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작이 직접 다스렸던 공국에 대한 내용은 부르고뉴 공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부르고뉴의 역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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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국 États bourguignons 1366년~1477년 | ||
부르고뉴 십자가[1] | ||
<rowcolor=#fede00,#fede00> 발루아-부르고뉴기 | 발루아-부르고뉴 문장[2] | |
1465년 ~ 1477년[3] | ||
<colbgcolor=#0701a0,#0701a0><colcolor=#fede00,#fede00> 위치 | 부르고뉴 공국 프랑스 동부(욘,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부르고뉴 영지 프랑스 북부(오드프랑스[4], 그랑테스트 일부) 독일 서부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 |
수도 | 디종(전통적)[5], 그 외[6] | |
정치체제 | 봉건제 | |
군주 | 호담공 필리프 2세(1363~1404) 용맹공 장 1세(1404~1419) 선량공 필리프 3세(1419~1467) 용담공 샤를(1467~1477) | |
언어 | 중세 프랑스어, 부르고뉴어, 라틴어, 네덜란드어 | |
종족 | 프랑스인, 부르고뉴인, 네덜란드인 왈롱인, 독일인 | |
종교 | 가톨릭 | |
통화 | 휠던, 스퇴이버 | |
성립 이전 | 부르군트 왕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 |
주요사건 | 1474 ~ 1477년 부르고뉴 전쟁 1477년 용담공 샤를의 죽음 동년 공국 영토 분할 | |
멸망 이후 |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로 분할[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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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국[8]은 1363년부터 1477년까지 114년 동안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공작들이 다스렸던 국가들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당시에 쓰였던 것은 아니고 부르고뉴 공국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발루아-부르고뉴 공작이 다스리는 국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비교적 현대에 쓰이기 시작했다.
2. 문화
부르고뉴의 통치자들은 당시 유럽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저지대를 통치하면서 예술에 막대한 후원을 해주었고, 이 때문에 부르고뉴의 궁정들은 항상 음악가와 미술가, 조각가, 자수가로 붐볐다. 휘호 판데르후스(Hugo van der Goes)는 부르고뉴 공작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한 대표적인 화가였고, 이외에도 아낌없는 후원은 후일 렘브란트 같은 거장들이 활약하던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네덜란드 회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외에 부르고뉴 궁정에서 활약한 음악가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예술성 있는 작품들을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중세 음악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이외에도 부르고뉴의 귀족들은 진귀한 서적들을 읽고 모으기를 즐겼다. 망명생활 도중 플랑드르 지역의 귀족 로데베이크 판흐뤼트휘서(Lodewijk van Gruuthuse)의 장서관을 방문한 에드워드 4세는 큰 감명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이를 모방해 후일 영국 왕립도서관이 되는 개인 장서관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상황이 이러니, 부르고뉴가 출판업과 인쇄술의 중심지까지 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3. 발루아-부르고뉴 공국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개창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바로 프랑스 왕 장 2세의 막내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호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9]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마르그리트 3세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의 유일한 상속녀였을 뿐만 아니라, 전 남편인 필리프 1세 드 카페-부르고뉴의 사망 이후 아르투아와 부르고뉴 자유백국을 상속받아 본인 스스로도 상당한 영토를 소유한 대영주였다. 이로서 호담공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세력권을 저지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10] 당시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저지대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부흥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러나 이와 함께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치세에 분란의 씨앗도 함께 싹텄는데, 바로 그것은 당시 정신병자였던 프랑스 왕 샤를 6세 대신 프랑스를 통치하는 섭정을 둘러싼 다툼이었다.[11] 당시 호담공 필리프 2세는 자신을 따르는 부르고뉴파(Bourguignons)의 지지를 받으며,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그를 따르는 아르마냑파(Armagnacs)와 대립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이 재개되고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사후, 그의 작위를 아들 용맹공 장이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오를레앙 공 루이 1세가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되었고, 용맹공 장은 또 아르마냑파의 지지를 받는 샤를 도팽(훗날의 샤를 7세)과의 협상 도중 암살되면서 갈등은 점점 격화되어, 결국 부르고뉴파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잉글랜드와 결탁해 프랑스 발루아 왕실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부르고뉴파의 지지를 얻은 잉글랜드군은 샤를 6세로부터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트루아 조약[12]까지 조인받았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그 유명한 잔 다르크의 등장과 함께 기세를 되찾은 프랑스군이 파타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에 부르고뉴파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처형시키는 식으로 대응을 했으나 이미 사실상 결정된 전세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샤를 7세 역시 막 왕위에 오른 상태로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에 따라, 휴전 회담 도중 교묘하게 잉글랜드 측을 배제시킨 체로 부르고뉴-프랑스 양국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대한 봉건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으로 거듭났고 볼로뉴, 베르망두아 등에서의 지배권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453년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고, 이는 아라스 조약을 체결한 선량공 필리프(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4. 독립 왕국으로서의 자립시도와 몰락
1477년 프랑스 왕국 지도. 붉은 색이 프랑스 왕국의 국경선
용담공 샤를은 행정기관과 법원을 개편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총병과 포병을 양성하는 군제개혁까지 이루었다. 특히 용담공 샤를의 치세에는 부르고뉴가 독립국으로서 거의 자립할 단계까지 갔었다. 선량공 필리프 3세와 용담공 샤를 부자의 노력으로 옛 로타링기아 왕국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으나 이 두 발루아 왕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용담공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 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부르군디" 혹은 "로타링기아" 혹은 "프리지아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했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다.[13] 그러나 1473년 9월 트리어에서 열릴 대관식에서, 황제가 샤를이 자신을 붙잡아 왕위를 내놓으라 겁박할까 두려워 도망치는 바람에 대관식이 열리지 못해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14]
게다가 용담공 샤를의 이러한 자립 시도는 주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곧 라인 강 유역은 친부르고뉴 세력과 반부르고뉴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클레베 공작이나 팔츠 선제후 등은 샤를과 우호적인 관계를 꾀했으나, 알자스를 점유 중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티롤 백작 지기스문트, 라인 강 상류 유역의 여러 자유시를 지원하던 스위스 동맹, 저지대와 부르고뉴 본토 사이에 있어 두 영지를 갈라놓고 있었던 로렌 공국의 르네 2세 등 용담공 샤를과 적대하던 주변 세력은 공동의 적인 부르고뉴에 대항하여 연합을 형성했고[15] 쾰른 주교령에서 주민들이 쾰른 대주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샤를이 대주교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는 과정에서 로렌 공국-스위스 동맹 연합군과 샤를이 충돌하게 되었다.(부르고뉴 전쟁) 처음에는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를 점령하는 등 샤를이 선전했으나,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16] 군대의 대부분을 잃는 등 위기에 몰렸고 결국 1477년 1월 5일 낭시 공략 도중 연합군에게 패하며[17] 스위스 동맹군에 의해 전사했다.[18]
이때까지 용담공 샤를은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 외에는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하나뿐인 딸의 결혼 문제도 확정짓지 못 한 상황이었다. 용담공이 허무하게 전사하자 부르고뉴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신하가 후사없이 죽었으니[19][20] 신하의 영지를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즉각 부르고뉴 침공을 지시했으며, 저지대의 네덜란드인들은 루이 11세에게 매수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에 의해 그녀가 거주하고 있었던 겐트(헨트, Gent) 성에 유폐된 마리는 아버지 샤를의 유언을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외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심복들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17세였던 막시밀리안은 그녀의 편지를 받고 크게 감명받아 사비를 털고 대출까지 받아 1,200명의 기사들을 동원하여 1477년 8월 18일 부르고뉴령 겐트에 입성했다.
이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한 편인데, 생면부지의 여성인 마리 드 발루아-부르고뉴의 편지를 받은 막시밀리안 대공은 사악한 반란군과 침략자들에 맞서 레이디를 구출하는 기사도적인 낭만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위를 차지했긴 하지만 기반이 부족해서 매우 가난한 형편이었는데, 기사도적인 정의감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을 저당잡히면서까지 대출을 받아 겨우겨우 기사들을 모아 출병했다. 겐트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는 서로 한 눈에 반했는데,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라틴어로 대화했다고 한다. 직후 마리는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1세로서 막시밀리안 대공과 결혼하여 상속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명목상의 주군으로서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부르고뉴를 침공했다. 이후 벌어진 전쟁 끝에 1479년 쥐느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대공이 승리하면서 저지대 지역과 프랑슈콩테 일대는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피카르디와 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은 프랑스에 넘어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여공작은 자신의 영지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고 남편과도 서로 사랑하여 금슬좋게 지냈다. 그러나 1482년 3월 27일, 임신한 상태로 사냥하던 중 낙마 사고로 4세의 필리프와 2세의 마르가레테만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영지는 아들 미남왕 필리프에게 상속되었고, 필리프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대공이 섭정으로 다스리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미남왕 필리프의 아들 카를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캉브레 조약으로 프랑스가 밀라노와 나폴리를 포기하는 대신 합스부르크 왕가가 부르고뉴 탈환 시도를 포기함으로써 부르고뉴는 완전히 프랑스 왕국에 통합되었다.[21] 독립국으로서의 부르고뉴 공국은 이 때부터 완전히 역사에서 지워졌고, 프랑스령 부르고뉴 및 오스트리아령 저지대(네덜란드, 벨기에)의 역사로 갈리어 이어지게 되었다.
4.1. 부활 시도
파비아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를 대패시켜 포로로 잡고 밀라노, 나폴리 및 전 이탈리아 반도의 영유권과 더불어 부르고뉴를 반환할 것을 조약으로 내세웠다. 다만 프랑수아 1세가 보석금만 내고 먹튀해서 실패(...)1814년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전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의 아우 카를 대공을 수반으로 이전 합스부르크령인 알자스, 부르고뉴 등을 프랑스에서 떼어내 새로운 군주국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는 독일제국의 빌헬름 1세가 동맹국편에 참전한다면 부르군트 왕국을 부활시켜 준다고 벨기에 정부를 꼬셨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에는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서 슈츠슈타펠이 지배하는 부르군트 SS국 창설이 논의되기도 했다.
5. 구성국 목록
주교령 등(노란 빗금)
인척 관계(연두색)
- 느베르 백국
- 외 백국
- 르텔 백국
5.1.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네덜란드 17주 Zeventien Provinciën • Dix-Sept Provi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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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목록 보기 ] | 1. 아르투아 백국 | 2. 플란데런 백국※ | 3. 메헬렌 영주령 | 4. 나뮈르 백국 | 5. 에노 백국 | 6. 제일란트 백국* |
7. 홀란트 백국* | 8. 브라반트 공국 | 9. 림뷔르흐 공국과 오베르마스※ | 10. 룩셈부르크 공국 | 11. 위트레흐트 주교후령* | 12. 프리슬란트 영주령* | |
13. 헬러 공국※ | 14. 흐로닝언 영주령* | 15. 링겐, 베더, 베스테르볼더, 드렌터 영주령* | 16. 오버레이설 영주령* | 17. 쥣펀 백국 | - | |
*: 스페인령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일부만 독립 | ||||||
관련문서 | ||||||
신성 로마 제국 | 부르고뉴국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스페인령 네덜란드 |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 벨기에 합중국 | 네덜란드 공화국 네덜란드 연합왕국 |
용담공 샤를 시절 부르고뉴국의 영토 지도 중에서 로렌 바로 윗부분에 있는 저지대 국가를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라고 한다.
6. 지배자 목록
6.1.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이름 | 재위 | 비고 |
"호담공" 필리프 2세 | 1364-1404 | |
"용맹공" 장 | 1404-1419 | |
"선량공" 필리프 3세 | 1419-1467 | |
"용담공" 샤를 1세 | 1467-1477 |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낭시 전투에서 전사 |
"부귀공" 마리 1세 | 1477-1482 | 용담공 샤를의 딸로 부친의 남성 후계가 없어 계승했으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막시밀리앙과 혼인했다. |
6.2. 합스부르크 가문
자세한 내용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문서 참고하십시오.이름 | 재위 | 비고 |
막시밀리앙 | 1477-1482 | |
"미남공" 필리프 4세 | 1482-1506 | |
샤를 2세 | 1506-1555 |
7. 기타
문화와 예술을 가장 많이 후원한 선량공 필리프 3세는 무예가 뛰어난 귀족들 24명을 모아 황금양모 기사단[26]이라는 조직을 창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장은 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어야만 했으며, 초대 단장은 선량공 필리프 3세 본인이었다. 단원들 역시 귀족이어야 했으며, 이들은 모두 범죄나 이단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에도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법한 황금양털이란 이교스러운 이름 탓에 빈축을 사기도 했으니, 할 일 없는 높으신 분의 코스프레라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러나 의외로 명망이 높았는지 기사단장직의 계승 문제에 교황이 관여한 적도 있었고, 기사단장직은 역대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 스페인의 국왕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자 자신이 정통 기사단장이라고, 보르본(부르봉) 왕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나치 독일이 구 부르군트 왕국 지방에 부르군트 SS국이라는 국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Paradox Interactive의 게임 Europa Universalis IV에서 구현되어 있다. 부르고뉴 아래에 홀란트, 브라반트, 플란데런이 동군연합으로 묶여 있고 느베르를 복속하고 있으며, 에노 일대는 부르고뉴의 일부로 합쳐져 있다. 1444년 기준으로는 아직 헬러, 위트레흐트는 복속하지 못한 상태. 실제 역사대로 프랑스와 서로 대립하는데, 후사 없이 통치자가 사망하면 나라가 자동으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에 상속되는 부르고뉴 상속 이벤트도 구현되어 있다. 한때는 잉글랜드,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십중팔구 모두 경쟁국으로 찍히는 끔찍한 외교환경을 자랑했으나 패치로 오스트리아와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미션은 프랑스 지배, 북부 저지대 확장, 남부 옛 하 부르군트 왕국(지금의 스위스와 프로방스 일대) 방면 확장,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영향력 강화 네 방향으로 나뉘어 있으며, 조건을 만족하면 로타링기아 왕국, 프랑스, 네덜란드로 변신할 수 있다.
[1] 부르고뉴 전쟁 관련 그림에서는 성 파트리치오 십자와 비슷하게 생긴 깃발이 나오는데 이 십자가도 부르고뉴의 십자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따라서는 X의 위아래 끝의 4부분만 가시가 달린 것도 있고 가시달린 십자가도 나온다.[2] 후기 발루아-부르고뉴가의 문장이다.[3] 해당 지도의 부르고뉴는 용담공 샤를 1세의 치세로 로트링겐 공국 등을 점령하여 일시적으로 저지대와 부르고뉴 본토를 이어놓은 상태이다. 이는 샤를의 생전에만 유지되었으며 샤를 사후, 마리 드 부르고뉴 치세에 해체된다. 14세기 후반~16세기 초의 부르고뉴 영토 전체를 부르고뉴국(États bourguignons)이라고 부른다. 위의 그림도 부르고뉴국의 영문판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볼 수 있다. 즉, (좁은 의미의)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는 위에 있는 지도와 비슷한 Duchy of Burgundy 부분이다.[4] 플란데런 백국의 일부분[5] 시기와 상관없이 전통적으로 디종을 수도로 여겼다. 다만 실질적인 수도는 시기마다 달랐다.[6] 선량공 필리프 3세의 후손들은 주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를 선호했다. 브뤼셀이 행정 수도의 기능을 한 적도 있고 용담공 샤를은 브뤼셀보다는 메헬렌을 선호했다고 한다. 즉, 실질적인 수도는 시기마다 달랐다.[7] 프랑슈콩테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됐다가 프랑스의 영토가 됐다.[8] États bourguignons 혹은 État bourguignon/英 : Burgundian State[9] 프랑스 카페 왕조 제14대 왕 필리프 5세- 부르고뉴 백작부인 마르그리트 1세(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와 혼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 플랑드르의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와 초혼,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와 재혼)[10] 공식적으로 플랑드르, 아르투아가 영지가 된 건 호담공 필리프 2세와 마르그리트 3세의 아들인 용맹공 장 1세의 시기였다.[11] 최근 연구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이 섭정을 둘러싼 권력투쟁일 뿐만 아니라 도시민,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2] 이때 샤를 도팽은 샤를 6세의 사생아로 몰렸다.[13] 용담공 샤를이 받고자 한 왕위가 부르군디였는지, 로타링기아였는지, 프리지아였는지는 용담공 샤를 당대의 기술에서도 크게 엇갈린다.[14] 아이러니한 건 이 이후에 기술되어 있듯이 둘의 외아들과 외동딸이 극적으로 결혼하게 돼 둘은 사돈 관계가 된다. 이미 용담공 샤를이 전사한 이후이긴 하지만.[15] 연합군을 이루지 않았지만 샤를에 적대적인 인물로는 명목상 종주국인 프랑스의 루이 11세도 있었다. 그리고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자 프랑스는 부르고뉴를 집어먹기 위해 즉각 개입했다.[16] 사실 샤를의 부르고뉴군은 초반에는 30,000명의 병력으로 연합군보다 우세했으나 모라트 전투에서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가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많은 병력을 잃는 바람에 열세로 몰린 것이었다. 특히 샤를은 스위스군의 사기를 꺽으려고 스위스군 포로 412명을 처형했으나 이를 보고 스위스군이 사기를 잃는 것이 아니라 크게 분노해서 더 맹렬히 싸우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17] 당시 샤를과 부르고뉴군은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으나 병력에서 열세였던터라(부르고뉴군은 8,000명, 연합군은 22,000명) 대패하고 말았다.[18] 패주하다가 스위스군에게 포위당하여 11명의 근위병들과 함께 저항하는 도중에 할버드에 머리를 찍히면서 말에서 떨어져 추가로 공격당해 투구가 부서지고 머리는 그대로 두쪽으로 쪼개졌다. 근위병들 역시 저항하다 모두 전사했다. 이때 용담공 샤를과 근위병들의 갑주와 옷이 고가임을 알게된 스위스 병사들이 이를 전부 벗겨갔다. 나중에 전투가 끝난지 3일 후에야 시신을 수습하러온 부르고뉴인들에 의해 샤를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벌거벗겨지며 할버드로 인해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지고 몸에는 창이 여러 개 박힌데다 늑대에게 시신 일부를 뜯어먹히는 등 훼손이 워낙 심해서 손톱(당시 샤를은 손톱이 유난히 길었다고 한다)과 몸에 난 흉터를 통해 겨우 알아보았다고 한다.[19] 딸 마리가 여공작으로 즉위했지만 적어도 살리카법을 처음으로 확대 해석해 여성의 작위 상속을 막아놓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시비걸기 좋은 명분이었다. 사실 프랑스도 왕위 말고 다른 작위들은 여성 상속이 인정되는 편이었지만...[20]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다스리던 부르고뉴 공국은 왕자령이었기에 단절된다면 발루아 왕실의 프랑스 국왕이 영지를 회수할 수 있었다.[21] 이 때 부르고뉴 지방의 일부이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령으로써 프랑스로 편입되지 않은 프랑슈콩테는 1668년 프랑스가 점령하였다가 아헨 조약으로 스페인에 반환하였으나 1678년 네이메헨 조약으로 프랑스가 도로 가져갔다.[22] 신성로마제국 영토 내에 위치했다[23] 참고 자료 지도에는 안나와 있고, 위치상으로는 느베르 백국쪽[24] 라인 강 근처 보라색[25] 로렌 공국 바로 아래 노란 빗금[26] 프랑스어: Ordre de la Toison d'or, 스페인어: Orden del Toisón de O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