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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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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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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Britain Monarch
※ 2012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여론조사업체 ICM에 의뢰해 영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TOP 5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 헨리 5세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제2대 국왕
헨리 5세
Henry V
파일:1280px-King_Henry_V_from_NPG.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헨리 5세
(Henry V)
출생 1386년 9월 16일
잉글랜드 왕국 몬머스 성[1]
사망 1422년 8월 31일 (향년 35세)
프랑스 왕국 뱅센 뱅센느 성[2]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413년 3월 21일 ~ 1422년 8월 31일
서명 파일:헨리 5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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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몬머스의 헨리
(Henry of Monmouth)
배우자 발루아의 카트린 (1420년 결혼)
자녀 헨리 6세
아버지 헨리 4세
어머니 메리 드 보훈[3]
형제자매 토머스, , 험프리, 블랜치, 필리파
장례식 1422년 11월 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웨일즈 대공2.3.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2.4. 국가 통치 참여와 아버지와의 갈등2.5. 잉글랜드 국왕
2.5.1. 국내 정책2.5.2. 1415년 프랑스 원정2.5.3. 지기스문트의 잉글랜드 방문2.5.4. 아르플뢰르에서의 무력 충돌2.5.5. 1417 ~ 1420년 프랑스 원정2.5.6. 트루아 조약2.5.7. 1421 ~ 1422년 프랑스 원정과 최후
3. 평가
3.1. 잔혹성
4. 가족 관계
4.1.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에 활약한 잉글랜드 왕국의 왕.

플랜태저넷 왕조 중에서도 랭커스터 왕조 계통이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탁월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고, 트루아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를 보장받았지만, 이질에 걸려 프랑스 왕이 되지 못한 채 일찍 죽었다. 현재 영국 왕실의 표어인 과 나의 권리(Dieu et mon droit)를 정한 왕이다.[4]

2. 생애

2.1. 초년기

1386년 9월 16일, 잉글랜드 왕국 몬머스 성에서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제2대 노샘프턴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인 메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머스, , 험프리가 있었으며, 누이로 블랜치[5], 필리파[6]가 있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창립한 랭커스터 가문 출신으로, 곤트의 존은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조카 리처드 2세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헨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1394년 6월에 어머니 메리가 사망했으며, 1395년에 병을 앓았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1395년 11월, 아키텐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곤트의 존은 브르타뉴를 방문해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상호 동맹을 맺고, 자신의 손자 헨리와 장 4세의 딸인 마리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이 결혼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는데, 만약 성공했다면 랭커스터 가문의 영향력은 브르타뉴를 포함한 프랑스 서해안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1398년, 아버지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대립한 끝에 결투 재판에 임했다. 그런데 결투가 막 벌어지려던 때 리처드 2세가 돌연 개입해 두 공작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노퍽 공작은 평생, 헨리는 10년동안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추방당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399년 2월 3일, 곤트의 존이 레스터 성에서 사망했다. 이후 리처드 2세는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영구 추방하며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리처드 2세는 소년 헨리의 후견인을 자처했고, 그를 돌볼 비용 마련을 위해 500파운드를 별도로 할당했다.

1399년 5월,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고, 소년 헨리도 원정에 참여했고, 리처드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해 7월 초,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간 틈을 타 노스 요크셔의 레이븐스퍼에 상륙한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소년 헨리는 이로 인해 입장이 곤란해졌지만, 리처드 2세는 그가 아버지의 반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기고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다만 보안상의 이유로 더블린 북서쪽에 위치한 트림 성에 억류되도록 했다.

2.2. 웨일즈 대공

1399년 9월 29일,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제압당해 런던 탑에 수감된 리처드 2세가 압력에 굴복해 퇴위했다. 다음날 의회에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에 선포되었다. 그 후 소년 헨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바스 기사단 기사 작위를 아버지에게 수여받았다. 10월 1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헨리 4세의 대관식에서, 헨리 왕자는 정의를 상징하는 무딘 검을 칼집에 꽂고 다녔다. 이틀 후, 의회는 헨리 왕자가 웨일즈 대공, 콘월 공작, 체스터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는 데 동의했다. 같은 달 말에 아키텐 공작이라는 칭호도 받았고, 11월 10일에는 랭커스터 공작이라는 칭호와 이에 따른 특권과 자유도 받았지만, 랭커스터 공국 자체는 왕실 직할지의 일부로 남았다.

1400년 1월 초,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솔즈버리 백작 존 몬타구, 럼리 남작 랄프 럼리, 칼라일 주교 토머스 머크 등이 리처드 2세의 복위를 꾀하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윈저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죽이기로 결의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축제는 성탄절부터 시작해 12일간 이어져 1400년 1월 6일 토너먼트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킹스턴에서 무장부대를 모으고 야밤에 윈저성에 들어간 뒤 1월 6일 토너먼트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후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로 했다. 여기에 웨스트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있는 리처드 2세를 빼돌리는 작전도 수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관계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3.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

1400년 9월 16일,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스 공을 칭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4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노스 웨일스 전역으로 이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악천후 속에서 산속에 숨어있던 웨일즈 유격대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고 막심한 피해만 입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0월 15일 병력이 크게 줄어든 채 슈루즈버리 성으로 돌아왔다. 오와인의 반란군이 헨리 4세를 물리치자, 그의 명성은 웨일스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1401년, 반란은 웨일스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웨일스 북부와 중부 시골 지역 전체가 오와인을 지지했으며, 북부 전역의 잉글랜드 도시, 성 및 사유지에 끊임없는 습격이 벌어졌다. 심지어 웨일스 남부의 브레콘과 궨트에서도 스스로 "오와인의 아이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의 봉기와 약탈이 벌어졌다. 헨리 4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약한 헨리 퍼시를 웨일스 토벌대 지휘관으로 세웠으며, 14살된 아들 몬머스의 헨리 왕자를 헨리 퍼시의 부관으로 세웠다. 이후 헨리 왕자는 헨리 퍼시의 지휘하에 오와인 글린두르 토벌 작전에 참여했지만, 오와인 글린두르의 탁월한 유격 전술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7]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글린두르의 포로로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도 호응했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영주들도 자유를 얻는 대가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헨리 4세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고, 헨리 왕자도 동행했다.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버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왕실군과 헨리 '핫스퍼' 퍼시가 이끄는 반란군이 격돌했다. 이때 헨리 왕자는 최전선에서 진군하다가 체셔 궁수가 발사한 화살이 얼굴에 박혀 중상을 입었지만, 고통을 찹고 부하들을 이끌고 경사면으로 올라가 육박전을 벌였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선두에서 싸우다가 전사했고, 다른 반군 사령관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스코틀랜드 귀족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체포되었다.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승리한 지 이틀 후, 우스터 백작과 다른 반군 기사 두 명이 처형되었고,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8]

파일:몬머스의 헨리의 뺨에서 화살촉을 빼내는 존 브래드모어.jpg

헨리 왕자가 입은 부상은 거의 치명적이었다. 화살이 코 옆에 6인치(15.24cm)나 박혔으며, 의사들은 화살을 뽑으려고 했을 때 화살촉이 안쪽 깊숙한 곳에 남아 뼈가 갈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헨리는 패혈증으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왕실 의사 존 브래드모어가 긴 족집게 같은 특수 장비#를 사용해 화살촉을 제거하고, 붕대에 천연 항생제인 꿀을 발라 막은다음 꿰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수술은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헨리는 수술을 받는 내내 의식이 있었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는데도 끝까지 인내했다고 전해진다. 헨리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얼굴은 평생 동안 흉터로 인해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1406년, 헨리 왕자는 웨일스 반란 진압을 전담했다. 그는 원정을 감행했다가 오와인의 유격전에 시달리는 대신 웨일스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조직하기로 하고, 웨일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성들의 도움을 받으며 반란군의 무역로와 무기 및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그 결과 1407년에 이르러 웨일스 영주들이 하나둘씩 잉글랜드군에 항복하기 시작했고, 애버리스트위스 성은 1407년 한여름에 몬머스의 헨리가 이끄는잉글랜드군에 포위된 뒤 가을에 함락되었다.

1409년, 헨리 왕자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할레치 성을 포위했다. 오와인은 협상을 위해 부하들을 프랑스로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젊은 그루퍼드'는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잉글랜드에 대항해 군사 행동을 취하도록 설득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결국 할레치 성은 함락되었고, 그 때까지 오와인과 함께 있던 사위 에드먼드 모티머가 전사했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내이자 오와인의 딸인 카트린과 두 사람의 자식들은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뒤 오와인의 아들 그루퍼드가 갇혀 있던 런던 탑으로 투옥되었다. 그 후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 산악 지대 깊숙이 들어가서 저항을 이어갔지만, 대부분의 웨일스 지역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2.4. 국가 통치 참여와 아버지와의 갈등

1408년, 헨리 왕자는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이복형제인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웬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초대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 등의 보좌를 받았고, 헨리 4세에 의해 총리가 되었던 토머스 아룬델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축소한 끝에 1409년 12월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한 뒤 1411년 11월까지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헨리 왕자는 국가 재정을 감독하는 한편, 프랑스에서 발발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내전에 개입해 부르고뉴파를지원하고자 잉글랜드군을 프랑스로 파견했다.

그러나 1411년 11월 건강을 회복한 헨리 4세는 장남 헨리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져 자기가 총애하던 신하들을 축출하고 사실상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된 것에 반감을 품었고, 그 대신 차남 토머스를 총애했다. 그는 헨리를 정계에서 퇴출시킨 뒤 1412년 7월 9일에 토머스를 클라렌스 공작에 세우고 중용했다. 이후 헨리는 수년간 별다른 정계 활동을 하지 않고 사저에 잠자코 지냈다.

1413년 3월 20일, 중병을 앓던 헨리 4세가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예루살렘 방에서 사망했다. 부르고뉴 연대기 작가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Enguerrand de Monstrelet)에 따르면, 죽어가는 헨리 4세 옆 소파에 왕관이 놓여 있었는데, 왕의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근처에 있던 시종들은 왕이 죽은 줄 알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도착한 몬머스의 헨리 왕자는 왕관을 들고 방을 나갔지만, 얼마 후 시트 밑에서 한숨이 들렸다. 하인들은 실수를 깨닫고 시트를 뒤로 젖혔다. 왕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왕관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시종들로부터 왕자가 왕관을 가지고 갔다는 말을 듣자, 왕은 아들을 불러 왜 왕관을 가져갔느냐고 물었다. 이에 헨리 왕자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왕께서 돌아가셨다고 나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장자이고, 당신이 죽은 후에는 당신의 왕국과 왕관이 모두 내 것이었으므로 내가 그것을 차지했습니다."

헨리 4세가 답했다.
"그 왕관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내 것도 아니었지만."

헨리 왕자가 말했다.
"저는 아버지처럼 검으로 왕국을 지키겠습니다."

헨리 4세가 답했다.
"그렇게 해라.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길 것이다. 그 분이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해다오."

그후 헨리 4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훗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시대극 <헨리 4세>에서 이 이야기를 차용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2.5.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 사후, 의회는 만장 일치로 몬머스의 헨리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로 추대했다. 141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갑작스러운 눈보라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왕위에 막 오른 헨리는 6피트 3인치(약 190cm)에 달했고, 날씬했으며, 검은 머리를 귀 위 고리 모양으로 자르고 깔끔하게 면도했고, 안색은 붉고 얼굴은 갸름했으며, 눈에 띄고 뾰족한 코가 있었다. 또한 그의 눈은 기분에 따라 '비둘기의 부드러움'과 '사자의 광채'로 바뀌곤 했다고 한다.

2.5.1. 국내 정책

헨리 5세는 아버지의 쿠데타 이후 오래도록 혼란했던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먼저 하트퍼드셔의 랭글리 성에 묻혀 있던 리처드 2세의 유해를 리처드 2세의 첫 왕비인 보헤미아의 안나[9]가 묻힌 무덤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송해서 왕의 예우로 안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헨리 '핫스퍼' 퍼시에 의해 잉글랜드 차기 국왕으로 추대된 이래로 페펀시 성에 감금되었던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석방시키고 형제 로저와 함께 바스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하고 작위와 영지를 돌려줬다. 이후 에드먼드 모티머는 헨리 5세에게 전적으로 충성했다.

헨리 5세는 웨일스 반란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고, 그중 한 명인 하이웰 코트모어는 잉글랜드군에 배속되었다. 1415년, 헨리 5세는 반란 지도자 오와인 글린두르를 사면하겠다고 선언하고, 오와인의 아들 마레두드에게 사절을 보내 아버지에게 귀순을 권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레두드는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 편에 계속 남았다. 오와인은 이후에도 사면을 끝까지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웨일스 산악 지대에서 은거했다.[10]

한편, 헨리 5세는 이단으로 단죄된 롤라드파를 탄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13년 9월 11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은 헨리 5세의 승인을 받은 뒤 롤라드파를 노골적으로 보호하는 존 올드캐슬에게 리즈 성에 와서 신앙을 검증하라고 통보했다. 올드캐슬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쿨링 성으로 숨었다. 아룬델은 즉시 올드캐슬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9월 23일까지 런던에 출두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간주하여 토벌하겠다는 헨리 5세의 뜻을 전했다. 9월 23일에 출두한 올드캐슬은 런던 탑에 갇힌 뒤 이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헨리 5세는 지난날 웨일스에서 오와인 글린두르 반란 진압에 동참한 전우였던 올드캐슬에게 40일 동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1413년 10월 19일, 올드캐슬은 윌리엄 파크마이너가 이끄는 런던 롤라드파의 도움으로 런던 탑에서 탈출한 뒤 스미스필드에 있는 파크마이너의 집에 숨어서 상황을 살폈다. 그는 부유한 롤라드파 인사들로부터 자금을 제공받고 이를 통해 장비를 수집하고 용병을 고용했다. 토지를 소유한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모어는 롤라드 목사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녀의 하인이 반란에 가담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벨튼, 더비셔, 에식스, 레스터셔, 브리스톨 등지에서 롤라드파 봉기가 잇따라 발발했고, 올드캐슬은 스미스필드에 기사 3명, 종자 15명 등 총 222명의 반군을 집결한 뒤 장차 왕궁을 급습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사전에 헨리 5세의 스파이 역할을 한 여관 주인 존 바튼과 토머스 버튼이 올드캐슬의 은신처와 계획을 폭로하면서 모든 게 들통났다. 헨리 5세는 1414년 1월 9일 또는 10일 밤에 클레켄웰의 세인트 존 수도원에 군대를 집결한 뒤 올드캐슬이 이끄는 반란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1월 10일, 전투 후 생포된 롤라드파 80명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다. 토머스 아룬델은 이 재판에 출석해 이단자들을 단호히 근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그 결과 전원이 화형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은 대거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올드캐슬은 왕실이 몰수한 그의 재산 일부를 임대한 오랜 친구 존 해리의 지원으로 수년간 도피 행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결국 1417년 웨일스의 웰시풀에서 체포되었고, 런던으로 호송된 뒤 1417년 12월 14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롤라드파는 이후에도 비밀 조직 형태로 오래도록 활동했다.

2.5.2. 1415년 프랑스 원정

2.5.2.1. 배경
헨리 5세가 즉위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이끄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가 이끄는 아르마냑파[11]가 한창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지 못했다. 양 파벌은 서로를 꺾기 위해 잉글랜드 왕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413년 7월,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파리에 입성했다. 용맹공 장은 급히 파리를 탈출해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1414년 1월, 장은 파리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다. 그해 4월,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피카르디에서 부르고뉴파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부르고뉴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뒤, 일부는 부르고뉴로 행군하고 주력군은 아르투아로 향했다. 이에 장의 동생인 느베르 백작 필리프가 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아르마냑파에 항복했다.

상활이 갈수록 안 좋아지자, 용맹공 장은 수세에 몰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가 보낸 사절단은 헨리 5세에게 가스코뉴와 앙구무아를 주겠다고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2천 장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걸 받기를 원했던 헨리 5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1414년 7월,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아라스를 포위했지만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아르마냑파 원정군에 끌려왔던 도팽 루이는 용맹공 장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르마냑파 수뇌부 역시 내전에 지쳐있던 터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9월 4일, 장은 잉글랜드와의 동맹 협상을 그만두는 대가로 사면받았고, 아르마냑파는 철수했다.

이후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단을 파견해 양국간의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는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프랑스가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1세런던 탑에 포로 신세로 전락한 상태라서 자기가 출진할 때 스코틀랜드가 후방을 칠 여력이 되지 않으므로, 전쟁을 벌이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요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356년 장 2세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된 뒤 지불해야 했던 몸값 중에서 현재까지 지불되지 않은 160만 크라운을 즉시 지불하고, 노르망디, 투르네, 앙주, 브르타뉴, 플란데런 백국, 그리고 아키텐의 토지 소유권을 넘겨주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게 해준다면 에드워드 3세 대부터 이어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르마냑파 지도자이자 프랑스 무관장 샤를 1세 달브레는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고, 샤를 5세가 공략한 아키텐 일부를 돌려주고, 카트린과 결혼시키면서 지참금 60만 크라운을 보내는 정도로 끝내려 했다.

1414년 11월, 헨리 5세는 윈체스터 주교이자 이복형제인 헨리 보퍼트의 주관하에 열린 의회에서 프랑스 측이 자신의 요구를 조롱하고 자신을 모욕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국의 영역을 강제로 빼앗고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을 지원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지지를 표명하고 특별세를 거두기로 했다. 여기에 잉글랜드의 성직자들과 부유한 젠트리, 요먼들로부터 돈을 빌려서 군자금을 충당했다. 헨리의 군대는 6천 명의 장궁병과 2천 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창기병과 검병을 포함한 중보병, 65명의 포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판금 갑옷은 밀라노와 뉘른베르크 수입산이었다.[12] 국왕은 신선한 고기를 확보하게 위해 소와 양을 항구까지 몰고 간 다음 즉석에서 도축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군대를 수송하기 위한 1,500척의 함대가 사우샘프턴 항에 집결했다.

1415년 7월,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 등이 사우샘프턴에서 출항 준비를 하던 헨리 5세를 폐위시키고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 음모를 전해듣고 열흘간 고민하다가 헨리 5세에게 고발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헨리 5세는 세 사람을 7월 31일에 긴급 체포한 뒤 약식 재판을 거쳐 8월 5일에 전원 교수형에 처한 뒤 시신을 4개로 토막내 잉글랜드 각지에 보내게 했다.
2.5.2.2. 아르플뢰르 공방전
1415년 8월 7일, 헨리 5세는 기함 트리니티 로얄에 탑승한 뒤 출항했다. 목표는 지난날 잉글랜드 해안을 주기적으로 습격한 프랑스 해적들이 근거지로 삼은 아르플뢰르였다. 1415년 8월 17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센 강의 지류인 레자르드 강 하구의 아르플뢰르 해안에 상륙했다. 당시 프랑스 수뇌부는 헨리가 좀더 서쪽인 셰르부르 반도에 상륙할 거라고 오판했기에 그쪽 방면에 제대로 신경쓰지 않아서, 아르플뢰르에 주둔한 수비대는 3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르플뢰르는 26개의 탑과 3개의 요새 성문을 갖췄으며, 2.5마일에 달하는 성벽에 해자를 이중으로 갖춘 강력한 요새였다. 여기에 항구 입구에 날카로운 말뚝을 박고 요새화된 성문 앞에 나무 바비칸을 세웠다. 그래서 헨리는 무력으로 공략하기보다는 외교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도시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으로서 돌아왔으니 즉시 복종하라고 요청했다.

시민들은 한 때 수비 병력이 너무 적다고 여겨 항복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프랑스 장군 라울 6세 드 고쿠르가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오면서 수비대 병력이 400명으로 늘어나자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레자르드 강의 수문을 폐쇄해 마을 북쪽 지역을 침수시켰다. 헨리 5세는 외교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공성전을 준비했다. 잉글랜드 본대는 8월 17일 아르플뢰르 서쪽 언덕인 몽 르콩트를 점령하고 숙영지를 건설했고, 8월 18일 클라렌스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레자르드 강을 건너 아르플뢰르 동쪽 언덕인 몽 카베르를 점거했다. 또한 잉글랜드 선원들은 소형 보트를 타고 침수 지역을 순찰해 적이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았다.

헨리 5세는 8월 19일 재차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하자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잉글랜드 포병들은 여러 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교대로 복무하면서 성벽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아르플뢰르 탑에 설치된 포대가 이에 맞서 포격을 가해 상당수의 잉글랜드 병사를 사살했고, 주민들은 낮 동안 적의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성벽을 밤새 복구했다. 잉글랜드 공병들은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팠지만, 적군이 이에 맞서 땅굴을 파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몰아낸 뒤 잉글랜드인들이 만든 땅굴에 불을 질러 파괴했다. 잉글랜드군이 해자를 메꾸기 위해 나무 토막을 던지자, 수비대는 불을 붙인 기름 통을 그 쪽으로 던져 나무 토막을 불태웠다. 이렇듯 수비대가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잉글랜드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성벽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부시코 원수 장 2세 르 맹그르를 구호군 사령관으로 삼고 1415년 8월 말 프랑스 전역에 소집령을 내렸다. 또한 플란데런과 브르타뉴에서 선원과 선박을 고용했고, 루앙에서 썩어가던 갤리선을 수리했다. 그러나 병력 집결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으면서, 아르플뢰르 구원 작전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는 사이 잉글랜드군 진영에서 이질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몸져누웠지만, 도시 내에서도 이질이 퍼져 많은 이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보급품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잉글랜드군의 대포 사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많은 방어 시설이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

9월 15일, 라울 드 고쿠르는 클라렌스 공작에게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요청하면서 10월 6일까지 휴전하자고 제의했다. 클라렌스 공작으로부터 적의 요청을 전해들은 헨리 5세는 9월 18일까지 휴전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협상은 거의 진전이 없었고, 헨리 5세는 9월 17일 아르플뢰르가 다음날 오후 1시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저녁, 수비대는 헨리 5세에게 9월 22일까지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헨리는 수락했다.

이후 12명의 수비대 장교로 구성된 일행이 마을을 떠나 버논에 있던 도팽 루이에게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루이로부터 그들을 도울 방도가 없다는 답변을 듣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기로 했다. 9월 22일, 라울 드 고쿠르는 도시 내 주요 관료 및 장교들과 함께 아르플뢰르 성문 열쇠를 가지고 헨리 5세를 찾아가 넘겨줬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입성했지만, 몇몇 프랑스군은 정문에 있는 탑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결국 제압되었다. 라울 드 고쿠르를 포함한 수비대 생존자 260명은 칼레로 보내져서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억류되었고,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을 사람들은 계속 머무르는 게 허용되었지만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2.5.2.3. 아쟁쿠르 전투
헨리 5세는 한달여간의 공방전 끝에 아르플뢰르를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다수는 이질로 인한 병사자였다. 코트니 주교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도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또한 약 5,000명은 너무 아파서 프랑스에서 원정을 계속할 수 없어서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듯 피해가 막심했기에, 국왕 평의회는 헨리 5세에게 프랑스 침공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자고 권고했다.

하지만 헨리는 이를 거부하고 원정을 이어가기로 했다. 1,200명의 수비대를 아르플뢰르에 배치한 뒤, 900명의 맨앳암스와 5,0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칼레로 들어가서 군세를 회복하려 했지만,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솜 강 여울목을 미리 선점하자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적 수비대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후 도하 가능 지점을 극적으로 찾아내어 솜 강을 건넜다. 그러나 10월 24일 칼레로 재차 향하던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에서 최소 14,000명, 최대 25,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한 데다 힘겨운 공성전에 이은 고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거의 탈진 상태였던 잉글랜드군으로서는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프랑스군 지휘관 '부시코 원수' 장 2세 르 맹그르샤를 1세 달브레는 계곡 너머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전투 대열을 유지한 채 대치하는 동안 밤이 찾아왔고, 잉글랜드군은 잠도 자지 못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밤을 보냈다. 헨리 5세는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군이 늘어날 것임을 인지하고 안그래도 많은 프랑스군이 더 많아지기 전에 결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다음날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1415년 10월 25일에 벌어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6천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진이 쭉 빠져 프랑스에게 언제 쓸려나갈지 몰랐으나, 헨리 5세의 지략과 프랑스군의 성급함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대승을 거두었다. 이날 프랑스군 지휘관 장 2세 르 맹그르와 샤를 1세 달브레는 전사했다. 이때 헨리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동생 랭커스터의 험프리 앞에 서서 항전하다가 프랑스 귀족 장 1세 달랑송이 휘두른 도끼에 투구를 가격당해 땅바닥에 쓰러져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만,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목숨을 바쳐가며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아쟁쿠르 전투 말미, 헨리는 프랑스군 포로를 모조리 학살하도록 지시했다. 잉글랜드 기사들과 병사들이 학살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자, 헨리는 엄선한 200명의 궁수에게 이 일을 맡겼고, 포로들은 전부 살해당했다. 포로들을 단검으로 찌르고 망치로 머리통을 박살냈으며,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배를 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심지어 포로를 오두막에 전부 몰아놓고 불을 질러 집단 화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세 기준으로도 굉장히 잔혹한 처형에 속했다.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간신히 생환할 수 있었다.

헨리 5세가 포로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직 남아있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두려워했고, 잉글랜드군이 사로잡은 프랑스군의 숫자가 너무 많아 어떻게든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5세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 고위 포로들을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일반 병사들은 값나가는 물건과 소지품을 모조리 털렸다. 잉글랜드군은 소수의 부유층만을 남기고 가난한 자와 중상자는 모조리 목을 그어 죽여버렸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헨리는 칼레로 이동했다가 11월에 런던으로 돌아온 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승리를 선포했고, 잉글랜드인들은 1356년 푸아티에 전투 이래 60년만에 거둔 대승에 매우 열광했다. 이리하여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축출한 이래로 입지가 불안정했던 랭커스터 왕조는 잉글랜드인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고, 헨리 5세의 권위 역시 확고부동해졌다.

2.5.3. 지기스문트의 잉글랜드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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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를 방문한 지기스문트.

1415년경, 콘스탄츠 공의회를 이끌던 헝가리 왕국의 국왕이자 로마 왕 지기스문트는 교황이 난립하는 문제의 핵심은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오랜 세월 대립하는 데 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이를 중재해 평화를 이룩하고 단 한 명의 교황만 받들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르고뉴를 거쳐 1416년 3월 1일 파리에 도착한 뒤, 정신병에 걸려서 정무를 보지 못하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고 있던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만나 잉글랜드와 화해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베르나르 7세는 잉글랜드군이 해군 기지로 사용하는 아르플뢰르에 대한 해군 봉쇄를 유지해 잉글랜드군을 충분히 약화시킨 뒤 아쟁쿠르 전투의 복수를 하길 갈망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으라는 지기스문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지기스문트는 헨리 5세와 협상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1416년 초 도버에 상륙해 잉글랜드 대귀족과 성직자들의 영접을 받았고, 1416년 5월 3일 런던에 도착했다. 헨리 5세는 지기스문트를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했으며, 그가 의회에서 벌어지는 회의를 참관하도록 했고, 금세공인 헤르만 루이셀이 제작하고 헨리 5세의 문장 배지 중 하나인 흰색 에나멜 곰 문양이 있는 황금 목걸이를 선물받았다. 지기스문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 협상을 맺고 공통의 교황을 받들 것을 요청했고, 헨리 5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 정부에 지기스문트의 중재 하에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잉글랜드군이 자기들이 전쟁을 통해 확보한 영토를 굳이려는 수단이라고 여기고 거부했다.

프랑스의 비협조에 분노한 지기스문트는 교회 분열을 선호하고 평화 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는 프랑스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1416년 8월 15일 헨리 5세와 켄터베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지기스문트와 헨리 5세는 프랑스가 불법적으로 양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서로 약속했으며, 두 통치자의 신민에게는 서로의 땅을 자유롭게 거래하고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고, 상대방의 반역자를 숨겨주지 않으며, 전쟁 중에 서로를 돕기로 했다. 이리하여 지기스문트의 조부인 얀 루쳄부르스키가 확립했던 룩셈부르크 왕조와 프랑스 사이의 우호 관계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이후로 콘스탄츠 공의회와 뒤이은 후스 전쟁에 몰두했고, 백년전쟁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5.4. 아르플뢰르에서의 무력 충돌

한편, 프랑스 측은 잉글랜드에게 넘어간 아르플뢰르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벌였다. 프랑스와 제노바 함대는 항구를 봉쇄했고 프랑스 지상군도 아르플뢰르에 주둔한 잉글랜드 수비대를 육상에서 압박했다. 아르플뢰르 수비를 맡고 있던 도싯 백작 토머스 보퍼트는 이에 맞서 1,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선발한 뒤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1416년 3월 9일부터 작전을 개시한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 인근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다가 카니바빌에서 방향을 돌려 아르플뢰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아르마냑 백작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파견한 프랑스 분견대가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이 모든 말과 짐을 후방에 배치하고 전투 대형을 결성하자,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하여 적의 전선을 돌파했지만 적군의 후방을 요격하는 대신 짐을 약탈하고 말을 훔치는 데 열중했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인근의 작은 울타리 정원으로 후퇴한 후 해질녘까지 방어했다. 그러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보퍼트는 야간 행군을 감행해 현장을 빠져나갔다.

3월 11일 아르플뢰르 인근 해변에 이른 잉글랜드군은 절벽 위에 프랑스군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결성한 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시신을 약탈했다. 그 사이에 맨앳암즈 2,000명과 1,000명의 궁수병, 민병대 1,000명이 접근했다. 이들은 잉글랜드군에 접근하지 않고 고지대에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들을 뚫지 못하면 아르플뢰르에 돌아갈 수 없었기에, 보퍼트는 강행 돌파를 명령했다.

잉글랜드군이 명령에 따라 고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아쟁쿠르 전투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다. 이때 아르플뢰르에 남아있던 잉글랜드 수비대가 적의 측면을 요격하자, 간신히 전열을 유지한 채 물러나던 프랑스군은 아예 무기를 집어던지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160명이 전사한 데 비해 프랑스군은 200명이 전사하고 8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르마냑 백작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50명을 추가로 교수형에 처했다.

발몽 전투 이후 프랑스 육군이 아르플뢰르 근처에 얼씬하지 못했지만, 해상 봉쇄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에 헨리 5세는 7월 22일 함대를 모집해 이스트 서식스의 비치 헤드 곶에 집결시킨 뒤, 친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지휘를 맡겼다. 베드퍼드 공작은 8월 15일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해군과 셰프드코 해전을 치른 끝에 적선 3척을 나포하고 대형 선박 한 척을 침몰시켰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1,500명에 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베드퍼드 공작의 공적을 치켜세우려는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베드퍼드 공작의 활약으로 아르플뢰르 봉쇄는 풀렸고, 헨리 5세는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2차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2.5.5. 1417 ~ 1420년 프랑스 원정

2.5.5.1. 2차 캉 공방전
1417년 3월, 헨리 5세는 사우샘프턴에 대병력을 집결했다. 기록에 따르면, 사우셈프턴에 집결한 병력은 15,000명의 맨앳암즈 및 장궁병,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고용된 선박들을 포함한 1,500척에 달하는 함대였다. 여기에 포병, 공병, 광부, 갑옷 제작자 및 기타 보조원들까지 합치면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417년 7월 20일, 잉글랜드 함대는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이 아르플뢰르에 상륙하거나 볼로뉴 인근에 인근에 상륙하리라 예측했지만, 헨리 5세는 센 강의 남쪽 제방에 있는 작은 마을인 뚜끄 마을 인근 해변에 상륙했다.

이후 46명의 새로운 기사를 임명하고 클라렌스 공작이자 자신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토머스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고 앞장서서 각지의 성과 마을들을 공략하고 철저히 약탈하게 했다. 클라렌스 공작은 상륙 3일 만에 여러 마을을 공략하고 수많은 이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하고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인이 겁탈당했는데, 수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리시유 주교인 토머스 베이신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공포가 밀어닥쳤다. 그 누구도, 거의 누구도 도망하는 것 외에는 안전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도시와 요새에서 대부분의 마을과 요새에서 수비대를 가진 지휘관들이 성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리고 주민들이 제지되지 않았다면, 확실히 몇몇 곳에서 일어났듯이 마을들이 텅 빈 채로 남겨졌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오랜 평화와 질서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잉글랜드인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흉포한 짐승들이며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잉글랜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루앙에서 군대 소집령을 내리고 잉글랜드군의 행보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그의 정적인 용맹공 장이 파리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관심은 그 쪽으로 향했다. 이로 인해 노르망디인들은 프랑스군의 별다른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캉으로 진격했다.

캉은 노르망디의 문화, 정치, 종교 및 금융 중심지였다. 1345년 7월 26일 에드워드 3세캉을 공략하고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캉을 되찾은 프랑스인들은 도시의 방어를 대폭 강화했다. 총 12개의 문루와 32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이 새로 건축되었고, 언덕 위의 구 시가지를 감싸는 캉 성과 그 밑의 신 시가지를 감싸는 새로운 성벽이 세워졌다. 수비대는 공격자들이 이용가능한 교외 건물들을 철거하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8월 14일 클라렌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선발대가 도착했을 때 생트리니티 수도원과 생테티엔 수도원은 여전히 철거되지 않고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이 수도원들을 곧바로 확보한 뒤 수도원의 두꺼운 벽 뒤에 포대를 설치했다.

그 후 현장에 도착한 헨리는 8월 18일부터 신시가지를 향해 포격을 가하게 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크고 단단한 돌덩이나 가연성 물질로 채워진 철 포탄을 발사하는 중포와 납탄을 소나기처럼 발사하는 경포를 갖추고 있었다. 이 포탄들은 성내 석조 주택들을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치명적인 파편을 사방에 흩뿌려 수비대와 시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수비대는 새로 지어진 성벽 위에 설치된 소형 대포로 반격했지만, 위력이 떨어졌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잉글랜드 공병들은 성벽 아래에 터널을 뚫으려 했지만, 수비대가 성벽에 큰 물 그릇을 올려놓고 잔물결을 통해 터널 공사를 탐지하고 반대편에서 터널을 뚫어 이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시민들은 잉글랜드군이 포격을 중단한 밤마다 돌, 목재 덩어리, 모래주머니로 손상된 성벽을 수리했고, 성벽 뒤에는 참호를 파고 말뚝을 꽂았다. 헨리 5세가 사절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지만, 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헨리 5세는 9월 4일 3번의 미사를 치른 뒤 신시가지를 향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첫번째 공격은 불타는 기름, 생석회 가루, 끊는 물을 퍼붓고 석궁 화살과 투석기를 앞세워 항전한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에드먼드 스프링하우스라는 이름의 기사는 파손된 성벽 틈으로 들어갔다가 그 뒤에 있는 참호에 빠진 뒤 프랑스군에게 붙들린 후 성벽 위로 끌려가 잉글랜드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태워졌다. 이후 2번째 공세 역시 격퇴되었지만, 헨리는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 공세를 단행했다. 잉글랜드군은 격전 끝에 파괴된 성벽 틈을 파고 들어서 시내 중심가로 진입했다. 수비대와 시민들은 처절하게 싸웠지만 끝내 제압당했다.

헨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찾을 수 있는 모든 시민을 시장으로 몰아넣은 뒤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최소 2,000명이 학살되었고, 핏물이 거리를 가득 흘러내렸다고 한다. 헨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중 가슴을 빨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는 머리 없는 여인의 시신을 보고 학살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 대신, 병사들이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가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손을 쭉 뻗으며 자비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

언덕 위의 구 시가지와 성채는 좀더 버텼지만 신시가지에서 도망쳐온 피난민들로 인해 곤경을 겪다가 16일 후인 9월 20일에 항복했다. 헨리는 구 성채를 지킨 병사들에게는 말, 무기, 장비, 그리고 각각 2,000에쿠스의 동전을 챙기고 떠나도록 허용했다. 반면 민간인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도시에 남거나 입고 있는 옷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700~2,000명의 시민이 도시를 떠났다고 한다.
2.5.5.2. 루앙 공방전
캉을 공략한 헨리 5세는 기세를 이어가 아르장탕, 팔래스, 셰르부르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공략했다. 이후 바이외, 코탕탱, 에브뢰, 쉴부르, 알랑송 등지의 주민들이 앞다퉈 귀순하면서, 노르망디 대부분이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헨리는 그 해 겨울 동안 노르망디에 머물면서 점령지에 행정관들을 파견해 지배력을 강화했다. 1418년 봄 원정군을 재차 일으킨 그는 프랑스에서 파리에 이은 2번째 도시였던 루앙을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

1418년 6월, 루앙으로 진군하던 중 루비에르를 공략한 헨리 5세는 루비에르의 포로들 중 자신의 막사에 포탄을 명중시킨 프랑스군 포병 8명을 끌고와 전부 교수형에 처했다.[13] 뒤이어 퐁드라르슈도 함락시키고 여러 요새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뒤 7월 31일 루앙에 당도했다. 그는 루앙 시가지를 둘러보고는 무력으로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 성벽은 매우 두꺼웠고 각각 3개의 대포가 포함된 60개의 탑과 바비칸이 보호하는 6개의 성문이 있었고, 수비대는 4,0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은 백년전쟁 기간 동안 여러 공성전을 치렀지만,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성을 공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헨리는 섣불리 공격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느니 16,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루앙을 완벽하게 봉쇄해 굶겨죽이기로 마음먹고, 4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하고 철 사슬로 루앙 주변을 지나는 센 강에 설치해 누구도 도시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루앙 수비대와 시민들은 파리 정부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가는 대도시이며 프랑스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 도시를 버릴 리 없다고 믿고 구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에겐 불행하게도, 1418년 5월 29일 아르마냑파를 몰아내고 파리를 공략한 용맹공 장은 헨리 5세와 밀약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는 구원을 호소하는 루앙 대표단에게 500명의 무장병, 1,000명의 궁수, 12,000명의 파리 민병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보내주지 않았고 단지 600명의 민병대만이 루앙에 찾아왔다. 이후 루앙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전령이 지원을 호소하자, 장은 냉랭하게 답했다.
"너희 자신을 스스로 돌봐라."

이렇듯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았지만, 반 잉글랜드 정서로 똘똘 뭉친 루앙 시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Enguerrand de Monstrelet)는 이들이 잉글랜드 왕의 뜻에 복종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살아남기로 맹세했다고 밝혔다. 이후 양자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진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루앙에 보관된 식량이 12월 초부터 바닥을 드러내면서 기근의 위협이 엄습했다. 이에 루앙 시민들은 "쓸모없는 입"으로 간주된 여성, 어린이, 노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추방자들이 잉글랜드 진영으로 밀려와서 자신들을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헨리 5세는 누구도 포위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했다. 결국 이들은 성벽 근처에 파헤쳐진 도랑에서 살아야 했다. 많은 잉글래드 병사들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나눠주려 했다가 헨리 5세에게 걸려 처벌받았다. 다만 헨리는 1418년 크리스마스 때 성직자 2명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특별히 주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구호는 이것 뿐이었고, 추방자들은 도랑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었다.

수비대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수차례 출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헨리는 생포된 프랑스 장병들을 수비대가 지켜보는 앞에서 집단 처형했다. 수비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잉글랜드인 포로들을 성벽에 내걸어 목이 졸려 죽게 했다. 이후 수비대와 시민들은 말을 잡아먹었고, 말이 사라지자 개, 생쥐, 고양이 등을 먹어치웠다. 1419년 1월 2일, 기사 16명이 헨리 5세를 찾아와서 조건부 항복을 타전했지만, 헨리는 어떤 타협도 거부했다. 헨리 5세의 입장을 전해들은 시민과 수비대는 도시를 모조리 불태운 뒤 최후의 돌격을 하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첩보원으로부터 이같은 정보를 입수한 헨리는 루앙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면 자신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인질 80명을 넘기고 금화 3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집과 재산을 지킬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루앙의 많은 시민이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하길 꺼렸지만, 며칠간의 격렬한 논의 끝에 1월 19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기로 결의했다. 구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고, 루앙은 1월 19일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헨리는 루앙에 입성한 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문장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으며, 자신을 "Henrycus Rex Francorum"(프랑스의 헨리 왕)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자신에게 끝까지 항전한 루앙 수비대 장교들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세 장교를 참수하기로 했다. 그가 지명한 희생자는 루앙 대주교의 대리인이었던 로베르 리베, 포병대장인 장 주르댕, 그리고 석궁병 지휘관 알랭 블랑샤르였다. 로베르 리베와 장 주르댕은 재산 일부를 헨리 5세에게 지불함으로써 목숨을 구했지만, 블랑샤르는 이를 거부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처형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재산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갖는다고 해도, 잉글랜드인이 불명예스럽게 만들게 하느니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2.5.6. 트루아 조약

루앙을 공략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한 헨리 5세는 며칠간 병사들을 휴식시킨 뒤 파리를 향한 공세를 감행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데다, 루앙 함락을 방관한 것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은 용맹공 장은 도팽 샤를 및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기로 했다. 1419년 7월 8일, 장은 푸이르포르에서 샤를 왕세자와 만나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평화 조약과 동맹을 제안했다. 퐁소 평화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은 샤를 왕세자와 고문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다만 아르마냑파는 장이 부르고뉴인들이 점령한 요새를 포기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행위를 재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샤를 왕세자와 장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자, 프랑스 전역에서 내전 종결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1419년 7월 31일, 잉글랜드군이 우아즈강의 요충지 퐁투아즈를 기습해 점령했다. 파리의 중요한 방어 거점인 퐁투아즈의 함락과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은 수도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용맹공 장과 이자보 왕비는 파리 방어를 포기하고 샤를 6세를 데리고 라니쉬르마른으로 황급히 도주했다. 이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 주변을 약탈했다.

1419년 9월 10일, 용맹공 장이 도팽공 샤를을 받든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적하기 위해 몽뜨흐 다리에서 회견을 가졌다가 아르마냑파 기사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으로 추대된 용맹공 장의 아들 선량공 필리프는 도팽 샤를이 아버지를 해치는 데 책임이 있다고 믿고 그에 대한 충성 맹세를 포기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협상을 가졌다. 하지만 본래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헨리 5세에게 가급적 많은 것을 양보하지 않고 동맹을 이끌어내기를 희망했다. 그해 10월, 잉글랜드군이 묄랑 다리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고뉴파 주둔군은 필리프에게 파리 시민들이 잉글랜드군에 항복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헨리 5세와 조속히 합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필리프는 그래도 헨리 5세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헨리 5세가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자 결국 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이기로 했다.

1420년 5월 21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필리프와 이자보 왕비의 거듭된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헨리 5세는 샤를 6세와 이자보의 딸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국왕이 되며, 헨리 5세와 카트린의 아들이 뒤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다. 반면 도팽 샤를은 용맹공 장을 부당하게 살해하여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린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자보가 아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도팽 샤를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사생아라고 선언했다고 주장했지만, 트루아 조약에는 도팽 샤를이 사생아라고 규정되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아무튼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독립을 잃고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다만 조약에 따르면, 샤를 6세와 이자보는 생애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 왕과 왕비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1420년 6월 2일, 헨리 5세는 트루아 대성당에서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했다. 그 후 그의 군대는 7월에 용맹공 장이 살해되었던 몽뜨흐 요새를 포위해 며칠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헨리 5세는 1420년 11월 멜룬을 포위 공격해 함락했다. 그 후 파리에서 겨울을 보내던 헨리 5세는 1421년 1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을 분쇄하고 본국에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카트린 왕비와 함께 잉글랜드로 떠났다. 클라렌스 공작이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토머스는 헨리를 대신해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2.5.7. 1421 ~ 1422년 프랑스 원정과 최후

1421년 3월 22일, 앙주의 수도 앙제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던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보제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 카트린의 왕비 대관식을 거행한 뒤 잉글랜드 북부를 순시하며 스코틀랜드를 공격할 준비를 하던 헨리 5세는 친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격노했다. 1421년 6월, 그는 4,000 ~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칼레로 향했다. 이후 노르망디의 잔여 잉글랜드군, 부르고뉴파 프랑스군, 베네치아, 제노바, 플란데런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2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마냑파를 응징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헨리 5세는 먼저 드뢰를 공격해 손쉽게 공략한 뒤, 방돔으로 진군하지만 프랑스군 주력에 의해 막힌다. 이후 오를레앙 방향으로 후퇴하다가 강행군으로 루아르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 중인 프랑스군을 기습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조이니와 빌노븨 르 로이로 방향을 돌려서 그곳들을 공략했다. 이후 1421년 10월 6일 파리 주변의 일드프랑스 일대에서 왕세자파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새인 모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모 요새에는 1,000명 가량의 수비대가 있었고, 지휘관은 바스타르 드 보뤼스였다.

헨리는 도시를 포위한 뒤 포병대를 동원해 성벽을 수시로 포격하고 성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그러나 보뤼스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이질이 창궐하면서 아쟁쿠르 전투에서 맹활약한 존 클리포드 등 잉글랜드 유수의 장군들과 병사들이 병사했다.[14] 헨리 본인도 병에 걸렸지만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22년 5월 9일 성벽을 뚫고 모 마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수비대는 내부 성채로 들어가서 계속 항전하다가 5월 10일에 항복했다. 헨리 5세를 향해 조롱조의 노래를 지어서 부른 나팔수 오라스는 참수되었고, 보뤼스는 참수된 뒤 느릅나무에 머리와 시체가 매달렸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군은 모 성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6,000명 이상을 상실했다고 한다.

모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뒤, 헨리 5세는 데본 출신의 행정관 존 포테스큐를 모 수비대장으로 임명한 뒤 벵센 성으로 가서 건강을 회복한 뒤 6월 말에 샤를 도팽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코스느쿠르쉬르루아르로 진군했지만, 무더운 날씨 속에서 완전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온종일 행군했다가 질병이 재발하면서 다시 쓰러졌다.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파리로의 귀환길에 올랐지만, 말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해 가마에 실려갔다. 8월 벵센 성에 도착한 그는 병상에서 카트린 왕비와 측근들을 불러모았고, 외아들 헨리 6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고, 친동생 베드퍼드 공작을 잉글랜드의 섭정,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프랑스의 섭정으로 삼겠다고 유언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상황이 나빠진다면 노르망디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라."고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의 대의명분만이 프랑스에 정당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비슷한 말을 했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는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세. 그의 유해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장례식을 치른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의 섭정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베드퍼드 공작이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고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잉글랜드의 호국경이 되었다. 험프리는 자기가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이를 강력하게 막아서는 바람에 성사하지 못했다. 이후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1422년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하면서, 갓난아기 헨리 6세는 트루아 조약에 의거해 프랑스의 국왕을 겸임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르마냑파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었고, 도팽 샤를은 이에 힘입어 자신이 프랑스 국왕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헨리 6세를 받드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과 도팽 샤를을 받드는 아르마냑파는 프랑스의 패권을 놓고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대반격, 어린 국왕 헨리 6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어야 할 권세가들의 심각한 갈등, 부르고뉴 공국의 이탈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백년전쟁에서 승리했다.

3. 평가

오랜 세월 동안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던 잉글랜드-프랑스 관계로 인해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그 왕위 계승권까지 한때나마 차지했던 헨리 5세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인들에게 영웅으로 숭배받았다. 그래서 영미권에선 대체역사를 좋아하는 역덕들이 그가 장수했을 경우 과연 어떻게 역사가 바뀌었을지, 특히 이럴 경우 잔 다르크가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을지나 잔 다르크와 대결할 경우 누가 이겼을지에 대한 떡밥의 글이 종종 인터넷 포럼에 올라온다.

3.1. 잔혹성

후대의 사람들에게 헨리 5세는 유달리 잔혹하고 무자비한 군주로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학살한 것을 비판하지만, 당시 포로의 숫자가 수천에 달해 거의 잉글랜드군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으며, 그냥 풀어줄 경우 전장에 흐트러진 무기들로 재무장하거나 후방의 프랑스군에게 합류하여 잉글랜드군과 맞서 싸울 것을 우려했기에 학살을 명령한 것이었다. 또 프랑스군의 추가 공격이 예상되었기에 망설이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따라서 아쟁쿠르의 학살은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프랑스 역사가들도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수천에 달하는 인원을 한꺼번에 죽인 것은 확실히 잔혹하긴 하다. 게다가 포로를 오두막에 몰아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인 것은 당대인의 관점에서도 지나쳤다고 한다.

헨리 5세가 유달리 비난받는 부분은, 무자비한 보복과 이에 따른 민간인에 대한 약탈과 조직적인 학살이다. 헨리 5세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지만, 당대의 전쟁 관습대로 항복을 거부했을 경우 군인은 물론 민간인이라도 봐주지 않고 가차없이 죽였다. 캉의 학살에서 최소 2,000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을 한꺼번에 장터로 몰아넣고 전부 죽여버렸다. 게다가 그는 운좋게 살아남은 주민들을 상대로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을 허용해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약탈과 강간을 당했다. 심지어 "불 없는 전쟁은 머스타드 없는 소세지와 같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질 정도였으며 잉글랜드군이 가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아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은 아주 쉬웠다고 한다. 그는 포위전을 치르는 동안 병사들을 출격시켜 인근 농가를 약탈하고 방화를 하고 다니곤 했다.

또, 헨리 5세는 루앙을 공격하기 전에 수비대가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교수대를 세운 다음 포로들을 데려와 목을 매달았다.[15] 믈룅에서 거세게 저항하다 포로가 된 프랑스 수비대들 역시 교수형에 처했고, 보복으로 20리그(96km) 근방을 초토화시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루주몽 성을 함락시켰을 때는 수비대 전체를 목 매달은 다음 건물을 무너뜨렸으며, 도망친 수비대원들마저 추격대를 보내 사로잡은 다음 전부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모를 함락시켰을 때는 프랑스 수비대장 바스타르 드 보뤼스를 참수한 다음 나무에 머리와 시체를 걸어놓았다.

자신을 모욕한 오라스라는 나팔수를 사로잡아 처형한 일도 있었고, 침략자에 맞서 자신의 성을 잘 지킨 죄밖에 없는 수비대장 역시 참수해 버렸다. 포로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한 적도 있는데, 솔직히 이것은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복수였으며 그저 헨리 5세의 개인적인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헨리 5세가 처음부터 프랑스를 상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학살을 계획한 것은 아니고, 그의 첫 데뷔전이었던 아르플뢰르의 공성전에서는 완강한 수비대를 상대로 수차례의 권고 끝에 항복을 받아냈으며, 포로의 처분도 귀족들과 수비대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 주민들은 자신의 지배를 반대하는 자를 추방하는 걸 빼면 보복을 가하지 않는 등 훗날의 악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대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르플뢰르에서 입은 전군의 약 20 ~ 40% 수준의 큰 손실을 만회하고 적은 수의 병력으로 효율적인 정복을 위해서, 그리고 프랑스의 문턱에서부터 진흙탕 신세를 만든 프랑스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가 더해져서 훗날의 악명을 쌓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어찌됐건 상기한 헨리의 보복과 약탈, 학살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프랑스인들한테서 잉글랜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헨리가 군대를 끌고 인근 농촌을 약탈할 때마다 프랑스 농민들은 절망에 사로잡혀 농장과 가족을 버리고 숲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프랑스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1419년경의 어떤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 침략자들은 "굶주린 늑대들, 오만한 위선자들, 사람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 약탈로만 살아가는 자"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성 때문에 헨리 5세는 프랑스에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이런 헨리 5세의 잔혹함은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최종적으로 패배하는 한 이유가 되는데, 본인이 살아있을 때는 스스로의 카리스마와 잔혹함으로 영국군을 하나로 뭉쳐 프랑스를 공포로 굴복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반감을 남겨 버렸다. 이 탓에 헨리 5세가 급사하고 잔 다르크라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프랑스 측에 나타나자, 그 공포는 바로 증발하고 영국에 대한 반감으로 뭉친 프랑스의 반격을 받아 결국 영국은 패배하고 말았다.

4. 가족 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헨리 6세
(Henry VI)
1421년 12월 6일 1471년 5월 21일 앙주의 마르그리트
슬하 1남[16]

5. 여담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헨리 5세>에서 등장한다. 앞의 두 극에서는 할 왕자(Prince Hal)이라는 이름의 왕세자로 나온다.
  •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서 왕세자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태자'라는 표현을 써서 지칭된다. 주인공 바비도[17]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가지고 "뉘우치는 말을 하면 살려주겠다"며 회유하나, 바비도는 끝내 거절한다. 마지막에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라며 한탄한다. 직접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이 바비도가 훗날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막은 잔 다르크와 겹치는 부분[18]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바비도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인 존 배드비가 1410년 화형을 당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잔 다르크[19]가 태어난 걸 생각하면 묘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작가 김성한이 이 부분까지 고려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상술한대로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03년 퍼시 가문을 위시한 노섬브리아의 영주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던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날아온 화살이 얼굴을 맞아 사경을 해멘 전적이 있었다. 이때 범죄 혐의로 감옥에 있던 의사 존 브레드모어를 석방을 조건으로 당시 헨리 5세의 얼굴에 박힌 화살촉을 빼내는 수술을 집도하게 했고, 이때 존 브레드모어는 자신의 금속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화살촉 제거기(arrowhead removal)를 발명해 헨리 5세에게 박힌 화살을 무사히 빼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1:20부터볼 것을 추천한다.#[20]
  • 한국 대체역사소설 마지막 바이킹에서 신분제와 봉건제 등 구체제를 고수하려는 최종보스격 빌런으로 등장한다.

[1]영국 웨일스 몬머스셔[2]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드마른 뱅센[3]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4] 원래 유래는 리처드 1세가 1198년 기소르 전투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을 격파할 때 외친 배틀 크라이로 여기서 '권리'는 철저한 왕권신수론자였던 리처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군주의 왕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걸 왕실 표어로 삼은 헨리 5세의 '권리'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계승권을 의미한다.[5] 1392 ~ 1409,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의 부인[6] 1394 ~ 1430,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의 부인[7]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8]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왕실군과 반군은 병력이 각각 14,000여명으로 대등했으며, 항복하라는 헨리 4세의 제안을 해리 핫스퍼가 거부하며 반군이 결사적으로 나온터라, 국왕군도 겨우 이겼을 정도로 치열했다. 특히 전투가 끝난 후 국왕군의 사상자가 3천 명이나 나와, 2천 명의 사상자를 낸 반군보다 더 많았을 정도였다. 해리 핫스퍼는 전사하고 사후 그의 영지가 전부 왕실에 몰수된다.[9]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10] 마레두드는 1421년이 되어서야 헨리 5세의 사면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영지를 돌려받았다.[11]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아버지 루이 1세가 용맹공 장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샤를의 장인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불과 14세의 나이로 작위를 승계한 어린 오를레앙 공작을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파벌의 핵심인사로 떠올랐기에 파벌의 명칭이 아르마냑파로 굳어졌다. 양측의 대립이 루이 1세 생존시부터 있었던 일이기에 이 시점의 파벌까지도 소급하여 아르마냑파라고 부르기도 한다.[12] 당시 중세 유럽에서는 밀라노와 뉘른베르크가 갑옷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13] 일부 문헌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포로를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한다.[14] 사실 이질은 전근대 군대의 가장 큰 적이었다. 아무리 관리한다 해도, 전근대라는 환경에서 장기간 타지에 원정을 떠난 군대가 항상 위생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헨리 5세는 '전사왕'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웨일스 공 시절부터 병사들과 함께 최일선 진흙탕에서 구르는 타입의 지휘관이었고,[21] 따라서 전염병의 위험에 그만큼 더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15] 이 때문에 루앙 수비대도 보복으로 잉글랜드군 포로들을 목매달아 죽였다.[16] 웨일스 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17] 실존인물이며, 본래는 존 배드비(John Badby) 라는 이름인데 작가의 착오로 인해 '바비도'가 되었다. 작가도 차후 해당 착오를 인지하고 "발표한 지 오래된 걸 감안하여, 작가로서의 책임도 있으니 그대로 남기고 책임의 소재만 밝혀두겠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해당 작가 문서를 참고하자.[18] 두 사람 다 평민의 신분으로 영국 왕실과 맞섰으며, 이미 타락해버려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권력만 챙기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여 이단자로 몰려 재판을 받을 때도 당당하게 나서면서 의지를 끝까지 지키다가 화형당했고,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거절한 공통점이 있다.[19] 1412년생으로 추정.[20] 다만 그 결과 왼쪽 뺨에 흉측한 흉터가 생겼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때문인지 헨리 5세의 초상화들은 전부 오른쪽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