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2:17:32

애설스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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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 초대 국왕
애설스탠
Æthelstan
파일:aethelstan.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애설스탠
(Athelstan)
출생 894년
웨식스
사망 939년 10월 27일 (향년 45세)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927년 ~ 939년 10월 27일 (약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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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고대 영어 Æþelstan (애델스탄)[1]
영어 Athelstan (애설스탠)
라틴어 Athelstanus (아텔스타누스)
별칭 영광왕 애설스탠(Æthelstan the Glorious)
승리왕 애설스탠(Æthelstan the Victorious)
선왕 아달스테인(Adalsteinn Godi)
아버지 대 에드워드
어머니 이크그윈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즉위3. 대외 활동
3.1. 시대적 배경3.2. 잉글랜드 통일3.3. 스코틀랜드 침략3.4. 더블린 연합군의 격퇴
4. 내치
4.1. 정치 및 행정4.2. 교회와 학문의 진흥
5. 유럽과의 관계6. 죽음 및 사후 평가

[clearfix]

1. 개요

웨식스 왕국의 제27대이자 마지막 국왕이며,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의 초대 국왕이다.

그는 통일 잉글랜드의 초대 왕이라는 뜻깊은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긴 왕이었다. 주요 업적으로는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을 장려했으며, 교회의 부흥에 힘을 쏟은 것을 들 수 있고, 아울러 해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에는 웨식스 왕 중 원 톱인 앨프레드 대왕에 가려져 듣보잡 취급을 당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아져 앨프레드 대왕과 함께 고대 앵글로색슨의 왕 중 투 톱으로 여겨지고 있다.

2. 즉위

애설스탠은 대 에드워드 왕의 장남으로서, 그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참고로 대 에드워드 왕은 총 세 번 결혼했는데, 세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아들도 훗날 왕이 되었다. 이들이 각각 에드먼드 1세이드리드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앨프워드라는 아들이 있었고, 사실 대 에드워드 왕은 아마 앨프워드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거나 하다못해 잉글랜드의 일부라도 넘겨주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앨프워드가 일찍 죽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했다. 924년 6월 선왕이 죽고, 그로부터 불과 16일 후에 앨프워드가 죽었기에 애설스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웨식스에서는 애설스탠이 왕이 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고, 특히 앨프워드가 묻힌 윈체스터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나마 머시아는 처음부터 애설스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에 애설스탠은 925년 9월에 늦게나마 대관식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관식 이후에도 몇 년간이나 애설스탠에 대한 반대가 끊이지 않았고, 때문에 그는 즉위 초기에는 단지 머시아의 왕으로서만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근차근 나라 안밖으로 자신의 업적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3. 대외 활동

3.1. 시대적 배경

고대의 잉글랜드는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9세기에 접어들면서 주요 4개 국가로 대충 정리되었다. 이 네 국가는 웨식스, 머시아, 노섬브리아, 동앵글리아였는데, 이들 간에 당연히 국력의 격차와 흥망성쇠는 있었다. 예를 들어 8세기경에는 머시아가 가장 강력했었고, 9세기 초에는 웨식스가 가장 강했었다. 하여간 이들 네 나라는 자기들끼리 툭탁거리면서 그런대로 지내고 있었는데, 9세기 중반이 되면서 본격적인 위기가 닥치게 된다. 바이킹족의 침략이 본격화된 것이다. 9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족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이들 네 왕국이 털리기 시작했고, 결국 9세기 후반에는 동앵글리아, 노섬브리아, 머시아가 바이킹에게 정복당했다. 당시 최강자였던 웨식스조차 나라가 거의 점령당하는 지경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때 알프레드 대왕이 등장했다. 잉글랜드의 왕 중 유일하게 '대왕'으로 불리는 왕, 구국의 영웅이 등장한 것이다. 871년에 웨식스의 왕위에 오른 알프레드 대왕은 초반 5~6년간은 일방적으로 털리긴 했지만, 웨식스는 알프레드 대왕의 지휘 아래 피터지게 바이킹과 싸워나갔다. 878년, 알프레드 대왕은 운명의 싸움인 에딩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나라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886년에 동앵글리아의 왕 구트룸 1세와 알프레드 대왕은 대충 합의를 보고 잉글랜드를 갈라 먹게 되었다. 즉, 머시아의 서쪽을 뚝 떼서 알프레드 대왕이 먹고, 나머지 동쪽은 바이킹이 가져가서 그들이 점령한 동앵글리아와 합치는 것으로 협정을 맺은 것이다. 몇년 뒤인 890년에 바이킹은 협정을 무시하고 다시 침략해 왔으나 알프레드 대왕은 다시 이들을 물리쳤다. 이후, 알프레드 대왕의 뒤를 이은 대 에드워드 왕 또한 만만찮은 활약을 하여 바이킹이 점령한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를 정복해 나갔다. 덕택에 그가 죽었을 때에는 남부 노섬브리아에 있는 요크 왕국만이 바이킹 영토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왕위에 오른 애설스탠은 대외적으로 다양한 활약을 하며 여러 업적을 세웠다. 그 결과, 애설스탠은 앵글로색슨 전체를 지배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웨일스의 왕들을 지배한, 브리튼 섬의 왕 중 왕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었다.

3.2. 잉글랜드 통일

비록 선왕인 대 에드워드 왕이 바이킹족 점령지의 대부분을 되찾아 왔었지만, 노섬브리아의 요크 왕국은 예외로서 아직도 바이킹이 점령하고 있었다. 926년, 애설스탠은 그의 누이와 요크 왕국의 왕인 시흐트릭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를 기회로 애설스탠과 시흐트릭은 서로 침략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을 돕지도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927)에 시흐트릭이 죽자 애설스탠은 이를 기회로 삼아 요크 왕국을 침략했다. 그는 요크 쪽 저항군을 가볍게 발라버린 후 요크를 점령했고, 내친 김에 노섬브리아의 왕위까지 가져가 버렸다. 이로써 애설스탠은 잉글랜드 전체에 지배력을 가진 첫 번째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 웨일스 지역에 대해서도 강한 지배력을 가진 왕이었다. 웨일즈에 대한 지배력은 이미 아버지와 고모가 확립해 놓았고, 애설스탠이 이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웨일즈의 왕은 애설스탠의 지배를 받았고, 무거운 조공까지 웨일스에 부과되었지만 웨일스는 애설스탠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따라서 애설스탠 재위 기간 동안 웨일스잉글랜드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애설스탠은 그가 새로 지배하게 된 잉글랜드 북부, 즉 노섬브리아에서 귀족 세력과 공존하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던 그답게 점령지의 성직자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요크 왕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심복이었던 요크 대주교에게는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여 넘겨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인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고, 북부 왕국들은 차라리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의 바이킹들과 연합하고 싶어했다. 애설스탠이 잉글랜드 남부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에 비해 잉글랜드 북부에서 그의 지배력은 매우 약했다.

3.3. 스코틀랜드 침략

934년,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를 침략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고, 몇가지 설이 있다.
  • 침략 1년 전에 라이벌이었던 그의 동생이 죽었기에 웨식스에서의 권력 기반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 침략이 있던 해에 더블린의 바이킹 왕국의 왕이 죽었고 그에 따라 바이킹족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영국 북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려 했다는 설
  • 그냥 스코틀랜드 지배권을 두고 스코틀랜드 왕과 사이가 나빠져서 그를 털러 간 것이라는 설
등이다.

이유야 어쨌든 934년 5월 그는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네 명의 웨일즈 왕들이 따라 나섰다. 공격은 육지와 해상 양면에서 이루어졌으며 둘 다 성공적이었고,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 깊숙히까지 털어먹었다. 전쟁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 결과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원인도 알려져 있지 않았잖아?

하여간 애설스탠은 같은 해 9월에 버킹엄에 돌아와 있었고, 거기서 스코틀랜드 왕인 카우산틴 2세는 신하 왕으로서 법령 공표에 입회했다.

3.4. 더블린 연합군의 격퇴

934년 올라프 구트프리트손이 바이킹족의 왕국인 더블린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스코틀랜드 왕인 콘스탄틴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와 바이킹의 연합을 강화했다. 937년, 올라프는 아일랜드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고, 곧 옛 바이킹 영토인 요크 왕국의 재건에 나섰다. 올라프 혼자 대적하기에는 애설스탠이 너무 강했으므로 동병상련하던 스코틀랜드의 카우산틴 2세와 연합하여 웨식스와 대적했다. 그해 가을에는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목적으로 다른 스코틀랜드 왕국까지 끌어들였다 공대 결성. 중세의 전투는 보통 여름에 치러졌고, 애설스탠은 그렇게 큰 규모의 공격이 다 늦은 가을에 이뤄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애설스탠의 초기 대응은 느렸다. 애설스탠이 웨식스머시아의 병력을 소집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는 동안, 연합군은 잉글랜드 북서쪽을 털어먹었다.

하지만 양측이 맞장 뜬 브루넌버 전투에서 애설스탠이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연합군은 붕괴되었다. 올라프는 아일랜드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스코틀랜드카우산틴 2세는 아들을 잃었다. 승자인 잉글랜드군도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애설스탠의 두 조카와 대 에드워드 왕의 동생인 애설워드의 아들들도 죽었다. 이 브루넌버 전투는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의 전투 중 가장 중요한 전투로 여겨진다.

4. 내치

4.1. 정치 및 행정

애설스탠은 이전 왕들이 이루지 못했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애설스탠은 명확히 자신의 근거지를 정하지는 않았으나, 주로 웨식스에 머무르며, 지방의 유력 인사들을 내각으로 불러 모으는 방식으로 지방을 통치했다. 고정된 근거지가 없었던 것은 원래 앵글로색슨족에게 수도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궁정은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열렸고, 내각 모임 또한 이곳 저곳에서 열리곤 했었다. [2]

대 에드워드 시절의 작고 비공식적이었던 신하들의 모임은 애설스탠의 재위기간 동안 크고 정식화된 회의로 확장되었다. 애설스탠은 각 지방의 주교와 지방의 파견 관리, 지방의 권력자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했는데, 이는 잉글랜드 통일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에서 최초로 자국어로 된 법률을 공표한 민족일 정도로 법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는데, 애설스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법 제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10세기 왕들이 만든 법들 중 가장 많은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은 애설스탠이 만든 법이다.

요크를 정복하고, 브리튼의 다른 왕들을 복속시킨 후에는 새로운 주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는 등 화폐 보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비록 화폐 제조가 중앙에서 관리되지 못하고,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된 것은 애설스탠 재위 중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손자인 에드거 1세부터는 유럽에서 가장 앞선 화폐 제도를 갖추게 된다.

4.2. 교회와 학문의 진흥

앵글로색슨에게는 교회와 정부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교회의 유력자들은 왕정 회의나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이러한 관계는 더욱 더 긴밀해졌다. 애설스탠 자신 또한 교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애설스탠은 기독교 유물을 수집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선물과 봉헌도 자주 했고, 아예 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바다 건너 유럽 대륙의 교회와 관계를 맺는 데도 힘을 쏟았다.

애설스탠은 교회의 학문을 부활시키려던 그의 할아버지 알프레드 대왕의 노력을 계승했다. 당시 교회 및 교회에서 주도되던 학문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는데, 애설스탠은 이의 부흥을 추진하여 책을 인쇄하고 유통시켰다. 애설스탠은 그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기독교 관련 학문의 증진으로 유명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 종교 유물의 수집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듣고 각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궁정을 방문했다. 그의 학문 증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그것에 대해 칭송하는 많은 시가 지어져서 후대로 전해졌다.

5. 유럽과의 관계

웨식스 왕조 후기의 웨식스 왕들은 유럽 왕들에게 성공의 상징이었다. 920년경의 유럽 대륙의 왕가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각종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애설스탠은 잉글랜드에서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더 나아가 전쟁만 잘하는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카롤링거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웨식스 왕정은 카롤링거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관계는 애설스탠의 증조할아버지인 애설울프신성 로마 제국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의 왕의 딸과 결혼하고,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다시 알프레드 대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인 에아드기푸도 서프랑크 왕국의 왕인 단순왕 샤를 3세와 결혼했다. 애설스탠의 재위 기간 중에는 유럽 쪽과 결혼을 통한 동맹이 강화되었다. 애설스탠은 여자 친족들이 자신의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을 꺼렸고, 따라서 그들은 주로 유럽 쪽으로 시집갔기 때문이다. 그의 누이들은 모두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했거나 아니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애설스탠의 가장 중요한 유럽 동맹은 새로 떠오른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왕조였다.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10세기 초반에 몰락했고, 새로 등장한 오토 왕조의 왕 하인리히 1세는 세력 기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들을 카롤링거 왕가의 여자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꿩 대신 닭 삼아 웨식스 왕가가 혼처로 물망에 올랐고, 하인리히 1세는 아들인 오토, 즉 훗날의 대제 오토 1세를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와 결혼시켰다.

애설스탠은 당시 관습에 따라 유럽의 왕자들과 양아버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이 권력에서 쫓겨나면 유럽 대륙으로 병력을 보내 잃었던 영토나 왕위를 되찾게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뒤를 이어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궁정에 머무르고 있던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막내아들인 호콘 1세가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물론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실패한 원정도 있었다.

이렇게 활발했던 유럽 대륙과의 관계는 그가 죽고 나서 곧 끊겼고,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잉글랜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한 상태로 지속되었다.

6. 죽음 및 사후 평가

939년 10월, 애설스탠은 글로스터에서 죽었다.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대왕, 아버지인 대 에드워드 왕, 이복형제인 앨프워드는 모두 윈체스터에 묻혔지만, 애설스탠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윈체스터에 묻히는 것을 거부했고, 그에 따라 윌트셔의 맬름즈베리 사원에 묻혔다.

그가 죽자 바로 요크 주민들은 더블린의 바이킹 왕인 올라프 구트프리트손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아울러 앵글로색슨족이 브루넌버 전투에서의 승리에서 얻은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지배력 또한 무너졌다. 그에 따라 애설스탠의 후계자가 된 이복 동생 에드먼드 1세 왕과 이드리드 왕은 그 곳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올라프는 중부지역의 동쪽을 점령했으나 그가 죽고 나자 에드먼드 1세가 그 곳에 대한 지배를 되찾아 갔고, 요크마저 다시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에드먼드 1세가 죽고 나자 요크는 다시 바이킹 지배하에 들어갔고, 노섬브리아 주민들이 마침내 노르웨이 왕을 몰아내고, 이드리드에게 지배권을 넘겨 준 후에야 앵글로색슨족은 잉글랜드 전역에 대해 지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애설스탠 왕의 업적은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대왕의 업적에 묻혀서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웨식스 시대의 위대한 왕 중 한 명이었다. 10세기 영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그는 중세 잉글랜드를 시작한 왕이며 또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던 왕이었다. 아울러 그는 통일 잉글랜드의 초대 왕이었다. 잉글랜드가 최종적으로 통일된 것은 후대의 이드리드 왕이 바이킹족의 요크 지역을 정복한 후였지만, 애설스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초석을 쌓았다.

애설스탠의 법률 제정 및 통치 체계의 정립 또한 중요한 업적들이었다. 그가 확립한 통치 체제는 당시로서는 가장 중앙 집권화된 것이었고, 이는 그의 형제와 조카들이 당대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통치 체제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 밖에, 종교 활동과 학문을 장려하는데 헌신한 것에 대해서도 살아 생전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1] æðeɫstɑn[2] 이건 동로마와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본토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