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02:52:08

헨리 5세

파일:나무위키+유도.png   강철의 누이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헨리 5세(강철의 누이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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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식스·잉글랜드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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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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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헨리 5세 (Henry V)
출생 1386년 9월 16일
웨일스 몬머스 성
사망 1422년 8월 31일 (35세)
프랑스 뱅센 성
장례식 1422년 11월 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아일랜드 영지의 영주
1413년 3월 21일 ~ 1422년 8월 31일
배우자 발루아의 카트린 (1420년 결혼)
자녀 헨리 6세
아버지 헨리 4세
어머니 마리 드 보헌
형제 토머스, 존, 험프리, 블랑슈, 필리파

1. 개요2. 생애
2.1.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다2.2. 때 이른 죽음
3. 평가
3.1. 잔혹성
4. 트리비아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에 활약한 잉글랜드의 왕.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모습과는 달리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며, 능력이 대단해 헨리 4세가 병에 들었을 때 잠시 아버지 대신에 국왕 자문회의를 운영한 경력이 있었다. 이때 너무 유능해서 회복한 헨리 4세는 아들을 견제해 이후 헨리 5세에게 아무런 공직도 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사망하기를 그냥 기다렸다.[1]

헨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활약했다. 그는 열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실전을 겪었고, 1403년 슈루즈버리 전투(Battle of Shrewsbury)에서 해리 핫스퍼(Harry Hotspur)가 이끄는 반군을 격파했으나 전투 도중 왼쪽 얼굴에 화살을 맞아 낙마했다.[2] 이때 화살이 워낙 깊게 박혀서 수술만 해도 며칠이나 걸렸을 정도였고 왕실 주치의 존 브래드모어와 의사들도 화살을 제거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으나 그의 얼굴 왼편에 큰 흉터가 생겼다고 한다. 해리 핫스퍼를 격파한후 헨리 5세는 왕자 시절 오웨인 글린두르가 이끄는 웨일스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헨리 5세는 키가 굉장히 컸다. 그의 키는 무려 6피트 3인치(약 190cm)에 달했다. 현대 기준으로도 엄청난 장신이므로 중세 유럽에선 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항상 깨끗하게 면도했으며 혈색이 건강했고 코가 날카로웠다. 두 눈은 비둘기의 온후함과 사자의 위엄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힘이 장사여서 무게가 삼십 킬로그램이 넘는 갑옷을 마치 가벼운 외투처럼 걸치고 다녔다. 헤어스타일은 군인 특유의 바가지 머리(투블럭)였고 태도는 쌀쌀맞았으나 정중했다.

2. 생애

2.1.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다

야심찬 젊은 국왕은 프랑스의 지배권을 원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존 올드캐슬이 이끄는 롤라드파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존 위클리프의 종교 개혁 운동) 인물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들이 국왕에 대해 반란을 꾸민 것은 사실인데, 사실 음모는 진행되지도 않았고 계획도 완전히 엉터리였다. 게다가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를 런던탑에 포로로 억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즉위했을 때가 한창 프랑스백년전쟁으로 투닥대던 시기라 그는 왕위에 오르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군과 치고받으며 지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Jean sans Peur/John the Fearless)이 이끄는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이끄는 아르마냑파[3]가 실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립이 격화되어가는 와중에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국내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양 파벌은 서로를 누르기 위해 심지어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손을 벌리기까지 했고 헨리 5세는 이러한 대립을 잘 이용하여 장차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1413년에 아르마냑파는 수도인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부르고뉴를 침공하여 공작을 폐위시키겠다고 주장했고, 헨리는 이들 양쪽과 협상을 진행했다. 먼저 1414년에 부르고뉴 공작 장이 보낸 대리인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헨리 앞에서 가스코뉴와 앙구무아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대가로 영국 병력 2천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한편 아르마냑파의 사절단에게 헨리는 신붓감으로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을 보내고 천만 크라운의 지참글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아르마냑파는 공주와 장 국왕의 몸값 잔액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으나 헨리 5세의 요구는 점점 더 커졌다. 헨리는 마침내 아키텐과 노르망디, 앙주와 푸아투, 멘, 퐁티외까지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헨리 5세는 곧바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1414년 11월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를 통하여 헨리는 의회의 열렬한 지지와 군자금을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잉글랜드 곳곳에 사람을 파견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성직자들과 부유한 젠트리, 요먼들이 헨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헨리 5세는 이 군자금을 훗날 거의 다 갚아주었다.

헨리의 군대는 6천 명의 장궁병과 2천 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창기병과 검병을 포함한 중보병, 65명의 포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판금 갑옷은 밀라노와 뉘른베르크 수입산이었다.[4] 국왕은 신선한 고기를 확보하게 위해 소와 양을 항구까지 몰고간 다음 즉석에서 도축하였다고 한다. 총 1,500척의 함대가 집결되었다. 헨리는 출정 직전 마지막으로 후방을 안정화하기 위해, 자신의 암살 음모에 가담한 케임브리지 백작, 토머스 그레이 경, 스크로프 경, 올드캐슬 경을 처형했다.

그리고 1415년 8월 11, 헨리 5세는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프랑스 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상륙했다. 그들은 아르플뢰르라는 항구 도시에 상륙했다. 헨리는 아르플뢰르를 발판삼아 노르망디 전역을 정복하고 파리로 향할 생각이었다.

헨리는 정면 공격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는 육지엔 도랑을 팠고 해상엔 함대를 주둔시켜 보급을 차단했고, 땅굴을 파내어 폭약으로 성벽을 난타했다. 결국 아르플뢰르는 오지 않는 지원군을 기다리다 지쳐 항복했다. 상당히 오랜 기간을 버티면서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국왕 샤를 6세는 지원군을 주지 않았다.

몇 개월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터라 영국군은 지쳐 있었지만, 헨리는 머뭇거리면서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당장 군대를 출격시킨 다음 센 강을 따라서 칼레까지 진군하겠다고 공언했다. 이것은 260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행군이었다. 국왕의 자문관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헨리 5세가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헨리 5세는 예전의 잉글랜드 왕들이 그러했듯이 경로에 있는 모든 마을을 다 부수고 다 태우면서 진격하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잉글랜드군이 신나게 불을 질러서 프랑스 국토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헨리의 군대는 주둔지 반경 100km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불길이 없는 전쟁은 머스타드가 없는 소세지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용맹공 장에게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 왕위의 상속권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며 그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용맹공 장은 처음엔 잉글랜드군과 결탁하고자 하는 조짐을 보였으나 일단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과 아르마냑파가 주도하는 프랑스군이 충돌,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가 발발했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잉글랜드군은 6천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진이 쭉 빠져 프랑스에게 언제 쓸려나갈지 몰랐으나 헨리 5세의 지략과 프랑스군의 성급함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헨리는 프랑스군 포로를 모조리 학살하도록 지시했으며,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간신히 생환할 수 있었다. 한편 아쟁쿠르 전투로 인해 사망한 프랑스군 지휘관 중에는 용맹공 장의 동생들도 있었으나 정작 용맹공 장 휘하의 부르고뉴군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때 아쟁쿠르에서 헨리가 포로 학살을 지시하자, 잉글랜드군 기사들과 병사들조차 탐탁치 않아 망설일 정도였다. 결국 그는 엄선한 200명의 궁수에게 이 일을 맞겼고, 포로들은 전부 살해당했다. 포로들은 단검에 찔리고 망치에 머리통이 박살났으며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배를 검으로 찔리기도 했다. 심지어 포로를 오두막에 전부 몰아놓고 불을 질러 집단 화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세 기준으로도 굉장히 잔혹한 처형에 속했다.

아무튼 아쟁쿠르에서 헨리가 포로를 처형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그는 아직 남아있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두려워 했고, 잉글랜드군이 사로잡은 프랑스군의 숫자가 너무 많아 어떻게든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5세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 고위 포로들을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일반 병사들은 값나가는 물건과 소지품을 모조리 털렸다. 잉글랜드군은 소수의 부유층만을 남기고 가난한 자와 중상자는 모조리 목을 그어 죽여버렸다.

이후 헨리 5세는 동생 베드퍼드 공작에게 명령을 내려 프랑스와 제노바의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외교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를 갈라놓아 프랑스를 고립시킨 뒤, 1417년 다시 프랑스로의 원정을 재개했다. 1만 명의 병력이 본국으로부터 증원되었고, 헨리는 노르망디로부터 프랑스 내륙으로 차근차근 진격해 나갔다. 아르마냑파는 아쟁쿠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헨리 5세의 앞에서 프랑스군은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캉이 첫 번째 목표였고, 항복을 거부한 대가로 시민들은 학살되었다.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린이까지 전부 장터로 몰아넣은 잉글랜드군은 2000명의 시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살아있는 자가 없었다. 이날 장터에 없었던 사람들도 강간과 약탈을 당해야만 했다.

캉의 운명을 보자 바이외는 곧바로 굴복했다. 코탕탱과 에브뢰, 쉘부르도 전부 정복되었다. 알랑송도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헨리는 점령지에 행정관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6월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루비에르가 정복되었고, 헨리는 루비에르의 포로들 중 자신의 막사에 포탄을 명중시킨 프랑스군 포병 8명을 끌고와 전부 목을 매달아 버렸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헨리는 심지어 프랑스 포로를 고대 로마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처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퐁드라르슈도 함락되었고, 곧이어 노르망디의 마지막 도시인 루앙이 잉글랜드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헨리는 느긋하게 포위망을 차리고 루앙의 항복을 기다렸다. 드디어 루앙 시민들은 고기가 다 떨어져 말고기를 먹고 생쥐를 먹었으며 썩은 음식과 풀까지 뜯어먹었다. 이때 루앙의 프랑스 수비군 사령관 알랭 블랑샤르(Alain Blanchard)는 식량을 아끼기 위해 가난한 시민들을 전부 성 밖으로 내쫓았는데, 쫓겨난 루앙의 시민들은 잉글랜드군 진영으로 찾아와 항복했으나 헨리는 비정하게 그들의 항복을 거부하며 쫓아낸 다음 이들이 모두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잉글랜드군조차 루앙 시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해[5] 빵을 주려고 했으나 헨리는 이조차 막았다. 결국 쫓겨난 루앙 시민들은 겨울이 와서 굶주림과 추위로 굶어죽어나 얼어국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이 시기 루앙의 모습은 비참했다. 존 페이지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어미가 죽었는데 아이는 죽은 줄도 모르고 젖을 빨고 있었으며, 시민들은 거리에 널부러져 숨을 쉬다가 소리 없이 죽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면 죽은 자는 열두 명에 달했다. 마침내 루앙이 항복했다. 헨리 5세는 도시에 입성해 대성당에서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물론 항복해온 수비대 사령관 알랭 블랑샤르와 프랑스 수비대는 전부 처형되었다.

이때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는 다시 내부 항쟁에 돌입해 있었다. 아르마냑파는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인해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파리의 지배권은 여전히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에게 있었고, 부르고뉴파는 라이벌인 아르마냑파를 찍어누르고 프랑스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헨리 5세는 이들의 분쟁이 더욱 격화되도록 교묘히 유도하여 그들이 힘을 합쳐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막으며, 프랑스군을 각지에서 격파, 점차 남진하여 파리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헨리는 이제 노르망디 전역의 지배자였고, 파리의 코앞에 도달했다. 샤를 6세의 정신병은 너무 심해져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샤를 6세의 네 왕세자는 어려서 일찍 죽거나 병사했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은 샤를이라는 이름의 소심한 젊은이였는데[6] 아무리 봐도 왕 자질이 없었다.

1418년, 부르고뉴군이 폭동을 일으켜 파리를 무력으로 탈취했고 라이벌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부르고뉴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샤를 6세의 아들이자 원래 왕위계승권자인 도팽 샤를은 원래 부르고뉴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 파리를 떠나 시농으로 도피했다.

이후 도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맹공 장에게 회담을 신청했고, 몽트로 다리에서 양자가 회동하기로 약속이 맺어졌으나, 회담 장소에서 용맹공 장이 도팽 샤를의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1419년). 이에 격분한 용맹공 장의 아들 선량공 필립은 잉글랜드군과 연합하여 도팽 샤를을 적대하게 되었고, 따라서 파리 역시 헨리 5세의 세력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420년 5월, 헨리 5세는 샤를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샤를 6세의 딸이자 왕세자 샤를의 누나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왕위계승자이자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병약한 샤를 6세가 죽으면 젊고 튼튼하고 강골인 헨리 5세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6세는 헨리 5세보다 나이도 많고 병약했기 때문에 헨리 5세로서는 샤를 6세만 죽으면 자신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여겼다. 비록 도팽 샤를(훗날의 승리왕 샤를)과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냑파가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내의 다른 주요 파벌인 부르고뉴파는 헨리 5세의 즉위에 찬동하고 있었고 헨리 5세 본인이 이미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포로들을 대부분 학살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커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놓았기에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처럼 보였다.

2.2. 때 이른 죽음

하지만 얼마 못가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난 직후, 프랑스 원정을 지휘하다가 한참 젊은 나이에 전염병인 이질을 앓다가 죽었다.

헨리 5세는 파리로 급하게 돌아왔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으며 말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가마에 실려서 8월 뱅센 성에 도착했다. 그는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을 불러 어린 헨리 6세의 후견인으로 임명하고 프랑스의 섭정직을 물려주었다.

헨리 5세는 유언으로 반드시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상황이 나빠진다면 노르망디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대의명분만이 프랑스에 정당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그는 8월 31일, 35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질은 전근대 군대의 가장 큰 적이었다. 아무리 관리를 한다 해도 전근대라는 환경에서 장기간 타지에 원정을 떠난 군대가 항상 위생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헨리 5세는 '전사 국왕'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병사들과 함께 최일선 진흙탕에서 구르는 타입의 지휘관이었고, 따라서 전염병의 위험에 그만큼 더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인들이 만든 역사를 다룬 작품과 영화들에서 멋지게 나오는 것과 정말로 대조적인 죽음. 그래서인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중세의 전쟁은 한번 이긴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지 영주들에게 자신의 실질적인 힘을 보여주면서 항복을 받아내어야 오래 간다.[7]

문제는 헨리 5세가 사망한 시점에 샤를 6세는 살아있었고, 헨리 6세는 아기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르마냑파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도팽 샤를은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는 이러한 도팽 샤를의 주장을 트루아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비록 도팽 샤를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했으나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왕이 대관식을 올렸던 랭스[8] 는 잉글랜드군 + 부르고뉴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시농 성에서 골치를 썩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성처녀 잔 다르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9]

결국 갑작스러운 헨리 5세의 죽음, 그리고 뒤를 이은 아들 헨리 6세의 어린 나이와 무능, 잔 다르크로부터 시작된 도팽 측의 반격으로 인해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

3. 평가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던 잉글랜드-프랑스 관계로 인해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그 왕위계승권까지 한때나마 차지했던 헨리 5세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인들에게 영웅으로 숭배받았다. 그래서 영미권에선 대체역사를 좋아하는 역덕들이 그가 장수했을 경우 과연 어떻게 역사가 바뀌었을지, 특히 이럴 경우 잔 다르크가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을지나 잔 다르크와 대결할 경우 누가 이겼을지에 대한 떡밥의 글이 종종 인터넷 포럼에 올라온다.

또 실제로도 헨리 5세와 잔 다르크는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우선 헨리 5세는 왕이라는 최고위 신분의 남자고, 잔 다르크는 시골에서 소몰고 양치던 평민 여자다.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하에서 어려서부터 전장을 누비며 무예와 전술을 착실하게 익힌 헨리 5세와 달리 잔 다르크는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문맹으로 타고난 직감과 신앙심에 의지해 본능적으로 군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야 할 줄 알았던 무학의 천재장군이었다.

중세시대 기준으로도 잔혹한 군주여서 적군과 양민을 잔혹하게 처형하길 즐겼던 헨리 5세와 달리 잔 다르크는 용맹했으나 전투만 끝나면 적에게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최후까지도 대조적인데, 헨리 5세는 이질에 걸려 병상에서 골골대고 죽는 바람에 미디어에는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는 반면에 잔 다르크는 화형을 당하면서도 담담하게 죽어서 잔 다르크를 다루는 미디어에서 이 부분이 결코 빠지지 않는다.

3.1. 잔혹성

헨리 5세는 유달리 잔혹하고 무자비한 군주로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를 학살한 것을 비판하지만, 당시 포로의 숫자가 수천에 달해 거의 잉글랜드군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으며, 그냥 풀어줄 경우 전장에 흐트러진 무기들로 재무장하거나 후방의 프랑스군에게 합류하여 잉글랜드군과 맞서 싸울 것을 우려했기에 학살을 명령한 것이었다. 또 프랑스군의 추가 공격이 예상되었기에 망설이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따라서 아쟁쿠르의 학살은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프랑스 역사가들도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수천에 달하는 인원을 한꺼번에 죽인 것은 확실히 잔혹하긴 하다. 게다가 포로를 오두막에 몰아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인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선 조금 지나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헨리 5세가 유달리 비난받는 부분은 민간인에 대한 약탈과 조직적인 학살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헨리 5세는 불 없는 전쟁은 머스타드 없는 소세지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특히 잉글랜드군이 가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아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은 아주 쉬웠다고 한다. 그는 포위전을 치르는 동안 병사들을 출격시켜 인근 농가를 약탈하고 방화를 하고 다니곤 했다.

헨리 5세의 가장 큰 특징은 무자비한 보복이라 할 수 있었다. 헨리 5세는 항복을 거부했을 경우 군인은 물론 민간인이라도 봐주지 않고 가차없이 죽였고 심지어 항복해도 죽였다. 캉의 학살에서 최소 2000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을 한꺼번에 장터로 몰아넣고 전부 죽여버렸다. 게다가 그는 운좋게 살아남은 주민들을 상대로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을 허용해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약탈과 강간을 당했다.

또, 헨리 5세는 루앙을 공격하기 전에 수비대가 잘 볼수 있는 위치에 교수대를 세운 다음 포로들을 대려와 목을 매달았다.[10] 믈룅에서 거세게 저항하다 포로가 된 프랑스 수비대들 역시 교수형에 처했고, 보복으로 20리그(96km) 근방을 초토화시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루주몽 성을 함락시켰을 때는 수비대 전체를 목 매달은 다음 건물을 무너뜨렸으며, 도망친 수비대원들마저 추격대를 보내 사로잡은 다음 전부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모를 함락시켰을 때는 프랑스 수비대장 바스타르 드 보뤼스를 참수한 다음 나무에 머리와 시체를 걸어놓았다.

무엇보다 그는 유독 자존심이 강해서 남들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감히 자신이 관대하게 제안한 항복을 거절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자신을 모욕한 오라스라는 나팔수를 사로잡아 처형한 일도 있었고 침략자에 맞서 자신의 성을 잘 지킨 죄밖에 없는 수비대장 역시 참수해 버렸다. 포로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한 적도 있는데 솔직히 이것은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복수였으며 그저 헨리 5세의 개인적인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이렇듯 헨리의 보복과 약탈, 학살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프랑스인들한테서 잉글랜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헨리가 군대를 끌고 인근 농촌을 약탈할 때마다 프랑스 농민들은 절망에 사로잡혀 농장과 가족을 버리고 숲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프랑스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1419년경의 어떤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 침략자들은 "굶주린 늑대들, 오만한 위선자들, 사람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 약탈로만 살아가는 자"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성 때문에 헨리 5세는 프랑스에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이런 헨리 5세의 잔혹함은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가 최종적으로 패배하는 한 이유가 되는데, 본인이 살아있을 때는 빼어난 군사적 역량과 강한 카리스마로 잉글랜드군을 한데로 묶고 프랑스를 공포로 굴복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반감을 남기는 바람에, 헨리 5세가 급사하고 잔 다르크라는 또다른 카리스마가 프랑스 측에 나타나자 그 공포는 바로 증발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으로 뭉친 프랑스의 반격을 받아 결국 잉글랜드는 패배하고 말았다.

4. 트리비아

  • BBC에서 제작하는 연작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에서 톰 히들스턴이 헨리 5세를 연기했다.
  • 셰익스피어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헨리 5세' 라는 희곡을 썼는데 이 희곡의 한 구절, 정확히는 4막 3장의 'St. Crispin's Day Speech(성 크리스핀 데이의 연설)' 이 유명하다. 아쟁쿠르 전투만 언급되면 빠지지 않는 유명한 장면이다.[11]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크리스핀 데이는, 오늘로부터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우리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절대로 이어지지 못하리라.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적은 우리,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한 형제들이다.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오늘 나와 함께 피 흘리는 자는
Shall be my brother
모두 나의 형제일지라.
이 구절에서 제목을 차용한 작품에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위 해피 퓨가 있다. 전자는 이 구절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했지만, 후자는 비꼬는 듯한 부정적인 어조.
  •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서 왕세자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바비도[12]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가지고 뉘우치는 말을 하면 살려주겠다며 회유하나, 바비도는 끝내 거절을 한다. 마지막에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 . .”라며 한탄한다. 직접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이 바비도가 훗날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막은 잔 다르크와 겹치는 부분[13]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바비도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인 존 배드비가 1410년 화형을 당한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잔 다르크(1412년생으로 추정)가 태어난 걸 생각하면 묘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작가 김성한이 이 부분까지 고려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이 초상화를 보면 투블럭 혹은 귀두컷의 역사가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 1989년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 겸 주연으로 영화 '헨리 5세'를 제작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를 최대한 그대로 스크린에 옮겼다.


[1] 임종의 자리에서 헨리 4세가 숨을 거뒀다고 생각한 헨리 5세가 왕관에 손을 대자, 헨리 4세가 눈을 뜨더니 "그건 아직 네 것이 아니다. 내 것도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하고 숨을 거뒀다는 일화가 있다(....). 아빠 안 잔다 나 아직 안 죽었어[2] 당시 슈루즈버리 전투는 헨리 4세가 친정에 나설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국왕군과 반군은 병력이 각각 14,000명으로 대등했으며 항복하라는 헨리 4세의 제안을 해리 핫스퍼가 거부하며 반군이 결사적으로 나온터라 국왕군도 겨우 이겼을 정도로 치열했다. 특히 전투가 끝난후 국왕군의 사상자가 3천 명이나 나와 2천 명의 사상자를 낸 반군보다 더 많았을 정도였다. 해리 핫스퍼는 전사하고 사후 그의 영지가 전부 왕실에 몰수된다.[3]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아버지 루이 1세가 용맹공 장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샤를의 장인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불과 14세의 나이로 작위를 승계한 어린 공작을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파벌의 핵심인사로 떠올랐기에 파벌의 명칭이 아르마냑파로 굳어졌다. 양측의 대립이 루이 1세 생존시부터 있었던 일이기에 이 시점의 파벌까지도 소급하여 아르먀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4] 당시 중세 유럽에서는 밀라노와 뉘른베르크가 갑옷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5] 특히 쫓겨난 루앙 시민들은 여자와 아이들이 많았다.[6] 8번째 자식이다. 동생이 한 명 있었으나 어려서 일찍 죽어서 형제자매들 중 사실상 막내였다.[7]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는 프랑스에게 많은 승리를 거뒀지만, 연이어 세상을 떠나며 전황이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따라서 아쟁쿠르의 승리로 얻어낸 성과를 확실하게 다질때까지는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8]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창업주 클로비스 1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래, 프랑스의 왕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실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도 아니고 명목상 로마의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도 아닌 프랑스로서는 랭스의 대관식을 통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나름의 정통성을 확보했던 것이다.[9] 헨리 5세 입장에서는 정말인지 황당한 결과일 수 밖에 없다. 설마 한창 젊은 자신이 늙은 프랑스 왕 보다 먼저 죽는 것부터가 예측불허의 돌발사태이고, 그래도 자신이 남긴 군사적 성과 덕에 잉글랜드의 우세가 이어졌건만 웬 성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전황을 갈아엎어버렸다.[10] 이때문에 루앙 수비대도 보복으로 잉글랜드군 포로들을 목매달아 죽였다.[11] 번역 출처[12] 실존인물로 원래 이름은 존 배드비(John Badby)이며 작가의 착오로 바비도라고 쓰게 된 듯 하다.[13] 두 사람 다 평민의 신분으로 영국 왕실과 맞섰으며, 이미 타락해버려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권력만 챙기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여 이단자로 몰려 재판을 받을 때도 당당하게 나서면서 의지를 끝까지 지키다가 화형 당했고,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거절한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