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1:36:24

브리타니아 열왕사

1. 개요2. 내용3. 아서왕 가계도4. 기타

1. 개요

Historia Regum Britanniae

웨일스 몬머스 지역의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몬머스의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가 1136년에 라틴어로 쓴 저서이다.

제프리는 전설 속 영국 왕들의 《연대기》를 기록한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최초로 아서왕의 일대기를 문헌에 기록했다.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매우 인기를 끌었다. 제프리가 쓴 라틴어판의 필사본만 해도 잘 보존된 것이 200점 이상 전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의 관심을 받았고, 세계적으로 아서왕을 알렸다.

오늘날 제프리는 아서왕 전설(Arthurian Legends)의 설계자로 불리고,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아서왕 문학(Arthurian Literature)'의 시발점으로 통한다.

2. 내용

트로이 전쟁 이후, 트로이 유민들이 브리튼섬을 발견해 정착한 이후, 게르만계 이민족들이 침입해 온 7세기까지 2천 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브루투스 1세가 브리튼 땅으로 이주한[1] 이래 7세기 웨일스 왕 카드왈라드에 이르기까지 전설브리튼인의 왕들을 서술하고, 아서왕의 탄생과 죽음까지 그의 생애를 최초로 기록했다.

우서왕이 죽자 아서는 15세 나이[2]브리튼 국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선왕의 하나뿐인 아들이 신분을 감추고 자라 바위에 박힌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뽑아 자격을 증명하고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는 아서왕 전설 속 이야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후 아서왕은 국내에서 반발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브리튼인의 역사》와 비슷하게 색슨족 등의 이민족들과 여러 번 전투를 치르었는데, 바스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아서왕은 북쪽의 픽트인과 스코트인을 쳐부수고,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오크니 제도를 정복하여 아서 제국을 세웠다. 그 뒤 아서왕은 재차 정복 사업에 나서 노르웨이, 덴마크, 갈리아를 정복하며 제국을 확장해 나갔다.[3]

아서의 정복지 중 갈리아로마 제국의 영토였기에 아서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아서의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의 대결로 이어진다. 아서왕과 그의 기사들은 갈리아에서 로마 황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를 격파했다. 그러나 아서가 로마로 진격하려는 순간, 아서의 조카 모드레우스(모드레드)가 브리튼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구엔후아라(기네비어) 왕비를 아내로 삼고 왕좌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서왕은 브리튼으로 회군하여 모드레우스가 이끄는 반란군과 캄란 전투를 치르며, 창 롱고미니아드로 모드레우스를 찌르고 승리했으나 전투에서 맏조카인 구왈과구스(가웨인)를 잃었으며[4] 자신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아서왕은 일가 중 콘스탄틴에게 왕관을 물려주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발론섬으로 떠나 거기서 아발론의 여왕 모르겐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그는 때가 되면 언제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5]

아서왕브리튼의 왕으로 제국[6]을 건설해 유럽대륙[7]을 지배하고 로마 제국과 전쟁해 이겼다, 아서왕의 아버지는 우서왕이며 마법사 멀린이 아서왕의 탄생과 왕위 계승을 도왔다, 조카 모드레드가 반역을 일으켜 최후의 전투인 캄란 전투를 했다, 엑스칼리버아발론에서 만들어졌으며 부상당한 아서왕은 아발론으로 가서 상처를 치유했다 등등 내용이 모두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나왔다. 아서왕의 라이벌로 나오는 로마 제국루키우스 티베리우스도 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아서왕의 일대기는 영웅 서사의 한 가지 전형이다.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비범한 능력, 위기가 닥치고 위기를 벗어나고 극복하는 것이 그러하다. 또한 아서왕의 결말은 언젠가는 다시 부활해 재림하여 나라를 구원해 줄 영웅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전까지 아서왕 전설은 구전 설화였으나 제프리가 그 내용을 책으로 씀으로써 문헌에 쓰인 이야기로 재시작되었다. 오늘날 아서왕 전설의 필수 요소로 생각되는 기본적 합의 사항들은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비롯하였다. 이후로 많은 내용이 덧붙여지고 바뀌었지만, 구원의 열망을 담은 결말만큼은 오늘날에도 제프리의 결말을 그대로 따른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걸작 리어왕의 원형이 되는 전설도 이 책에 실려 있다. 레이르(Leir)왕이 세 명 중 두 딸에게만 땅을 물려주었다가 괄시를 받은 것까지는 세익스피어작 리어왕과 이야기가 유사하나, 열왕사 속 레이르왕은 잉글랜드에서 도망쳐 프랑크족에 시집간 코델리아에게 몸을 의탁하고, 코델리아의 남편이던 프랑크족의 왕으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아 프랑크족은 레이르왕을 복권시키기 위하여 잉글랜드로 쳐들어간다. 그 전투에서 고네릴과 리건의 군대는 프랑크족의 군대에 처절히 발리고 고네릴과 리건, 그리고 그들의 남편까지 전부 사망한다. 이후 다시 레이르왕은 왕위를 되찾아 3년간 나라를 통치하다가 사망하고 코델리아는 레이르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통치한다. 하지만 5년 후 코델리아의 조카들, 즉, 고네릴의 아들인 '마르가누스'와 리건의 아들인 '쿠네다기우스'는 군대를 이끌어 코델리아를 공격하고, 전투에서 패하여 감옥에 갇힌 코델리아는 비통하게 자결한다. 이후 마르가누스와 쿠네다기우스는 브리튼 왕위 계승권을 놓고 내전을 치르고 결국 쿠네다기우스가 최종 승리자가 된다. 이후 리건의 자손인 쿠네다기우스는 수 대에 걸쳐 브리튼을 지배한다.

3. 아서왕 가계도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아서왕의 탄생과 죽음까지 그 생애를 서사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문헌[8]으로 《브리튼인의 역사》나 《캄브리아 연대기》가 그러했듯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도 역시 아서왕의 시대를 로만 브리튼 이후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켈트 신화에서 아서왕이 신들의 후손이었다면,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는 로마 왕조의 후손으로 나온다. 아서왕의 전설에는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의 여러 영웅들의 스토리가 들어있으며, 그 때문에 시대순으로는 연결이 안 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서왕할아버지 '콘스탄티누스 2세'는 브리튼섬에 처음 상륙한 건국브루투스 1세와 연결되며, 그보다 더 올라가면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다. 우서왕은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자 콘월을 함락시켰고, 전투에서 공작이 전사하자 틴타겔성에 있는 공작 부인과, 마법으로 아서를 얻고 혼인했는데 이 설정[9]은 바로 제프리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서 이후 일반적인 설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에 따라 아서왕고향콘월(Cornwall)의 틴타겔이 되었고, 영국 왕실도 의미를 부여해 국왕의 장남을 '콘월 공작'으로도 지명하며, 그의 부인은 '콘월 공작 부인'이라는 공식 호칭을 사용한다. 전설에 나오는 적룡은 현재 웨일스의 상징으로 웨일스 국기에도 있다.

파일:아서 왕 가계도.png
<아서왕의 가계도>

5세기, 브리튼의 왕이자 브르타뉴의 왕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세가[10] 픽트족에게 암살당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콘스탄스(Constans)는 속세를 떠나 종교에 귀의한 수도승이었고, 차남인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와 3남인 우서(Uther)는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당대의 권력자였던 보르티게른[11](Vortigern)은 수도자가 된 왕의 장자 콘스탄스를 수도원에서 불러내어 왕으로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보르티게른은 선왕 콘스탄티누스 2세를 암살한 픽트족을 기용했고, 콘스탄스왕 역시 픽트족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그의 어린 두 동생들인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와 우서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브르타뉴로 피신하게 되었고, 권신 보르티게른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스코틀랜드인들이 남침하자 다급해진 보르티게른은 용병으로 이를 막았다.[12] 그러나 전쟁이 끝나도 용병들은 돌아가지 않고 정착했으며, 난폭함과 야만성을 가진 이들은 브리튼인들에게는 재앙이 되었다. 침략자들은 분탕질과 약탈, 겁탈과 살육을 자행했고, 반란을 일으켰다. 보르티게른왕은 여러 개의 도시와 요새들을 이들의 소유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도망친 보르티게른왕은 캄브리아(Cambria. 현재의 웨일스)에 정착했고, 그곳에 요새를 짓기로 결정했으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건축의 기초를 놓으면 밤새 땅이 그것을 삼켜 버려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보르티게른왕은 제사장들과 상의했고, 그들의 조언에 따라 아버지가 없는 소년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여 멀린이 잡혀 왔다. 멀린은 인큐버스와 수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멀린은 땅을 파 보면 건축의 기초를 삼켜 버린 지하수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며, 지하수 바닥의 돌안에서 나온 백색과 적색 의 싸움을 고했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이 사건으로 멀린은 예언자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곧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와 우서 형제가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다. 얼마후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 왕자와 그의 동생 우서가 군대 1만을 이끌며 밀려들어 왔고,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가 왕위에 올랐다. 형제는 보르티게른이 들어간 성을 함락시켰고, 색슨족 등 야만족들을 정벌했다. 이후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념물을 세우고자 하여 멀린을 찾았고, 멀린은 스톤헨지를 만들었다. 그 돌은 치유의 효과가 있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옛 거인족이 날라 온 돌로, 멀린이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이 제프리의 설명이다.[13]

전쟁도 승리했고, 역사적인 기념물도 세웠으나 아우렐리우스왕의 치세는 생각보다 일찍 끝나고 만다. 보르티게른의 아들 파센티우스(Pascentius)가 색슨족과 동맹을 맺고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 왕의 동생인 우서 왕자가 적들에게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떠났으며 멀린도 고문으로 우서와 동행했다. 색슨족은 자객을 아우렐리우스왕에게 보냈고 왕은 독살당하고 말았다. 왕이 숨진 바로 그 순간, 밤하늘에는 혜성이 등장하여 어둠을 가로질렀고 우서 왕자는 군대를 이끌며 행진하던 중 이 혜성을 보고 공포와 놀라움을 느꼈다. 멀린은 혜성을 보자마자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왕이 죽었으며 이제 우서가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용의 머리를 닮은 혜성은 우서의 즉위와 위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임을 알렸고, 이후 '우서 펜드래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우서 왕은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는 콘월을 함락시켰고, 공작이 전사하자 마법으로 공작 부인과 동침했고, 이후 공작 부인과 혼인해 콘월과 화친을 맺었다. 켈트 신화를 보면 여왕이 새 남편을 선택함으로써 기존 왕의 시대가 끝난다는 모티브가 있다.

이때 멀린으로부터 한 가지 조건을 제시받았는데, 마법으로 얻는 아들인 만큼 그로 인해 태어날 아이를 내어달라는 것이었고, 우서왕은 이를 수락했다. 멀린은 장차 태어나게 될 우서의 아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예지하고, 아기를 데려다가 충직한 기사인 엑터 경에게 맡겨 자라게 했다. 이후 우서왕과 이거나 왕비는 딸을 낳았고, '안나'로 이름을 지었다. 제프리의 이 작품에서는 우서왕이 아들인 아서를 먼저 낳고, 그다음에 딸을 낳았다고 설정했다. 안나는 훗날 로트왕과 혼인해 두 아들을 낳았다. 로트왕은 로디언과 오크니 제도를 다스리는 왕으로, 우서왕이 병이 들어 색슨족 등과의 전투에 참전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브리튼 군대를 이끌고 싸웠다. 우서왕은 그와 딸 안나(Anna)를 결혼시키고, 자신이 병석에 누운 동안 브리튼을 다스리도록 맡겼다. 로트왕은 장인이자 주군인 우서뿐만 아니라 처남인 아서가 왕이 되자 그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아서왕은 유럽 원정에서 노르웨이를 정복하자 로트왕에게 노르웨이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로트왕 역시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제프리는 '로도네시아의 로트'(Lot of Lodonesia)로 부르다가 이후 '노르웨이의 왕 롯'(King Loth of Norway)으로 불렀다. 이때 로트왕의 장남인 구왈과구스(가웨인)의 나이가 12세였다. 만약 구왈과구스(가웨인)가 캄란 전투에서 동생 모드레우스(모드레드)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로디언, 오크니,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서왕의 후계자였던 만큼 아서 제국의 대왕이 될 수도 있었다. 차남이라 이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없었던 모드레우스는 어쩌면 이런 이유로 반란을 꾀한 것일 수 있다.

우서왕은 죽기 직전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들 아서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긴 후 눈을 감았다. 아서는 자신이 우서 펜드래곤왕의 유일한 혈육이자 후계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아서가 왕이 되기도 전에 정적들에 의해 살해당할 것을 염려한 멀린은 갓 태어난 아서를 엑터 경에게 맡겨 키웠다. 멀린은 아서가 신탁이 씌여진 바위에 꽂힌 칼리번(엑스칼리버)을 뽑고 나서야 비로소 아서가 우서 펜드래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표하는데, 이런 극적인 스펙터클은 모두 멀린의 기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프리는 신검이 아발론에서 제조되었다고 설명했으며, 칼리번(Calibum 또는 Calibunun)이라 불렀는데 이는 '쇠'를 뜻하는 라틴어 '칼리부스'(chalybu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아서왕이 이 검을 들면 470명 군대도 혼자서 무찌를 수 있었다고 한다. 아서왕은 브리튼의 국내 상황을 정리한 후, 구안후마라(기네비어)와 결혼했으며 이후 해외 정복을 개시했다. 아서왕과 구안후마라 왕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는데, '아들은 없고 조카가 후계자'라는 이 설정은 후대 작품들에도 널리 계승된다. 자식이 없다는 설정은 당시 브리튼인의 멸족과 망국에 대한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일어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구원자에 대한 열망이 전설의 바탕이 되었던 만큼, 아서왕의 부활과 재림으로 이야기로 이야기는 마무리되고 있다.

4. 기타

전설 속 인물이었던 아서왕은 12세기에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통해 중세 시대에 세계적으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아서왕 전설은 중세 시대 내내 유행을 하며 그 내용이 덧붙여지고 퍼져나갔으며, 오늘날 판타지 문학 예술의 원류가 되었다.

전설 속 왕들의 《연대기》인 만큼 당연히 역사 연구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브리타니아 열왕사》보다 먼저 나온 웨일스브르타뉴의 이야기와 시들에서 아서왕은 인간은 물론 초자연적인 적들까지 막아내며 브리튼섬을 지키는 위대한 전사이며, 마법의 힘을 사용하는 판타지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고, 《브리타니아 열왕사》역시 이런 구전 신화와 설화들을 비롯, 아서왕에 대한 기록이 있는 9세기의 브리튼인 넨니우스가 대략 828년 무렵 기록한 《브리튼인의 역사》(Historia Brittonum) 등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나오고 나서의 아서왕 전설에 관한 모든 문헌들은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제프리의 라틴어 이름인 '갈프리두스'(Galfridus)를 붙여 《브리타니아 열왕사》 이전 문헌을 '전 갈프리두스 문헌'(pre-Galfridian text), 《브리타니아 열왕사》 이후 문헌을 '갈프리두스 문헌'(Galfridian text) 또는 '후갈프리두스 문헌'(post-Galfridian text)이라 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역사적 가치는 전혀 없는 유사 역사서, 설화집에 가까운 물건이다. 전근대 역사서에 역사적 사실만을 담담하게 기록된 사초는 지극히 드물고, 현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전근대의 역사는 이런 문헌들도 포함해 신화전설의 형태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 일 또한 포함하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보면 안 된다는 시각도 있으나, 신화적인 내용이 많지만 실제 역사도 상당히 반영하고 있는 삼국유사일본서기에 비교하면 저 두 책에게 오히려 미안할 일이다.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내용이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 것은 근대 계몽주의의 등장 이전인 16세기까지의 일이고, 사료 비판을 통해 사료로서는 무가치한 것으로 결론 난 지 오래다. 환단고기처럼 위서는 아니지만, 아서왕이 서로마 제국을 처바르고 대제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라서 내용적으로는 환단고기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게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학사가 아주 메롱해진다.[14]

다만 웨일스 신화의 보존 및 중세 문학 작품으로서 가치는 매우 높으며, 이 책이 쓰인 12세기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사료로서는 유의미할 수 있다.

서양 중세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번역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비슷한 처지였던 롤랑의 노래도 비교적 최근에야 완역본이 출간된 상황이라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영역본이 그나마 차선책인 상황이다.


[1] 로마와 마찬가지로 트로이의 후예를 주장하는 것. 이게 사실상 유럽판 기자동래설이다.[2] 고대 시대 성인식을 치르는 나이.[3] 실제 역사와 어긋나는 내용이라 현대의 어린이용 판본에서는 빼버리는 경우가 많다. 현실의 비슷한 사례는 크누트 대왕북해 제국이 있다.[4] 아서왕은 자식이 없었으며, 맏조카 가웨인은 후계자로서 충성을 다했고, 그의 동생이자 라이벌인 모드레드는 반란을 일으켰다. 가웨인은 아서왕을 위해 동생 모드레드에 맞서다 죽었다. 아서왕 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끝이 났다.[5] '왕의 귀환'이라는 주제는 신화의 구원 모티브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6]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의 신화를 담았다.[7] 프랑스, 독일, 북유럽 등.[8] 아서왕 전설은 웨일스 지방의 신화로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저술되면서 비로소 기록 문학이 된다.[9] 마법에 의해 태어난 아이[10] 동시대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와 동일시되기도 한다.https://en.m.wikipedia.org/wiki/Constantine_III_(Western_Roman_emperor)[11] '보르티게른'이란 말은 고유 이름이기보다는 '족장'이나 '왕'을 뜻하는 보통 명사일 수 있다고 한다.[12] 당시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주트족을 용병으로 끌어들였고 이어 색슨족, 앵글로족 등이 모여들게 된다.[13] 실제 고고학적으로 스톤헨지는 켈트족 시대보다 오래전인 기원전 200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14] 다른 예시를 들자면, 카데시 전투에 대한 이집트 기록은 파라오가 신으로 변해 승리했다는 둥 현대의 합리적 관점으로 보면 민망하기 그지없을 정도의 프로파간다이지만, 적어도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 및 히타이트 측 기록과 교차 검증 하여 고대사를 재구하는 데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브리타니아 열왕사로 재구할 수 있는 역사는 사실상 없다.