웬트워스는 20여년 뒤인 1584년에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거 봐라. 스페인 놈을 남편으로 맞아들이지 말랬더니 끝끝내 결혼해 가지고서는 이게 뭔 일이냐"라는 비난이 높아졌던 듯하다.[14] 이 때문이었는지 칼레 함락 이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던 메리는 신하들에게 "짐이 죽어서 해부된다면, 그대들은 짐의 심장에 펠리페와 칼레라는 두 단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칼레의 함락과는 전혀 무관했는데도 엉뚱하게 피해를 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메리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를 꼽을 수 있다. 메리 1세의 실정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잉글랜드 의회 의원들 사이에 "역시 여자 따위가 왕이 되니까..."라는 생각이 퍼졌다. 그리고 메리의 뒤를 이어 또 다시 여왕이 즉위하자 의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서 빨리 결혼하시어 정치라는 여자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짐을 하루빨리 내려놓으소서"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는 성별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2.5.1.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가?' 칼레가 잉글랜드에 함락된 것은 1347년. 백년전쟁이 끝난 것이 1453년인데, 프랑스의 칼레 탈환은 1558년에야 이루어졌다. 즉 백년전쟁이 끝나고 백년도 더 지나 탈환했고, 칼레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은 기간은 2백 년이 넘는다는 말이다.하지만, 이를 프랑스가 칼레 회복에 관심이 없었다거나 역대 프랑스 왕들이 게으르고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극히 곤란하다. 당장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만 하더라도 맞수인 카를 5세[15]에게 군사적으로 밀려서 그렇지 문학, 건축, 그림, 언어, 교육 등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다. 또한 프랑수아 1세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프랑수아의 선왕이자 장인인 루이 12세(재위: 1498~1515)도 내정을 훌륭하게 관리한 왕이다. 치세 동안 단 한 차례의 반란도 경험한 바 없고, 1506년에 투르에서 개최된 삼부회에서는 '국가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 또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루이 12세의 프랑스가 연거푸 전쟁[16]에 참가하면서도 재정난을 겪지 않은 것에 대해 루이가 평소에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렇듯 훌륭한 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하지 못한 것은, '탈환하지 못한 게 아니라, 탈환하지 않았던 것' 이라는 데에 그 해답이 있다.
백년전쟁을 끝낸 프랑스 왕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전후 복구 사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선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아들로 뒤를 이은 루이 11세(재위: 1461~1483)는 왕권 강화야말로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왕실 방계임에도 아예 독자세력화하려는 각을 보는 부르고뉴국 등 자신의 앞길을 막는 귀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 연계하려 하자 잉글랜드에 급히 배상금을 보내 프랑스 국내의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칼레를 돌려주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리고 루이 11세가 세상을 떠난 뒤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쟁이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땅따먹기 경쟁을 벌였고, 물론 백년전쟁과 관련한 상징성은 있지만 평범한 도시에 불과했던 칼레를 탈환하기보다 경제와 문화의 보고(寶庫)인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부터 칼레를 탈환하기까지의 1558년 동안의 백년 동안 프랑스는, 국내 귀족 세력을 꺾어누르고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칼레 문제를 잠시 미루어 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6. 이후
칼레의 주인이 잉글랜드에서 프랑스로 바뀐 뒤에도, 요충지인 칼레를 둘러싼 공방전은 몇 번이고 벌어졌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에도 칼레가 몇 번이나 등장하고, 나폴레옹 역시 소싯적에 전투 기록이 있다.성공회가 생겨난 이후의 잉글랜드인들 중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던 이들은 잉글랜드의 가톨릭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한 후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로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도 칼레에는 소수의 잉글랜드계 주민들이 살고 있다.
1818년에 나폴레옹과 싸우고 난 뒤 영국으로 귀환하는 영국군을 전송하는 항구도 칼레였다. 영국으로서는 수백년만에 칼레를 다시 거쳐가본 셈. 칼레 시장은 영국군에 편지를 써서 승선하는 동안 프랑스와 칼레 마을에 대한 사려 깊은 대우에 감사를 표했다.
영국은 이후로도 유럽 내 군사기지 등의 운용 목적으로 타국 영토에 자국령으로 차지 및 유지중인 곳이 몇 군데 더 있는데, 대표적으로 지브롤터와 아크로티리 데켈리아가 있다. 비슷한 입장인 칼레는 애저녁에 프랑스가 탈환했다지만 저 두 영토는 예전에는 영국이 대영제국 시절인지라 탈환이 불가능했고 대영제국 해체 이후로도 스페인이나 키프로스가 영국의 국력을 넘어서지는 못하는데다 해당 영토의 시민들 역시 영국으로의 귀속을 희망하고 있어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계속 영국령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의 항복 이후 독일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 파리의 프랑스 군정청관할이 아닌 됭케르크등 솜 강 이북 북프랑스 일대와 함께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17]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44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들은 연합군이 여기로 올까 노르망디로 올까?며 첩보전으로 싸운 끝에 연합군의 기만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곳을 상륙 예정지로 파악하고 대비, 병력이 분산되어 버렸고 선택과 집중에 실패해 결국 노르망디가 함락된다.
2015년에 들어서서는 영국으로 불법 이민을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가 되어버린 탓에 프랑스를 떠도는 제3국의 난민들이 몰려들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덩달아 도시 경제도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2016년 10월 24일 칼레 난민촌 폐쇄 작업을 시작하며 1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3. 정치
강경 보수 세력의 지지세가 강하며, 실제로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 지지도가 높은 수준이다. 이는 영국과의 접경 지대로서 채널 터널을 통해 영국으로의 밀입국을 노리는 난민들의 불법이민 문제를 직접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다만 가장 우파 정당의 지지율이 높은 곳은 이 지역 근처의 랑스 광역권으로, 201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당시 국민전선이 이 지역 광역권을 석권했다.4. 칼레의 기적
이 작은 항구도시가 축구팬들에게는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돌풍과 이변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1999-2000시즌 프랑스 축구의 FA컵인 쿠프 드 프랑스에서 4부리그 소속 아마추어 팀 칼레 라싱 위니옹 FC가 AS칸, 스트라스부르, 보르도 등 유수의 강팀들을 꺾고 준우승을 거둔 것이다. 2000년 5월 7일 1부리그 명문팀 FC 낭트와의 결승전에서 접전 끝에 1-2로 아깝게 패했다. 경기를 직관한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이 “오늘 두 팀이 모두 승자다. 낭트는 경기에서, 칼레는 정신에서 승리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프로축구 선수가 아닌, 본업이 편의점 점원, 은행가, 공무원, 학생, 정원사인 이들이 거둔 대이변이었다.# 칼레 라싱 위니옹 FC는 재정난으로 2017년 해체했고, 2023년 창단한 라싱 클럽 칼레가 칼레의 대표 축구팀으로 활동하고 있다.[1] 정확히는 철도 전용 터널[2] 발레도 '밸레이'로 읽는 등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프랑스어 발음을 존중한다. 영어가 게르만어이긴 하지만 영국이 독일어권 국가들보다 프랑스와 더 가깝다는 점과 한동안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지였다는 점 등으로 인해 현재 영어와 단어가 비슷한 정도는 독일어보다 프랑스어가 더 높다. 물론 아직도 '캘리스'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3] 프루아사르가 프랑스의 애국주의(?) 시인이라서 프랑스인을 미화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저작을 약간이라도 읽어보면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프루아사르는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의 가신이었으며, 국가주의에 정반대되는 전통적인 봉건 전사 귀족 가치관의 옹호자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많은 프랑스인의 두려움과 증오를 받았고' '전투 직전 회담에서 프랑스인은 천박하고 비열하다며 대놓고 조롱한' 잉글랜드 기사 존 챈더스를 전혀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용감하고 지혜롭고 명예로운 기사도의 꽃'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다.[4] 판본에 따라 어떤 시민들이 저항해서 군대를 몰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5] 과거 영국 하원 의석은 현재와 달리 한 지역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기도 했었다. 중선거구제[6] 여기서 pale은 울타리, 경계선, 한계, 범위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참고로 잉글랜드가 한 때 아일랜드 섬 대부분을 지배했었다가(아일랜드 영지)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영토가 줄어 나중엔 더블린과 그 주변만 지배했었는데 이 시기 해당 지역을 The Pale이라고 한다. 이 pale도 소위 앙주 제국이나 백년전쟁 중 잘 나갈 때에는 한때 엄청 넓기도 했던 영국령 프랑스의 마지막 잔재라는 차원에서 같은 의미이다. 이후 헨리 8세가 그 상태에서 만족하지 않고 아일랜드 섬을 모두 재정복해 아일랜드 영지를 아일랜드 왕국으로 바꾼다.[7]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 볼 때.[8] 군주가 한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부분 참고.[9] 펠리페가 메리보다 열한 살 아래였다. 또 한참 전의 일이긴 하지만 한때 펠리페의 아버지 카를과 메리의 혼담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10] 여기에서 프랑스사에 밝은 분들은 기즈 공작이라고 하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배후조종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는데, 프랑수아 사후 그 직위는 아들 앙리에게로 이어졌다. 다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프랑수아 역시 위그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위그노 전쟁 중 위그노 측에 의해 암살당했다.[11] 1558년 1월 1일 ~ 1558년 1월 6일.[12] 만 4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만 2천 5백이었던 데에 비해, 만 8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겨우 3백. 이건 여담이지만 이후 라모랄은 네덜란드의 종교(신교) 문제로 인해 반역죄로 처형당했는데, 그것이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13]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이탈리아의 역사가 안 나오는 게, 바로 이 때문. 르네상스 이후 통일 이전까지, 이탈리아는 그 대부분이 줄곧 스페인.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14] 실제로, 메리 1세가 결혼 상대를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5] 친가가 신성 로마 제국 황가이고 외가가 스페인 왕가인 희대의 엄친아다. 즉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에, 베네룩스 지방, 구(舊) 아즈텍 및 잉카 제국령까지 통치했으니, 군사적으로 밀리는 게 당연.[16] 2차 및 3차 이탈리아 전쟁.[17] 이후 국가판무관부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