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60719 0%, #CD1223 20%, #CD1223 80%, #a60719);"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웨식스 왕조 | |||
체르디치 | 킨리치 | 체울린 | 체올 | |
체올울프 | 퀴네길스 | 퀴첼름 | 첸왈흐 | |
머시아 왕조 | 웨식스 왕조 | |||
펜다 | 첸왈흐 | 색스부르흐 | 애스크위네 | |
웨식스 왕조 | ||||
첸트위네 | 캐드왈라 | 이네 | 애설허드 | |
쿠드레드 | 시게베르흐트 | 퀴네울프 | 베오르흐트리치 | |
에그버트 | 애설울프 | 애설볼드 | 애설버트 | |
애설레드 1세 | 알프레드 | 대 에드워드 | 앨프워드 | |
애설스탠 | ||||
}}}}}}}}}}}}}}} |
알프레드 대왕 관련 틀 | ||||||||||||||||||||||||||||||||||||||||||||||||||||||||||||||||||||||||||||||||||||||||||||||||||||||||||||||||||||||||||||||||||||||||||||||||||||||||||||||||||||||||||||||||||||||||||||||||||||||||||||||||||||||||||||||||||||||||||||||||||||||||||||||||||||||||||||
|
웨식스 왕국 제25대 국왕 앨프리드 대왕 Alfred the Great | |
이름 | 웨식스의 앨프리드 (Ælfred of Wessex) 앨프리드 대왕 (Alfred the Great) |
출생 | 849년 |
사망 | 899년 10월 26일 (향년 50세) |
재위기간 | 871년 4월 23일 ~ 899년 10월 26일 |
종교 | 기독교(보편교회) |
축일 | 10월 26일 |
[clearfix]
1. 개요
고대 영어 | Ælfrēd Micela (앨프레드 대왕) |
영어 | Alfred the Great (앨프리드 대왕)[1] |
라틴어 | Alfredus Magnus (알프레두스 대왕) |
영국의 역대 왕들 중 단 둘뿐인 대왕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2] 하지만 순수한 영국의 왕으로서는 유일한 대왕이다. 고대 영어로는 앨프레드(Ælfrēd) 혹은 앨프래드(Ælfrǣd)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잉글랜드라는 국가 및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왕[3]으로 평가되고, 오늘날에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고려 태조 + 고려 현종 + 조선 세종의 포지션이다. 앵글로색슨족이 세웠던 칠왕국을 통일해서 잉글랜드라는 정체성을 확립했고, 수준높은 고대 로마 문화를 담은 라틴어 문헌들을 앵글로색슨어로 번역해서 영어의 기초를 세웠다. 특히 잉글랜드 북부를 완전히 정복하고, 잉글랜드 남부에 위치한 웨식스까지 침략하는 바이킹들을 여러 번 패퇴시켜 앵글로색슨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업적을 세웠다. 전쟁에 국가를 총동원하는 동원령을 역사상 최초로 발동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 헨리 1세가 알프레드 대왕의 직계 후손인 스코틀랜드의 마틸다[4]와 결혼해서 그 후손이 쭉 지금까지 이어져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국 왕실 역시 알프레드 대왕의 직계 후손이다. 실제로 <영국 왕실 계보도>에는 알프레드 대왕의 이름을 잉글랜드 왕 계보 맨 위에 올리고 있다. 사실상 알프레드 대왕을 영국 왕실의 시조로 여기는 셈이다.
이에 성공회에서는 알프레드 대왕을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0월 26일이다.
2. 생애 및 업적
알프레드는 옥스퍼드셔에서 에그버트의 아들인 애설울프 왕의 5남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알프레드의 큰형 애설스탠은 애설울프 왕보다 더 일찍 죽었고, 애설울프 사망 후 남은 세 형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5] 모두 오래 있지 못하고 20대에 요절했기에 결국 막내 알프레드가 871년 22세에 왕위를 이어받았다.2.1. 군사적 업적
알프레드의 조부인 브레트왈다[6] 에그버트 왕은 웨식스 왕국을 브리튼 섬의 패자로 만든 최초의 인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브리튼 섬 대부분을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8세기 말부터 데인족 바이킹이 침략해오면서 웨식스 왕국은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시달렸으며, 9세기 중반부터는 도둑 떼 수준을 넘어 아예 정규군 수준의 병력으로 쳐들어 와서 브리튼 섬을 약탈했다.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웨식스 왕국은 사실상 패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다.알프레드 즉위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즉위 초반 그는 바이킹 침략군들에게 연전연패하면서 계속 도망다니기 바빴으며 런던, 캔터베리 등 다수의 요충 지역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이 위기상황에 그의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는데, 도망다니는 중에도 지역의 군소 영주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적인 바이킹에 대항하자는 공감대를 얻어냈으며, 이를 통해 주요 전략지에 요새를 세우고, 상비군을 편성했다. 이런 군사적 인프라 확충을 통해 반격에 나선 알프레드는 878년 5월 6~12일에 드디어 월트셔(Wiltshire) 지역의 에탄던(Ethandun, 현재는 에딩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데인족 수장 구스룸(Guthrum)[7]이 이끄는 바이킹 부대를 박살내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 승리에 고무된 알프레드는 차례로 바이킹의 점령지를 무너뜨렸으며 886년에는 바이킹의 손아귀에 있던 런던을 탈환하였다.
런던 탈환 이후 수년간의 전쟁에 지친 웨식스와 바이킹은 886년 웨드모어 조약을 맺고 상호 군사행동을 멈추었다. 런던을 포함한 브리튼 남서쪽 및 머시아 서쪽은 웨식스가 차지하고, 머시아 동쪽 및 동앵글리아는 데인족에게 할양하는 조약이었다.[8] 이때 데인족이 가지게 된 지역을 소위 데인로(Danelaw) 또는 데인랜드(Daneland)라고 했는데, '데인로'라는 명칭은 '데인인의 법으로 통치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웨식스에서는 영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큰 농장(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소작을 시키는 장원제도가 대세였던 반면 데인로의 주축 지역이었던 머시아와 동앵글리아 등에서는 자영농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 웨드모어 조약은 항구적인 평화조약이 아나라 일종의 휴전이었기 때문에 알프레드 이후에도 바이킹은 계속 웨식스의 영역을 넘보았으며, 웨식스는 웨식스대로 바이킹에게 내준 지역을 탈환하는데 골몰했다.[9]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상대적으로 가깝고 토질도 비옥한 데다 확실한 정치세력도 없었던 브리튼 섬은 바이킹들에게 최적의 식민 대상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바이킹과 웨식스 간에는 계속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웨식스의 주축을 이루었던 앵글로색슨인들도 원래는 유틀란트 반도와 북독일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며, 브리튼에 건너와서 토착세력이었던 브리튼인들을 서쪽 고지대로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앵글로색슨인은 이민 분야에서 바이킹들의 대선배이자 롤모델인 셈이었다. 알프레드 생전인 890년에도 바이킹이 웨식스로 쳐들어와서 무려 4년 동안이나 잉글랜드 전역을 시계 방향으로[10] 돌면서 쫓겨다니기도 했다. 이때 후계자인 대 에드워드가 데뷔하면서 군재를 쌓은 것은 덤이었다.
2.2. 행정 / 문화적 업적
이처럼 알프레드는 비록 데인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 했지만, 바이킹에 휩쓸려 사라질 뻔했던 앵글로색슨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데에는 성공했는데[11], 그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만 잘하는 무인이 아니라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가 몰락한 이후 사실상 이민족 최초로 왕권 확립 + 중앙집권 스타일의 통치체제를 마련했다.[12] 바이킹이 계속 침략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왕권을 계속 강화시켰다. 바이킹과 휴전한 후에는 자신의 지배영역을 10개 남짓한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각각 세속권력인 장관과 종교권력인 주교를 파견하였다. 통상적인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토착세력에게 맡겨 두고 국왕은 이들로부터 형식적인 충성맹세만 받았는데, 알프레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으며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심지어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임명권과 파견권까지 국왕이 장악하여 종교 권력도 국왕의 손아귀에 있었다.9세기라는 혼탁한 시기에 중앙집권화에 성공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알프레드 이후 유럽에서 제대로 된 중앙집권국가가 등장하려면 소위 절대왕정 체제가 시작되는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거의 몰아내고, 최초의 잉글랜드 통일왕국을 이룩하면서 할아버지가 개척해 놓은 중앙집권을 강화시켰다.[13][14][15] 다만 10세기 후반부터 유틀란트 반도에 덴마크 왕국을 건설한 바이킹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중앙집권화의 성과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유럽에서 동로마 다음가는 수준의 중앙집권 국가였으나 결정적으로 1066년 노르만족에 의해 대륙에서 봉건제가 도입되면서 잉글랜드는 문치적으로 퇴화했고[16] 튜더 왕조 시기가 되어서야 다시 중앙집권체제가 되었다.
알프레드의 업적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제도 정비와 더불어 문화와 종교의 부흥에도 힘썼다.[17]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손잡고, 각지에 주교를 파견하는 등 가톨릭 신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큰 산 하나만 넘어가도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역별 이질성이 강했던 고대 영어의 표준화를 시도했고, 기록을 위한 영문법을 정비하였다. 알프레드 이후 웨식스 왕국에서는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많은 문헌을 남겼다. 그의 시기에 라틴어로 쓰인 책 다수가 영어(고대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보에티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 등 라틴 저술가들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소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본인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몇몇 저술을 남겼고, 그가 직접 쓴 문헌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이 시기에 기록으로 남겨진 문서들은 당대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1차 사료인 동시에 고대 영어 및 고대 게르만어 연구에도 대단히 소중한 자료들이다.[18]
3. 죽음
알프레드는 크론병 또는 치질을 앓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여러 차례 이장되었다가 유실되었고, 최종 이장지에서는 19세기부터 그의 유해를 발견했다고 하는 주장이 나왔다.4. 평가
알프레드 대왕 사후 1,000년 기념 행사 때 세워진 동상. |
이처럼 알프레드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업적을 남겼다.
다만 중세 유럽의 대왕 시리즈 가운데 생전부터 인정을 받았던 카롤루스 대제나 오토 1세와 달리 알프레드는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나서야 위대한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가 결과적으로 정복왕 윌리엄을 비롯한 노르만-프랑스계 엘리트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들의 후예들이 잉글랜드의 지배층이 되면서 피지배층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왕을 딱히 높이 평가할 이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19]. 그러나 1214년 부빈 전투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한발씩 걸쳤던 노르만계 귀족들이 완전히 프랑스에서 발판을 잃어버렸고 잉글랜드인에 동화되었으며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독자성이 부각됨에 따라서 그 독자성을 만들었던 알프레드 왕은 점점 높이 평가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및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영국 국교회가 로마 교황청과 분리되어 모든 전례용어가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뀌었다. 그러자 이미 수백 년 전에 라틴어를 고대 영어로 번역했던 알프레드 왕의 업적이 부각되면서 그는 영국 역사상 한 명밖에 없는 대왕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이러한 인식 변화는 튜더 왕조의 정치적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로마까지 몸소 순례를 갔던 알프레드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은 다소 덜 강조하는 등 튜더 시대의 입맛에 맞는 재해석이었다. 이 부분은 영국 사학계에서 영국의 가톨릭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에 와서야 제대로 재조명을 받았다.[20]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만족들의 후예들이 잉글랜드를 지배할 시절에는 알프레드 대왕을 두고 '덴마크인(바이킹)들과 싸워 이긴 용맹한 원주민(앵글로색슨족) 왕' 외에 다른 평가가 없었다. 이들이 13세기초에 프랑스에 있었던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잉글랜드인이란 정체성이 확고히 생기자, 독자적인 '잉글랜드'가 부각되면서 비로소 '잉글랜드'라는 개념의 원조였던 알프레드 대왕이 부각되었다.
알프레드 대왕은 자식복과 후손복도 좋은 편이었고, 왕위 계승도 비교적 무난했다. 그의 사후 즉위한 아들 대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군재를 물려받아서 바이킹의 침략과 각지의 반란을 일소했고, 손자인 애설스탠은 할아버지 못지않은 먼치킨급 재능의 소유자로 그의 치세 때 잉글랜드는 통일 왕국이 되었다. 이어진 후왕(後王)들도 11세기 덴마크 왕조의 침략이 본격화될 때까지 통치능력은 대체로 무난함 이상이었다.[21] 선왕이 죽자마자 박터지게 싸워대고 결국 왕국을 세 갈래로 나눈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과 여러 모로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대륙같은 경우는 영국과는 달리 원래 이런 내전이 종특 수준이긴 했지만...
또한 비록 정식적인 앵글로색슨계 웨식스 왕조는 끝이 나면서 노르만 왕조가 열리긴 했지만 노르만 왕조의 후손이자 동시에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인 마틸다[22]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랜태저넷과 혼인하여 헨리 2세를 낳아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시하였으며,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존 왕은 물론 아직까지도 영국 왕가에는 알프레드 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편 알프레드가 뒤늦게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동시대에 그의 부하가 쓴 전기가 유실되지 않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휘하 웨일즈인 주교였던 애서(Asser)는 라틴어로 《앵글로색슨의 왕 알프레드의 생애》(Vita Ælfredi regis Angul Saxonum)라는 미완성작 전기를 남겼다. 이 전기의 원본은 중세에 잊혀졌다가 재발견되어[23] 알프레드의 구체적인 행적을 후대인이 알 수 있게 되었다.
5. 여담
사실 알프레드 대왕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이스트 앵글리아의 바이킹 용사다. 알프레드 대왕이 이스트 앵글리아를 공격할 때 회전에서 승리하고 나서 패잔병들을 추격하다가 개울에 걸친 좁은 다리를 마주쳤다. 그때 거대한 도끼를 든 바이킹 용사 한 명이 좁은 다리를 가로막고 도전을 요구하며 하루의 낮 만큼이나 시간을 끌었다. 알프레드 대왕에게는 수천 명이나 되는 전사가 있었지만 그 바이킹 용사는 너무나 위엄차게 행동했고, 그 도전에 10명이 넘는 전사가 응해 용감하게 나섰지만 모두 반토막이 나서 다리 아래로 처박혔다. 결국 알프레드 대왕의 웨식스군은 집단적으로 투창을 던져 그 바이킹 용사를 제거했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 용사의 활약은 알프레드 대왕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바이킹의 사가에서도 칭송되었다.[24] 알프레드 대왕의 기록에도 교차 검증된다."전사는 용감하게 죽으면 천 년을 산다."
라는 격언으로 지금까지 영국에서 회자된다.6. 아서 왕과의 유사점
- 현대 영국의 국민적 영웅인 아서 왕은 원래 켈트족, 그 중에서도 브리튼인[25]의 영웅으로서 게르만족에 속하는 앵글로색슨족[26]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1066년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후, 앵글로색슨 패권이 몰락하여 켈트 문화가 다시 꽃 피우게 되면서 1100년대부터[27] 아서 왕의 신화가 다시 영국에 퍼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앵글로색슨족은 선조들의 적이었던 아서 왕을 영웅으로 여기게 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알프레드 대왕 또한 한 때 잊혀졌다가 재조명받게 된다.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만족들의 후예들이 잉글랜드를 지배할 시절에는 알프레드 대왕을 두고 '덴마크인(바이킹)들과 싸워 이긴 용맹한 원주민(앵글로색슨족) 왕' 외에 다른 평가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1200년대에 프랑스에 있었던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잉글랜드인이란 정체성이 확고히 생기자, 독자적인 '잉글랜드'가 부각되면서 비로소 '잉글랜드'라는 개념의 원조였던 알프레드 대왕이 다시 부각되었다.
- 어떤 학자는 기존에 브리튼인[28] 사이에서 존재했던 아서 왕 전설이 훗날 중세를 거치며 앵글로색슨족[29]의 대영웅 알프레드 대왕을 모델로 재구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아서 왕과 알프레드 대왕의 행적은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서 왕은 브리튼인들의 편에 서서 침입자이자 이교도인 앵글로색슨족을 격퇴했고, 알프레드 대왕은 그 앵글로색슨족의 편에 서서 침입자이자 이교도인 데인족을 격퇴했다는 점이다. 즉 브리튼인을 침략했던 앵글로색슨족이 점점 문명화되고, 또 다른 야만인 이교도의 침입을 받으며 브리튼인과 똑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30] 아서 왕 이야기는 중세 내내 구전되어 왔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아서 왕 전설에 앵글로색슨족 특유의 베오울프와 같은 요소가 많은 것도 이때문이라고 한다.
7. 매체에서
《알프레드 왕과 케이크》(King Alfred and the Cakes)라는 동화로 유명하다. 알프레드 왕이 도망치던 중 어느 오두막에 들렀는데, 아줌마가 부탁한 대로 빵을 지켜보던 중 빵이 타는 줄 모르고 화덕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가 임금인 줄 모르는) 집주인 아줌마에게 질책을 들었다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다양한 알레고리로 해석되곤 하는 이 동화는[31] 정작 그가 왕으로서 남긴 업적보다도 유명할 만큼 영국에서 잘 알려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두산장)에 실렸다.펭귄 출판사에서 알프레드 대왕 때 1차 서적을 모아놓은 책을 내놨는데 그만큼 그의 시대는 기록된 역사서들이 많다. 알프레드 본인의 저술도 살아남을 정도니 금상첨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태종 무열왕에 비유했다. 그리고 여러 업적들을 언급할 때 옥스퍼드에 대학교를 지으라는 말이 나오지만, 옥스퍼드 대학을 세웠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
드라마 <바이킹스>에도 등장한다. 청년기의 배우는 영화 <싱스트리트>의 주연으로 얼굴을 알린 퍼디아 월시-필로이다. 처음에는 갓난아기로 나오다가 시즌 5 막바지에는 청년으로까지 성장했다. 다만 아버지는 애설울프 왕이 아니라 어머니가 바람피워서 낳은 사생아로 나온다. 즉, 성직자 에셀스턴과 어머니 주디스 왕비 사이에 난 막장 드라마 뺨치는 불륜에 의한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본인도 영특하긴 하지만 왕으로서는 자잘한 결함이 있는 걸로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선하고 유약한데다가 병약하기까지 해서 귀족들에게 자주 무시받는다. 그래도 그를 편애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으로[32] 우여곡절 끝에 임금으로서 자리잡는데 성공하고, 반발하는 귀족들을 제압하고 쳐들어온 바이킹들을 무찔러 성공해 드라마 최후의 승자가 된다.
<토탈 워 사가: 브리타니아의 왕좌>는 그의 치세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시리즈 주역으로 트레일러에 등장했다. 그가 이끄는 <웨섹스> 팩션 역시 일종의 주인공 보정을 받아 난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드라마 <라스트 킹덤>(The Last Kingdom)은 버나드 콘웰의 《THE SAXON STORIES》를 원작으로 제작한 BBC 드라마이다. 주인공 우트레드(Uhtred)와 함께 주된 역할로 등장한다. 알프레드 왕 항목 참조.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2편의 867년 시나리오에서 도싯의 백작으로 나온다. 웨식스의 소왕(독립 공작)인 형 애설레드 1세의 봉신으로, 형이 후계자를 낳기 전에 죽어야 웨식스를 물려받는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이 막 브리튼 제도에 들어와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된 시점이다. 그러다가 3편에서는 정식 시나리오의 중요한 한 축이 된다.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한 라그나르 로스브로크의 아들들에 대항하여 웨섹스의 왕이 된다. 초반부에 무력 맞대결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 <라스트 킹덤>과 <바이킹스>에서 보던 것과 같이 웬만하면 나라 다 뺏기고 거지꼴로 버티다가 간신히 역전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멸망당하기 일쑤다. 해당 시나리오 기준 최고 난이도로 어려움이 따른다. 맨 처음 시작시에는 친형이 웨식스의 왕이고, 본인은 일개 지방 영주지만, 그대로 몇 달 지나면 형이 사망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주인공인 바이킹 세력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토리 후반부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지며, 주인공이 자신의 적인 바이킹임에도 필요할 경우에는 바로 협력을 제안하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 현대 영어의 Great 어휘는 라틴어 유래 표현이다.[2] 또 다른 한 명은 앨프리드보다 100여 년 후의 크누트 대왕인데, 잉글랜드 왕이 아닌 덴마크 왕으로서 대왕 칭호가 붙었다.[3] 데인족 등의 바이킹이라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앵글로색슨인들을 하나로 단결하게 한 것. 훗날 독일이 프랑스 혁명군의 침략으로 민족적으로 각성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4] 그녀의 어머니가 웨식스의 마가렛(에드먼드 2세의 손녀, 망명자 에드워드의 딸, 에드거 애설링의 여동생)이었다.[5] 애설볼드-애설버트-애설레드 1세[6] 브리튼 섬의 대왕(大王). 칠왕국의 패자(覇者) 정도 뜻이다.[7] 879년에 이스트 앵글리아의 왕이 되었다고는 하나 당연히 그는 색슨족이 아니라 데인족으로, 이스트 앵글리아의 마지막 왕 에드문드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구트룸은 사실 당대에도 데인족 사이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피정복지인 잉글랜드의 체계와 종교에 관심을 두었고, 바이킹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어 했다. 결국 그는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의 세력을 일구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스트 앵글리아의 왕이 될 수 있었다.[8] 구스룸은 에딩턴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여전히 바이킹의 세력은 건재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그가 자신을 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구스룸의 동앵글리아 지배를 인정했다. 구스룸은 동앵글리아의 왕이었으나 머시아 동부 역시 그의 영토였다. 다만 노섬브리아의 경우는 별도의 바이킹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다.[9] 중세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생산력에 한계가 있는 지역이라, 이곳에 살던 바이킹들은 인구가 늘어나면 근처의 다른 부족과 전쟁을 벌여 물자와 영토를 약탈하거나 배를 타고 해적질을 해야 했다. 그나마 평화적인 해결책은 식민 활동을 통해 부족 일부나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왔다가 가면 약탈이요, 와서 눌러앉으면 식민인데 말이 식민이지 그냥 정복이다. 평화로운 게 아니다).[10] 템즈 강-웨식스-머시아-동앵글리아-런던 근교[11] 만약 알프레드가 없었다면,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자신들이 서쪽 고지대로 몰아냈던 브리튼인처럼 완전히 정복자에 동화되거나 혹은 아일랜드 방면으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높다.[12] 알프레드보다 두 세대 정도 앞서서 유럽 대륙을 평정했던 샤를마뉴의 통치체제도 중앙집권형 통치체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자세한 것은 샤를마뉴 항목 참조. 이외에는 서고트 왕국이 로마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긴 한데, 왕위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점 때문에 3세기의 위기마냥 로마식 체제의 단점까지도 흡수했다.[13]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중앙집권을 16세기 이후의 '사회적-제도적 기반을 갖춘' 중앙집권과 똑같이 여김은 적절하지 않다. 봉건주의는 기본적으로 왕권과 영주권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체제이고, 따라서 왕이 특별히 무능하면 영주권이 성장하여 왕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처럼 왕이 특별히 유능하면 왕권이 성장하여 영주권을 억누르는 경우 역시 자주 있었다. 각 지역에 장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했다는 것 역시, 강한 왕이 등장하면 어떤 식으로든 세습영주의 권한을 억누르고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음과 같은 맥락이었다.[14] 예를 들어 영주권을 존중하기로 유명한 유럽 봉건제에서도 영주위를 세습하려면 상위계층인 임금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왕권이 약할 때에는 승인이 단순한 요식절차에 불과하지만, 영주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강한 때에는 세습 승인을 대가로 복종을 요구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위협적인 봉신에게는 적당한 빌미를 붙여 영지를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영주권을 억누르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영주권을 억제하려는 시도의 완성이 '지방관' 파견, 즉 왕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인물로 영주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즉, 알프레드의 독창적인 고안이 아니다. 다른 왕들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때가 많았으나 알프레드는 성공시켰을 따름이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성립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샤를마뉴 역시 세습영주 체제 자체를 뒤집기는 힘든 상황에서 교회에 많은 영지를 수여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가톨릭 성직자는 세습이 불가능하고, 설령 혼외자를 낳더라도 사생아로 취급하여 계승 등을 일절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주교에게 영지를 내려주어도 당사자가 죽으면 다시 후보자 없는 빈 영지가 생긴다. 그러면 임금은 다시 자기 입맛에 맞는 인물에게 주교령을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편을 드는 영주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왕이 장악했다는 것도 사실 11세기 후반 그레고리오 7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원래 왕이 성직자를 임명하곤 했다. 로마 제국 후기의 국가교회 전통 이래 교회 조직은 국가(정부) 조직의 핵심적인 요소였고, 따라서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주교 등의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 역시 당연하게 여겼다. 즉 성직자 서품과 임명이 교황과 교회의 권리라는 것은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의 전성기에 교황들이 세속 군주와 싸워서 얻어낸 것이었고, 알프레드의 시대에는 군주가 사제를 서품함이 오히려 당연했다. 위에 소개된 샤를마뉴의 사례에서도 세속 군주인 샤를마뉴가 주교를 임명하여 주교령을 설치했다.[15] 즉, 알프레드는 역사를 뛰어넘은 중앙집권 개념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다. 중세 군주로서 자신의 권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중세 수준에서 권력 집중에 성공하였고, 알프레드의 아들과 손자 역시 선대의 유산을 충분히 유지할 능력이 있었기에 집중된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봄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권력을 권력 집중화에 성공한 데에는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단결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 (샤를마뉴가 계속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계속 입증해야 했음과 달리) 비교적 폐쇄적인 섬 환경에서 기존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당대 영국의 상황도 상당히 호재가 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16] 중앙집권에서 봉건제로의 역행 및 수많은 고대 영어 문학의 손실 등. 물론 단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축성 기술하고 군사 부문 같은 무치적으로는 확실하게 발전하게 된다. 게다가 중앙집권이라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봉건제 같은 경우 왕이 죽어도 다른 영지 귀족들과도 싸워야 하지만 중앙집권제 같은 경우는 왕만 사로잡으면 왕국을 낼름 집어삼킬 수 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왕이 전사하자마자 앵글로색슨족들의 저항이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도 당시 잉글랜드가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이다.[17] 지역적 범위가 좁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사/정치/문화 모든 면에 관심이 많았던 샤를마뉴와 여러 모로 오버랩이 된다.[18] 다만 안타깝게도 북부 대학살 때 요크에 보관되어있던 고대 영어로 쓰여진 서책들이 대부분 불타면서 현재에 남은 것들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하다.[19] 중세 잉글랜드에서 토착민 앵글로색슨족과 지배층 노르만족 간 갈등은 소설 《아이반호》에 자세히 묘사되었다.[20] Horspool 2014[21] 재위기간이 짧은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암군(暗君)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22]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인 웨식스의 마가렛이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와 혼인하여 스코틀랜드의 마틸다를 낳았고, 이 마틸다가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 헨리 1세와 혼인해 마틸다를 낳았다. 즉 모계로 여러 다리 건너 이어진 것이다.[23] 원본은 18세기 화재로 소실[24] 재미있게도 훗날 바이킹 시대에 종말을 고한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 군대의 한 바이킹이 혼자서 40명을 도끼로 찢어발겼다. 이 바이킹은 해럴드 2세의 병사가 다리 아래에서 찔러죽였다.[25] 현대 웨일스인과 콘월인의 직접적인 기원[26] 현대 잉글랜드인의 직접적인 기원[27]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1100년대에 쓰여졌다.[28] 현대 웨일스인과 콘월인의 직접적인 기원.[29] 현대 잉글랜드인의 직접적인 기원.[30] 원래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은 같은 게르만족이면서 오딘, 토르, 티르, 프레이야, 프리그 등을 주신으로 섬기는 게르만 이교를 믿고 있었으나 앵글로색슨족은 알프레드 대왕 시기에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지 오래였다. 데인족까지 개종하는 건 10세기 중반쯤은 되어야 했다.[31] 알프레드 사후 100년 뒤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라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인지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이 사건이 알프레드 재위 초 바이킹의 침략 시절, 바이킹에게 궁정을 잃고 도피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로, 이후 집주인이 알프레드에게 중용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외에도 알프레드가 책(특히 《성경》)을 보고 있었다거나 아주머니가 그대로 귓방망이를 날렸다거나하는 바리에이션도 여럿 있지만, 공통적으로 알프레드 왕이 대인배라는 묘사는 변하지 않는다. 빵을 웨식스 왕국에 대한 은유로 봐서 왕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혼자 좌절감에 빠져 있는 것을 백성들이 깨우쳐 준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32] 근데 어머니가 이 과정에서 형인 애설레드가 알프레드를 대신해 귀족들에게 인망을 사자 독을 먹여 그를 죽였다.
이처럼 영주권을 억제하려는 시도의 완성이 '지방관' 파견, 즉 왕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인물로 영주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즉, 알프레드의 독창적인 고안이 아니다. 다른 왕들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때가 많았으나 알프레드는 성공시켰을 따름이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성립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샤를마뉴 역시 세습영주 체제 자체를 뒤집기는 힘든 상황에서 교회에 많은 영지를 수여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가톨릭 성직자는 세습이 불가능하고, 설령 혼외자를 낳더라도 사생아로 취급하여 계승 등을 일절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주교에게 영지를 내려주어도 당사자가 죽으면 다시 후보자 없는 빈 영지가 생긴다. 그러면 임금은 다시 자기 입맛에 맞는 인물에게 주교령을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편을 드는 영주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왕이 장악했다는 것도 사실 11세기 후반 그레고리오 7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원래 왕이 성직자를 임명하곤 했다. 로마 제국 후기의 국가교회 전통 이래 교회 조직은 국가(정부) 조직의 핵심적인 요소였고, 따라서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주교 등의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 역시 당연하게 여겼다. 즉 성직자 서품과 임명이 교황과 교회의 권리라는 것은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의 전성기에 교황들이 세속 군주와 싸워서 얻어낸 것이었고, 알프레드의 시대에는 군주가 사제를 서품함이 오히려 당연했다. 위에 소개된 샤를마뉴의 사례에서도 세속 군주인 샤를마뉴가 주교를 임명하여 주교령을 설치했다.[15] 즉, 알프레드는 역사를 뛰어넘은 중앙집권 개념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다. 중세 군주로서 자신의 권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중세 수준에서 권력 집중에 성공하였고, 알프레드의 아들과 손자 역시 선대의 유산을 충분히 유지할 능력이 있었기에 집중된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봄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권력을 권력 집중화에 성공한 데에는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단결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 (샤를마뉴가 계속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계속 입증해야 했음과 달리) 비교적 폐쇄적인 섬 환경에서 기존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당대 영국의 상황도 상당히 호재가 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16] 중앙집권에서 봉건제로의 역행 및 수많은 고대 영어 문학의 손실 등. 물론 단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축성 기술하고 군사 부문 같은 무치적으로는 확실하게 발전하게 된다. 게다가 중앙집권이라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봉건제 같은 경우 왕이 죽어도 다른 영지 귀족들과도 싸워야 하지만 중앙집권제 같은 경우는 왕만 사로잡으면 왕국을 낼름 집어삼킬 수 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왕이 전사하자마자 앵글로색슨족들의 저항이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도 당시 잉글랜드가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이다.[17] 지역적 범위가 좁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사/정치/문화 모든 면에 관심이 많았던 샤를마뉴와 여러 모로 오버랩이 된다.[18] 다만 안타깝게도 북부 대학살 때 요크에 보관되어있던 고대 영어로 쓰여진 서책들이 대부분 불타면서 현재에 남은 것들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하다.[19] 중세 잉글랜드에서 토착민 앵글로색슨족과 지배층 노르만족 간 갈등은 소설 《아이반호》에 자세히 묘사되었다.[20] Horspool 2014[21] 재위기간이 짧은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암군(暗君)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22]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인 웨식스의 마가렛이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와 혼인하여 스코틀랜드의 마틸다를 낳았고, 이 마틸다가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 헨리 1세와 혼인해 마틸다를 낳았다. 즉 모계로 여러 다리 건너 이어진 것이다.[23] 원본은 18세기 화재로 소실[24] 재미있게도 훗날 바이킹 시대에 종말을 고한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 군대의 한 바이킹이 혼자서 40명을 도끼로 찢어발겼다. 이 바이킹은 해럴드 2세의 병사가 다리 아래에서 찔러죽였다.[25] 현대 웨일스인과 콘월인의 직접적인 기원[26] 현대 잉글랜드인의 직접적인 기원[27] 몬머스의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1100년대에 쓰여졌다.[28] 현대 웨일스인과 콘월인의 직접적인 기원.[29] 현대 잉글랜드인의 직접적인 기원.[30] 원래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은 같은 게르만족이면서 오딘, 토르, 티르, 프레이야, 프리그 등을 주신으로 섬기는 게르만 이교를 믿고 있었으나 앵글로색슨족은 알프레드 대왕 시기에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지 오래였다. 데인족까지 개종하는 건 10세기 중반쯤은 되어야 했다.[31] 알프레드 사후 100년 뒤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라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인지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이 사건이 알프레드 재위 초 바이킹의 침략 시절, 바이킹에게 궁정을 잃고 도피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로, 이후 집주인이 알프레드에게 중용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외에도 알프레드가 책(특히 《성경》)을 보고 있었다거나 아주머니가 그대로 귓방망이를 날렸다거나하는 바리에이션도 여럿 있지만, 공통적으로 알프레드 왕이 대인배라는 묘사는 변하지 않는다. 빵을 웨식스 왕국에 대한 은유로 봐서 왕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혼자 좌절감에 빠져 있는 것을 백성들이 깨우쳐 준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32] 근데 어머니가 이 과정에서 형인 애설레드가 알프레드를 대신해 귀족들에게 인망을 사자 독을 먹여 그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